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전 대통령이 2017년 12월 15일 중국 베이징의 음식점 융허셴장(永和鮮漿)에서 가진 조찬은 ‘식사 정치’의 대표적 실패 사례로 꼽힌다. 당시 한중정상회담을 갖기 위해 방중한 문 전 대통령은 김정숙 여사 등과 함께 이곳을 찾아 중국식 만두(샤오룽바오)·만둣국(훈툰)·꽈배기(유탸오) 등을 주문했다. 베이징 시민들과 뒤섞여 식사하는 한국 대통령의 모습은 소탈하게 볼 수도 있었지만 ‘혼밥’ 시비에 휘말리면서 중국에 의한 전대미문의 홀대 사건으로 각인됐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분짜 식사’는 달랐다. 2016년 5월 24일 베트남을 방문 중이던 오바마 전 대통령은 일행들과 함께 하노이의 한 서민 식당을 찾아 분짜와 쌀국수 등을 시켜 먹었다. 현지인들 사이에 자리 잡고 맥주를 마시는 미국 대통령의 소탈한 모습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퍼지면서 초강대국 대통령의 친근한 이미지를 깊게 심어줬다.
하노이의 오바마, 베이징의 문 전 대통령의 식사는 겉보기에는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도 하나는 대표적 성공 사례로, 하나는 최악의 실패 사례로 남은 것은 식사가 남긴 결과와 관련이 있다. 오바마의 식사는 미·베트남 관계의 발전으로 이어졌지만 문 전 대통령의 식사에는 중국의 혹독한 한국 때리기와 굴종적 한중 관계가 뒤따랐다.
윤석열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부터 식사 정치에 능한 지도자로 기대를 모았다. “대통령이 되면 혼밥은 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그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인근 식당에서 자주 측근과 함께 식사했고 언론은 그 모습을 열광적으로 보도했다. 대통령 당선인의 친서민적 밥 자리에 대한 국민 반응도 뜨거웠다. 남대문 꼬리곰탕, 통의동의 김치찌개와 육개장 등을 즐겼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윤석열 맛집’ 지도가 생겼을 정도다. 대통령 당선인의 식사 스타일에 대한 환호는 과거의 속 좁은 정치, 편 가르기 정치와 결별하고 국민만 바라보는 큰 정치를 열어줄 것이라는 기대가 반영된 결과였을 것이다.
요즘 윤 대통령의 식사 정치는 예전 같지 않다. 4월 29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의 영수회담은 편안한 밥 자리를 통해 극한 정쟁을 완화할 기회였으나 만찬은커녕 오찬도 없이 씁쓸한 뒷맛만 남겼다. 윤 대통령이 뚜렷한 이유 없이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 등 여당 지도부와의 만찬을 추석 이후로 연기한 것도 어색했다. 심지어 이달 8일에는 윤 대통령이 비한(비한동훈)계 몇몇 의원들만 불러 만찬을 한 사실이 밖으로 알려지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까지 벌어졌다.
윤 대통령과 한동훈 여당 지도부 간 24일 만찬은 겉보기에는 멀쩡했으나 결과가 좋지 않았다. 윤 대통령은 “우리 한 대표가 고기를 좋아해서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준비했다”고 말했고, 술을 안 마시는 한 대표를 배려해 술 대신 오미자차로 건배하는 세심함도 보여줬다. 그러나 한 대표는 만찬이 끝날 무렵 대통령실에 “대통령님과 현안을 논의할 자리를 잡아달라”며 독대(獨對)를 대놓고 요청했다. 만찬 며칠 전 언론을 통해 한 대표의 독대 요청 사실이 보도된 것을 두고 대통령실이 “이런 식의 언론 플레이는 본 적이 없다”고 비난했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겠다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
‘9·24 만찬’은 어쩌면 윤석열 정부 최악의 식사 정치로 기록될지도 모르겠다. 의정 갈등, 김건희 여사 논란 등에 대한 대화는 없었고 이 같은 문제들을 논의하기 위한 윤·한 독대를 두고 갈등만 키운 꼴이 됐다. 윤 대통령과 한 대표는 “지금 자중지란을 보일 때냐”는 비난 여론이 끓어오르고 있는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윤 대통령의 국정 운영 지지율은 2022년 5월 2주 차 한국갤럽 조사에서 52%였으나 최근 20%까지 추락했다. 내 편 네 편 가리지 않고 국민만 바라보는 소통의 정치를 하겠다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7년 전 문 전 대통령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윤 대통령의 ‘식사 정치’는 달라야 한다. 한 대표는 물론 각계 주요 인물들을 두루 만나 의견을 경청하면 의사들을 의료 현장으로 돌아오게 할 해법을 찾을 수 있다. 배우자 논란도 특별감찰관 임명 등 선제적 대안을 제시한다면 반전도 불가능하지 않다. 모처럼의 갈등 봉합 기회였던 윤·한 만찬의 결과는 아쉽지만 아직은 끝난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