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년 만에 한국 최대 종교로 자리잡은 기독교의 성장에는 이역만리 미지의 땅을 망설임 없이 찾은 초기 선교사들의 열정과 희생이 있었다. 1885년 부활절 제물포에 상륙한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1859~1916)와 헨리 게르하르트 아펜젤러(1858∼1902)는 각각 미 북장로회와 북감리회 출신으로, 오늘날 한국 교회의 효시로 꼽힌다.
한국 교계는 올해부터 내년까지를 한국 교회 140주년으로 정하고 다양한 행사를 준비 중이다. 그 일환으로 한국교회미래재단(이사장 소강석 새에덴교회 담임목사)은 초기 한국 선교사들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행사를 마련했다.
지난달 28일(현지 시간) 찾은 미국 뉴저지주 그로브개혁교회. 이 곳은 언더우드가 어린 시절 다녔던 교회로, 교회 묘지에는 언더우드의 가족묘가 있다. 언더우드는 한국에 묻히길 원해 1999년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으로 이장됐다. 스티븐 게르모소 담임목사는 “언더우드의 삶은 현재 이 지역의 사람들에게도 모범이 되고 있다”며 “언더우드의 정신을 학교와 고아원 등으로 펼쳐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언더우드가 수학한 뉴저지 뉴브런즈윅신학교에는 언더우드의 흉상과 함께 편지·서적 등을 모은 언더우드 컬렉션이 보관돼 있다. 매크리어리 총장은 “언더우드가 조선에서 보인 모습들이 워낙 뛰어났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언더우드는 한국어 문법서와 한영사전을 저술했고,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와 경신학교를 설립했다.
언더우드와 같은 시기 한국 땅을 밟은 아펜젤러의 고향은 펜실베이니아 수더튼이다. 그가 다니던 임마누엘 레이디스 교회 근처에는 그의 생가와 함께 한국 교회의 기부로 만들어진 가묘(假墓)가 있다. 아펜젤러는 1902년 서천에서 물에 빠진 정신여학교 여학생을 구하다 순직했다. 존 니더하우스 담임목사는 “한국인들이 꾸준히 찾아온다”며 “고향 사람들도 그를 잘 몰랐지만 이제는 많이 알게 됐다”고 귀띔했다.
아펜젤러가 신학을 공부했던 뉴저지 드루 신학교에서 만난 아펜젤러의 증손녀 쉴라 플랫(78) 여사는 “지난 7월 사촌의 집에서 아펜젤러의 편지 더미와 글 상당량을 발견했다”며 “한국 생활이 어땠는지 담겨 있는데 연구를 위한 기증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초기 한국 기독교 역사의 기록으로서의 중요성과 함께 근대 개화기 사료로서 중요한 가치도 지니게 될 것으로 보인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뿐 아니라 모펫·아담스·베어드·스크랜튼·벨·레이놀즈·전킨 등 초기 선교사들의 유산과 사료들은 미국 교회와 대학, 연구소 등이 소중히 보관하며 관련 연구를 진행해 기독교 선교 정신을 이어나가고 있다. 29일 찾은 뉴저지 프린스턴신학교에서는 모펫 등 북장로회 선교사들의 사료와 지도, 독립신문 등이, 30일 찾은 펜실베이니아 장로교역사협회에는 장로교의 보고서와 충청·전라 지역의 사진들이 빼곡히 쌓여 있었다. 31일 찾은 버지니아 유니온장로교신학교에도 전킨·레이놀즈 등 남장로회 선교의 역사가 보관돼 있었다.
선교사들의 노력을 통해 세워진 한국 교회는 이제 반대로 교인 감소라는 위기를 겪고 있는 미국 교회에 울림을 전하고 있다. 게르모소 목사는 “300명에 달하던 교인이 줄어 40~50명이 됐다”면서 “언더우드의 정신을 한국 방문단이 올 때마다 되새기고 있다”고 밝혔다. 임마누엘 레이디스 교회의 존 니더하우스 전 담임목사도 “한국인들이 올 때마다 큰 헌금을 하고 가 교회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했다.
소강석 목사는 “선교사들의 거룩한 신심이 오늘의 한국을 만드는 동력이 됐다”며 “선교사들이 한국의 근대화와 독립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끼친 만큼 이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면 한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