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백남준은 브라운관 모니터를 탑처럼 쌓아 올린 대작 ‘다다익선’을 설치한 후 “시대가 변하면 새로운 기술로 대체해도 좋다”는 말을 남겼다. 작품을 소장한 국립현대미술관은 작품을 보존하기 위해 브라운관 대신 LCD 모니터로 교체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지만, 백남준으로 상징되는 ‘미디어아트’에 새로운 기술이 더해질수록 ‘다다익선’의 입지는 점차 좁아질 것이다.
국내 정상급 미디어아트 작가 7인을 통해 이런 미디어아트의 미래를 조망하는 전시가 경기도 오산의 오산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변화와 변환’이라는 주제로 진행되는 이번 전시에는 미디어아티스트 이이남, 김홍년, 노진아, 송창애, 이재형, 최종운, 한호 등이 참여했다.
관람객은 전시관 1층 입구에서 커다란 두상과 마주한다. 노진아 작가의 ‘히페리온의 속도’다. 인공지능(AI) 기계를 상징하는 대형 머리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관람객을 향해 눈동자를 돌리고, 작품에 대해 관람객이 이야기를 나눌 때 입을 벌려 대화를 시도한다. 노진아의 작품이 AI 형상화한다면, 1983년생 젊은 작가 이재형은 ‘페이스 오브 오산’이라는 전시를 통해 AI 기술을 활용한다. 작가는 MZ세대답게 오산의 얼굴과 감성을 지역 내 수많은 SNS에서 찾고, 이를 ‘정보 시각화’라는 방식으로 분서한다. 작품 속 사람의 얼굴이 ‘대출’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면 슬픈 표정으로 바뀌는 등 SNS 정보에 반응하는 것이다.
송창애의 ‘워터 오디세이: 거울’은 인터랙티브 미디어아트를 표방한다. 관람객은 적외선 센서로 그림을 그리고, 이는 실시간으로 천장 구조물에 이미지로 나타난다. 이는 작가가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놓은 새싹 이미지와 결합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고유한 작품으로 탄생한다. 작가들은 프로그램의 기교에만 집착하지 않는다. AI, LED 등 첨단 기술은 자신의 고유한 작품과 관객이 소통하는 도구다. 최종운은 세계 각국에서 수집한 일상의 유리 오브제로 다양한 형태의 빛을 표현하는 ‘우주 너머’를 선보이며, 빛과 음악이 어우러지는 미디어아트를 선보인다.
한호는 높이 3m, 폭 1.5m의 거대한 캔버스 유화 ‘최후의 만찬’을 선보인다. 작품에는 수많은 구멍이 뚫려 있는데, 작가가 LED 조명을 켜면 평범한 현실의 그림이 순식간에 이상 세계로 변신한다. 작품은 무지개빛으로 반복적으로 변하면서 삶과 죽음의 메시지를 전한다.
3층 전시실의 김홍년·이이남 작가는 설명할 필요가 없는 세계적인 대가다. 지난해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 대형 전광판에서 훨훨 나는 나비의 작품으로 K아트를 세상에 알린 김홍년 작가는 대표작 ‘화접(花蝶)’ 작품의 나비를 전시한다. 이 작품은 2016년 세빛섬 개인전에서 처음 선보인 이후 삼성전자의 신작 폴더폰 타임스퀘어, 영국 사치갤러리 등에서 날았고, 이번 전시에서 오산지역의 오산천에서 기후재난, 전쟁 등을 나비의 날갯짓으로 이야기한다.
이이남은 5폭의 미디어 병풍으로 이뤄진 ‘만화-병풍 l’을 선보인다. 고전회화가 그려진 이 병풍에는 ‘머털이’, ‘고인돌’, ‘맹꽁이’ 등이 등장한다. 특히 이중 한 캐릭터는 로켓을 타고 아날로그TV와 함께 날아오르는데, 이 영상은 마치 수명을 다한 백남준의 ‘다다익선’이 서서히 꺼져가고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음을 알리는 듯하다. 전시는 3월 24일까지.
오산=서지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