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인이 의료법인의 이사나 대표 자격으로 여러 의료기관 운영에 관여했다는 사정만으로는 불법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의료법은 의료인이 하나의 의료기관만 운영하도록 하고 있지만, 다른 병원 운영에 관여했다는 사정만으로 불법으로 볼 수는 없다는 취지다.
11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2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의료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치과의사 이모 씨에 대해 유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깨고 사건을 대전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의료법 위반 부분에 대해 법리 오해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 씨는 의료법인 대표로 치과병원을 운영하면서, 사단법인 명의를 이용해 의원과 치과의원 등 다른 의료기관의 운영에도 관여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검찰은 이 씨가 자금 조달과 인력 운영, 급여 결정 등에 실질적으로 관여하며 여러 의료기관을 지배·관리했다고 보고 불법 중복 운영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1·2심은 이 같은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 씨가 각 의료기관의 운영을 사실상 통제했다고 보고, 의료법이 금지하는 중복 운영에 해당한다고 판단해 의료법 위반과 사기, 국민건강보험법 위반 등을 유죄로 인정했다.
그러나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의료인이 의료법인의 이사나 대표 지위에서 의료기관 경영에 관여했다는 사정만으로는 곧바로 불법이 성립한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의료법인은 공공성과 비영리성을 전제로 설립되고 국가의 관리·감독을 받는 법인으로, 개인 의료인과는 구조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어 의료법 위반이 인정되려면 단순한 경영 관여를 넘어, 의료법인을 외형만 갖춘 채 탈법적인 수단으로 악용했다는 추가 사정이 필요하다고 봤다. 예컨대, 실질적인 재산 출연이 없는 유령 법인을 병원 운영 수단으로 이용했거나, 법인 재산을 부당하게 유출해 공공성과 비영리성을 심각하게 훼손한 경우 등이 이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의료법인 설립 과정에 일부 하자가 있거나 재산이 일시적으로 유출된 정황만으로는 위법을 단정할 수 없다고도 덧붙였다.
이번 판결은 의료인이 의료법인 명의 병원 운영에 관여한 경우 처벌 범위를 처음으로 명확히 제시한 판단으로, 향후 유사 사건의 기준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환송심에서는 대법원의 판단 취지에 따라 실제로 의료법인이 탈법적으로 악용됐는지 여부가 다시 심리될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