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로 접어들었다. 쉰 넷 최경주의 인생도 가을이다. 그러나 최경주는 쉬 잊힐 마음이 없다. 한여름 태양이 쉽게 사그라지지 않듯 그의 심장은 여전히 뜨겁다. 올해만 해도 자신의 생일(5월 19일)에 한국프로골프(KPGA) 투어 최고령 우승 기록을 세웠다. 7월에는 한국인 최초로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챔피언스 투어 메이저 대회 정상에 올랐는데, 특히 ‘골프의 고향’ 스코틀랜드에서 열린 ‘더 시니어 오픈’이라 의미가 더욱 컸다.
한국 남자골프에서 최경주의 위치는 변함없이 독보적이다. 1999년 한국인 최초로 PGA 투어 퀄리파잉(Q) 스쿨을 거쳐 정식 멤버가 된 이후 각종 최초 기록을 쏟아냈다. 약 20년의 현역 생활을 마무리한 뒤 50세 이상 선수가 뛰는 챔피언스 투어를 주 무대로 활동하고 있지만 현역의 존재감은 잃지 않고 있다.
물론 변한 것도 있다. 대표적인 게 눈빛이다. 레이저를 쏠 듯 강렬하던 눈에는 어느새 여유가 비집고 들어가 앉았다. 최경주의 표현대로 하면 골프는 ‘잘 익은 김치처럼’ 풍미가 다양해졌고 내면은 더욱 깊어졌다. “확실히 예전보다 샷의 구질이 다양해졌다”는 게 그의 말이다.
골프채를 처음 손에 쥘 때 열여섯 까까머리 고등학생이던 최경주도 이제는 그 당시 아버지 나이가 됐다. 그는 세 자녀의 아버지이자 최경주재단 꿈나무들의 듬직한 아버지가 되고자 한다. 최경주재단은 미국주니어골프협회(AJGA) 대회를 3개나 개최하고 있다. 최경주는 “후진 양성은 가장 보람되고 은퇴 후에 더욱 매진해야 할 일”이라고 말한다.
최경주가 거쳐 온 골프인생과 앞으로의 삶, 후진 양성, 그리고 아버지나 남편으로서의 모습 등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현재 챔피언스 투어를 뛰고 있지만 PGA 투어 500회 출전까지 2개 대회밖에 남지 않았다. 목표로 하는 대회가 있나.
“500회 출전은 내 골프인생의 중요한 이정표가 될 건데, 내년 7월 디 오픈에서 하고 싶다. 그전에 PGA 투어 대회에 한 차례 출전하면 디 오픈에서 딱 점을 찍는 거다(최경주는 더 시니어 오픈 우승으로 내년 디 오픈 티켓을 획득했다). 500회라면 대략 20년 동안 투어 카드를 잃지 않고 꾸준히 채워야 하는 숫자다. 진짜 보통 일 아니다.”
과거에 ‘디 오픈 코스는 날씨가 변덕스럽고, 깊고 좁은 항아리 벙커 때문에 나랑 안 맞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디 오픈 코스 중에서도 가장 어렵다는 커누스티에서 시니어 메이저 정상에 올랐다. 예전에 비해 골프 기량이 성숙해졌다고 봐도 되나.
“그건 맞는 것 같다. 내가 과거에 페이드 샷을 잘 치긴 했는데, 커브가 좀 많았다. 그래도 남들보다 페어웨이 잘 지키고 아이언 샷도 잘 치면서 성적이 나니까 그걸 바꾸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2018년 갑상선 수술 후 몸이 달라졌다. 스윙 스피드가 안 나왔다. 그래서 새로운 근육을 키우고 새로운 것들을 몸에 장착했는데 공의 커브가 많이 줄더라. 그러니까 타이트한 페어웨이에 가도 볼이 많이 안 도망가면서 골프가 치기 쉬워졌다. 아이언 샷은 내 인생에서 지금이 최고로 잘 맞는 것 같다. 올해처럼 볼이 똑바로 가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예전에는 디 오픈에 가서 벙커를 보면 그걸 피하기 위해 멀리 돌려 친다든지 해서 조금 버거웠는데 이제는 할 만하더라. 경험이 쌓인 것도 무시 못 한다.”
퍼팅도 잘 되고 있는 것 같던데.
“맞다. 올해 퍼팅이 좋다. 작년 후반기부터 톱질을 하는 듯한 ‘소(saw) 그립’(오른손 엄지를 그립에 대고 나머지 손가락은 펴서 잡는 자세)으로 바꿨는데 감이 좋다. 공의 직진성이 좋고, 힘 있게 굴러간다. 김치도 숙성이 되면 맛있듯이 아이언 샷이나 퍼팅이 이렇게 성장하면서 좋은 결과가 나온 게 아닌가 생각한다.”
“내년 디 오픈서 500회 출전 금자탑…나이 드니 링크스의 다양성 좋아져”
타이거 우즈는 세인트앤드루스 올드 코스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한다. 보비 존스도 처음엔 링크스 코스를 싫어했지만 나중에는 사랑했다. 젊은 시절 처음 링크스 코스를 접했을 때와 지금의 느낌에 차이가 있나.
“예전에는 사실 아무 것도 몰랐다. 항아리 벙커에서 어떻게 나와야 하는지도 몰랐고, 바람 읽는 것도 못했다. 근데 세월이 지나고 바람 많은 (집이 있는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에서도 연습을 하다 보니 바람에 공을 어떻게 실어 보내야 하는지 알겠더라. 경험도 쌓였지 않나. 링크스 코스에서 바운스 되면서 공이 멈추는 것과 소프트한 그린에서 치는 건 많이 다르다. 항상 일정하게 구르는 맛은 확실히 링크스 코스가 좋다. 그러니까 믿음을 갖고 칠 수 있다. 또한 링크스에서는 언덕, 심지어 벙커 턱을 활용하거나 페어웨이서부터 굴러가는 것도 계산을 해야 하는 등 창조적인 샷을 많이 해야 한다. 그런 다양성이 마음에 든다.”
시니어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한 뒤 동료들의 반응은 어떻게 달라졌나.
“모두 ‘오픈 챔피언’이라고 불러준다. 선수들도 그곳이 어렵다는 걸 알지 않나. 그런 곳에서 우승했으니 더욱 높이 평가해 주는 것 같다. 평소 내가 ‘큰 어른’으로 존경하는 잭 니클라우스한테서도 ‘엑설런트’ 했다는 축하 메시지를 받았다.”
한국 남자골프의 개척자로서 많은 업적을 이뤘다. 그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건 뭔가.
“무슨 일이든 시작이 있어야 결과가 있다. 내가 처음 PGA 투어에 도전한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봤다. 하지만 내가 강행을 한 거다. 그게 내 골프인생에서 가장 잘 했던 시점이다. 2002년 컴팩 클래식에서 첫 우승을 하고 모든 국민들이 열광했을 때도 잊을 수 없다. 첫 우승이 있었기에 이후 제2, 제3, 제4의 목표도 추진해 올 수 있었던 거다.”
PGA 투어 도전은 인생 최고의 승부수였을 것 같기도 한데.
“맞다. 프로 생활을 하면서 많은 우승을 했지만 난 미국행을 결정한 게 최고의 승부이자 성공이라고 본다. 당시 미국에서 성공하기 위한 10가지 항목을 메모해서 집에 갔더니 아내는 나를 믿어주고 무조건 가라고 했다. 하지만 업계 선배들은 시기상조라고 했다. 내가 양아버지처럼 모시는 피홍배 삼정그룹 회장님이나 김귀열 슈페리어 회장님은 ‘하면 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단호하게 ‘나는 미국 간다’ 이렇게 했다. 이게 내 인생 최고의 승부수였다.”
선수 생활이 평탄할 수만은 없다. 아쉬웠던 시기는 언제인가.
“2015~2016년부터 몸이 이상하게 정상 컨디션이 잘 안 돌아왔다. 그런 증상이 보통 갑상선 오는 시점에 그렇다고 하더라. 그때 조금 일찍 알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2018년 수술 후 잘 극복했다. 3년 전부터는 술도 싹 끊었다. 최근에는 탄산음료와 커피도 마시지 않는다. 그런 걸 보면 유혹과 싸워 항상 잘 이기는 것 같다. 그런 힘이나 의지는 어디서 나오나.
“나도 그동안 어떤 유혹들을 이겨내지 못했으니까 갑상선 문제도 발생한 게 아니겠나.(웃음) 돌이켜보면 남자들끼리 술 한 잔 하자는 게 어디 한 잔만 되나. 그동안 까불다가 노안도 오고, 갑상선도 온 거다. 하지만 신앙생활에 충실하면서 헤쳐 나가다 보니 목표가 뚜렷해졌고 다시 일어설 수도 있었다고 본다.”
노력과 절제 삶 전혀 고되지 않아…골프인생에서 요즘이 제일 재밌다
골프의 기술적인 부분뿐 아니라 삶의 태도 등에 대해서도 많은 성찰을 하는 것 같은데.
“성경에 정말 많은 이야기가 있는데 그런 것들을 공부하면서 배운다. 그 중 핵심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라는 말이 있다. 돌이켜 보니 내가 그동안 육신의 생각을 하면서 살았더라.”
노력과 절제가 강조되는 삶이다. 고되지 않나.
“아니다. 고될 것 같지만 생각보다 재밌다. 막내 강준이와 공을 치고, 가끔 큰아들 호준이와 딸 신영이가 댈러스에 오면 편을 나눠 경기도 하면서 쉰다. 댈러스에 4~5명의 골프를 배우는 꿈나무들이 있는데 이 친구들 가르치는 보람도 있다. 골프 인생에서 요즘이 제일 재밌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나 주변에서 골프를 반대했지만 그걸 뿌리치고 결국 성공했다. 뚝심이 어렸을 때부터 강했나.
“뚝심보다는 비즈니스로 말하면 딜을 잘 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무조건 골프를 하지 말라는 게 아니었다. 골프를 하려면 가사 일을 도와라, 그런 후에 하는 거에 대해서는 뭐라고 안 하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낮엔 집안일을 돕고, 밤에는 운동을 하기로 아버지와 합의를 봤다. 저녁 먹고 바로 연습장 가서 밤 12시까지 연습했는데 낮에 틈틈이 하는 것보다 밤에 집중해서 3~4시간 하는 게 훨씬 더 효과가 컸다.”
역도를 할 때와 뭐가 달랐나.
“역도를 할 때는 사실 ‘이 쇳덩어리하고 왜 이렇게 해야 되나’ 싶었다. 근데 공을 때릴 때는 희열이 있었다. 그리고 공을 치면 왼쪽으로 갈 때보다 우측으로 갈 때가 예뻐 보였다. 그게 드로, 페이드라는 건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어쨌든 내 몸 구조는 그때부터 우측으로 가는 구조였다.”
최경주는 PGA 투어 8승 중 7승을 페이드 구질로 일궜다. 그만큼 페이드를 사랑한다. 드로로 거둔 유일한 1승은 2011년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이다. 최경주는 “이전 우승할 때는 무조건 다 페이드로 공략했는데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이 열리는 소그래스 TPC에서는 대략 20%의 샷은 드로 구질로 날려야 했다”며 “마침 그때 함께하던 호주 코치(스티브 벤)가 드로 샷을 잘 쳤다. 그 친구한테 배워 필요할 때 드로 샷을 날린 덕분에 우승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래도 역도 덕분에 기본을 익힌 거 아닌가.
“하체 훈련을 하루 종일하고 나면 내리막을 걷지도 못할 정도였다. 그걸 한 2년 했더니 하체가 얼마나 좋았겠나. 시골에 60kg이나 40kg짜리 쌀가마니나 감자, 고구마 같은 거 담아놓으면 쉽게 들어 옮겼다. 경운기 바퀴 교체할 때도 한쪽 핸들을 어깨에 착 걸치고 바퀴가 뜨게 했다. 그 자세로 바퀴를 교체하는 10분 정도 거뜬히 버티고 있었다. 스포츠의 기본은 모두 하체에서 나오는데 역도를 통해 그 기본을 갖췄다.”
젊은 시절 보면 눈빛이 장난이 아니었다. 레이저가 나온다고 했다. 원래 눈빛이 그랬나, 아니면 PGA 투어에서 살아남기 위해 강하게 보이려 한 건가.
“승부욕도 강했고, PGA 투어에서 살아남으려면 엄청난 어떤 무언가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근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연습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뒤떨어질 것 같고, 퇴출될 것 같았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연습만 했던 건데 이게 독기가 돼 눈으로 온 거다. 가끔 예전 모습을 유튜브를 통해 볼 때가 있는데 지금 내가 봐도 와~, 진짜 살벌했더라.(웃음)”
“레이저 눈빛은 살아남기 위한 독기…지금 내가 봐도 진짜 살벌했더라”
선수생활 중에 생긴 징크스는 없나.
“그런 건 없다. 대신 연습 루틴을 깨면 뭔가 이상하다. 기본을 지키는 훈련법이라고 보면 된다. 퍼팅하고, 샷 하고, 치핑하고, 벙커 샷하고, 화장실 가고, 다시 퍼팅하는 등 순서가 다 있는데 이걸 어기면 그날은 뭔가 안 좋다. 그래서 웜업을 하는 순서까지 항상 일정하게 유지하려고 한다.”
가족 얘기도 궁금하다. 프로 골퍼를 준비 중일 때 법대생 아내를 만났다. 아내의 마음을 얻은 비결이 뭐였나.
“특별한 거 없었다. 그나마 특별하다면 맛있는 걸 잘 먹었다. 대학생들이 먹기 쉽지 않은 등심도 먹고, 동동주 대신 맥주도 마시고 그랬다. 교회 안 나오면 데이트도 없다고 해서 교회도 같이 가는 등 순탄하게 연애생활 했다.”
등심을 먹었다고 했는데 그 당시 레슨으로 돈을 좀 많이 벌었던 건가.
“난 지금까지 골프를 하면서 한 번도 빈곤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빈곤하다는 건 돈도 있지만 클럽이나 볼 문제도 있다. 예를 들어 볼이 없으면 일단 일부러 OB를 한 방 냈다. 그런 뒤 그쪽에 가면 공이 정말 많았다. 가방에 40~50개 주워 와서 숙소에서 깨끗하게 닦은 뒤 양파 주머니 같은 망에 넣어서 팔았다. 아는 사장님들한테 ‘내가 돈이 좀 필요하니 이거 좀 사 달라’고 부탁한 거다. 그립도 갈아주곤 했다. 그런 식으로 용돈을 번 덕분에 학창시절부터 시골집에 손 벌릴 일이 거의 없었고, 그 당시 아내와 데이트 할 때는 경양식집 가서 함박스테이크도 먹는 등 풍족하게 지냈다.”
프로 골퍼의 가장 큰 단점은 아무래도 아이들과 함께할 시간이 적다는 거다. 그런 부분은 어떻게 메웠나.
“함께 투어를 다니기도 하고, 집에 와서는 아이들 위주로 생활했다. 내 연습도 물론 해야 하지만 아이들이 야구한다고 하면 야구장 가서 도와주기도 하고 부모로서 할 수 있는 건 하려고 노력했다.”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
“큰아이가 고등학교 때 골프 선수를 했는데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2014년이나 2015년쯤인데 내가 그때 한 10경기를 다 취소하고 큰아들 캐디도 해주고 운전도 하면서 같이 대회를 다닌 기억이 있다. 당시 ‘이 시간은 절대 되돌아올 수 없으니 절대 허투루 보내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아이랑 다니면서 2등과 3등 하기도 했다. 지금 막내도 한때 야구 한다고 해서 같이 야구장도 다녔다. 하지만 그게 아빠 노릇 다 한 건 아니다. 없는 날이 얼마나 많은가. 아이들이 잘 성장한 건 100퍼센트 와이프의 헌신적인 뒷바라지 덕분이다. 내가 자주 없었음에도 잘 키워준 게 항상 고맙다.”
아이들은 지금 어떻게 성장했는지 소개해 줄 수 있나.
“큰 아들 호준이는 대학 졸업 후 미국 AI 회사에 입사해서 제 갈 길 가고 있다. 둘째 신영이는 건축과에 다니는데 올해가 마지막 학기다. 이제 졸업하고 건축 관련 자격증만 따면 된다. 그리고 막내 강준이는 이제 듀크대에서 지금 열심히 선수생활 잘 하고 있다.”
본인의 어린 시절 아버님은 어떤 존재였나.
“자식들한테 많이 숨긴다고 해야 되나. 아픈 것도 숨기고, 본인도 추우면서 안 추운 척하는 존재였다. 한 번은 아버지가 겨울에 미역을 채취하는데 맨손으로 하시는 거다. 난 물이 안 차가운가 보다 했다. 나도 맨손으로 탁 넣었는데 얼음이더라, 얼음. 근데 자식들 앞에서는 그런 표현을 안 하신 거다. 그때가 아마 내가 12살, 13살 때였다. 그리고 아버지는 소위 ‘간이 컸다’. 배가 거의 가라앉을 정도로 미역을 많이 싣고 침몰 안 되게 끌고 오곤 하셨다. 진짜 잘못하면 다 물에 빠져 죽을 정도로 가득 싣고 그거를 끌고 오는, 그런 담력이 있었다.”
아버지가 해 주신 말씀 중 기억나는 게 있나.
“뭐든지 때가 있는데 때를 놓치면 아무 것도 못한다고 하셨다. 예를 들어 고기떼가 오기 전에 그물을 먼저 쳐야 고기를 잡지, 멍하니 있다가 고기떼가 오는 걸 보고 그물을 던지면 이미 때가 늦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사람은 때를 잘 맞춰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또 ‘성실하게 열심히만 하면 누군가는 너를 이끌어주는 사람이 있을 거다’는 얘기도 자주 해주셨다. 그런 말씀이 실제로 내가 고2 때부터 서울에서 혼자 생활을 할 때 많은 도움이 됐다.”
그때의 아버지 나이가 됐다. 그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 같나.
“그런 거 있다. 이렇게 마음속에. 아버지는 지금도 고향에서 유자 따고, 농사도 하시면서 잘 살고 계신다.”
“골프나 삶 모두에 믿음 있어야…후진 양성이 가장 큰 보람”
2007년 최경주재단 설립 후 후진 양성을 위해 다양한 활동들을 하고 있는데.
“내가 후배들에게 좋은 모델이 되거나 그들에게 어떤 기회를 줄 수 있기를 항상 바란다. 내가 주변의 도움을 받아 성장해서 다시 후배들을 돕는 것처럼 우리 꿈나무들이나 재단 장학생들이 자신의 꿈을 이룬 후에는 또 다른 어려운 친구들이나 후배들을 위해 똑같은 일을 할 거라고 믿는다.”
꿈나무들에게 항상 강조하는 말이나 삶의 자세가 있나.
“반짝하는 선수가 되지 말고 오래 가는 선수가 되라고 한다. 그러기 위해선 생활도 바르게 해야 한다. 근데 그게 쉽지는 않기 때문에 길잡이로서 어떤 신앙적인 믿음을 가지고 같이 가는 게 좋지 않겠냐고 조언한다. 혼자 공을 잘 치는 게 아니라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나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라고도 한다. 재단 훈련프로그램도 서로서로 도와주는 형태다. 아이들이 고된 훈련도 서로 도와가면서 잘 해나가는 걸 보면서 보람을 느낀다.”
신앙적인 믿음에 대해 강조를 많이 하는데 그건 어떤 종교가 되든 상관이 없나.
“그렇다. 난 아이들에게 이렇게 설명한다. 자기 스윙을 믿는 트러스트(trust)라는 단어가 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선수는 본인 스윙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제대로 된 샷을 날릴 수 있다. 신앙적인 믿음은 페이스(faith)다. 절대자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있다고 믿는 게 페이스다. 두 믿음은 서로 단어는 다르지만 선수에게는 꼭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스윙에 대한 믿음 없이는 절대 좋은 선수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는 절대자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흔들리거나 유혹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꿈나무들에게 이 두 가지 믿음을 가지라고 하는 거다.”
은퇴 후의 삶은 어떨 것 같나.
“개인 사업은 안 하기로 이미 선포했다. 대신 후진 양성은 계속할 거다. 그 아이들이 또 다른 후배들을 잘 보살피고 이런 활동이 계속 이어질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게 내 계획이다.”
최경주 하면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억됐으면 하나.
“글쎄, ‘그 친구는 참 열심히 살았다’ 이런 정도면 되지 않을까.”
팬들에게 한 마디 한다면.
“그동안 팬들이 ‘넌 할 수 있다’, ‘최경주라면 할 수 있다’ 이런 말들을 참 많이 해주셨다. 내가 경기가 안 풀리더라도 끝까지 할 수 있었던 원천은 바로 이런 응원 덕분이었다. 더 시니어 오픈 우승 때도 마지막 날 6번 홀까지 3오버파를 치면서 분위기가 좋지 않았지만 팬들의 응원 덕에 포기하지 않았던 거고 결국 해낼 수 있었다. 항상 믿어주시는 팬들에게 감사하다.”
◆ ‘디 오픈 목소리’가 불러준 KJ
최경주는 해외에서 ‘KJ 초이(Choi)’로 통한다. 여권을 제외한 모든 서류에 경주(Kyungju)라는 이름 대신 KJ를 쓴다. 최경주도 처음에는 자신의 이름 경주를 고집했다. 그러다 1998년 디 오픈을 계기로 KJ로 불리기 시작했다. 디 오픈에는 1번 홀에서 선수들을 소개하는 장내 아나운서가 있다. 역대 아나운서 중 지난해 세상을 떠난 아이버 롭슨이 가장 유명했다. 독특한 스코틀랜드 억양을 가지고 있던 롭슨은 1975년부터 2015년까지 41년 동안 선수를 소개해 ‘디 오픈의 목소리(Voice of The Open)’라 불렸다. 1998년 디 오픈 첫날 롭슨은 최경주를 ‘쿵 초이’라고 소개했다. 최경주는 2라운드 시작 전에 그를 찾아갔다. 롭슨은 “한국 이름이 발음하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최경주는 “그럼, 이니셜로 KJ라고 불러주면 어떻겠냐”고 했다. 롭슨도 “KJ? 그거 좋다”고 했다. 2라운드 때 롭슨이 최경주를 “KJ Choi”라고 소개했고 최경주는 그때부터 KJ Choi가 됐다.
[서울경제 골프먼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