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북스&]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노예 부부의 탈출기

■주인 노예 남편 아내(우일연 지음, 드롬 펴냄)





1848년 12월 20일 새벽, 노예 소유가 합법이었던 미국 남부 조지아주 메이컨에서 미국 역사상 가장 대담한 탈출 중 하나가 시작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일어난 엘렌 크래프트는 입고 있던 코르셋을 벗은 후 직접 바느질한 남성용 바지를 입고 오른팔을 붕대로 감은 뒤 팔걸이에 넣었다. 체형과 얼굴을 가리기 위해 몸과 턱에도 붕대를 감았고 긴 머리를 자른 후 높은 실크 모자를 눌러 썼다. 거울 앞에 선 사람은 더 이상 노예 여성 엘렌이 아닌 젊고 병든 백인 남성 윌리엄 존슨이었다.



남편 윌리엄의 준비는 비교적 간단했다. 평소 입는 바지와 셔츠를 입었지만 훌륭한 흰색의 중고 비버 모자를 더했다. 부자 백인의 노예라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그렇게 아내는 백인 주인이, 남편은 노예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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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가 일생일대의 탈출을 감행하며 쓴 무기가 그들의 삶에 족쇄를 채운 피부색이라는 점은 아이러니했다. 엘렌은 피부색이 밝았는데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의 어머니를 소유했던 부자 백인 농장주였기 때문이다. 어머니 마리아 역시 백인 아버지를 두었기에 엘렌의 피부는 그녀를 몸종으로 아꼈던 이복 자매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이 선택은 무척 위험하기도 했다. 탈주 노예가 노예 사냥꾼에 붙잡힌다면, 심지어 부자 신사를 흉내냈다는 사실까지 발각된다면 산 채로 불태워질 지도 몰랐다. 그러나 부부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기 위해 이 공포로 가득한 여정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탈출 서사의 서막으로 이토록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도 흔하지 않을 것 같다. 심지어 완벽한 실화다. 하지만 할리우드가 일찌감치 영화로 제작했을 법한 이 이야기는 미국 내에서도 비교적 덜 알려졌다. 작가는 궁금했다. 이처럼 잊을 수 없는 이야기에 어떤 이면이 있기에 모두 이 이야기를 잊어버린 걸까.

그렇게 탄생한 책 ‘주인 노예 남편 아내’는 부부의 여정을 치밀하게 따라가며 이 의문을 파헤쳐 간다. 책은 철저하게 사실을 기반으로 하는데 모든 묘사와 인용문 등은 부부가 직접 쓴 1860년작 ‘자유를 향한 1000마일’을 기초로 한다. 또 수많은 자료를 뒤져 부부의 탈출 전후 삶을 완성하고 그들이 말하지 않았던 공백을 메워 간다. 이들의 여정은 미국의 빛과 그늘을 모두 보여준다. 일례로 부부는 1600km를 달려 북부 자유주에 도착했지만 이후로도 노예 사냥꾼에 쫓겨 영국으로 한번 더 탈출을 감행해야 했다. 인종은 물론 성별과 계급, 권력의 경계를 모두 넘나드는 이 복잡한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쉽게 환영받지 못했을 것도 같다.

‘주인 노예 남편 아내’라는 어울리지 않는 네 개의 단어가 펼치는 풍부한 층위를 소설보다 더 흥미롭게 풀어간 것은 오로지 작가의 힘이다. 작가는 백인 관점에서 서술된 편향된 당대 자료들을 철저히 해체한 뒤 균형 잡힌 시각으로 정리해 나간다. 탁월한 묘사력으로 부부가 살았던 시대의 질감까지 되살려낸다. 작가는 이 위대한 이야기를 되살린 공로를 인정받아 2024년 퓰리처상 전기 부문을 수상했다. 2만 2000원.


김경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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