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 벽면에 그날 아침 발행된 신문을 붙였다. 면도칼로 신문 기사를 오려냈다. 신문 여기저기에 네모난 구멍이 뚫렸다. 오려낸 기사를 마치 ‘쓰레기 버리듯’ 투명 아크릴 통에 던져 넣었다. 그러기를 매일, 전시 기간인 일주일 내내 반복했다. 현대미술가이자 행위예술가 성능경(80)의 대표작 ‘신문:1974.6.1 이후’이다. 성능경은 군 복무 기간이 36개월이던 1970년에 입대했고 1973년 초 제대했다. 군대 가 있던 1972년 10월 유신으로 비상계엄이 선포됐고, 그해 말 ‘유신 헌법’에 의해 군부독재가 이뤄진 상황이었다. 1974년 6월 국립현대미술관 그룹전에 초청받은 그는 그림이 아닌 행위로 답했다.
“전시 기간 일주일 동안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신문만 오렸어요. 엄혹했던 유신 시절이었죠. 현실 탄압, 언론 탄압에 대한 저항에서 발동한 작업이에요. 기사를 오려냄으로써 정보 당국에 의해 통제되는 언론의 기사를 예술가인 제가 다시 한번 검열한 것이죠. (1970년대) 그 당시에는 검열에 의해 신문 찍는 아연판이 짓이겨진 얼룩이 고스란히 신문에 인쇄되곤 했어요.”(2021년 1월 성능경과 국립현대미술관의 인터뷰 중에서)
군부는 신문의 내용만 검열했지만, 예술가는 역사의 기록으로서 검열했던 것이다. 같은 시대를 산 이건용(82)도 온몸으로 시대상을 꼬집었다. ‘바디스케이프’로 명명한 그의 신체 드로잉 연작은 몸을 억압한 작품들이다. 캔버스 뒷면에 서서 보이지 않는 화판 너머로 손을 뻗어 붓질을 하는가 하면, 팔을 구부리지 못하게 팔꿈치를 묶고 고정시킨 상태에서 허우적대듯 그리기도 했다. 신체적 제약과 한계를 실험하며 ‘안 보고’ ‘팔 묶어’ 작업함으로써 화가는 소소한 일상 활동까지 제한당했던 군부 독재 시대를 암시적으로 꼬집었다. 작가 최병소(81)는 5·16 군사 정변과 유신 체제에 대한 정치적 좌절감, 새마을운동으로 인한 경제적 희망을 동시에 경험한 1970년대가 괴로웠다. 그는 검정색 볼펜으로 신문을 지웠다. 신문은 반복된 볼펜질로 찢기기도 하며, 다 칠한 신문은 마치 타버린 잿덩이처럼 시커멓다. 그 시절 사람들의 속마음처럼.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개인전 ‘풍래수면시’가 한창인 이강소가 1975년 제9회 파리비엔날레에 초청받았을 때 선보인 ‘닭 퍼포먼스’에서도 정치적 억압의 시대상이 읽힌다. 작가는 회화의 의미와 예술의 본질을 탐구하고자 분필 가루 위에 한쪽 발을 끈으로 묶은 닭을 풀어놓았고 그 발자국과 퍼덕거림은 고스란히 작품이 됐다. 발 묶인 닭, 그것이 1970년대 우리의 모습이지 않았을까. 군부가 ‘퇴폐 미술’로 낙인찍었던 이들 작가는 지난해 ‘한국실험미술 1960~70년대’라는 이름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전시를 열었고, 이는 고스란히 뉴욕 구겐하임미술관과 LA 해머미술관 순회전으로 이어지며 살아남은 역사를 보여줬다.
계엄 시도는 명백한 반헌법적 행위이며 시대착오적 선택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는 세상이요, 서울에서의 사건이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시대다. 1970년대 실험예술가들이 ‘전후(戰後) 세대’였다면, 지금 목소리를 내는 국민들은 ‘IMF 세대’다. 정부와 정책의 무능함이 초래한 국가 부도의 위기 상황에서, 치솟는 환율로 유학의 꿈을 포기했고 위축된 경기 속에 취업부터 고달팠던 바로 그 세대다. 이들과 한목소리를 내는 20대는 ‘세월호 세대’다. 계엄령이 선포됐던 4일 새벽에 유행처럼 번진 댓글 하나. “얘들아, 우리는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듣지 않기로 결심한 세대야”라고 냉소적으로 꼬집는 바로 그들이다.
힘없고 약한 예술가라지만, 진짜 예술가들은 권력과 부조리 앞에 굴복하지 않는다. 특히 현대미술은 시대정신의 표현이며 역사를 기록하는 또 다른 방식의 하나다.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그러했듯 예술로 새겨진 역사적 사건은 그 어떤 기록물보다도 강렬하다. 2024년 겨울, 이 시대를 예술가들은 어떤 ‘계엄 미술’로 남길 것인가. 큰소리 내지 않는 예술의 힘이, 손 모아 외치는 국민의 목소리가 무섭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