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간 반복된 혹독한 여름에 골프장들은 유례없는 어려움을 겪었다. 폭염과 폭우가 번갈아 덮친 탓에 골프장 잔디는 타다가 익기를 거듭하면서 버텨내지를 못했다. 듬성듬성 맨땅을 드러낸 코스에 아마추어 골퍼들은 물론 대회장으로 쓰는 투어 선수들 사이에서도 불만과 안타까움의 목소리가 커졌다.
기후변화의 역습에 한숨짓던 골프장들은 결단에 나서기 시작했다. 확 바뀐 국내 기후를 그나마 견뎌낼 만한 새로운 잔디로 교체하는 작업이다. 페어웨이 잔디까지 싹 갈아엎는 ‘재건축’을 결정한 곳이 꽤 있고 티잉 구역의 잔디만 바꾸는 ‘리모델링’에 들어간 곳은 훨씬 많다.
2일 코스 관리 전문 업체 대정골프엔지니어링에 따르면 올해 켄터키블루그래스에서 중지로 페어웨이 잔디를 교체 완료했거나 진행 중인 곳은 몽베르 회원제 코스부터 더헤븐, JNJ, 엘리시안 제주 대중제 코스, 부영, 아난티 제주 김녕 코스, 파나시아, 서경타니, 볼카노(옛 레이크힐스 제주), 더클래식까지 10곳에 이른다. 역대 23차례 가운데 10건이 올 한 해에 집중된 것이니 ‘역대급’ 재건축 붐인 셈이다.
잔디는 선선한 기후에서 잘 자라는 한지형과 여름철에 잘 생육하는 난지형으로 구분되는데 켄터키블루그래스는 한지형, 중지는 난지형의 일종이다. 골퍼들은 흔히 양잔디, 한국 잔디로 각각 부른다. 양잔디는 기온이 섭씨 30도를 넘기면 힘들어하는데 강한 햇볕과 강우에 번갈아 노출되다 보니 뿌리가 정상적으로 물을 흡수하지 못해 다 말라 죽어버린 것이다. 잔디 농가에서 켄터키블루그래스 품귀 현상까지 빚어지면서 양잔디 골프장들은 고온이 계속된 가을까지도 잔디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밀도가 높고 질감이 부드러운 양잔디는 연중 ‘초록’을 유지하는 기간이 길어 골퍼들 사이에서 선호도가 높다. 하지만 현재는 선호도를 떠나 일단 잔디가 살아 있는 코스를 만드는 게 급선무인 상황이다. 업계에 따르면 설해원, 360도, 센테리움, 몽베르 대중제 코스 등은 내년 한국 잔디로 페어웨이 교체를 준비 중이고 레인보우힐스도 교체를 검토 중이다. 블랙스톤 이천 또한 내부 검토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비용은 얼마나 들까. 잔디 품종 교체 작업에는 18홀 페어웨이 기준으로 40억 원 안팎이 든다. 작업 기간 골프장 문을 닫아야 하기에 영업 손실도 감수해야 한다. 업계 관계자는 “양잔디는 10년 정도 지나 노후화하면 잡초 방제 비용으로만 매년 2억~3억 원의 추가 지출이 발생한다. 한국 잔디의 18홀 관리 비용이 연 16억~17억이라면 양잔디는 19억 원이 넘어간다”며 “양잔디의 하절기 퀄리티가 계속해서 떨어지는 추세이다 보니 골프장 입장에서는 대안이 없어진 것이다. 연 3억 원의 추가 지출을 10년 하면 30억 원이니까 이참에 장기적인 관점에서 품종 교체라는 투자에 나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영업 중단을 걱정하는 골프장들은 전면 교체 대신 페어웨이 중간중간에 새 품종을 식재해 5~6년에 걸쳐 퍼져나가도록 하는 작업 방법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티잉 구역 잔디를 켄터키블루그래스에서 난지형으로 교체하는 작업은 이제 흔해졌다. 동래베네스트는 티잉 구역 잔디의 3분의 2를 난지형으로 바꿨고 88은 모든 홀의 티잉 구역 1개씩을 골라 교체에 들어갈 예정이다. 심지어 경남의 한 골프장은 그린 잔디까지 벤트그래스에서 난지형으로 바꾸려 테스트 중이다.
한국 잔디 등 난지형으로의 교체가 대세가 된 분위기지만 일각에서는 의구심도 제기한다. 한 업계 전문가는 “기후변화라는 것이 계속해서 더워지는 쪽으로만 간다고 확정해서 말할 수는 없지 않나”라며 “일부 양잔디 코스의 잔디가 생각보다 빠르게 회복한 것만 봐도 최근의 품종 교체 바람이 다소 성급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금세 누렇게 변하는 한국 잔디의 단점도 가볍게 볼 일은 아니다”라고 했다. 또 다른 전문가는 “양잔디 골프장 중에서도 장기적인 안목의 투자로 배수 시설을 제대로 갖추고 여름철 잔디의 스트레스 관리에 집중한 곳은 상대적으로 큰 피해 없이 지나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