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 총선을 2주가량 앞두고 의정갈등이 심화된 틈을 타 간호사들의 숙원인 ‘간호법’ 제정이 재추진되고 있다. 국민의힘이 새 간호법안을 21대 국회 회기 내 조속히 처리하겠다고 밝히면서 작년 5월 윤석열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로 눈물을 삼켰던 간호사들 사이에 화색이 도는 분위기다.
◇ 의사·간호조무사 강력 반대에…‘간호법’ 국회 통과 목전에서 폐기
대한간호협회(간협)는 28일 국민의힘이 간호법 제정안을 발의한 데 대해 "그동안 간호 관련 법이 없어 어려움을 겪던 간호인과 환자에게 반가운 소식"이라며 환영의 뜻을 밝혔다.
간호사들의 오랜 숙원인 간호법은 지난해 2월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서 국회 본회의에 직회부되며 입법 속도를 냈다. 간호법은 의료법에 포함된 간호사에 대한 규정을 떼어내 간호사의 업무범위, 체계 등에 관한 단독법을 제정하는 것이다. 간협은 "간호법이 단순히 간호사들의 처우를 개선할 뿐 아니라 고령화 시대에 사회적 돌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법"이라며 제정 필요성을 어필했다. 그러나 의사, 간호조무사 등 간호사를 제외한 13개 보건의료직역단체가 '보건복지의료연대'(의료연대)를 구성하고 이를 규탄하면서 난항을 겪었다. 제정안에 담긴 '지역사회 간호'라는 표현이 간호사의 단독 개원을 가능하게 하고 간호조무사, 응급구조사 등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게 한다는 게 이들이 반대하는 주된 이유였다. 이들은 작년 4월 간호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자 대통령에게 법안의 재의요구권 행사를 요구하며 '연가투쟁'을 벌였다. 대한의사협회 등 의료연대 소속 단체장들은 단식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보건의료직역 간 갈등이 심화하자 보건복지부는 간호법을 제정하는 대신 간호사의 근무 환경 개선방안 등을 담은 '간호인력 지원 종합대책'을 발표하며 한발 물러섰다. 정부와 여당이 대통령에 재의요구권 행사를 건의하고 이에 대통령이 응하자 간호사들은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 때 했던 (간호법 제정) 약속을 어겼다"며 공분했다. 그동안 모호한 의료법 조항 탓에 관행처럼 떠맡아 온 불법의료행위를 거부하겠다며 '불법진료 신고 운동'을 벌였지만, 지난해 5월 진행된 국회 본회의 재표결에서 부결되고 말았다.
◇ ‘총선에서 심판’ 벼르더니…의정갈등에 상황 급반전
더불어민주당이 작년 11월 간호법을 다시 발의하기도 했지만, 수정된 문구가 또다시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보건의료 직역 간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던 상황이다. 당시 간협은 "내년(2024년) 4월 치러질 총선에서 간호법에 대한 재의요구권 행사를 건의한 여당 의원들을 심판하겠다"며 별렀다. 아이러니하게도 5개월 여만에 상황이 반전되며 여당이 새로운 간호법안을 들고 나온 것이다.
이날 국민의힘이 발의한 간호법에는 간호사·PA(진료지원) 간호사·간호조무사의 자격 및 업무 범위가 구체적으로 적시됐다. 간호사 업무 범위는 환자의 간호 요구에 대한 관찰, 자료수집, 간호 판단 및 요양을 위한 간호, 건강증진 활동의 기획과 수행, 간호조무사 업무 보조에 대한 지도 등으로 규정했다.
법적으로 정해진 규정이 없어 합법과 위법의 경계에 있었던 PA 간호사에 대해서는 "자격을 인정받은 해당 분야에서 전문 간호 및 의사의 포괄적 지도나 위임 하에 진료 지원에 관한 업무를 수행하도록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수술실에서 집도의를 보조하는 역할 등 의료현장에서 암묵적으로 의사 업무를 대신해온 PA 간호사들이 제도권 안에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법적 근거를 마련하려는 취지다. 지난달 의과대학 증원에 반발해 전공의들이 집단 사직서를 제출하고 병원을 이탈하면서 PA 간호사 문제는 다시 수면 위로 올랐다. 정부는 전공의 이탈로 의료공백이 커지자 그에 대한 대책 중 하나로 PA 간호사 활용 카드를 꺼내들었다. 간호사들이 응급 환자를 대상으로 심폐소생술(CPR), 응급약물을 투여하는 것은 물론 뇌척수액 채취, 진료기록 작성 등 전문적인 의료행위까지 할 수 있도록 한시 허용한 시범사업이 시행된지 어느덧 두 달 가까이 되어간다.
◇ 새 간호법, 더 세졌다…'재택 간호 전담 기관' 독자 개설 권한 부여
이번에 발의된 간호법안에는 지난해 가장 논란이 컸던 '지역사회 간호' 문구가 빠졌다. 대신 간호사가 '재택 간호 전담 기관'을 독자적으로 개설할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이 적시돼 있다. 사실상 간호사에게 요양시설 설립 권한을 주는 것으로, 작년에 추진됐던 간호법보다 되려 간호사들에게 큰 권리가 주어지게 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의사 등 다른 보건의료직역단체의 반발도 더욱 거세질 수 있다는 관측이다. 그동안 의사단체 등은 간호법이 통과되면 간호사의 무면허 진료와 처방이 속출해 국민 건강을 위협할 것이라며 이를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주장을 펴왔다. 의정갈등의 출구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보건의료계 새로운 갈등이 피어 오를 가능성이 크다. 실제 최근 의협 42대 회장으로 선출된 임현택 당선인은 ‘PA 간호사의 의사 대행 금지’를 핵심 공약 중 하나로 내걸었었다.
간협은 "그동안 간호법이 없었던 탓에 환자를 위한 간호사의 행위가 불법이 되거나 도움이 필요한 환자에게 적절한 도움을 줄 수 없는 사례가 많았다"며 "여·야당과 정부 모두가 간호법안의 필요성에 대해 한마음이 되었다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이들은 간호법 제정을 현 정부가 추진하는 '의료개혁'의 연장선이라고 보고 있다.
간협은 "치료 중심에서 예방과 관리 중심으로, 의사 중심에서 환자 중심으로 변경되는 정부의 의료개혁은 시대의 분명한 요구"라며 "간호인들은 간호법을 필두로 시작되는 의료개혁을 지지한다. 의료는 특정 이익집단의 것이 아니라 국민들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