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0년대 프랑스 파리 거리에 완벽히 동일한 글씨체로 쓴 성경책 수십여 부가 나돌았다. 필경사가 쓴 필사본이라기에는 완벽히 똑 닮은 글씨체의 성경책들로 인해 파리의 경찰 당국은 뒤집어졌다. 사악한 마법을 부린다는 혐의로 기소 위기에 처한 요하네스 푸스트는 영업비밀을 밝힐 수밖에 없었다. 독일 마인츠의 인쇄업자인 구텐베르크가 개발한 금속활자가 그 비밀이었다.
동양에서 먼저 종이와 먹, 목판인쇄술까지 발명했지만 서양인 구텐베르크가 출판에 있어서 혁신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활자를 원하는 만큼 빠르고 경제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한 페이지에 모음 ‘e’가 30개 이상 들어간다고 해도 더 이상 문제되지 않았다.
4세기가 더 흘러 미래 챗GPT의 등장에 버금가는 제품이 나타났다. 1884년 독일계 미국인인 오트마르 머건탈러는 한 번에 활자 한 줄을 주조하는 모노타이프 기계를 내놨다. 전기 모터로 움직이는 라이노타이프는 수백 개의 건반이 움직이면서 자간까지 조정해 금속활자를 주조, 배열하면 반대편에 투입된 종이를 통해 인쇄하는 방식이었다. 이 기계의 도입으로 신생 미국의 경우 영국에서 유명한 작품이 들어오면 이를 대량으로 인쇄해 24시간 만에 이를 판매하는 경우도 흔했다.
교유서가에서 최근 번역 출판한 신간 ‘옥스퍼드 출판의 미래’는 영국 옥스퍼드브룩스대 산하 옥스퍼드 국제 출판 센터 소장인 앵거스 필립스가 동료 출판인 및 연구자들과 함께 출판의 과거부터 현재, 미래를 망라해 다룬 야심찬 책이다. 처음으로 유럽 대륙을 넘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시작돼 전 세계적으로 5억만부 이상이 팔린 조앤 K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 전권에 이르기까지 출판 업계가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초점을 뒀다.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고 서점도 줄어 ‘책의 발견’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저자들은 설자리를 잃고 있다. 정확히 표현하면 저자 사이에 명성에 따른 격차가 커지는 셈이다. ‘미드리스트(Midlist)’로 통칭되는 인지도와 판매도 중간 수준의 작가들의 경우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명성을 확보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저자들이 책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기업가적인 마인드가 돼야 살아남는 시대가 됐다는 것이다. 동시에 책 자체는 명성을 늘리는 수단의 일환이 되고 수익은 이 명성을 통한 2차 콘텐츠 창출을 통해 얻는 공식도 일반화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최신 자료는 2017년까지로 한정돼 있지만 중국의 경우 매일 책을 읽는 독자가 3명 중 1명 꼴인 31%로 집계되는 데 우리나라는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비독자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로 조사됐다. 하지만 오프라인 경험에 해당하는 서울국제도서전에는 15만명이 다녀갔다.
새로운 점은 이미 1830년대부터 책의 사양길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제기돼 왔고 책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만 바뀌어왔다는 것. 한때는 신문이었고 이후에는 라디오, TV에서 이제 인터넷으로 바뀐 것뿐이다.
그 자신이 기술혁신의 결과물로 등장한 책이 이제 챗GPT가 도화선이 된 생성형 인공지능(AI) 시대에는 어떤 위협을 맞게 될까. 저자들이 답을 내놓지는 않는다. 다만 여러 시나리오를 제시할 뿐이다. 그 중 하나는 AI를 통해 독자별로 맞춤형 책이 등장할 수 있는 미래다. 책이 쉽게 쓰이면 독자가 매기는 적정 책의 가격도 낮아질 수 있다.
이미 기존 출판사들도 하위 브랜드를 의미하는 ‘임프린트’를 다양화해 큐레이션의 힘으로 세분화한 독자들을 찾아나서고 있다. 미국의 대표 출판사인 펭귄랜덤하우스의 경우 임프린트만 무려 270개에 달한다.
출판산업의 미래가 어두운 가운데 그래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부분은 과거 출판사들의 시작도 저작권을 무시한 대량 판매에서 시작됐다는 것이다. 혼돈 가득한 AI 시대 지식산업에서도 자정작용에 해당하는 ‘파인 튜닝(미세조정)’의 힘이 중요해질 듯하다. 4만 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