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지난해 9월 국민건강보험 정책 최고 의결 기구인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건정심)’를 열고 올해 건강보험료율을 7.09%로 동결했다. 2017년 이후 7년 만의 동결로 “물가 급등, 금리 등으로 어려운 국민경제 여건을 고려했다”는 설명을 달았다. 하지만 동결 결정 이전에는 다양한 논의가 오갔다. 건보 재정 고갈을 막기 위해 “보험료율을 1%는 올려야 한다. 동결하면 적자를 면할 수 없다”는 정기석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의 목소리가 대표적이다.
보건복지부가 4일 발표한 제2차 국민건강보험 종합 계획(2024~2028)에는 이 같은 정부의 고민이 담겼다. 65세 고령 인구 증가에 따른 의료비 폭증, 저출생으로 인한 건보 수입 감소로 지속 가능한 재정 운용이 어렵다는 판단에 건보료율 법정 상한선(8%) 인상이라는 카드를 꺼냈다. 법적 상한선 조정에 국민적 합의를 담은 사회적 논의를 병행한다는 전제를 달았지만 사실상 인상이 필요하다고 선언한 셈이다.
현재 건보 재정은 어떤 상황일까. 복지부가 이날 공개한 건보 재정 전망에 따르면 당기 수지는 올해 2조 6402억 원 흑자에서 2025년 4633억 원으로 줄어들고 2026년에는 3072억 원 적자로 돌아선다. 당기 수지 적자는 2027년 7895억 원, 2028년 1조 5836억 원으로 가파르게 증가한다. 2026년 적자 전환 이후 3년 만에 적자 폭이 5배로 ‘껑충’ 뛰는 셈이다. 고령화에 따른 의료비 폭증, 필수의료·요양급여 등 건보 재정 지출이 더 늘어날 수밖에 없는 추세로 볼 때 재정 효율화와 수입을 늘리는 작업이 동시에 진행되지 않는다면 적자 폭이 더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전임 정부가 건보 보장률 제고에 주력했다면 현 정부는 재정 효율화에 방점을 찍고 방향 전환을 한 셈이다.
다만 복지부의 건보 재정 전망은 지난해 10월 국회예산정책처의 분석보다는 보수적인 편이다. 예정처는 ‘2023~2032년 건강보험 재정 전망’에서 올해부터 건보 재정 수지가 1조 4000억 원 적자로 돌아서고 2032년에는 적자 규모가 20조 원까지 불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누적 적립금은 2028년부터 5조 5000억 원 적자로 돌아서고 2032년에는 61조 6000억 원 적자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했다.
정부는 보험료율 법적 상한선 폐지에 앞서 환자가 적정한 수준으로 의료 서비스를 이용하도록 비급여 항목에 대한 관리를 통해 누적 적립금 소진 시점을 최대한 늦출 계획이다. 우선 비급여와 급여를 섞어 사용하는 ‘혼합 진료’를 금지하기로 했다. 급여가 적용되는 물리치료를 받을 때 비급여 항목인 도수 치료까지 받도록 유도해 환자 부담을 늘리는 식의 행태를 없애겠다는 것이다. 급여는 건보 가입자와 피부양자에게 제공되는 의료 서비스다. 비급여는 건보가 적용되지 않는 항목으로 의학적 근거는 인정받았지만 건보공단에서는 비용을 지불해주지 않는 항목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모든 비급여 항목이 아니라 일부 문제가 되는 비급여 항목에 대해 혼합 진료를 금지하려는 것”이라며 “금지 대상이나 방식, 시행 시점은 의료개혁특별위원회를 구성해 구체화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유재길 국민건강보험노조정책연구원 원장은 “혼합 진료를 금지해야 비급여 항목의 양산을 막을 수 있고 진료비도 절감할 수 있다”며 “건강보험 보장률도 더 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급여와 비급여의 중간 단계쯤으로 볼 수 있는 선별 급여 항목 역시 임상적 근거를 중심으로 평가를 강화해 효과가 없는 항목은 퇴출하는 방안을 마련한다. 복지부에 따르면 선별 급여 지급액은 2017년 2520억 원에서 2022년 1조 978억 원으로 4.4배로 늘었다.
환자·소비자들에게 충분한 비급여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비급여 항목의 명칭·코드를 표준화하고 항목별 권장가격을 제시한다. ‘마늘 주사’나 ‘신데렐라 주사’처럼 일부 비급여 항목은 의료기관마다 다른 이름을 쓰는데 앞으로는 성분명을 기반으로 비급여 명칭을 분류·표준화할 방침이다. 건보 무임승차를 막기 위해 피부양자 제도 또한 개선한다. 현재는 연 소득 2000만 원, 시가 5억 8000만 원의 주택을 보유한 형제·자매도 피부양자 적용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