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 현상)’ 해소를 위한 전방위적인 대책을 연일 쏟아내고 있다.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를 폐지하고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납입액과 비과세 한도를 상향하는 등 증시 수요 기반을 확충했다. 특히 코리아 디스카운트 요인으로 꼽히는 물적 분할, 내부자거래, 자사주, 배당절차 관련 제도를 개선해 일반 주주 이익을 보호하겠다는 방안을 내놓았다.
정부가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에 발 벗고 나선 것은 국내 증시가 지나치게 저평가돼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기준 국내 증시의 주가순자산비율(PBR)은 코스피 0.95배, 코스닥 1.96배로 선진국(3.10배)은 물론이고 신흥국(1.61배)보다 낮은 수준이다. 한국 전체 PBR은 1.05배로 대만(2.41배)이나 인도(3.69배)는 물론이고 중국(1.13배)보다도 낮다. 증시 저평가로 유명했던 일본도 1.42배까지 확대됐다. 자본시장 저평가를 해소해 기업 성장과 경쟁력을 끌어올릴 뿐만 아니라 국민 자산 축적도 지원하겠다는 방침이다.
설 이후 나올 ‘밸류업’에 관심 집중
정부가 내놓고 있는 여러 대책 가운데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건 설 연휴 이후 나올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이다. 주가순자산비율(PBR), 자기자본이익률(ROE) 등 업종별 투자지표를 비교 공시하고 기업 지배구조보고서를 통해 상장사의 기업가치 제고계획을 기재하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주가 부양에 소극적인 기업 명단을 공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압박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코스피 상장사는 물론이고 코스닥 전체 상장사를 대상으로 적용하는 등 다양한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이와 함께 주주가치 제고 우수업체 등으로 구성된 지수나 상장지수펀드(ETF)도 개발한다고 한다. 특히 PBR을 중심으로 지수를 개발하되 ROE 등을 적극적으로 반영한다는 계획이다. 정부는 국내 산업은 자본집약적인 장치산업 비중이 큰 만큼 당기순이익에 초점을 맞춘 주가수익비율(PER)보다 자본 가치를 고려하는 PBR이 더 적절하다고 보고 있다. 아직 구체적인 방안을 확정되지 않았으나 최근 저PBR주를 중심으로 주가가 가파르게 상승하는 만큼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상황이다.
시장에서는 거래소를 중심으로 기업 가치를 끌어올린 일본 사례가 있는 만큼 이번엔 다를 수 있다는 기대가 나온다. 당국도 일본 사례를 적극적으로 참고해 밸류업 프로그램을 고민하고 있다. 운용업계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어떤 방향으로 고민하는지 알 수 없지만 지난해 일본이 증시를 부양했던 성공 모델이 있기 때문에 과거보다는 도움이 되는 정책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日 10년 동안 일관된 정책 추진
일본 사례를 살펴보면 2023년 3월 일본 도쿄증권거래소는 PBR이 1배 이하인 상장기업을 대상으로 자본수익성과 성장성을 높이기 위한 개선 방침과 구체적인 이행 목표를 공개하도록 했다. 2014년 1월 15일부터 개별 상장기업의 기업지배구조보고서 등을 통해 구체적인 기업가치 제고 노력을 기재한 기업 명단을 매월 공표하기로 했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일본 공적연금과 중앙은행은 2014년부터 기업지배구조 개선에 가중치를 부여한 닛케이(NIKKEI) 400 지수를 새로운 벤치마크로 삼아 일본 주식을 매입했다. 이어 지난해 6월 ROE가 자본비용보다 높고 PBR이 1배를 초과하는 기업 150곳을 모아 ‘JPX 프라임 150 지수’를 새롭게 개발했다. 이에 기관투자자가 JPX 프라임 150의 벤치마크를 사용하도록 유도해 일본 상장기업에 기업가치 제고를 유도했다.
결국 일본 닛케이225 지수는 2022년 말 2만 6095에서 지난 7일 3만 6120으로 38.4%나 상승했다. 같은 기간 코스피 지수는 2236에서 2610으로 16.7%, 코스닥 지수는 679에서 812로 19.6% 상승하는 데 그쳤다. 신한투자증권에 따르면 일본이 기업가치 제고에 나선 이후 1년 만에 프라임 그룹에서 PBR 0.5배 미만 기업 비중은 5.9%에서 3.3%로 2.6%포인트 감소했다. 0.5배에서 1.0배 사이 기업은 34.2%에서 30.7%로 3.5%포인트 줄었다. 저PBR 주식일수록 밸류업 시행 직후 강하게 상승하면서 6개월 후 고점을 형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 정책이 성공한 것도 관련 정책을 10년 가까이 꾸준히 추진한 결과라는 평가도 나온다. 최진아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지금 목격하는 ‘일본 재평가’는 2013년 아베 정부가 제시한 3개의 화살 가운데 ‘일본 재흥(再興) 전략’에 뿌리를 두고 10년 동안 준비한 것”이라며 “경제 성장성 회복과 일본 재흥을 목적으로 국내외 투자자의 중장기 자금을 유인하고 ‘일본 주식회사’ 매력도 및 성장률을 높이는 방향성으로 상호 연관돼 있다”고 했다.
금융당국 “장기 프로젝트로 기업 문화 바꾸겠다”
금융당국도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일회성이 아닌 문화를 바꾸는 장기 프로젝트로 준비하고 있다. 금융위는 지난 6일 ‘자본시장 정책과제 추진 방향’을 통해 “조만간 거래소 등 유관기관과 협력해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 세부 내용을 확정하고 상장사 스스로 기업가치 제고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분위기를 조성해 나갈 계획”이라고 했다.
일본도 도쿄거래소 경영개선 요구에 상장기업들이 화답하면서 시너지를 냈다. 일본 기업들은 배당 증액, 자사주 매입 등 주주 친화 정책을 확대하면서 외국인의 일본 주식 매수가 확대됐다. 노무라자산운용에 따르면 외국인 일본 주식 매매는 해당 기업의 ROE와 연동된 형태로 나타났다. 기업들도 밸류업 프로그램에 대한 관심이 크지만 구체적인 방안이 나오지 않은 만큼 아직은 미지수다.
다만 명확한 페널티 없이 주주 친화적인 명단을 공개하는 ‘네이밍 앤드 셰이밍(naming and shaming·이름 거론해 망신 주기)’만으로는 기업 참여를 끌어내기엔 한계가 있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지수 개발과 ETF 출시가 이뤄지더라도 국민연금 등 큰 손이 참여하지 않으면 인센티브도 크지 않다.
당국 관계자는 “밸류업 프로그램은 기업들이 스스로 가치를 높일 수 있도록 문화를 바꾸기 위한 촉매제”라며 “기업 참여가 미흡하면 추가적인 대책을 준비하는 등 중장기적으로 문화를 개선해나갈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