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이 성공적으로 안착하기 위해서는 국내 증시에 외국계 행동주의 펀드의 유입을 늘려야된다는 주장이 나왔다. 기업별 특성을 고려한 적정 주주환원 규모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주주와의 소통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23일 한국거래소에서 ‘밸류업 관점에서 본 한미일 증시’를 주제로 간담회를 열고 한국 밸류업 지원정책의 지향점에 대해 발표했다.김 센터장은 한미일 기업의 지배구조에 대해 “미국은 패시브 펀드가 최대 주주고 일본은 오너의 개념이 약한 반면 한국은 오너로 불리는 지배주주들이 실질적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김 센터장은 이러한 구조 때문에 미국은 주주 자본주의 과잉 현상이 일어나는 반면, 국내에서는 소액 주주의 입김이 약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나스닥 시가총액 1위 기업인 애플은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6년여간 4634억 달러(약 641조 4846억 원)가량을 자사주 매입에 사용했다. 애플은 자사주를 매입함과 동시에 소각한다. 애플의 대주주는 글로벌 자산운용사 뱅가드(지분율 8.9%), 블랙록(7.3%), 스테이트 스트리트(4.0%) 등이다.
이익잉여금으로 자사주를 매입하는 애플과 달리 맥도날드와 스타벅스는 부채를 통해 자사주를 매입할 정도다. 이 때문에 두 기업은 전액 자본잠식 상태에 빠져있다. 두 기업뿐만 아니라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 지수 구성 기업 중 무려 31개 우량 기업이 전액 자본잠식 상태다. 김 센터장은 이에 대해 “자기자본을 줄여서 만든 극강의 자본효율성”이라며 “주주권 행사에 관심이 없는 패시브 투자자의 증가는 경영진의 전횡과 단기주의 횡행으로 귀결된다”고 짚었다.
그는 이러한 단기주의는 경계해야 하지만,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주주환원을 통해 자기자본을 줄이는 노력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를 위해 일본의 밸류업 정책 성공 사례를 참고해볼만 하다고 제언했다. 일본 증시는 실물 경제 침체에도 불구하고 이달 초 역대 사상치를 경신하며 활황을 이어가고 있다.
김 센터장은 “‘아베노믹스’의 근간을 만든 이토 쿠니오 히토츠바시대학 명예교수는 자본효율성이 낮은 게 일본 증시가 저평가된 큰 원인이라고 생각했다”면서 “기업들이 과거에 벌어들인 자금을 쌓아두기만 할뿐 더 이상 자본을 증식시키지 않고 있다는 게 그가 가졌던 문제의식”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토 교수는 기업들이 갖고 있는 부를 주주들에게 환원하면 그 돈이 새로운 투자나 소비로 이어질 거라고 생각했다”며 “일본도 우리나라처럼 대기업의 지배주주나 경영진에 의사를 반하는 주장을 내세우기 어려운 사회 구조였는데, 외국인 자본을 일종의 메기처럼 활용했다”고 전했다. 그 결과 일본의 행동주의 펀드는 2014년 7개에서 2019년 35개로 급증했다.
다만 김 센터장은 한국과 일본, 중국, 독일처럼 제조업의 비중이 높은 국가들은 미국의 주주 행동주의를 그대로 도입하기에는 무리라고 봤다. 그는 “스타벅스나 맥도날드는 프랜차이즈 매뉴얼이라는 무형자산을 통해 현금흐름을 꾸준히 창출하기 때문에 대규모 설비 투자가 필요하지 않다”며 “장치산업에 해당하는 기업은 배당이나 자사주 매입보다 대규모 투자를 늘리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주주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김 센터장은 이 때문에 기업별 특성을 고려해 적절한 주주 환원 규모를 정해야한다고 제언했다. 이를 위해서는 주주와의 소통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기업의 수익성과 성장 가능성에 대한 신뢰를 제고하기 위한 정보를 자세히 제공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주식 투자를 하는 국민들이 1400만 명가량으로 급증했고 가계 금융자산의 효율적 운영이 국부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하다”며 차제에 상법 개정까지 정책적 논의를 확장해야 한다고 밝혔다.
최근 정부는 밸류업 지원정책의 일환으로 기업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에 '회사'뿐만 아니라 '주주'를 추가하는 내용으로 상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으나, 재계는 포이즌필이나 차등의결권 등 경영권 방어 수단이 없는 상황에서 법 개정이 경영 판단 위축을 불러올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