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시로 여는 수요일] 노각

유종인





노각이라는 말 참 그윽하지요



한해살이 오이한테도

노년이 서리고

그 노년한테

달세방 같은 전각 한 채 지어준 것 같은 말,

선선하고 넉넉한 이 말이

기러기 떼 당겨오는 초가을날 저녁에

늙은 오이의 살결을 벗기면

수박 향 같기도 하고

은어 향 같기도 한

아니 수박 먹은 은어 향 같기도 한



고즈넉이 늙어 와서 향내마저 슴슴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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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 그대 내력이 서리고

그대 전생에 내 향내가 배인 듯

아무려나

서로 검불 같은 생의 가난이 울릴 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조붓한 집 한 채 지어 건네는 맘

사랑이 그만치는

늙어가야 한다는 말 같지요

(하략)

오이는 어쩌자고 저럴까 싶었지요. 덜 익으면 쓰거나 시어야 하거늘 한 모금 독이 없어 풋열매를 다 내어주니까요. 여름내 늙을 새도 없이 밥상에 오르지요. 오이무침, 오이소박이, 오이냉국이 되어 더위를 식혀 주지요. 다 따먹은 듯해도 한두 개쯤 이파리 사이로 내미는 늙은 얼굴은 뭉클하기도 하지요. 노과라는 말이 맞을 듯하지만, 노각이라 부를 이유가 생겼군요. 검불 같은 생에 지어 올린 말씀의 전각이 우뚝하군요. 서로가 서로에게 서리고 배인 삶이라면 가난하다고만 할 수 없겠군요. <시인 반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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