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도 예산안 법정 처리 기한을 넘긴 여야가 우원식 국회의장의 추가 협의 요청에도 양보 없는 대치를 이어가 협상조차 실종된 모습이다. 야당의 ‘감액 예산안’ 철회 없이는 협상이 불가하다는 여당 입장에 야당은 ‘정부의 증액 예산안 제출’을 전제 조건으로 내걸며 기싸움만 가열되는 양상이다. 677조 원의 내년 예산안을 둘러싼 여야 간 극단적 자존심 대결로 필수적인 민생 예산마저 기약 없이 표류할 위기에 처하자 정치권에서는 여야 대표가 초당적 협상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3일 국회 원내대책회의에서 민주당이 감액만 반영한 내년 예산안을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강행 처리한 것을 두고 “대국민 사기극”이라며 전날에 이어 강도 높은 비판을 이어갔다. 추 원내대표는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은 당초 (정부) 예산안을 ‘긴축 예산’이라고 비난하더니 4조 원을 추가 삭감해 더 긴축 처리했다”며 “뻔뻔스럽게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몰염치한 연기를 했다”고 말했다.
우 의장이 전날 야당의 감액 예산안을 본회의에 상정하지 않고 이달 10일까지 협의를 요구한 것에 대해서도 “(감액 예산안 사과와 철회) 조건이 선행되지 않으면 그 어떤 협상에도 응하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민주당은 이에 “적반하장도 분수가 있어야 한다”고 맞받아쳤다. 박찬대 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날 원내대책회의에서 “대통령실, 검찰 특수활동비가 깎였다고 민생 경제가 무너지고 치안이 불안해지는 정부라면 간판 내리고 문 닫는 게 더 낫다”면서 “정부와 국민의힘이 털끝만큼이라도 민생과 경제 회생을 바란다면 증액 예산안부터 만들어 갖고 오라”고 촉구했다.
여야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강대강 대치를 이어가면서 민생 관련 예산안도 합의 처리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당장 민주당이 감액한 예산 가운데 △전공의 지원(931억 원) △돌봄수당(384억 원) △대학생 근로장학금(83억 원) 등이 포함됐다. 폭설·태풍 등 급작스러운 재난에 대비할 정부 예비비도 2조 4000억 원이나 삭감됐다.
국민의힘은 야당의 예산안 단독 처리로 상임위원회에서 합의됐거나 정부와 협의 중이던 예산 3조 3257억 원가량의 증액이 무산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다수 의석으로 예산 감액의 키를 쥔 야당이 이대로 밀어붙일 경우 여당으로서도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다.
정치권에서는 예산안 처리의 법정 시한을 이미 넘긴 만큼 지도부 간 통 큰 협상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커지고 있다. 앞서 가능성이 제기됐던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와 이 대표 간 2차 여야 대표 회담을 서둘러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는 것도 이 같은 배경 때문이다. 박지원 민주당 의원은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예산안 처리를 위해 국회의장과 여야 대표를 설득했던 일화를 전하며 “(이번에도) 영수회담이나 대표회담을 통해서 정국을 풀고 예산을 합의해 통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이날 정부세종청사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피해 복구 예비비와 딥페이크, 마약 등 범죄 수사에 필요한 경비를 삭감하는 것은 국민과 민생을 외면하는 처사”라며 “내년도 예산안이 하루라도 빨리 처리될 수 있도록 국회의 초당적 협력을 당부한다”고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