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임죄가 기업의 경영 판단을 저해하는 ‘손톱 밑 가시’로 인식되는 배경에는 모호한 법률 조항이 자리하고 있다. 형법 355조 2항·356조에서는 배임을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임무(또는 업무상 임무)에 위배해 재산상의 이익을 취하거나 제3자로 하여금 이를 취득하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해당 조항이 제정·시행된 지 7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업무 위배, 재산상 이득 등 문구를 두고 법적 해석만 분분하다. 형법상 배임을 둘러 싸고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이라는 비판이 법조계 안팎에서 끊이지 않는 이유다. 죄에 대한 정의 자체가 명확하지 않아 ‘혹시 배임죄에 해당할지 모른다’는 불안만 커지다 보니, 기업들이 신속하게 경영 판단을 내리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이는 최근 서울경제신문과 법무법인 세종이 국내 기업의 사내 변호사 5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응답자 가운데 35명은 ‘형법상 배임에 대한 개정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응답자(복수 응답) 가운데 62.7%는 바뀌어 야 할 부분으로 ‘업무에 위배, 이익 취득 등 모호한 개념의 명확화’를 꼽았다. 이어 ‘형법 처벌 기준 상향(또는 하향)’과 ‘기존 사기 혐의에 배임죄를 통합’이 각각 18%, 8%를 차지해 뒤를 이었다.
한 응답자는 개정이 필요한 이유(주관식)에 대해 “(범죄) 구성 요건이 포괄적이고, 광범위해 배임 여부에 대한 다툼의 소지가 크다”며 “수사는 물론 최종 법원의 판단 시까지 정확한 예측이 어렵다”고 답했다. 또 다른 응답자도 “현행 형법상 배임죄는 위태범으로 구성 요건이 다소 포괄적인 측면이 있어 기업의 자율적인 의사 결정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한다”며 의견을 같이 했다. 위태범이란 법이 보호하려는 이익(법익)에 대한 위험 상태를 야기하는 것만으로 구성 요건이 충족되는 범죄를 뜻한다.
한 응답자는 “기업가들이 경영 과정에서 판단을 할 경우 해당 조항 때문에 적극적 투자 등에 부담을 갖게 돼 기업 활동 위축을 가져올 수 있다”며 “경영진을 상대로 한 주주들의 부당한 소송 제기도 잦은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일부 응답자는 모호한 법적 조항을 명확하게 개정하는 동시에 법적 처벌을 상향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물가 상승 등을 고려해 벌금의 금액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형법에서는 배임죄를 저지른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의 벌금의 처하도록 하고 있다. 업무상 배임의 경우에는 처벌 수위는 10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이다.
다만 배임죄를 폐지하는 데는 반대 의견이 두드러졌다. 응답자(무응답 1명 제외) 가운데 71.4%가 ‘배임죄를 폐지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아니다’라고 답했다. 동일 사건을 사기 혐의로 처벌하는 미국처럼 배임죄를 폐지해야 한다는 응답은 28.6% 뿐이었다.
한 응답자는 배임죄 폐지에 반대하는 이유에 대해 “사기 혐의는 기망 행위를 요건으로 하고, 배임은 불법 이득 의사를 요건으로 해 (다르기 때문에) 기업 임직원의 배임 행위에 대한 처벌을 필요하다”며 “기업의 활동 등에 부패를 예방하는 것이 국가 청렴도와 같은 경쟁력 향상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어 존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응답자도 “주주 참여, 시장 감시 등의 장치가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계열회사가 많은 대기업 위주의 시장 구조상 배임죄를 폐지할 경우 부작용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고 답했다. 한 응답자는 “경영 환경이나 사회 문화, 법 체계 등이 다소 상이하다는 점에서 미국의 경우 만을 이유로 국내에서 배임죄가 폐지돼야 한다는 주장은 적절하지 않다. 우리나라와 법 체계가 유사한 독일이나 일본의 경우에도 형법상 배임죄를 유지하고 있고, 바로 폐지하는 게 국민 정서상 반감만 커질 수 있는 만큼 점진적 법 개정을 통해 처벌 요건을 강화하는 게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놨다.
이외에도 ‘국내의 경우 민사 손해배상 금액이 크지 않다’거나 ‘배임 행위에 대해 처벌 없이도 문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사회적 수단이 갖춰진 이후에 폐지해야 한다’ ‘배임죄의 구성 요건, 위법성 조각 사유를 보다 구체·명확화하는 차원의 보완이 우선 추진돼야 한다”는 답이 제시됐다. 배임죄 폐지가 시기상조인 만큼 현재의 법적 체제는 유지하되 개정 등 보완이 필요하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