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기업

엔비디아, AI로 신약 만들 때…韓선 빅블러 커녕 '공회전'만

[AI 빅뱅, 카오스에 빠진 K기업] < 상 > 뫼비우스 띠에 갇힌 기업

글로벌 산업 대전환 총성 울렸는데

韓, 사법·정치·규제 리스크에 발목

AI기술 격차 벌어지면 회복 쉽잖아

민관 합동 원팀 구성해 대응 절실

AI를 기반으로 신약개발 사업에 뛰어들겠다는 포부를 밝힌 젠슨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지난해말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AP연합뉴스AI를 기반으로 신약개발 사업에 뛰어들겠다는 포부를 밝힌 젠슨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지난해말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주 개최된 세계 최대 전자·정보기술(IT) 전시회인 ‘CES 2024’에 참석하지 않았다. 올해 CES 메인 테마가 인공지능(AI)으로 결정되면서 이 회장이 직접 참석해 기술 발전 상황을 점검하지 않겠냐는 전망도 나왔지만 결국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 회장의 불참과 관련해 재계에서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과 관련한 선고 공판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아무래도 자유롭게 운신하는 데 부담감을 느낀 것 아니겠냐”는 해석이 나왔다.

재판부 판단에 따라 삼성의 미래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외부 활동을 자제하려고 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다. 이 회장은 2020년 9월 이후 3년 2개월 동안 이 재판에 매달리면서 106차례나 공판에 직접 참석해 거의 매번 하루 종일 법정을 지킨 바 있다.



전 세계가 AI발(發) 산업 대전환 경쟁에 뛰어든 가운데 우리나라 기업들이 속도전에서 밀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우리와 경쟁하는 글로벌 대기업들이 산업 간 장벽을 무너뜨리는 ‘빅블러’를 통해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 헤매는 반면 우리 기업들은 사법, 정치, 낡은 규제 리스크라는 모래주머니에 발목이 잡혀 제대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16일 “글로벌 경영 환경은 정신없이 급변하는데 세계 최고 상속세나 법인세는 꿈쩍도 하지 않고 있고 포스코 같은 기업은 회장 교체기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권의 압력을 받고 있다”며 “외부 변화를 따라가기도 벅찬데 내부에서 발목이 잡히고 있는 형국”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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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해 11월 열린 결심공판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해 11월 열린 결심공판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제는 국내 기업들이 늪에 빠져 있는 사이에도 AI라는 산업은 빛의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기업들은 그동안 ‘패스트 팔로어(빠른 추격자)’ 전략으로 특정 산업에 대한 단기간 집중 투자로 기술 격차를 메우며 발전해왔다. 하지만 AI 시대에는 일단 기술 격차가 벌어지면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한종희 삼성전자 부회장 역시 최근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AI의 가장 무서운 점은 스스로 학습하면서 진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빅블러 시대 글로벌 기업의 오너나 최고경영자(CEO)들은 그야말로 발상의 한계를 돌파하면서 질주하고 있다. AI 시대 ‘대장주’로 꼽히는 엔비디아를 이끄는 젠슨 황 CEO가 대표적이다. 그는 최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JP모건 헬스케어 콘퍼런스에 참석해 AI 기반 신약 플랫폼인 ‘바이오니모’를 공개했다. 컴퓨터칩 설계 업체인 엔비디아가 자신들의 주특기인 AI를 바탕으로 인간 DNA를 더 빠르게 해석해 신약을 내놓겠다고 밝힌 것이다.

10년 넘게 미국 뉴욕 증시에서 시가총액 1위를 놓치지 않았던 애플이 최근 마이크로소프트(MS)에 1등 자리를 내준 배경에도 AI가 있다. MS는 챗GPT를 개발한 오픈AI의 최대 투자자이자 AI 혁신을 가장 빠르게 주도하고 있는 기업으로 꼽힌다. 반면 애플은 AI 분야에서 아직 이렇다 할 히트 작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스마트폰 시대에 혁신을 선도하던 세계 최고 기업이 불과 1년 만에 AI 빅뱅을 바라보는 추격자 신세가 된 것이다. 애플은 올 하반기에나 생성형 AI가 탑재된 아이폰 16을 내놓을 것으로 전망된다.

애플이 공개한 비전프로.애플이 공개한 비전프로.


국내 한 전자 업체의 임원은 “애플이 AI 자율주행차인 애플카에 10년 넘게 투자했지만 결과가 신통치 않아 실적을 중요시하는 이사회로부터 사업 중단 압력을 여러 차례 받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스티브 잡스가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MS가 주도하는 AI의 역사가 지금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AI가 단순히 기업의 먹거리를 넘어 한 국가의 생존을 결정하는 ‘전략 무기’로까지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이다. AI 업계의 ‘구루’로 통하는 제프리 힌턴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는 “AI가 미래의 핵무기가 될 수도 있다”는 전망을 내놓은 바 있다. AI 기술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발전한다면 이 기술을 독점한 국가가 전 세계 질서를 재편할 수 있다는 의미다. 현재 우리나라의 AI 산업 관련 지출은 주요 경쟁 국가와 비교해 한참 뒤떨어지는 수준이다. 최근 5년간 정부의 AI 투자 금액은 103억 달러(13조 7000억 원)로 미국(3285억 달러), 중국(1326억 달러)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정부와 기업이 ‘원팀’을 이루지 않으면 격차 극복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서일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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