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어느 시대나 사회고발적이었다. 당대의 모순을 낱낱이 드러내는 이러한 문학의 사회고발적 측면은 결국 그런 잘못들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작가와 독자들의 마음이 담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세상은 좋아지고 있는가. 지난해 퓰리처상을 수상한 소설 ‘내 이름은 데몬 코퍼헤드’는 세상이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200여년 전 찰스 디킨스가 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쓴 자전적 소설 ‘데이비드 코퍼필드’의 현대적 해석인 이 소설은 자본주의의 민낯을 보여준 원작의 시대와 크게 나아진 거 같지 않은 오늘의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공간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시간은 19세기에서 20세기 말로 옮겨졌지만 본질은 다르지 않다. “디킨스가 쓴 책들도 그랬다. 그는 어린애들과 고아들이 신세를 망쳤는데 아무도 쥐똥만큼도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을 그려냈다. 이 동네 출신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는 소설의 한 대목이 이를 잘 나타낸다.
구두약 공장을 전전하며 산업혁명의 그늘 아래서 가난과 열악한 노동환경을 겪은 원작의 주인공처럼, 소설의 주인공 역시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낸다. 마약과 알코올 중독자 미혼모에게서 태어난 주인공 데몬은 자신도 약쟁이가 되어 버린다. 새 아버지의 학대, 약물 과다로 인한 어머니의 죽음, 불법 아동 노동 착취까지, 데몬의 미래는 어찌 보면 뻔해 보인다.
그런 삶 속에서도 주인공은 꿈과 희망을 놓지 않는다. 그리고 그 희망을 이어가게 해 준 사람들은 결국 주변의 어른들이다. 이는 원작에서도 마찬가지다. 원작 주인공 데이비드가 고모할머니와 첫사랑의 도움으로 어려움을 이겨내고 소설가가 됐듯, 데몬도 좋은 선생님과 좋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좋은 글쟁이가 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소설이 200년 뒤에는 쓰여지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먼 미래에도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그건 너무 슬픈 일이 아닐까. “훌륭한 이야기란 삶을 베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마주 밀어내다는 것”이라는 데몬의 이야기는 문학을 통해야지만 희망을 볼 수 있는 제도적 실패와 도덕적 붕괴로 가득 찬 사회상을 암시한다.
아이들이, 젊은 세대들이 희망을 잃어가는 것은 결국 어른들의 잘못이다. 데몬은 왜 가난에서 벗어났고 데몬의 사랑 도리는 죽음을 맞이했는가? 어른들이 손을 잡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2만 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