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은 ‘가혹한 삶’의 ‘아노라’를 택했고, 베니스는 ‘존엄하고 우아한 죽음’의 ‘룸 넥스트 도어’를 택했다.”
세계 최고 영화제인 베니스와 칸 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작품들이 잇달아 개봉을 앞두고 있다. ‘룸 넥스트 도어’와 ‘아노라’가 바로 그 주인공. 두 작품은 여성 중심의 서사, 뉴욕이라는 배경 등이 공통점으로 꼽히지만 전혀 다른 사회적 지위와 배경을 가진 여성의 삶과 죽음 그리고 계층 갈등 등을 통해 우리가 마주한 현실의 여러 단면을 들춰낸다.
칸영화제는 성매매 노동자 스트리퍼와 러시아 재벌2세의 연애와 결혼을 통해 계층 격차의 문제를 다룬 ‘아노라’를 택했다. 베니스영화제는 최근 유럽에서도 찬반 논란이 첨예한 죽음의 문제 ‘안락사’를 다룬 ‘룸 넥스트 도어’를 선택했다. 삶과 죽음 그리고 뉴욕이라는 배경이 두 감독에게 각각 정반대의 메타포로 관객에게 ‘충돌하는 메시지’를 던진다는 점이 주목할만하다.
1971년 생인 미국 출신 ‘아노라’의 션 베이커 감독은 경제적 하위 계급을 통해 가혹하고 치열한 삶을, ‘룸 넥스트 도어’의 1949년생 스페인 출신 노년의 거장 페도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죽음으로 인생을 관조한다. 미국과 유럽의 차이, 젊은 감독과 노년의 거장이 현재를 바라보는 시각이 바로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 냈다는 평가다.
두 감독이 배경으로 삼은 뉴욕이라는 공간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각이 주는 메시지도 눈 여겨 볼만하다. ‘아노라'의 뉴욕은 스트리퍼로 돈을 벌어 생계를 이어가는 하루 빨리 벗어나고 싶은 ‘고달프고 쓰리고 아픈 현실의 공간’이라면, ‘룸 넥스트 도어’의 뉴욕은 마사에게 여성 종군기자로 세계적인 명성을 쥐어준 언론사가 있는 ‘희망의 장소’이자 삶을 우아하게 마무리할 수 있는 안식처와 같은 곳이다.
각각의 영화를 보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룸 넥스트 도어’는 알모도바르의 최초 영어 장편으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베니스영화제 공개 당시 18분이라는 영화제 최장 기립박수를 받았다. 종군 여기자인 마사(틸다 스윈튼)가 암 투병 중에 안락사를 결심한다. 그러나 곁에 누군가가 있어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친구들에게 단지 옆 방에 있어 달라는 부탁을 하지만 모두에게 거절 당한다. 마침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친구가 나타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는 작가이자 친구인 잉그리드(줄리안 무어)다.
20대부터 종군기자로 활동하며 삶과 죽음을 가장 가까이서 응시했던 마사가 안락사를 선택한 것은 어쩌면 필연이다. 표면적으로는 고통을 스스로 중단하고 존엄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지만 의지와 상관 없이 전쟁에서 죽음을 맞이한 이들 그리고 전쟁 후유증으로 살아도 살아있는 게 아닌 죽은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평생 보아온 그이기 때문이다. 23일 개봉.
‘아노라’는 미국 현지 언론에서는 1990년 세계적으로 흥행했던 줄리아 로버츠와 리차드 기어 주연의 ‘귀여운 여인’과 비교된다. 다만 2024년의 ‘귀여운 여인’ ‘아노라’에는 달콤한 연애와 데이트의 정석도 신데렐라도 없다. 뉴욕의 스트리퍼 아노라(극중 애칭 애니)는 러시아 재벌2세 이반의 요청으로 일주일 간의 계약 연애를 하고 이반은 충동적으로 청혼을 한다.
계약 연애부터 결혼까지 ‘초스피드’로 진행되고 이 과정에서 ‘귀여운 여인’에서 처럼 우아한 데이트는 없다. 혼인무효를 만들기 위해 ‘하수인 3인방’이 투입된다. ‘3인방’의 투입 이후 이반은 종적을 감추고 그를 찾아내서 혼인을 무효로 만들어야 하는 ‘하수인 3인방’과 결혼을 지켜내려 발버둥치는 아노라의 서사부터는 블랙 코미디가 된다. 웃다가 이들이 관계에 주목하게 되는 순간 씁쓸함이 몰려 오기 때문이다.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으며 “이 상은 과거, 현재, 미래의 성노동자를 위한 것”이라고 밝힌 베이커 감독은 이 작품으로 ‘잔혹한 블랙 로맨틱 코미디’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었다. 11월 6일 개봉.
두 작품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순식간에 매진을 기록할 정도로 뜨거운 주목을 받았다. 두 작품은 내년 열릴 아카데미시상식에서도 경쟁을 펼친다. 작품상을 놓고 과연 아카데미는 ‘가혹한 삶’과 ‘존엄한 죽음’ 중 어떤 선택을 할지도 관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