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밸류업이라는 화두를 처음으로 꺼낸 때는 올 1월 중순 민생 토론회였다. 알다시피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현실과 이상의 핑퐁 게임에서 현실은 대개 굴절되기 마련이다. 외풍에 취약한 한국 경제, 또 이를 반영하는 한국 증시가 제 펀더멘털에 못 미치는 것은 태생적 굴레, 어찌 보면 자연법칙에 더 가까울 수 있다.
그래서인지 발표 당시를 떠올리면 밸류업에 대한 평가도 문제의 본질보다는 정치권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쪽에 치우쳤다. 예컨대 ‘총선에서 개미 표심을 잡을 신의 한 수’ ‘친일(親日) 정부의 일본 정책 베끼기’ 등 냉소로 뒤범벅된, 본말이 전도된 얘기가 쏟아졌다. 이제 마타도어와 공수표가 난무하는 선거도 다 끝났고 올해도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다. 차분히 우리 증시의 제반 여건을 살펴보기 좋은 시점이다.
일단 ‘홈 바이어스(Home bias·자국 편향 투자)’가 많아 수급 측면에서 절대 아군으로 분류되던 개미가 국장을 하나둘 등지고 있다. 올해 코스피에서 개인은 8조 189억 원(9월 기준)어치의 주식을 팔았다. 2020년대 초반만 해도 순매수 규모가 50조 원 안팎이나 됐지만 미국이라는 엘도라도를 발견한 마당에 더는 국장에 미련이 없는 분위기다.
개미의 미국 애호는 막연한 감에 근거한 게 아니다. 국내 기업의 턱없이 부족한 주주 환원 등은 차치하고라도 한국의 잠재성장률이 완숙 경제인 미국에조차 2년(2023년·2024년) 연속 뒤지고, 반도체·배터리를 이을 차세대 산업은 잘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는 인공지능(AI)에서도 기술 리더십은 빅테크가 즐비한 미국이 쥐고 있으니 국장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기관의 현실 인식은 더 엄혹하다. 올 연말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투자 비중 목표치는 15.4%지만 실제 투자는 13.8%(2분기 기준)에 그친다. 그것도 2029년에는 13%까지 더 낮아진다.
갑갑한 대목은 시늉뿐인 연금 개혁 탓에 앞으로 5년 뒤인 2030년(5차 재정 계산 공청회 자료)부터 연금을 지급하려면 보험료로 충당이 안 돼 보유 주식을 내다 팔아야 한다는 점이다. 설상가상 한국 증시에 돈을 댈 경제활동인구(취업자 수)도 2027년을 정점으로 줄어든다. 한마디로 연금 지급으로 나갈 돈은 많아 주식은 처분해야 하고 주식을 살 시드머니는 쪼그라들 운명이다.
증시라는 것이 원래 제로섬게임이니 개인과 기관이 떠나도 외국인이 사주면 된다. 하지만 외국인이 K증시의 이런 아킬레스건을 모를 리 없다. 자국에서 외면받는 증시는 외국인의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다. 돈놀이에 더 취약한 내실 없는 증시가 된다는 뜻이다. 요모조모 따질수록 한국 증시는 장기 투자로 승부를 보기 어려운 시장이다.
이 때문에 한국 증시를 보면 지방 부동산보다 못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제 지방에 사는 사람들도 집은 노른자위 서울에 마련한다. 자신은 월세 내고, 전세에서 살아도 그런 선택을 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방에 거처를 마련해본들 집값이 내려갈 일만 남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나마 부동산은 지방을 살리기 위해 서울을 이중삼중의 규제로 옥죌 수 있지만 K증시에 투자자를 불러 모으려고 해외 증시에 페널티를 주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다. 지방 부동산보다 더 큰 위기의식을 가져야 하는 게 한국 증시의 현주소다.
결국 스스로 변해야 희망이 있다. 밸류업은 우리 자본시장 관점에서는 파국 직전의 마지막 비명에 가깝다. 정권 때마다 의례적으로 나오는 증시 부양책의 또 다른 버전으로 보기에는 우리 증시의 병세가 깊다. 투자자의 선택을 받는 시장이 되기 위해 밸류업에 의지와 능력을 갖춘 기업을 제대로 발굴해 알려야 한다. 밸류업 지수도 옥석을 더 가릴 필요가 있다. 기업이 지수에 들어가고 싶어야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특히 소액주주의 이익을 가벼이 여기는 대주주, 또 그런 대주주를 양산하는 각종 세제 등 규제와 불합리한 거래 관행도 이참에 정비해야 한다. 한국 기업만의 독특한 지배구조를 마냥 두둔하기에는 투자자의 안목이 너무 높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