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당시인 2021년, 국내 완성차 업계는 ‘와이어링 하네스’라는 부품 조달이 끊겨 공장 라인을 멈추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한 바 있다. 차량 내부에 있는 각종 전기전자장치에 전원을 공급하는 필수 부품인 와이어링 하네스는 대부분 중국이 생산하는데, 코로나 19로 현지 부품 공장들이 셧다운되자 수급이 급격히 경색됐고 이것이 자동차를 만들지 못하는 상황까지 이어진 것이다.
와이어링 하네스 사태는 한국에 ‘중국 공급망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남겼다. 그러나 상황은 그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석유화학부터 철강·배터리까지 한국 제조업은 저가 중국산이 점령하다시피 했다. 문제는 중국 제품들이 가격 경쟁력뿐 아니라 ‘품질 경쟁력’까지 겸비했다는 점이다. 업계 관계자는"중국 업체들 역시 과거보다 품질을 높이면서 가격은 오히려 낮춰 국산화율을 높이기가 쉽지 않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실제 중국의 철강과 석유화학 업체들은 포화 상태인 자국 시장을 벗어나 저가 상품을 해외로 수출하고 있고 배터리 기업들도 공급 과잉을 해소하기 위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에 대한 공략을 강화하고 있다.
로봇청소기 등 일부 가전제품에서는 중국산이 ‘카피캣’ 오명을 벗고 오히려 품질 경쟁력을 앞세우는 ‘품질 공세’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철강·배터리·로봇·가전 등 첨단산업 분야에서 전개되고 있는 중국의 전방위 덤핑 공세를 해결하지 못하면 핵심 공급망이 중국에 종속돼 경제 안보가 위협 받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철강을 위협하는 근본적인 요소도 중국산의 공급 과잉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시장에서 과잉 생산된 철강은 24억 9000만 톤으로 이 가운데 아시아 비중이 절반을 넘는 53.3%를 차지한다. 중국이 자국을 포함해 동남아 국가 생산 기지에서 저가 철강 ‘덤핑’을 하고 있다는 의미다. 직격탄을 맞은 포스코와 현대제철 등 철강 업계는 중국산 저가 철강이 시장 질서를 교란해 피해를 보고 있다며 반덤핑 제소를 검토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다.
탄소 감축 시대를 맞아 친환경 미래 제조업의 핵심으로 떠오른 배터리도 ‘중국 판’이 돼가고 있다. 최근 주목 받는 리튬·인산·철(LFP) 배터리는 중국이 앞서 나가고 있는데 중국 정부가 배터리 업체에 지급하던 보조금을 중단하자 공급 과잉이 발생했고 이 물량은 고스란히 수출돼 해외로 밀려 나가고 있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중국은 최근 전기차의 ‘캐즘(보편화 전 일시 수요 침체)’ 진입으로 배터리 성장세가 주춤한 틈을 타 시장을 장악할 기세”라고 우려했다.
중국은 공급 과잉 전략을 오히려 확대하겠다는 방침이다. 이달 초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리창 중국 국무원 총리는 “전기차와 배터리, 태양광을 신성장 동력으로 삼겠다”며 이들 품목의 수출 성장률을 30%까지 끌어올리겠다고 선언해 국내 산업의 피해가 장기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진다.
문제는 이런 중국의 밀어내기가 비교적 첨단 제품으로 확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품질까지 무장했다. 지난해 국내 로봇청소기 점유율 1위(35.5%)를 차지한 기업은 삼성·LG전자도, 미국 기업도 아닌 중국 업체 로보락이었다. 로보락의 가격은 160만 원으로 저렴한 가격을 앞세운 중국 제품과 전혀 다르다.
중국 TV 업체인 TCL은 쿠팡 등 온라인 커머스 시장에서 입소문을 타고 삼성·LG전자가 버티고 있는 국내 시장에 침투하고 있다. TCL의 ‘C845’ 시리즈는 2022년 3월 쿠팡에서 처음 출시 당시 55인치부터 85인치까지 전 제품이 5분 내 품절되는 진풍경이 벌어진 바 있다. 카운터포인트리서치 등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에서 프리미엄 TV 출하량이 전년 대비 39% 증가했다. 중국의 TV 고급화 전략이 시작됐음을 보여주는 수치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동남아에서 미국·유럽의 견제로 유입되기 시작한 중국 전기차가 현지에서 인기가 높아지는 등 ‘중국산은 싼 맛’이라는 공식이 깨지고 있다”며 “중국에 포위 당한 국내 산업은 경제 안보 측면에서도 위기”라고 말했다. 중국 전기차 업체 비야디는 실제로 국내 진출을 타진하고 있고 ‘대륙의 실수’로 유명한 샤오미는 국내 보조배터리와 차량용 공기청정기 등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