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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인
김정인 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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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칼럼 #캠퍼스
  • 신냉전의 위협이 도래하고 글로벌 경쟁 구도가 뚜렷해진 지금, 글로벌 중추 국가로의 도약을 목표로 하는 한국의 위상은 애매하기 짝이 없다. 북한은 대북제재를 비웃듯 극초음속 미사일 개발과 핵 실험 등을 자행하며 한반도의 역내 평화를 깨뜨리고 있다. 북한의 행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나라는 미국과의 동맹을 통한 미국의 확장 억제력 강화, 인도-태평양과의 관계 증진을 통한 군사 협정 등 소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내부의 힘(自强)이 아닌 외부의 힘(外勢)에 의존하며 우크라이나 전쟁·중동 전쟁이 발발한 현 상황에서도 우리의 입장보다는 강대국의 이익과 입장을 대변할 수밖에 없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물론 대내외적 상황과 한국의 입지 및 외교 형태를 고려했을 때, 미국 의존형은 우리 정부의 당연한 시나리오로 평가된다. 하지만 미국과 핵무기를 공유하는 ‘핵 공유론’이나 우리나라 자체의 핵을 보유해야 한다는 ‘핵 자강론’의 가능성을 ‘제로’에 수렴하게 하는 것은 핵우산 안에서 본인의 힘을 키우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일본의 경우, 아베 내각은 지난 2014년 평화헌법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 ‘집단적 자위권’ 행사 방침을 발표함으로써 해외 군사행동을 합법화했고, 미·영·호 군사동맹(AUKUS)에 일본의 가입이 확실시됨으로써 신냉전 상황에 대응하는 데 주력하는 모습이다. 뿐만 아니라 미일 원자력 협정을 통해 핵무기 개발에 전용될 수 있는 플루토늄에 대한 보유량을 확보하고 있다. 미일 원자력 협정에서 폐기 핵연료 재처리와 우라늄 농축과 관련해 미국이 허용하고 있는 수치는 한미 원자력 협정의 수준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핵무기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서 미국은 한국의 플루토늄 재처리 허용 요구를 거부하고 있지만, 일본은 30년 전부터 미국으로부터 예외를 인정받아 비핵 보유국 중 유일하게 플루토늄을 저장해왔다. 일본이 매년 8톤씩 자체 생산해 보유하고 있는 플루토늄은 핵무기 6000개를 만들 수 있는 양이다. 지난해 4월 개최된 워싱턴 회담에서는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한국의 자체 핵무장은 있을 수 없다고 못 박은 바 있다. 평화헌법 재해석을 통해 군사력을 점층적으로 확대하고 있는 동시에 핵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는 일본과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미국에 군사력을 위탁한다면 미국의 대내외적 변화에 따라 동맹국인 우리나라의 상황도 변화한다. 물론 미국과 군사 동맹국이기에 가질 수 있는 장점은 수준급이다. 주한미군을 통한 ‘안보 우산’은 한국의 국방비 지출을 낮추는 동시에 국가신용등급을 떠받치는 핵심 요인으로 작용한다. 국방대학원에 따르면 주한미군이 보유한 장비들의 환산 금액은 약 17~31조 원에 달하며 이를 본국의 것으로 대체하려면 23~36조 원 이상의 비용이 소요된다. 또한 전쟁 발생 시 자동 개입하는 미 증원전력은 120조 원 이상으로 평가된다. 이처럼 미국은 한국에 군사 경제비 지원, 군사 무기, 군사력 등의 다양한 측면에서 대들보가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긍정적인 요인으로만 작용하지 않는다. 미국에 대한 한국의 군사 의존도가 높은 만큼 한국 자체 군사 자강력은 낮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국과의 현 군사동맹 체제가 무너지지 않으라는 보장은 없다. 줄곧 주한 미군 철수 가능성을 언급해온 도날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재집권한다면 미국의 한반도 개입과 북한에 대한 제재가 느슨해져 북한의 핵 실험 증가 등 도발 위험성이 높아질 수 있다. 아울러 한국과 일본이 독립적인 핵 자강력을 확립하기 위해 핵 긴장도 폭증할 수 있고, 이는 아시아와 인도-태평양 전체의 역내 갈등을 초래할 수도 있다. 이제는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언제든 전쟁이 발발할 수 있는 ‘지정학적 경쟁의 시대’에 왔음을 명확하게 인지해야 한다. 스스로의 역량을 다져 경쟁력을 확보하고 동맹에 얽매여 우리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상황을 피해야 한다. 미국과의 군사 협정을 도모하되 한반도의 안보 상황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군사 자강력 또한 조금씩 확보해 나가야 한다. 한국이 핵 잠재력을 갖추기 위해선 적어도 미국과의 원자력 협정에서 플루토늄 보유권이라도 얻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 당장의 권위와 글로벌 대전에 굴복해 미국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마냥 고개를 숙이기만 하는 일은 언 발에 오줌 누는 행위와 다름없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2024.05.26 07:00:00
    한미동맹의 이중날: 핵우산 아래서의 불안정한 평화
  • "백지법 대신 제가 신상을 공개해드립니다" 각종 SNS에서는 이런 제목을 가진 게시글과 영상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썸네일에는 제작자가 공개하고자 하는 사람의 얼굴과 혐의를 크게 적어놓고, 정의구현을 시사할법한 제목으로 시청자를 유입한다. ‘참교육’, ‘법원 대신 처형’, ‘피해자의 울분을 풀어주기 위한 방송’ 등과 같은 문구로 가득한 영상에서는 법의 사각지대에 있어 도움을 받지 못한 사람이나 스토킹 등 법률의 특이사항으로 인해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한 사람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한 내용이 담겨있다. 신상공개 혹은 역으로 피해자의 입장을 느끼게 해주는 연출 카메라 형식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의뢰인을 위해 복수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로 위의 무법자, 학교폭력, 불륜 등 도덕적 해이와 사회적 분열을 야기하는 여러 항목이 이 영상의 소재에 해당된다. 신상공개를 위해 만든 한 인스타그램 계정은 10만 명이 넘는 팔로워를 갖고 있고, 이는 사적제재 콘텐츠에 대해 사람들의 수요가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왜 사법기관이 존재하는데도 개인에 의한 구형이 이렇게나 수요가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이 콘텐츠들이 법정의 솜방망이 처벌 앞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이들의 설욕을 씻어주는 ‘정의구현’을 표방하고, 법 앞에서 피해자가 감내할 수밖에 없는 무기력을 극복하는 '통쾌함'을 느끼는 심리를 작용케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적 제재를 정의구현의 한 방법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사적제재는 엄연히 불법이다. 정보통신망법 70조 1항은 사람을 비방할 목적으로 정보통신망을 통해 공공연하게 사실을 드러내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더군다나 명예훼손에 비해 사적제재는 ‘비방할 목적’ 요건까지 더해져 가중처벌 대상이 된다. 사적제재는 다음과 같은 위험성이 있다. 첫째, 장기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피의자의 처벌을 약화시킬 수 있다. 사적제재를 행하는 일반적인 이유는 범죄자가 치르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죗값을 되묻는 의도로 진행되는데, 이와 같은 행위가 반복돼 일상화되면 객관적 판단기준인 법 체제가 유명무실화되고 이에 동반해 법적 강제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피해자의 권익이 더 침해될 수밖에 없다. 둘째, 범죄의 경중에 관계없이 왜곡된 처벌을 내릴 위험성이 있다. 객관적인 판단 기준과 이성적인 판단이 부재한 사회가 도래한다면, 얼굴을 모르는 인터넷 판사가 무분별하게 신상을 공개하거나 곳곳에서 폭력이 난무하는 등 사회 시스템이 무너질 수 있다. 하지만 사적제재가 불법이며 잠재된 위험성이 있다 하더라도 현재 사법체제를 신뢰하기만 한다면, 기존 문제를 똑같이 양산하는 것에 불과하다. 공정하고 정당한 기준을 만들어 피해자의 고통을 헤아리고 합당한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모색하는 것이 급선무다. 사적제재의 가장 큰 원인은 “사법체제의 불신”이다. 사회에서 개인을 보호하는 울타리인 법의 허술함 또는 부재가 사적제재를 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지점에서 ‘법의 허술함 그리고 부재’를 어떻게 보완할지 모색해봐야 한다. 이런 고민을 통해 법 집행의 신뢰성을 보장하고 법적 절차의 공정성을 보완해 탄탄한 사법체제를 구성할 수 있다. 최근 AI, 딥페이크 등 기술을 둘러싼 법률상의 문제가 생겨나고 있듯 시시각각 변화하는 사회환경에서 법의 빈칸들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특히 유럽연합(EU)의 AI규제법안이나 미국의 변호사를 위한 AI 예비 지침이 나오는 반면 대한민국 국회는 이와 관련해 잠잠하다는 점이 이 점을 뒷받침한다. 기술뿐 아니라 사회에선 다양한 가치가 병립하는 장으로 나아가고 있기에, 동향파악이 더욱 빨리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정보를 신속하게 교류하고 학술적 논의가 유의미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법률 데이터를 개방해 개발자, 연구자 등이 자유롭게 정보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토대로 의원입법으로만 논의와 담론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전문가, AI, 시민 사회 등 모든 범주에서 형성될 수 있게 된다. 법률, 행정 절차 등과 관련된 데이터를 공개하고 민간 부문에서도 정책 개발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최근 국회는 강력범죄자들의 신상공개와 관련해 칼을 빼 들었다. 대부분 옛날 사진만 공개해 신상공개 효과가 없다는 평가를 받았던 데 반해 정부는 피의자 동의 없이도 새로 사진을 찍어 공개할 수 있게 법안을 변경하기로 했다. 이는 피의자 머그샷을 대중에게 공개하는 시스템이 구축된 세계 흐름에 맞춘 발걸음이고, 피의자에 대한 국민들의 의견을 반영한 조치였다. 사법체제의 굳건함은 법률의 공백 메우기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사적으로 처벌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가 피해를 합당하게 보상받고, 범죄자가 피해자의 고통에 상응하는 죗값을 받는 사회에서 살기를 원할 뿐이다.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2024.04.27 09:00:00
    범죄자에 대한 '사적 제재'가 위험한 이유
  • 21세기를 대표하는 단어를 뽑으라면, 필자는 단연 ‘혼란’을 택할 것이다. 지금 시기처럼 다양한 입장의 목소리가 범람하는 시기는 없었기 때문이다. 교권 추락을 해결하기 위해 학생의 인권을 보호하는 학생인권조례 폐지와 같은 해결 방안이 나오거나 성평등을 추구해야 하는 담론이 어느 순간 성별 간 대립으로 변질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는 다양한 입장이 충돌하며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혼란이 고조되고 있다. 여러 목소리가 혼재돼 있는 상황일수록 서로의 처지를 대변하는 근거의 옳고 그름을 신중히 검토해야 하지만, 각 입장 간의 의견 대립은 점차 양극화되어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있다. 이는 신자유주의 시대가 도래해 다양한 가치가 홍수처럼 한 번에 유입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같은 입장을 가진 이용자들이 같은 정보를 지속해서 되풀이하여 확산하는 에코 체임버(Echo Chamber)효과가 반영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옳지 못한 가치임에도 힘을 입은 주장들이 사회 곳곳에 자리 잡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어느 때보다 활발히 각 입장 간 의견을 교류해야 하는 때에 건전한 토론 대신 이념 대립과 혐오 조장이 만연한 시대가 되면서 후퇴의 서막이 시작된 것이다. 혼란스러운 사회에서 정치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우리 모두는 천부적으로 인간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 타인에 대한 이해를 도모해 그들의 존엄함 또한 인정해주는 것이 나와 나를 둘러싼 세상을 향한 예의이기도 하다. 이러한 배경에서 정치는 국민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상호 간 진정한 이해와 존중을 이룩할 수 있게 하는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 또 정치인은 중구난방 떠다니는 여러 가치로부터 촉발된 혐오를 바로 잡고 정책적인 조치뿐 아니라 그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동성애 퀴어축제가 전혀 발붙이지 못하게 하겠다” 이는 놀랍게도 작년 한 도지사가 문화제에서 발언한 연설 중 일부이다. 퀴어문화축제에 대한 몰이해와 소수자 인권에 대한 몰상식이 합쳐진 발언이다. 정치 단체는 다수뿐 아니라 소수의 국민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 지금처럼 다양한 목소리가 혼재되고 있는 시기라면 더욱이 그래야만 한다. 그러나 최근 정치 단체는 이와는 반대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야권 연합 비례대표 위성정당 더불어민주연합에서 시민 사회의 대표적 인물인 임태훈 전 군인권센터 소장을 후보로 선출했지만 더불어 민주당은 그를 3일 만에 후보 명단에서 제외했다. 한 정치분석학자는 임 소장의 동성애자 지지로 인한 종교계의 반발을 명단 제외의 원인으로 분석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성정체성에 따른 인격을 형성하고 삶을 영위할 권리가 있지만,아직까지도 한국 사회는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이 심하다. 소수자들을 존중하지 않으며 차별과 억압을 철폐하기 위한 책임을 다하고 있지 않은 모습이다. 소수자를 인정하지 않는 정치의 결말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한 채 서로를 헐뜯는 혐오정치, 팬덤정치로 변모할 수밖에 없다. 4.10총선이 끝났다. 사회적 혼란을 역동성으로 바꾸는, 모든 가치의 혼재를 조화로 탈바꿈하는, 오로지 말로써 표방하는 것이 아닌 정책적 추진성을 가지는 색다른 움직임이 필요하다. 정치인들은 정당 소속에 앞서 국민의 대표임을 자각하고 잘못 지핀 편견이라는 불에 부채질하지 않아야 한다. 사안을 다각적으로 다룰 수 있는 담론의 장을 형성하여, 결코 혼란에 휩쓸리지 않을 22대 국회가 조성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2024.04.13 05:46:57
    ‘다름’을 인정하는 사회와 정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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