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검증된 현대미술:날 것을 익히기 [아트씽]

[조숙현의 가까운 미술(2)]

예술의 독창성과 '날 것' 포용 못하는

'한국 미술 행정'이 만든 뻔한 전시들

1992년 MBC의 한 프로그램을 통해 데뷔할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은 평가위원들의 혹평을 받았으나 훗날 한국 대중음악사의 흐름을 바꿔놓는 스타 뮤지션이 됐다. 새로운 ‘날 것’을 수용할 수 있어야 새로운 감동도 가능하다. /사진출처=MBC1992년 MBC의 한 프로그램을 통해 데뷔할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은 평가위원들의 혹평을 받았으나 훗날 한국 대중음악사의 흐름을 바꿔놓는 스타 뮤지션이 됐다. 새로운 ‘날 것’을 수용할 수 있어야 새로운 감동도 가능하다. /사진출처=MBC




전시가 폭주한 6월이었다. 서울 시내 국공립미술관과 갤러리, 전시공간에서 야심작 전시들을 일제히 터트리는 바람에 지인 작가들의 전시 소식에도 다 찾아가기에 체력이 부족했다. 그러나 바삐 찾아간 전시에도 아쉬움은 남았다. 전시 형식이나 담론 제시, 작가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익숙했다. 낯선 감각, 새로운 문제 제기, 예술의 자율성은 보이지 않았고, 보이지 않는 연대의 강화만 확인할 수 있었다.


전시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전시는 사람과 돈으로 이루어진다. 예술가와 큐레이터, 관객이 전시 관람 집단을 이루어 한 편의 유효한 전시를 형성한다. 여기서 전시를 위한 작업 제작과 아티스트 피, 기획 피, 공간 대여금 등의 비용이 발생한다. 그러나 현대미술은 전시만으로 자급자족하는 경제 독립이 불가능하기에, 한국에서 진행되는 전시는 보통 지원금 조달을 통해 이루어진다.

창작지원금으로 통칭되는 전시지원금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서울문화재단, 경기문화재단 등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각종 지역 재단의 공모와 심사를 통해 지급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경직된 한국의 문화 행정과 자유로운 예술의 충돌이 빚어낸 기이한 한국형 전시 장르이다. 행정이 깊이 관여하는 국가 특성은 예술과 전시의 성격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매년 연말이 되면 예술가와 기획자는 바빠진다. 차기년도 지원금 마련을 위한 기획서 작성에 총력을 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 지원금과 보조금에 예술가와 독립 기획자, 비영리 문화 단체의 생계와 살림살이, 비전까지 달려 있는 것이 우리 현대미술 현장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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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지원서 양식은 보통 3부작으로 비장하게 구성되어 있다. 신청자의 주요 경력과 실적을 보는 신청자 정보 1부, 사업 목표 및 계획을 붙는 2부, 그리고 사업의 기대 효과 및 파급력을 묻는 3부를 꼼꼼히 작성해야 한다. 기획서에는 기획 의도와 사업 세부 구성, 운영 계획, 사업 추진 일정, 예산 계획, 홍보 전략과 함께 사업의 수월성과 책임성, 기대 효과를 엄숙하게 단속하며 마무리 된다. 이 지원서는 ‘예측 가능하고 실현 가능한 예술을 행하고 책임져라’ 라는 행정의 논리를 따르는데 과연 이들이 지원하고자 하는 예술 실천이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논리의 완결성은 충족하지만 이 논리를 따르기 위해서는 예술의 독창성과 아름다움이 큰 점수를 얻는다기보다는 형태와 과정 실현의 성실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예술의 예측 불가능성을 지지하지 않는다. ‘날 것’을 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온통 통과한 ‘익은 것’ 들만 실천된다.

예술에서 무엇을 기대하는가


가장 큰 문제는 여기에서 작업이나 전시의 이미지보다는 기획서 상의 기획의도나 특정 담론 등 텍스트를 토대로 평가가 이루어지는 전도이다. 지원 심사는 외부 심사위원 심의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심의위원들이 가지고 있는 작업에 대한 주관적인 취향과 그에 따른 선호도 역시 배제할 수 없다. 대중친화적일수록 경박하고 대중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수준이 되어야 고매한 순수미술이라는 편견, 경력에 우선하는 학위 체제의 비중, 현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일부 심사 구성원으로 인해 자격을 갖춘 클리쉐가 통과하고 창조적인 이미지가 탈락하는 결과가 가능해진다.

이렇게 예술의 날 것을 익힌 ‘한국 미술 행정’ 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탄생하고, 장르에 부합한 작업이 우리 앞에 출현하게 된다. ‘유망한 신진 작가’ 혹은 ‘꾸준한 중견 작가’가 선보이는 전시는 매체와 장르 실험 담론으로 무장하여 전시장을 들어서는 우리에게 10년 전, 그리고 아마도 20년 전과도 똑같은 기시감을 선사한다. 검증된 기획자와 기획하고 자격 있는 예술가의 전시로 전시장이 채워지고 세부 실행 계획을 기반으로 일정이 소비되고 예산을 지출하였으며 기대효과에 부흥하지만, 새로움을 찾는 관객에게 감동을 주지는 못 한다. 그리하여 전시장에서 보이는 것은 작가나 작업이 아닌, 한국 미술 행정 장르에 근사하게 부합하는 한 편의 전시기획서이다.



▶▶필자 조숙현은 현대미술 전문 출판사 아트북프레스(Art Book Press)를 운영하고 있다. 연세대학교 영상 커뮤니케이션 석사를 졸업했고, 전시기획자와 미술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내 인생에 한 번, 예술가로 살아보기’와 ‘서울 인디 예술 공간’이 있다. ‘강원국제비엔날레 2018 : 악의 사전’, ‘변덕스러운 부피와 두께’, ‘X-사랑’, ‘바로 오늘’, ‘Way of Life’ 등의 전시를 기획했다.

아트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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