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세계에서 가장 멋진 동네’를 선정, 발표하는 영국의 유명 여행·문화 매거진 ‘타임아웃(Time Out)’은 지난 9월호에서 세계에서 4번째 멋진 동네로 서울 성동구 성수동을 꼽았다. 과거의 공업지대가 창의적인 문화공간으로 변모한 점이 높은 평가를 받은, 일 년 내내 발길 닿는 곳곳에서 전시가 펼쳐지는 성수동.
성수동에 위치한 어린이 현대미술 전문 미술관 헬로우뮤지움이 지난 4일부터 14일까지 청년 예술가 발굴 및 양성을 위한 프로젝트 ‘2024 아트성수 헬로, 오락실’을 개최했다. 2021년부터 시작해 올해로 4회째인 ‘아트성수’는 성동구청과 협력해 청년 예술인을 발굴하고 그들의 창작 활동을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번 ‘아트성수 헬로, 오락실’은 체계적인 신진작가 발굴·양성을 위해 수도권 9개 미술대학과 협력한 점이 특징이다. 헬로우뮤지움이 위치한 성동구 주변의 △건국대△경희대△고려대△동덕여대△서울과기대△서울시립대△세종대를 비롯해 △경기대와 △인천 가톨릭대가 참여했다.
각 미술대학이 대학원 출신 신진작가를 3명씩 총 24명 추천했고, 동덕여대 큐레이터학과의 예비 큐레이터 3명이 전시 기획에 참여했다. 청년 예술가에게 창작의 기회를 제공하고, 학교에서 현장으로의 자연스러운 진출을 유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전시 제목 ‘헬로, 오락실’은 1970~90년대 아케이드 게임과 전자오락에서 출발해 ‘오락’과 ‘실(플랫폼)’을 결합한 ‘예술놀이장’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안했다. 작가들과 큐레이터가 예술을 놀이처럼 접근하며, 다양한 작품과 개념을 결합하고 실험하는 과정을 통해 현대 예술의 가능성을 탐구했다는 게 기획팀의 설명이다.
▲작은 이세계(異世界)의 연구자들
전시는 크게 3개 섹션으로 나뉘었다.
첫 번째 ‘작은 이세계의 연구자들’을 맡은 동덕여대 큐레이터학과 출신 이현진은 “무언가를 상상하며 살아가는 작은 이세계의 연구자들(신진작가들에 대한 비유적 표현)에게 이 불안정한 감각은 어려움이자 즐거움, 난해함으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이들은 이런저런 호기심을 묵인하지 않은 채, 사소한 것조차 경청하며 아트성수라는 실험의 장에서 함께한다”고 소개했다. 강지수는 기계를 외계의 존재라고 상상하며 기계화 신호를 채집해 평면 작업으로 선보였다.
김민정은 이상화된 인공성에 대한 의문을 기반으로 대상화 된 자연의 이미지를 포착했다. 김민지는 아날로그 기계장치의 움직임을 좇아 영사기의 구동 방식을 고민했다. 김일두는 식물의 순환적 생명성을 관찰하며 식물의 메커니즘과 인간의 삶을 연결시켰다. 신유진은 인간중심적 시선에 의해 파괴와 생성이 공존하는 현장을 반성적으로 바라보며, 제주 비자림로의 외래종인 일본 원산 삼나무 리서치에서 시작한 설치작품을 선보였다. 움직이는 키네틱 목재 조각을 주로 하는 안지겸은 폭력을 방임하는 무책임한 세계를 ‘피부’라는 제목의 섬세한 나무 작업으로 구현했다. 공간에서 중첩되는 감정과 흔적을 화폭에 담는 이예찬은 휴식과 두려움·불안이 공존하는 ‘작업실’을 출품했다. 기억과 상상을 결합해 경험을 재구성한 생명체적 형상을 만드는 조혜윤은 크게 놀랐을 때 등을 쓰다듬고 손을 따주는 제주 풍습 ‘넉들임’을 설치작품으로 만들어냈다.
▲현실의 비현실에서
두 번째 섹션 ‘현실의 비현실에서’의 큐레토리얼을 맡은 배지현은 “오락실은 일종의 도피처 같은 공간이지만, 참여 작가들에게 오락실은 현실의 어지러운 상념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곳이자 수많은 관계들로부터 자신을 격리하기 위한 사적 공간이며 자기 이해와 공감을 이끌어내 결국은 스스로를 증명하는 위안의 공간”이라고 풀어냈다. 배지인은 스쳐 지나간 찰나를 거듭 회상하고 그 안에서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오유선은 왜곡된 사회적 아이러니와 억압된 개인 서사에 대한 예민한 감각의 재구성을, 최유리는 사적인 공간이 보편적 이미지가 되어가는 현상을 회화로 보여줬다. 오지혜와 유숙형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독자적인 판타지 서사를 이끌었다. 왕제이안의 작품 속 눈부시게 빛나는 나무는 경계의 상황에 놓인 자신의 처지를 반추한 결과로 탄생했다. 엘리베이터 버튼의 지문을 채취해 표본화 한 작품을 내놓은 이현아는 관계성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한국화를 전공한 하현정이 그린 민들레·야생초·새·곤충 등의 그림에는 작고 시시해 보이는 소외된 자연의 이야기가 쉽게 휘발되지 않길 바라는 간절함이 담겨 있다.
▲가까워지고 싶은 우리에게 건네는 질문
오락실이라는 주제어에서 다양한 형태의 인터페이스를 통해 게임 세계에 접속해 소통하는 플레이어를 떠올린 최시현은 마지막 섹션 ‘가까워지고 싶은 우리에게 건네는 질문’의 큐레토리얼을 이끌었다. 그는 “작가들은 서로 다른 관점에서 개개인의 존재와 관계를 탐구하며 그에 따른 인간성 회복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익명성과 표면적인 관계를 주로 맺어왔던 우리가 작품에 나타나는 다채로운 소통과 교감 방식을 통해 상대방의 진심을 느끼고 진정성 있는 관계를 맺기 위한 질문을 던져보는 건 어떨까”라고 제안했다.
김세이의 추상회화는 캔버스에 구멍을 뚫고 물감을 밀어내는 방식으로 자신을 숨기는 불완전한 현대인의 모습을 비유했다. 김세진은 자신과 관계 맺는 불완전한 존재들의 유사성을 모아 그간 놓쳤던 고귀한 본질을 찾아냈다. 성규빈은 일상의 순간들을 공감각적 화면에 담아내 배려와 정을, 채하늘은 미세한 존재들이 하나의 큰 생태계를 이루는 모습에서 나·너·우리의 개념을 조망했다. “나랑 연애하자” 말 건네는 리위안밍은 국적과 언어의 장벽을 허물며 진정한 사랑의 정의를 내린다. 유효진은 떠나간 존재의 기억과 흔적을 드로잉으로 축적해 마음속에 새긴다. 김한준은 상호 윤리와 배려가 결여된 디지털 사회를 키네틱과 조각으로 형상화했다. 마지막으로 임인구는 관객을 이상의 이미지로 가득한 공간으로 끌어들여 내면의 물음, 자신과의 대화를 유도했다.
올해 ‘아트성수’에는 설치미술가 김기라가 예술감독으로 초청됐다. 양지연 동덕여대 큐레이터학과 교수를 비롯해 김윤 경기대 교수, 남수현 건국대 교수, 손종준 서울시립대 교수, 이예승 고려대 교수, 이한수 인천 가톨릭대 교수, 정재호 세종대 교수, 정하눅 경희대 교수, 한계륜 서울과학기술대 교수가 협력, 참여했다. 김이삭 헬로우뮤지움 관장은 “순수예술과 젊은 작가들의 실험 정신은 도시의 예술적 목마름을 달래줄 수 있기에 ‘아트성수’는 성수동과 신진 작가들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자 한다”면서 “성수동에서 처음을 시작하는 아티스트들에게 많은 기회와 도약의 경험이 열리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