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적으로 인공지능(AI) 주권을 둘러싼 경쟁이 격화하는 가운데 속도 경쟁에 매몰되기보다 국가 차원의 명확한 목표와 전략을 수립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최종현학술원 과학기술혁신위원회는 14일 발간한 ‘AI 주권 시대, 대한민국의 선택’ 보고서를 통해 “지금 필요한 것은 속력이 아니라 방향, 액션이 아니라 전략”이라고 이 같이 밝혔다. 이번 보고서는 최종현학술원 과기위 AI 전문 위원과 외부 전문가 12명이 참여한 미래과학기술 소모임의 심층 논의를 바탕으로 기획됐다.
김유석 최종현학술원 대표는 발간사에서 “AI 주권은 모든 것을 직접 만들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국가가 반드시 통제해야 할 영역과 글로벌 협력을 활용할 영역의 경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 대한 전략적 결정”이라며 “지금 필요한 것은 기술 경쟁의 속도 못지않게 방향, 즉 국가 차원의 목표와 책임 범위를 분명히 설정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보고서는 먼저 ‘오픈소스의 함정’에 주목했다. 오픈소스는 중립적이고 개방적인 대안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글로벌 빅테크가 시장 지배력을 확대하기 위해 활용하는 전략적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오픈소스를 장기간 무료 제공해 경쟁자를 소진시킨 뒤 지배력을 확보하거나, 라이선스 조건이나 접근 권한 등을 바꾸는 방식이다. 보고서는 “핵심 디지털 인프라를 글로벌 민간 기업의 선의와 전략에 의존하는 구조는 위험하다”고 덧붙였다.
소버린 AI에 투입되는 막대한 비용과 시간, 정책의 연속성에 대한 우려도 제기됐다. 초거대 모델 경쟁은 한 차례의 개발로 끝나는 사업이 아니라 연산 인프라 확충과 지속적인 고도화, 운영 비용을 장기간 감당해야 하는 소모전에 가깝다는 주장이다. 보고서는 이어 “공공 재원이 전면 투입되는 구조에서는 정권 교체나 정책 기조 변화가 곧바로 사업의 지속성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며 “장기간의 축적과 일관성이 요구되는 AI 개발에서 이러한 불확실성 자체가 무시하기 어려운 전략적 리스크”라고 진단했다. 또 성능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거대 언어 모델(LLM)을 국산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분야에 일괄 적용·강제할 경우 과거 액티브X나 공인인증서 사례처럼 ‘AI 갈라파고스’로 귀결될 가능성도 경고했다.
이에 보고서는 찬반의 문제가 아닌 어디까지를 국가가 책임지고 통제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구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행정·안보·공공 데이터와 핵심 인프라처럼 국가 책임이 불가피한 영역과, GPU 확보나 민간 활용 LLM처럼 글로벌 협력을 적극 활용할 수 있는 영역을 구분해 설계하는 ‘자립과 연계’ 전략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한국이 가진 전략적 기회로는 ‘제조 파운데이션 모델’이 제시됐다. 언어 중심의 LLM 질서가 소수 글로벌 기업에 의해 빠르게 고착화되는 것과 달리, 제조·물리 기반 파운데이션 모델은 아직 표준과 기술 경로가 확정되지 않은 미개척 영역으로 평가된다. 보고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 역량과 공정 데이터를 동시에 축적한 국가는 드물다는 점에서 한국은 단순한 추격자가 아니라 전략적 선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다”고 설명했다.
보고서는 이어 AI 전략의 마지막 승부처는 결국 인재를 얼마나 확보하고 유지하느냐에 달려있다고 제언했다. 이에 따라 ‘AI 인재 10만 양성’과 같은 숫자 중심 목표에서 벗어나 어떤 기능과 책임을 수행할 인재가 필요한지를 먼저 정의하고, 다양한 역할의 인재가 축적·성장할 수 있는 생태계로 정책의 초점을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다. 인재 유출을 방지하기 위한 방안으로는 성과와 책임에 기반한 계약형 고용, 고연봉·고위험 구조, 스톡옵션 등 다양한 보상 모델이 제시됐다. 고용 안정성을 유지하되 기여에 따라 보상이 명확히 달라지는 방식, 이른바 ‘엔비디아식 보상 모델’도 현실적인 대안으로 거론된다.
아울러 보고서는 “정부가 AI 바우처 등으로 시장 리스크를 분담하는 것뿐 아니라, 공공 부문이 행정 자동화·국방 시뮬레이션 등에서 적극적 사용자로 참여하는 ‘최초 수요자’ 역할까지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