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대위원장 한 사람이 집단 구성원들 전체를 설득할 수도, 결정할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서울의대 교수들 사이에서 겸직 해제 선언이 쏟아지고 있어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입니다. ”
정진행 서울대의대 교수협의회 비상대책위원장(분당서울대병원 병리과 교수)은 24일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서울의대 교수 상당수가 병원 파견을 포기하기로 결의했다. 머지 않아 국립대병원 교수들로 확산할 것”이라며 “의료현장의 공백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으로 우려된다”고 말했다.
정 위원장에 따르면 서울의대를 비롯한 국립의대 교수의 상당수는 교육부 장관이 발령하는겸직 교수다. 이들은 의대에서 학생들을 교육하는 게 본분인데 파견직 형태로 병원 진료를 병행하고 있다. 국립의대 교수들이 겸직 해제를 선언한다는 건 병원 파견, 즉 환자 진료를 하지 않겠다는 의미인데 파견직 신분이기 때문에 의료법상 불법인 진료 거부에 해당하지 않는다. 정부가 당장 2025학년도 대학 입시부터 의대 입학정원을 2000명 늘리겠다는 방침을 고수한 채 전공의들에 대한 처벌과 압박에 치중하자 서울의대를 중심으로 국립의대 교수들 상당수가 ‘겸직 해제’ 단체행동에 나설 공산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실제 ‘빅5’ 병원 중 하나인 서울아산병원 교수들은 전일 전공의 법적 보호와 의대 증원 재논의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순천향의대와 서울부천천안구미 등 산하병원 4곳의 교수들도 성명서를 통해 “작금의 사태에 대한 책임을 학생, 전공의들에게 전가하며 법적 논리가 부족한 행정 명령으로 그들을 협박하는 초유의 행태를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무분별하게 추진된 의대 증원 계획을 즉각 철회하고 원점에서 재논의하라는 게 이들의 요구다. 이 같은 움직임은 빅5 병원을 넘어 전국 의대, 대학병원 교수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정 위원장은 의대 증원에 반발해 전공의들이 집단행동에 나선지 나흘만인 전날(23일) 밤 박민수 복지부 제2차관과 긴급 회동을 가졌다. 정 위원장이 서울의대와 서울대병원 교수를 아우르는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로 선출된 직후 “파국만은 막아야 한다”며 공개 토론을 제안한 지 나흘 만이었다. 전공의 파업이 나흘차로 접어들며 서울의대 교수들이 “납득할 만한 조치가 없으면 전공의들과 함께 행동하겠다”고 선언한 터라 양측 회동에 많은 관심이 쏠렸다. 공교롭게도 둘의 만남 직후 의대 교수들의 집단행동 움직임이 포착되자 ‘실제로 만난 것은 맞느냐’, ‘애초에 짜여진 각본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등의 억측도 쏟아지고 있다.
정 위원장은 “필수의료 붕괴를 비롯한 의료계 모든 문제의 원흉을 의사로 몰고 가는 행태를 중단하고 의료대란을 막아야 한다는 데 공감대를 형성했다”며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다만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얘기할 단계가 아니다”라고 말을 아꼈다. 정 위원장은 회동 직전까지도 “의사를 악마화하는 기조를 중단하라”며 만남을 주저했다고 한다. 강대강이 만나 자기 입장을 선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판단에서다. 시종일관 집단행동 주동자에 대한 구속수사 방침과 의사면허 정지를 거론하며 칼을 빼들었던 정부가 병원을 이탈한 전공의들을 향해 “불법 상태를 벗어나 환자 곁으로 돌아오라”며 수위를 낮추고, 전일 의대 증원 관련 공개 토론에서도 의료계를 향한 박 차관의 기조가 달라졌다고 느꼈기에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서울의대 교수 비대위는 오는 26일 전공의들과 첫 대면 만남을 갖고 대응방안 등을 추가로 논의할 전망이다. 정 위원장은 “우선 파국을 막고 지속 가능한 보건의료체계를 만들기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한다”며 “지역의료, 필수의료 붕괴 등은 정부 행정 실패의 책임이 크다. 의사들이 모든 문제의 원흉인양 몰아가서는 안된다”고 안타까워 했다. 의대 증원 문제는 정부와 의사 간 양자 협상을 넘어 공론화해 해결해야 한다는 게 정 위원장의 입장이다. 그는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교수들이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단체행동을 하겠나. 선생으로서 학생들을 보호하고 국민 건강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비롯된 행동임을 알아달라”며 “교수들 사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데다 심적 고통을 겪는 전공의들이 너무도 많아 통제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