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6월 고용시장이 둔화했다는 소식에도 8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이 전 거래일보다 3원 오른 1383.3원(오후 3시 30분 기준)을 기록했다. 1일부터 6거래일 연속 1380원대를 이어갔다. 미국 실업률(4.1%)이 예상을 웃돌고 4~5월 일자리가 기존 예상보다 11만 1000명 줄면서 원화 강세가 예상됐지만 큰 틀의 흐름이 바뀌지 않은 것이다. 7월 금융통화위원회(7월 10~11일)를 앞두고 있는 한국은행 입장에서는 골치가 아픈 대목이다.
문제는 더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계부채가 급증하면서 한은의 고민을 더 깊게 만들고 있다.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시중은행의 가계대출은 이달 들어 5일까지 710조 1291억 원으로 닷새 만에 1조 5568억 원 증가했다. 4일 기준으로는 2조 2000억 원 증가다. 주요 은행 가계대출은 6월 한 달 동안 5조 3415억 원 급증하면서 2021년 7월(6조 2000억 원) 이후 2년 11개월 만에 가장 큰 폭으로 뛴 바 있다. 아파트 가격 상승세에 살아난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음)’ 수요가 원인으로 지목된다.
시장에서는 당국이 대출 규제를 연기한 것이 규제 강화 전 막판 수요를 자극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앞서 금융위원회는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의 시행을 7월에서 9월로 두 달 연기했다. 정부 내에서 원하는 선제적 기준금리 인하가 가능하려면 대출을 옥죄고 금리를 내려야 하는데 대출 규제 강화 시점을 늦추면서 통화 당국의 긴축 기조와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4월 광의통화(M2)는 4013조 원(평잔 기준)으로 사상 처음으로 4000조 원을 넘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부동산 역시 꿈틀대고 있다. 지난달 전국 아파트 경매에서 감정가 대비 낙찰가의 비율인 낙찰가율이 23개월 만에 최고치를 경신했다. KB부동산에 따르면 6월 서울의 매매거래활발지수는 25.87로 3년 11개월 만에 최고 수준이다. 부동산을 비롯한 자산 가격의 상승 역시 한은이 원하는 긴축과는 정반대의 흐름이다. 지금 상황은 ‘금리 인하 기대→대출 증가→집값 상승’으로 이어져 부동산 거품을 키울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한은도 상반기 금융시장안정보고서에서 일부 지역의 주택 가격이 상승 전환했다고 밝혔다. 강경훈 동국대 경영학부 교수는 “통화량이 늘면 주가나 부동산으로 돈이 쏠리고 가격이 오르게 돼 있다”며 “금리 인하에 대한 기대감이 주택 가격을 부추기며 한은의 결정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 이후 소상공인 구조조정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가 또다시 대출 만기 연장을 해주기로 한 만큼 한은이 섣불리 움직일 경우 자영업자 부실이 눈덩이처럼 커질 수 있다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금융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경기가 좋아질 때까지 부실을 미뤄보겠다는 것인데 생각만큼 경제가 개선되지 않으면 부실 폭탄만 키우는 꼴”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금리까지 내리면 문제가 더 꼬일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시장은 앞서 나가고 있다. 이날 하나증권은 7월 금통위에서 인하 소수 의견 1명을 예상한다며 이르면 8월 금리 인하를 점쳤다. 씨티도 8월 인하를 예상했다. 전직 금통위원은 “시장은 자사 이익 때문에 금리 인하를 원하겠지만 환율과 가계부채 등을 고려하면 조기 인하는 쉽지는 않은 상황”이라며 “과거에는 소수 의견이 다음 번 금리 인하의 신호로 쓰였던 적이 있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7월에 소수 의견이 나온다고 해도 이것이 곧바로 8월 금리 인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환율만 해도 원·달러 환율은 지난해 말(1288원)보다 7.14%나 높은 상태다.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 수석전문위원은 “금리 인하 기대감이 부동산 시장에 선반영됐고 현재 시장금리도 2%대로 떨어진 상태”라며 “이 상황에서 환율 불안까지 겹쳐 미국보다 선제적으로 금리를 내리기는 어렵기 때문에 종합적인 의사 결정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짚었다.
일각에서는 정치권의 금리 인하 압박이 한은의 운신의 폭을 더 좁혔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원희룡 국민의힘 대표 후보는 “무엇보다 금리가 문제”라며 “금리를 낮추기 위해 당이 주도하겠다”고 했고 윤상현 후보도 한은의 선제적 금리 인하를 촉구했다. 한덕수 국무총리 역시 “이제 금리는 내려갈 방향밖에 없다”고 한은을 압박한 바 있다. 전직 정부 고위 관계자는 “서민과 일부 자영업자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정치권이 과도하게 금리 인하 압력을 넣으면 한은 입장에서는 금리를 내리고 싶어도 못 내리는 측면이 생긴다”며 “한은 독립이 과거처럼 중요한 이슈는 아니지만 환율과 부동산이 불안한 상황에서 정치권이 너무 나서면 한은의 입지만 좁아진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