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백상논단] 붉은 말의 해, 한반도에 다시 오는 분기점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

北 '두 국가론' 불가역화 수순 돌입

헌법 개정 등 정치행위 집중 가능성

韓, 재촉말고 협력 메시지 유지해야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




2026년은 붉은 말의 해, 병오년(丙午年)이다. 인공지능(AI)에 병오년의 특징을 물었더니 “급격한 변화와 분기점”이라거나 “숨겨졌던 갈등의 표면화”라는 답이 돌아왔다. 말은 정지보다는 이동을 상징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한반도의 과거 병오년 역시 이러한 특징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1906년 병오년은 러일전쟁 직후였다. 전년도에 강제된 을사늑약을 제도적으로 완성하는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대한제국의 외교와 내정은 사실상 붕괴됐다. 동시에 일반 민중과 지식인 사회에서 타협 노선은 급속히 소멸했고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 정서는 확산됐다. ‘관리된 안정’은 무너지고 질서의 성격이 노골적으로 전환된 해였다.



1966년 병오년은 북한이 체제의 성격을 질적으로 바꾼 기점이다. 북한은 8월 노동당 제2차 당대표자회의를 열어 주체사상을 당·국가 운영의 전면지침으로 격상하고 군사·혁명 노선을 강화하며 대미·대남 강경 노선을 공식화했다. 김일성은 “사상에서 주체, 정치에서 자주, 경제에서 자립, 국방에서 자위”를 노동신문 사설을 통해 천명했다. 이는 경제보다 군사, 대외 협력보다 자력 갱생을 우선하는 노선으로 오늘날까지도 북한 체제를 규정하는 원형이 됐다. 이 결정은 1968년 청와대 기습과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 등 한국과 미국을 겨냥한 직접적 적대 행위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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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에도 갈등이 가시화되는 ‘불(火)의 정치’가 한반도에 다시 펼쳐질 가능성은 적지 않다. 북한은 1966년과 유사하게 자신들의 급진적 노선 전환을 제도적으로 굳히는 수순에 들어갈 공산이 크다. 북한은 2023년 12월 제8기 9차 노동당 전원회의를 통해 ‘적대적 두 국가론’과 ‘통일 포기’를 공식화했다. 이는 다가올 제9차 당대회에서 헌법 개정과 노동당 규약 수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는 “북남 관계는 더 이상 동족 관계가 아니라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이며 전쟁 중에 있는 교전국 관계”라고 규정했다. 지난해 9월 21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도 “숙적인 두 개 국가가 통일된 사례는 세계사에 없다”며 “통일은 불필요하다”고 단언했다. 김일성이 1948년 제시했던 ‘사회주의 건설과 조국 통일’이라는 두 가지 역사적 사명 가운데 하나를 공식적으로 폐기한 셈이다. 김정은은 나아가 “우리는 한국과 마주 앉을 일도, 그 무엇도 함께할 일도 없다”고 못 박았다. 이러한 반민족·반통일·반평화적 노선 전환을 ‘불가역적’으로 만들기 위한 정치적 행위가 집중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이 상황에서 한국은 대응 방향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정부는 남북 공동 발전을 위한 대규모 협력 구상을 연이어 제시하고 있다. 원산 갈마 해안관광지구와 백두산 삼지연 관광지구를 연계한 초국경 관광 프로젝트 등은 구체적이다. 김정은이 관광산업에 각별한 관심을 보여왔고 원산 갈마를 실질적으로 살릴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이 한국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매력적인 제안일 수 있다. 실제로 북러 관계가 밀착됐다고 하나 지난해 북한을 찾은 러시아 관광객은 약 880명에 불과했다. 접근성이 제한된 동해 연안의 지리적 한계, 연간 약 20만 명의 한국인이 방문했던 금강산 관광의 경험을 감안하면 관광 분야에서 한국과의 협력은 가장 현실적인 선택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김정은을 움직이기는 역부족이다. 북한은 러시아와의 협력을 통해 식량·원료·비료 등 최소한의 생존 자원을 확보하며 버티기에 들어갔다. 지난해 9월 3일 중국의 전승절 행사에서 김정은이 시진핑 주석과 나란히 선 장면은 북중 관계 역시 일정 수준 복원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환경에서 북한은 적대적 두 국가를 선언한 한국으로부터 과거와 같은 제재 완화나 경제적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다. 남북 관계를 주변화할 여력이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이 취해야 할 태도는 분명하다. 조급해 할 필요가 없다. 큰 틀에서 화해와 협력을 원한다는 일관된 메시지를 유지하되 성과를 재촉하지 않는 긴 호흡이 필요하다. 말의 해가 에너지와 변화의 속도가 빠른 해일수록 오히려 침착함이 전략이 될 수 있다. 격변의 순간을 갈등의 표면화로 흘려보낼 것인지, 아니면 평화의 내실을 다지는 계기로 만들 것인지는 결국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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