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반도체 산업이 주요국의 보조금 지급 경쟁과 첨단기술 탈취 시도 속에 대중(對中) 수출통제 동참까지 강요당하면서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동맹국인 미국과 우호적 관계 설정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는 한편 최대 수출 시장인 중국에서 완전히 발을 빼기도 어려워서다. 특히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1월 대선에서 재선을 노리는 민주당 후보로 확정되면서 바이든식 ‘동맹국을 통한 대중 견제’에 참여하라는 압박 강도가 한층 높아지는 모습이다. 더군다나 수조 원대 반도체 보조금을 당근으로 내건 터라 우리 정부와 기업들의 셈법은 더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산업통상자원부와 반도체 업계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미국 정부가 대중 반도체 장비 수출통제에 한국의 동참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첨단 반도체 분야에서 미국의 전방위 제재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기술 진화 속도가 심상찮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이미 미국의 제재를 뚫고 7㎚(나노미터·10억분의 1m) 반도체 양산에 성공했으며 전 세계 반도체 구형·중고 장비를 싹쓸이하면서 기존 반도체 분야에서 물량 공세를 퍼붓고 있다. 이 같은 중국의 반도체 굴기 과정에서 그간 미국이 설계한 제재의 허점이 고스란히 노출됐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외교 소식통은 “대중 반도체 제재 루프홀(loophole·허술한 구멍)’과 관련한 미국 정부의 고민이 상당한 수준”이라고 전했다.
미국은 한국도 미국처럼 △핀펫(FinFET) 기술 등을 사용한 로직 칩(16㎚ 내지 14㎚ 이하) △18㎚ 이하 D램 △128단 이상 낸드플래시를 생산할 수 있는 장비·기술을 중국 기업에 판매하는 것을 금지하기를 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반도체 장비를 만들 수 있는 부품의 수출 역시 엄격히 통제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의 한 당국자는 “한국이 반도체 장비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은 아니지만 증착 장비나 부품 분야 등에서 무시 못 할 기술을 갖고 있다”면서 “중소 업체들의 수출 문제가 걸려 있어 민감하고 조심스러운 문제”라고 전했다.
미국은 미국의 장비와 기술이 중국으로 흘러가는 데 있어 한국이 ‘중간 기착지’가 되는 문제도 예의 주시하고 있다. 앞서 로이터통신은 미국 최대 반도체 장비 회사인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가 수출규제를 어기고 한국 자회사를 통해 중국 반도체 기업 SMIC에 제품을 판매했다는 혐의로 미 법무부의 조사를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최근 파이낸셜타임즈(FT)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노후 장비 판매를 중단했다고 보도했는데 이 역시 미국 정부의 엄격한 수출통제 기조를 의식한 조치로 보인다.
삼성전자 등은 미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미 텍사스 테일러시에 173억 달러를 들여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공장을 건설하고 있는 만큼 투자금의 10~15% 규모인 17억~26억 달러(약 2조~3조 원)의 보조금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내다보고 있다. 결코 적지 않은 액수지만 미국 인텔이 100억 달러 이상, 대만 TSMC가 50억 달러의 보조금을 수령할 것으로 점쳐지면서 ‘쩐의 전쟁’에서 밀릴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커지고 있다. 이에 삼성전자 등은 미국 정부 정책에 호응하는 동시에 추가 투자 가능성을 내비치면서 협상력을 높이고 우리 정부도 이를 측면 지원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미국·중국·일본·인도 등과 달리 우리나라는 보조금 지급 등 강력한 반도체 산업 육성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정부가 이달 중 내놓을 ‘첨단전략산업특화단지 종합 지원 방안’에도 ‘반도체 보조금’은 포함되지 않을 공산이 크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당초 TSMC가 삼성전자보다 투자 규모가 컸던 게 사실이므로 그에 비례해 보조금이 적은 것은 당연하다”며 “미국의 보조금 지급 규모를 놓고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다 본다”고 말했다. 다만 “보조금과 수출통제 이슈를 결부시키는 것은 자칫 돌이킬 수 없는 자충수가 될 수도 있어 신중할 필요가 있다”면서 “국내 반도체 생태계 육성 방안 등 근본적인 대안을 찾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당장 국내 반도체 장비 업체들은 중국 수출에 빗장이 걸릴 경우 장비 산업 전반에서 성장판이 닫힐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약한 국내 기업들은 중국과 같은 초거대 시장을 공략하면서 회사의 덩치를 키워가야 하는데 미국 규제에 따라 이 기회가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국내 반도체 장비사의 한 고위 관계자는 “반도체 웨이퍼 위에 회로를 그리는 전(前)공정에는 아직 우리 장비 업체들이 명함도 내밀지 못하고 있고 그나마 일부 후공정 시장에서만 서서히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는 상태”라며 “중국으로 가는 문이 닫혀버리면 네덜란드 ASML이나 일본 도쿄일렉트론(TEL)과 같은 초일류 장비사들은 국내에서 탄생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