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반도체 업계는 한국을 방문한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의 발언으로 술렁거렸습니다. 저커버그 CEO는 지난달 29일 윤석열 대통령과 만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계에서 삼성전자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 세계 1위 TSMC에 대한 의존도 문제를 거론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사실 국내외를 막론하고 기업 CEO들이 고객사나 협력사를 직접 거명하며 문제점이나 불만을 이야기 하는 것은 거의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입니다. 특정 기업에 대한 발주(또는 납품) 사실 자체가 일종의 영업기밀이기도 하고 '영원한 적(敵)도 동지도 없는' 업계의 생리상 서로를 자극해봐야 좋을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커버그의 '깜짝 발언'에 대해 아직까지 TSMC는 공식 반응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는 TSMC의 경영 방침에 비추어보면 아마도 류더인 TSMC 회장이나 웨이저자 CEO 입에서 별다른 말이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커보입니다.
실제 메타는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과 같은 소셜미디어 운영업체로 잘 알려져있지만 사실은 지난해 5월 인공지능(AI) 처리작업을 지원하는 자체 반도체 2종을 공개하면서 AI 칩 전쟁에 뛰어들었고 바로 이 칩의 생산을 TSMC가 맡고 있습니다. 애플이나 엔비디아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TSMC의 중요 고객인 셈입니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TSMC의 생산능력에 불만을 갖고 있는 메타가 삼성을 지렛대로 활용하려는 전략으로 이번 발언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커버그가 윤 대통령을 만난 바로 다음날 이번엔 엔비디아의 수장이자 AI 시대의 최대 거물로 떠오른 젠슨 황 CEO가 곱씹어볼만한 발언을 내놨습니다. 그는 1일(현지시각)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열린 한 포럼에 참석해 "AI 산업 확장에 따라 점점 더 많은 칩(반도체)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칩의 성능 역시 함께 개선되고 있어 전체 칩의 총량 확대는 제한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비유를 통해 풀이해보자면 이런 식입니다. 가령 전세계에 1억 그루의 사과나무가 있고 이 나무들을 키우는데 1억 개의 AI칩이 필요하다고 가정해 봅시다. 만약 여기서 더 발전된 성능의 칩이 나오면 똑같은 작업(연산)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칩의 갯수가 현재 1억개에서 1000만개, 100만개 순서로 점점 줄어들 것입니다. AI 발전에 따라 연산 총량도 늘어나겠지만 칩도 고도화되므로 칩의 갯수까지 늘어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실제 황 CEO는 "우리는 점점 더 많은 팹(반도체공장)을 필요로 하겠지만 AI 프로세싱 역시 엄청나게(tremendously) 향상됐다"며 "나는 지난 10년동안 컴퓨팅(연산) 성능을 수백만배 개선시켰다"고 강조했습니다.
물론 단순한 우연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만, 두 사람의 발언을 시간순으로 연결해보면 저커버그 CEO가 대만 TSMC를 상대로 생산능력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자 잠재적 라이벌 격인 황 CEO가 "칩의 성능을 끌어 올리면 되지 않느냐"고 맞받은 셈입니다. 대만에서 태어난 젠슨 황이 TSMC와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고객 사이에서 경쟁자로 관계가 바뀌고 있는 메타와 엔비디아, 이들의 납품업체이지만 결코 을(乙)로 깔아볼 수 없는 세계 최대 파운드리 TSMC, 그리고 TSMC의 아성에 도전하는 삼성전자까지 반도체 산업을 둘러싼 글로벌 기업들의 생존 경쟁이 더 흥미진진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