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격한 보장성 확대와 실손보험 활성화 등으로 인한 본인 부담 감소는 이전보다 상급병원 이용 문턱을 낮춰서 수도권 대학병원에 대한 선호와 쏠림 현상을 심화시켰습니다.”
정부가 지난달 2일 ‘제2차 국민건강보험종합계획’을 발표하면서 지역·필수의료 공백을 초래한 원인을 지목하며 쓴 반성문이다. 이른바 서울 ‘빅5’ 등 상급병원으로 모든 인력과 환자·투자 등이 쏠리면서 지역·필수의료 생태계가 급격히 붕괴되고 지방 곳곳에서 응급실을 찾지 못해 병상을 헤매다가 사망하는 ‘응급실 뺑뺑이’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소아청소년과 의사를 만나기 위해 새벽부터 병원 앞에서 몇 시간씩 줄을 서는 ‘소아과 오픈런’은 일상이 됐다. 지난해 초 강원도 속초의료원에서는 연봉 3억 원에도 응급의학과 전문의를 구하지 못해 연봉 1억 원을 추가한 4억 원에 의사 모집 공고를 내는 진풍경이 빚어졌다.
특히 소아청소년과의 경우 지난해 4분기 합계출산율이 0.6명으로 추락하는 등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저출산 여파로 전문의가 돼야 할 전공의들의 씨가 마르고 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24년도 상반기 레지던트 1년차 정기모집 결과 피부과와 안과·성형외과 등 소위 인기 과목은 140~172%에 이르는 지원율을 보인 반면 소아청소년과(25.9%)와 산부인과(67.4%), 심장혈관흉부외과(38.1%) 등 비인기 과목은 전공의들이 대거 미달됐다.
정부는 지역·필수의료를 살리기 위해 2028년까지 10조 원 이상을 투자하겠다는 내용의 ‘필수의료정책 패키지’를 지난달 초 발표했다. 복지부는 18일 10조 원 가운데 5조 원을 난이도와 업무 강도가 높은 외과계 기피 분야, 내과 중증 질환 분야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박민수 복지부 2차관은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브리핑에서 “저출산 등의 영향으로 수요가 감소한 소아청소년과와 분만 등 분야에는 총 3조 원 이상을 집중 투입할 것”이라며 “심뇌 네트워크, 중증소아 네트워크 등 의료기관 간 연계 협력을 통해 치료 성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분야에 대해서는 2조 원의 네트워크 보상을 강화하겠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도수 치료와 백내장 수술 등과 같은 혼합진료(비급여+급여 진료)가 실손보험 팽창과 의료비 지출 급증의 원인이라고 보고 비중증 과잉 비급여 금지를 추진하는 한편 필수의료에 대한 수가도 미용·성형외과 개원의들의 연봉에 버금갈 수 있도록 파격적인 보상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박 차관은 “현재 비급여 진료가 많은 미용·성형 분야 개원의와 상급종합병원·대학병원의 연봉 수준을 비교하면 3~4배 차이가 난다”며 “이들 분야 임금에 맞춰야 인력 유출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의사 인력 확충과 더불어 필수의료 패키지, 건보종합계획 등에서 제시한 액션플랜을 더욱 구체화할 수 있는 청사진을 제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형선 연세대 보건행정학과 교수는 “충분한 의사 정원 확대가 이뤄지면 자연스럽게 필수의료 분야에 대한 공급이 늘고 붕괴된 필수의료 분야 생태계가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며 “인력 확충으로 의료 서비스가 늘어나면 사회 전체의 의료비 지출이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의대 정원 확대를 위한 의료계 설득도 계속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서울아산 어린이병원을 방문해 의료진 간담회를 열고 “증원을 단계적으로 하자는 의견도 있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단계적으로 이뤄졌다면 좋겠지만 정치적 리스크 때문에 역대 정부들이 엄두를 내지 못해 너무 늦어버렸다”며 “정부를 믿고 대화에 나와 달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필수의료 분야 의료진들이 정당한 보상을 받고 보람을 느끼며 일하고, 병원이 재정난을 겪지 않을 수 있도록 정부가 확실히 챙기겠다”며 “미래를 내다보고 후배들을 설득해달라”고 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