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7월에 일본에서 발행되는 1만 엔 신권부터 메이지 시대의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를 대신해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이치(1840~1931년)가 등장한다. 시부사와는 메이지 정부에서 지금의 재무성 역할인 대장성의 관리로 들어가 일본의 화폐·금융·조세제도 등의 밑바탕을 설계해 ‘일본 경제의 설계자’로도 불리는 인물이다. 무엇보다 그의 업무 능력을 높이 산 대장성이 고위 관료직을 제안했으나 오히려 시부사와는 ‘상업이 부흥해야 나라가 선다’는 신념으로 1873년 관직을 내려놓고 실업가로 전향해 일본 최초의 은행인 제일은행(현 미즈호은행)을 비롯해 철도·가스·전등·방직 회사 등 500여 개의 기업을 세웠다.
시부사와가 당시 관존민비(官尊民卑)라는 통념을 깨고 고위 관직을 버리고 실업가로 인생 2막을 개척할 수 있었던 계기는 사실상 메이지유신 직전에 프랑스로 떠나 유럽의 자본주의를 체감하면서 마련됐다고 할 수 있다. 막부의 신하로 발탁된 시부사와는 파리 만국박람회를 시찰하는 수행 사절로 1867년 1월 11일 일본 요코하마를 출발해 2월 29일 프랑스의 마르세유 항구에 도착했다. 당시 시부사와의 나이는 27세로 한창 새로운 문물을 수용할 만큼 유연했으며 스위스·네덜란드·이탈리아·영국 등을 돌며 자본주의와 기업 경영의 중요성을 체감하고 이듬해 12월 3일 요코하마로 귀국했다. 그는 “외국행을 결심한 이상, 이제까지 양이론(攘夷論)을 주장하며 외국은 모두 이적 금수(禽獸)라고 경멸했지만 앞으로는 빨리 외국어를 배워 외국 책을 읽을 수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자신의 회고록(박훈 역주, ‘일본의 설계자, 시부사와 에이이치’)에 밝혔는데 시세를 분별해 좋은 점이라면 무엇이든 취하겠다는 실용적인 사고의 유연성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실용적 유연성이 역사에 꼭 좋은 결과만을 가져온 것은 아닐 테지만 적어도 19세기 후반 관존민비의 사고를 깨고 20세기를 주도할 경영인의 선례를 개척하기로 뜻을 정한 시부사와의 결단은 지금 생각해도 참 빠르고 과감하고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