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명이 목숨을 잃은 이태원 참사 이후 “각계각층의 분노를 최대로 분출시키기 위한 조직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했으면 한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받은 당시 민주노총 조직쟁의국장 석모(53)씨가 중형을 선고받았다. 해당 메일은 북한 문화교류국 소속 공작원이 보낸 것으로 확인됐다.
24일 법조계에 따르면 수년간 100여차례에 걸쳐 북한 지령문을 받아 움직인 혐의로 작년 5월 구속기소 된 석씨에게 지난 6일 수원지법 형사14부(고권홍 부장판사)는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지령문 수신·보고문 발송뿐 아니라 평택 미군기지·오산 공군기지 내 시설·활주로·미사일 포대 등을 촬영한 영상·사진이 포함된 파일 등 국가기밀을 탐지·수집한 사실 등까지 유죄로 인정됐다.
재판부는 "북한 공작원이 이태원 참사 유족들의 크나큰 고통에 함께 슬퍼하면서 애도의 심정에서 지령을 내렸을 리 만무하다"며 "지령문과 보고문의 내용들은 모두 단 하나의 목표인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전복'으로 귀결되고, 피고인은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임에도 장기간 이에 동조했다"고 질타했다.
1심 법원이 이 같은 결론을 내리기까지 법정에서는 수사 과정에서 모인 방대한 분량의 디지털 증거의 적법성 여부가 다퉈졌다. 증거에는 각종 내밀한 자료가 담겼다. 2017년부터 석씨 등이 캄보디아와 베트남 등지에서 북한 공작원과 접선하는 모습을 국가정보원 수사관들이 촬영한 채증 영상이 포함됐다. 2018년부터 공작원 등과 주고받은 지령문과 보고문, 스마트폰에서 포렌식으로 선별한 파일도 담겼다.
이처럼 많은 증거가 제출되는 이유는 간첩 사건에서는 피고인과 관련자들의 진술을 기반으로 혐의를 입증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피고인이 수사 단계부터 진술을 거부하거나 참고인도 해외에 있는 등의 이유로 수사 협조가 어려운 경우도 많다.
이번 재판부는 증거가 조작됐다거나, 자신의 휴대전화에서 나온 게 아니라거나, 수집 과정이 위법해 증거로 쓸 수 없다는 주장을 하나하나 검토한 뒤 위법 수집 증거가 아니라고 밝혔다. 검찰은 사진 파일 등이 조작되지 않았음을 입증하기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 결과를 제출했을 뿐 아니라 실제 위변조 여부를 검증한 국과수 직원들을 법정에 증인으로 불렀다.
지난해 8월 28일 공판에서는 국정원 수사관이 증인으로 나와 석씨의 SD카드에 은닉된 프로그램을 법정에서 직접 구동하기도 했다.
석씨의 다른 외장하드에서 발견된 암호 '1rntmfdltjakfdlfkehRnpdjdiqhqoek7'('1구슬이서말이라도꿰어야보배다7'를 영자로 친 것)과 수사기관의 프로그램을 이용하자 석씨가 북한으로부터 받은 2020년 5월 7일 자 지령문이 해독됐다.
이 지령문에는 민주노총 임원 선거의 동향을 파악해 보고해달라는 내용이 있었다. 석씨는 지령에 따라 계파별 선거 전략 등을 취합해 보고한 것으로 파악됐고, 법원은 이 부분 혐의가 사실이라고 보고 간첩죄를 인정했다. 석씨가 수시로 공작 진행 상황을 북한에 보고하고 "남조선 혁명운동에 대한 김정은 동지의 유일적 영도", "모든 것을 다 바쳐나갈 것" 등을 언급하며 보낸 '충성맹세'도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