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IN 사외칼럼

‘위키드’를 통해 본 창작의 방법 [이수지의 Enter in Law}





초등학생 딸아이가 소설을 쓰겠다며 컴퓨터 앞에서 끙끙댄다. “용이 등장하는 근사한 이야기를 쓰고 싶은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에 나는 딸의 손을 잡고 영화 ‘위키드’를 보러 갔다. 이제 막 창작의 세계에 발을 들인 어린 창작자에게 창작이란 무엇인지 말로 설명하기보다 직접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영화 ‘위키드’의 원작은 1995년 그레고리 맥과이어가 발표한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에서 출발하지는 않았다. 1900년 출간된 고전 ‘오즈의 마법사’가 그 출발점이다. 맥과이어는 100여 년 전 이야기 속 인물과 세계관을 그대로 가져오되 선과 악의 구도를 과감히 뒤집었다. 모두가 ‘사악한 서쪽 마녀’로 알고 있던 존재가 사실은 차별에 저항한 정의로운 영혼이었다면 어떨까. 이 하나의 질문으로 익숙한 이야기는 전혀 다른 생명을 얻었다.

여기서 자연스러운 의문이 생긴다. 다른 소설의 캐릭터와 세계관을 그대로 가져다 썼는데 이것은 표절이 아닌가.

첫 번째 비밀은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에 있다. 저작권은 영원하지 않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저작자 사망 후 70년(한국 기준)이 지나면 작품은 인류의 공동 자산이 된다. 누구나 자유롭게 활용하고 변주할 수 있는 일종의 ‘창작의 공유지’가 열리는 것이다. 맥과이어는 퍼블릭 도메인인 ‘오즈의 마법사’ 위에 자신만의 서사를 덧붙인 것이다.



이 개념을 이해하면 주변의 많은 창작물이 새롭게 보인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로 다시 태어났고, 제인 오스틴의 엠마는 영화 ‘클루리스’로 현대적 감각을 입었다. 디즈니 제국을 일군 ‘신데렐라’, ‘백설공주’, ‘미녀와 야수’ 역시 수백 년 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설화를 재해석한 결과물이다. 위대한 창작은 때로 무(無)에서 태어나지만 이미 존재하는 이야기에 새로운 시선과 시대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탄생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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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비밀은 저작권법이 ‘아이디어’가 아니라 ‘표현’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법은 누군가의 머릿속에 있는 추상적인 개념이나 보편적인 소재 자체를 독점하게 두지는 않는다. ‘오즈의 마법사’가 퍼블릭 도메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낯선 세계로 떠난 소녀의 모험 이야기’, ‘자아를 찾고 싶어 하는 허수아비와 양철 나무꾼’ 같은 ‘오즈의 마법사’ 속 설정은 누구나 자유롭게 빌려 쓸 수 있는 아이디어의 영역이다. 반면 낯선 세계로 떠난 소녀가 구두의 뒷굽을 세 번 부딪치면 집으로 돌아간다거나, 소녀가 겪게 되는 구체적인 사건 전개들은 ‘표현’의 영역이므로 함부로 가져다 쓸 수 없는 것이다.

이 구분은 창작자에게 중요한 힌트를 준다. 아이디어나 소재는 누구의 것도 아니므로 익숙한 아이디어라도 그 아이디어를 나만의 시선과 언어로 풀어낼 수 있다면 그 이야기는 나만의 것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퍼블릭 도메인을 바탕으로 한 ‘위키드’의 내용을 그대로 가져다 써도 괜찮을까.

그렇지는 않다. 저작권법에는 ‘2차적 저작물’이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위키드’는 ‘오즈의 마법사’의 인물과 기본 설정을 차용했지만, 초록 피부의 엘파바가 태어난 배경, 금발 마녀 글린다와의 복잡한 우정 등 독창적인 사건 전개와 내용을 대거 추가했다. 이렇게 새로운 창작성이 더해진 결과물은 원작과는 별도로 독립적인 저작권 보호를 받는다. 소설 ‘위키드’를 바탕으로 한 영화와 뮤지컬이 모두 원작자의 허락 아래 제작된 이유다.

영화관을 나오며 딸에게 말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새로 만들어야 하는 건 아니야. 가장 익숙한 이야기가 때로는 가장 좋은 지도가 되기도 해.”

막막한 원고지 앞에서 고군분투하는 모든 예비 창작자에게도 같은 말을 전하고 싶다. 창작의 무게에 짓눌릴 때는 잠시 펜을 내려놓고 고전을 펼쳐보라고. 전통 민요에서 영감을 얻은 ‘아기상어’가 전 세계를 사로잡았듯이 인류가 오랫동안 쌓아온 이야기의 보물창고 속에는 아직도 수많은 ‘용’들이 당신의 상상력을 기다리며 잠들어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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