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냥은 가늘게 쪼갠 나무개비에 화약을 발라 불을 붙이도록 만든 도구이다. 성냥을 넣어둔 상자를 성냥갑, 이곳에 넣어둔 성냥을 성냥개비라고 부른다. 현대사회에서 보기 드문 성냥이 없을 때에는 불씨는 정말 귀했다. 불씨를 한번 얻으면 그 가정에서는 화로 등에 불씨를 보관해 꺼뜨리지 않고 대대로 물려 썼으니 말이다. 어렸을 적 연탄불을 꺼뜨려 굳이 번개탄을 써가면서 불씨를 살려야 했으니 성냥이 없던 시절은 더했으리라. 요즘은 라이터로 대체하면서 생일케이크와 같은 기념식 점화 때만 성냥이 사용되고 있다.
성냥은 영국에서 최초로 발명됐으며, 한국 최초의 성냥공장은 인천에 있었다. 1900년 러시아 대장성이 발행한 ‘조선에 관한 기록’이란 보고서에 나와 있다. 보고서에는 “1886년 제물포에 외국인들의 지휘 하에 성냥 공장이 세워졌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생산을 중단하게 됐다”라고 기록한다. 생산 중단 원인은 일본제 성냥이 많아지면서 경쟁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 기록에는 성냥공장의 위치나 상호가 없고 그냥 한국 최초의 성냥공장이 인천에 있었다고 돼 있다. 현재 기록에 남아 있는 성냥공장은 인천 금곡리에 설립된 ‘조선인촌주식회사’이다. 지금의 인천시 동구 금곡동이 이 지명을 쓰고 있다. 이 성냥공장이 인천에 설립된 데에는 경인 지역이라는 큰 시장을 배후에 두고 특히 목재 원료를 배편으로 쉽게 들여오는 이점 때문이라고 한다.
성냥공장의 최적지로 인천이 된 데에는 공장부지로서 전력수급이 용이한 점도 한 몫했다. 당시 인천 금곡동 고지대에는 인천 최초의 변전소 시설이 있어 공장 가동에 필요한 전력 공급이 한결 수월했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서울과 대구 등지에 세워졌던 성냥공장이 얼마 못 가 문을 닫은 것을 고려하면 인천만 한 성냥공장 부지는 없었던 셈이다.
조선인촌주식회사는 신의주에 부속 제재소까지 둘 정도로 규모가 있었다. 생산량만 해도 연간 7만 상자로, 직원만 남자 200명, 여자 300명 등 총 500명에 달했다. 당시 기계화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성냥개비에 인을 묻히거나 성냥갑을 넣는 공정이 모두 수작업이었기에 많은 인력이 필요했다. 성냥갑 제조를 위해 하청을 주는 곳이 500여 호에 이를 정도다. 이곳 금곡동 일대 공터나 도로변에는 햇볕에 말리고자 널어 놓은 성냥개비와 성냥갑으로 뒤덮이면서 동네 전체가 성냥공장을 연상케 했다고 알려졌다.
성냥공장이 인천에서 있어 마냥 좋았던 것만은 아니었다. 기록에는 이곳 공장에서 일하는 여공들 대부분이 10대 소녀로, 하루 13시간씩 일하며 1만 개의 성냥개비를 성냥갑에 담았다고 한다. 이러한 열악한 노동환경과 일본인 감독관의 괴롭힘은 1921년 3월 조선인촌주식회사 직공 150명이 지배인 배척을 선언하고 돌입한 동맹파업의 원인이 된다. 이 파업은 인천 최초 여성노동자들의 노동운동으로 기록됐다. 이후 인천항 정미공장 여공 파업과 함께 1920년대 노동운동의 도화선 역할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