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IT

기술력 밀리는데 국회는 규제 골몰…이대론 'AI 갈라파고스' 된다

[AI 강국의 조건]<상> AI 변방 위기 처한 韓

선진국은 민간·정부 유기적 공조

AI 활용 새 분야 지속적으로 개척

韓 투자액, 美 50분의 1도 못미쳐

발의된 11개 법안도 규제 일변도

민관 원팀 지휘체계 정립 등 시급





전 세계가 생성형 인공지능(AI)의 고도화 경쟁에 몰두하던 2022년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는 공공의 권리 보호를 위한 ‘AI 권리장전(AI Bill of Rights)’을 발표했다. AI가 인류에 해를 끼치지 않고 공정하게 사용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으로 프라이버시 보호, 알고리즘의 차별 방지 등을 담았다. 일종의 규제책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이는 AI 기술의 무분별한 사용을 방지하고 알고리즘의 투명성을 강조하면서 오히려 미국 빅테크 기업들로 하여금 ‘신뢰할 수 있는 AI 개발’을 유도했다는 평가다. 이 과정에서 백악관은 각 기업들과 충분한 기술적 담론을 형성했고 기업들은 규제를 준수하면서도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계속 발전시켰다.

한국은 정반대다. 가뜩이나 빅테크에 비해 자본력에서 뒤처지는 국내 기업들이 기술 추격에 허덕이고 있지만 국가의 AI 기본 발전 방향을 담은 ‘AI기본법’ 제정은 계속 미뤄지고 있다. 국회에서 발의되는 AI 관련 법안은 산업 진흥보다는 규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글로벌 스탠더드와 완전히 어긋난 규제가 나올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정부는 AI 산업 육성에 의욕을 보이고 있지만 민간기업과 국회를 조율하는 능력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이성엽 고려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러다 한국의 AI 시장은 주류에서 벗어나 갈라파고스처럼 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를 표했다.



AI가 올해 과학 분야 노벨상을 휩쓸면서 정보기술(IT) 업계에서는 ‘한국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났다’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과 유럽연합(EU) 등이 민간과 정부의 유기적인 공조를 통해 AI를 활용한 새로운 분야를 끊임없이 개척하고 있는 데 비해 한국은 민간기업과 정부·국회가 따로 놀면서 ‘골든타임’을 허비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은 국가 규모를 감안한다면 AI 분야에서 비교적 우수한 성적을 내고 있지만 승자만 살아남는 최첨단기술 경쟁에서 ‘패스트 팔로어’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관련기사



한국의 AI 산업은 ‘악전고투하는 기업’ ‘열의만 앞선 정부’ ‘규제 일변도의 국회’라는 세 바퀴가 서로 엇갈려 도는 게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된다. 영국의 토터스인텔리전스가 매년 발표하는 글로벌AI지수를 보면 한국이 처한 문제가 여실히 드러난다. 한국은 AI 모델을 개발하고 각 산업에 실제 적용하는 개발 분야에서 3위로 세계 최고에 근접한 성과를 냈지만, 중장기적으로 이를 뒷받침할 기초연구 분야에서는 13위로 처졌고 AI 산업에 대한 법·제도 상 규제 등을 평가한 운영 환경 분야에서는 35위까지 밀렸다. 정부 전략은 글로벌 4위로 비교적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열악한 제도적 뒷받침이 국내 AI 산업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지난해 한국의 AI 민간투자액은 13억 9000만 달러(약 1조 8000억 원)로 672억 2000만 달러(약 89조 3000억 원)를 투자한 미국의 50분에 1에도 못 미친다. 민간에만 의존해서는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격차인데 후방 지원까지 크게 못 미치는 것이다.

앞선 기술과 자금력을 갖춘 서구 선진국과 중국 등은 다른 나라의 우수 인재를 끌어모으면서 경쟁 우위를 더욱 굳게 다지고 있다. 보조를 맞추는 선진국 정부는 기술 향상에 따른 문제가 지나치게 커지지 않도록 적절히 통제하면서 각 기업들에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 새로운 AI 시장에서 최선단에 선 선진국 정부와 빅테크들이 만든 길은 그 자체로 AI 산업의 표준으로 자리 잡는 선순환이 반복된다. 장병탁 서울대 AI연구원장은 “투자와 지원이 합쳐져야 패스트 팔로어를 넘어 패스트 무버가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준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을 비롯한 후발 주자들은 빅테크의 기술력을 추격하는 한편 선진국이 미리 쳐둔 ‘규제’의 법망을 피해야 하는 과제까지 생긴다. 우리나라 정부·국회가 산업 진흥책을 만들고 선진국의 규제 흐름을 신속하게 파악해 비슷한 제도적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준다면 빠르게 이를 타개할 수 있겠지만 국내의 정책 논의는 글로벌 스탠더드와 관계없이 ‘규제 일변도’로 흐르고 있는 점이 문제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10일 기준 발의된 AI 관련 제정 법안은 총 11개로, 표면상으로는 ‘진흥법’이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규제법’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김우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인공지능 산업 진흥 및 신뢰 확보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안은 AI 사업자에 대해 제품·서비스 출시 전 정부 위원회의 심의를 받도록 했다. 같은 당 권칠승 의원은 고위험 AI를 정하도록 하고 이를 위반하면 5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하는 처벌 규정을 담았다. 황희 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법안은 AI분쟁조정위원회를 설치하도록 했다. 민간 중심으로 산업 육성책을 먼저 제시하고 과도한 부작용을 통제하는 차원에서 접근하는 선진국들과 완전히 다른 현실이다.

전문가들은 명확한 국가적 지휘 체계를 정립하고 민관이 ‘원팀’으로 글로벌 시장에 도전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게 시급하다고 조언한다. 김명주 서울여대 바른AI연구센터장은 “지휘 부서가 없다 보니 국가 차원의 ‘마스터플랜’을 세우지 못하는 것”이라며 “중장기 계획을 세우고 진흥과 규제 사이의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진동영 기자·김성태 기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