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목요일 아침에] 대동법 개혁에서 협치 배워야

특산물 대신 쌀로 낼 수 있게 제도개혁

기득권층 거센 반발, 100년 걸려 정착

붕당정치 속 민생 해법 협조 백성 살려

여야, 과거 교훈 삼아 대화·타협 정치를





대동법 도입은 조선 시대 최고의 조세 개혁으로 꼽힌다. 임진왜란 이후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섰고, 일본에서는 에도 막부 시대가 열렸는데도 조선 왕조가 무너지지 않았던 것은 대동법 개혁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을 정도다.

조선의 조세는 땅에 부과되는 토지세, 가구에 부과되는 역(노동력)과 공납(특산물)의 3종으로 구성됐다. 조선 중기부터 공납과 역의 비중이 커져 공납이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됐다. 김종직의 산행기 유두류록(遊頭流錄)에는 ‘(나라에 바칠 매를 잡으려고) 가난한 백성이 눈보라를 견디며 밤낮으로 천 길 산꼭대기에 엎드려 있다’는 내용 등 공납의 폐단이 잘 기록돼 있다. 대동법은 조세로 바치는 각 지방의 특산물을 대신해 쌀이나 삼베·돈 등으로 낼 수 있도록 한 제도다. 쌀로 대신 낼 수 있어 편해졌을 뿐 아니라 부과 기준이 호(戶)에서 토지로 바뀌면서 소작하는 가난한 백성들의 부담이 줄어들었다. 반면 지주·관료 등 기득권 세력이 거세게 반발해 전국으로 확대되는 데 무려 100년이나 걸렸다.



대동법 개혁이 지금 소환되는 것은 ‘붕당 망국론’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대립이 심했던 시기에 이뤄낸 성과이기 때문이다. 선조 때 서인 율곡이 처음 제안한 뒤 광해군 당시 남인 이원익이 경기도·강원도에서 시행하고 효종 때 김육이 충청도·전라도에 정착시키면서 전국적으로 확대할 수 있었다. 선조 시대는 4대 사화를 극복한 사림이 중앙 권력을 장악한 후 동인·서인, 동인은 남인·북인, 북인은 소북·대북 등으로 분열하며 당쟁이 시작된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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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무역개발회의는 2021년 한국의 지위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올렸다. 우리나라는 선진국 반열에 진입하자마자 추락 위기로 빠져들고 있다. 사상 유례없는 저출산과 인구절벽·고령화로 인해 연금 재정 고갈 위기에 처했다. 또 5년마다 1%씩 하락해 2% 붕괴 위기에 놓인 잠재성장률과 비정규직·정규직, 중소기업·대기업으로 갈라진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등으로 거센 도전을 맞고 있다. 주요 선진국들은 수명 연장에 대비해 보험료율 인상, 경제 상황에 따르는 연금액 삭감 자동 안정 장치 도입, 직역연금·국민연금 통합 등 연금 개혁을 거의 완료했지만 우리나라는 제대로 된 연금 개혁을 시작하지도 못했다.

인구 감소로 세수는 줄고 고령화로 복지 수요는 팽창하는데 ‘잃어버린 30년’의 옛 일본처럼 저성장의 터널이 눈앞에 다가왔다. 2023년 6월 기준 대기업의 정규직 시급 대비 비정규직은 67.2%, 중소기업의 정규직은 57.6%, 중소기업의 비정규직은 44.1%에 불과하다. 중소기업 근로자의 비중이 전체 근로자의 80.9%(2021년)에 이르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구조를 방치하고 어떻게 아이를 낳아달라 요구할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가 복합 위기에 직면했는데도 여야 정치권은 현실을 직시하기는커녕 유리한 입지 확보를 위해 정쟁에만 몰두하고 있다. 거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21대 마지막 국회에서 ‘선(先)구제 후(後)회수’ 방식의 전세사기특별법, ‘셀프 특혜’ 논란을 빚어온 민주화유공자법 등 5개 법안을 단독으로 처리했다. 거대 야당은 입법 폭주에 나서고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하는 쳇바퀴 돌리기를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 총선에서 연이어 압승한 야당이 대통령의 탄핵을 아무 거리낌 없이 거론하며 폭주하고 있어 22대 국회도 나아질 게 없다는 비관론까지 나온다.

정치권은 과거 붕당정치 속에서도 민생 문제 해법에서 협조해 백성을 살린 대동법 개혁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김육은 온갖 대립 속에서 대동법이 뿌리내릴 수 있었던 요인을 ‘호서대동절목’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말은 내가 꺼냈지만 제공(諸公·여러 동료)들이 변통하지 않았다면 시행되지 못했을 것이다. 제공들이 잘 변통하기는 했지만 임금께서 홀로 결단을 내리고 확고히 정해 끝내 성사시킨 데 말미암은 것이다.” 진정성을 담은 지도자의 리더십과 민생 개혁 필요성에 공감해준 다른 당파의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얘기다. 당시 조정에서 큰 영향력을 지녔던 김집·김상헌·송시열 등도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입장을 바꿨다. 여야는 수백 년 전 일을 교훈으로 삼아 대화와 타협, 협치를 통해 시대가 요구하는 산적한 과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

오현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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