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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고려거란전쟁'인가…원작 작가 "훌륭한 정치가 주는 메시지 주목" [일큐육공 1q60]

[인터뷰] KBS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 원작소설

'고려거란전쟁 : 고려의 영웅들' 쓴 길승수 역사작가

알고보면 더욱 흥미로운 고려-거란 역사 속 이야기

"구주대첩 패배했다면 한국이란 나라 없었을 수도"





천년 전 고려와 거란 제국 사이 27년 간의 ‘여요 전쟁’을 다룬 KBS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 넷플릭스 1위 등극에 이어 최근 공중파에선 보기 드물게 10%대 시청률을 돌파하며 연일 화제 몰이 중이다. '사극좌' 최수종이 강감찬 역을 맡아 극의 중심을 제대로 잡았고 김동준(현종 역), 지승현(양규 역), 이원종(강조 역), 김준배(소배압 역), 김혁(야율융서 역), 이지훈(장연우 역), 이시아(원정왕후 역), 하승리(원성 역) 등이 각자 개성을 살린 명품 연기로 몰입감을 높이고 있다.



고려거란전쟁은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다. 일큐육공 팀은 드라마 원작 소설인 '고려거란전쟁 : 고려의 영웅들'(들녘)을 쓴 길승수 작가를 만나 역사와 소설, 드라마 사이의 차이에 대해 물었다. 서희, 양규, 강감찬, 현종 등 사라지고 잊혔던 고려시대 영웅들의 기록을 직접 길어 올린 주역인 그는 소설을 쓰기 위해 <고려사>·<고려사절요> 뿐만 아니라 거란 역사서인 <요사>, 송나라 역사서인 <속자치통감>·<속자치통감장편> 등을 10년 넘게 연구해 왔다. 지금도 여요 전쟁을 배경으로 한 속편 소설을 집필 중이라고 한다.

서울시 관악구에 위치한 낙성대 강감찬전시관에서 만난 길 작가는 “고려는 구주대첩(귀주대첩) 승리를 거둠으로써 200년 동안 평화를 누린다. 그때 졌다면 고려는 거란에 항복했겠죠. 100년 뒤 거란을 멸망시킨 금나라한테도 정복당했을 가능성이 많다”며 "만약 고려가 졌다면 현대의 우리는 아마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길승수 작가가 서울경제와 만나 길승수 작가가 서울경제와 만나 "구주대첩에서 고려가 졌다면 현대의 우리는 아마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길 작가는 이날 서울 관악구 강감찬전시관에 전시된 강감찬의 구주대첩 기록화 앞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 강신우PD


[고려거란전쟁] 원작자 등판! 최수종이 소배압에 졌다면 벌어질 일 | 일큐육공

◇거란 황제 야율융서, 엄마 때문에 고려를 침략했다고? = 송나라와 '전연의 맹'을 맺고 발해까지 멸망 시키며 유목민에서 제국으로 거듭난 거란(요나라). 5대 황제 경종 야율명의 때가 가장 전성기였는데, 그 배후에는 경종의 후비(아내) 승천황태후가 있었다. 승천황태후는 뛰어난 관리와 장수들을 등용해 정치 경제적으로 안정을 이룬다. 그의 아들 성종(야율융서)는 12살 때부터 황제 자리에 올랐지만, 엄마의 간섭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그러던 1009년 승천황태후가 세상을 떠나자 야율융서의 야심이 본격화한다.

"기록에 따르면 야율융서는 황제 28년 동안 자기 힘으로 한 게 하나도 없어요. 심지어 격구(말을 타고 하는 전통 구기 스포츠)를 즐기던 나이 마흔 가까운 아들한테 그만두라고 명령을 내릴 정도로 엄마 승천황태후의 통제가 심했습니다. 자기를 억압하던 엄마가 죽자 뭔가 보여주고 싶었을 겁니다. 마침 고려에서 강조의 정변이 일어난 거죠."

야율융서는 40만 대군을 결성해 직접 친정에 나선다. 그때 벌어진 첫 전투가 드라마에서도 크게 화제가 됐던 양규 장군의 흥화진 전투다. 흥화진은 993년 제1차 여요전쟁 이후 고려 국방부장관 서희가 성종과 함께 만든 한반도 최북단 요새다. 양규는 이곳에서 40만 거란군의 공격을 고작 4000명 병력 만으로 굳건히 지켜낸다. 결국 야율융서와 소배압 사령관은 흥화진 함락을 포기하고 고려군 본진과 직접 맞붙는다. 삼수채에서 마침내 고려 1인자 강조를 굴복시키며 전세를 뒤집는데 성공한다.

일큐육공 유튜브 캡처일큐육공 유튜브 캡처





◇현종의 몽진(피난)은 도망이 아니었다고? = 거란군은 수도인 개경 코앞까지 순식간에 남하한다. 고려 조정 대신들은 항복하려 하지만 그때 유일하게 반기를 든 인물이 바로 63세의 예부시랑 강감찬이었다. 강감찬은 현종을 설득해 나주로 몽진(먼지를 뒤집어 씀, 피난)을 떠날 것을 결심케 했다.



"대량원군 현종은 원래 경상도 지역이 뿌리예요. '대양면'이 경상도 합천에 있고 할머니도 신라계이거든요. 그런데 왜 하필 전라도 나주로 갔을까요. 나주는 국토의 끝단이기도 하지만 쌀 운반을 위한 해운로로서 최적의 요충지였습니다. 결국 나주로 피난을 떠난 건 전쟁 물자를 확보해 끝까지 싸워보고자 했던 의지의 표현인 거죠."

전쟁 이후 강감찬은 차츰 군사 경력을 쌓기 시작한다. 그러다 그의 나이 72세, 고려군 총사령관인 상원수 자리까지 고속 승진한다. 전쟁이 벌어지면 총사령관은 사실상 왕권과 비등한 권력을 손에 쥐게 된다. 이는 강감찬에 대한 현종의 무한 신뢰에서 비롯됐다고 작가는 말한다.

강감찬은 서열과 연공을 파괴하고 군 지휘부를 구성했다. 거란군을 상대해본 경험자인 강민첨과 조원에게 지휘부를 맡기고 젊은 능력자인 김종현을 병마판관에 임명한다. 이후 1019년 소배압의 10만 거란군과 다시 맞붙었을 때에는 이미 거뜬히 상대할 만큼 고려군의 군사력이 강해져 있었다. 그리고 이는 거란군의 전의를 완전히 상실케 한 구주대첩 승리로 이어진다.





◇왜 지금 '고려거란전쟁'인가? = 청야작전(적의 군대가 보급을 받을 수 없도록 아군의 모든 물자를 불태우는 작전)까지 벌이며 결사항전 의지를 내비친 현종의 의지까지 더해져, 구주대첩은 단 하루만에 대승을 거둔다. 소배압 총사령관은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기 바빴고 살아 돌아간 거란군의 수도 수천 명에 불과했다. 야율융서는 소배압에게 "무슨 낯짝으로 나를 보려는 거냐"면서 "낯가죽을 벗겨 죽이고 싶다"라고 화를 냈다고 <요사>에 기록돼 있다.

구주대첩 승리 이후 고려는 200년 동안 '황제의 나라'로서 평화와 안정을 누린다. 바로 이 시기 유교문화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지방제도 등 한국 사회의 원형을 확립하게 된다. 길승수 작가는 만약 고려가 구주대첩에서 졌다면 거란 뿐만 아니라 100년 뒤 금나라 등으로부터 숱한 침략을 계속 받았어야 했을 거라고 말했다. 그랬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못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편 <고려사절요>에는 전쟁 당시 양규 장군이 이때 총 7번의 전투를 통해 거란군 5만 명을 사살하고 백성 3만 여 명을 되찾았다고 간단히 기록돼 있다. 그런 대단한 인물에 대한 역사 기록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껏 우리에게 고려거란전쟁 하면 서희나 강감찬 정도만 조금 알려져 있었습니다. 디테일한 부분은 거의 없죠. 왜냐면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의 역사는 부정해야 했거든요. 언급을 안하다 보니 결국 잊혀지게 됐던 거죠."



작가는 천년 전 한반도 땅에서 벌어졌던 고려거란전쟁 역사를 통해 “좋은 정치란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 “고려거란전쟁 시기 두 명의 훌륭한 왕이 있었습니다. 성종과 현종. <고려사>는 성종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같이 일할 수 있는 분이다'. 현종은 이렇게 평가했죠. ‘흠잡을 데 없는 분이다'. 이런 훌륭한 왕들이 좋은 정치를 펼쳤기에 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었고 거란도 극복할 수 있었던 거죠. 드라마와 소설을 통해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자랑스러운 역사를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강신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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