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408
  • 중대재해처벌법(중처법)은 기업이 영위하는 사업에 관하여 대표이사 등 경영책임자가 취하여야 하는 경영상, 관리상의 조치를 정하고 있다. 즉, 기업의 안전보건관리체계를 위하여 인력을 충원하거나 예산의 증액, 조직의 개편, 절차·규정·매뉴얼 등의 제·개정 등을 시행하는 것이 중처법에서 정한 의무 내용이다. 이는 현장에서 이행하여야 하는 안전보건조치와는 구분된다. 예컨대 현장의 안전설비가 설치되어 잘 작동 중인지를 확인하는 것은 현장책임자의 몫이고, 경영책임자는 현장에서 안전설비를 잘 구비할 수 있도록 관련 예산을 편성해주는게 그의 일이다. 이처럼 중처법에 따른 의무가 현장에서 취하여야 하는 직접적·구체적인 안전보건조치의무와 구분됨에도 양자를 혼동하는 경우가 종종 발견된다. 대표적인 것이 위험성평가다. 산업안전보건법상 위험성평가는 산업현장에서 해당 현장의 책임자(안전보건관리책임자 또는 안전보건총괄책임자)의 총괄 관리 하에 실시되는 것임에도, 중처법 위반 사건에서 사고의 원인이 된 유해·위험요인이 위험성평가표에 없으면 곧바로 위험성평가 절차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것으로 평가되는 사례가 종종 있다. 현장에서 위험성평가를 다소 미흡하게 실시하였다고 하여 경영책임자가 위험성평가 절차 자체를 제대로 만들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음에도 말이다. 올해 선고된 중처법 위반 판결 중에는 위와 같은 점을 정확히 지적한 판결이 있다. 춘천지방법원 영월지원은 D공사의 광업소에서 죽탄(물과 석탄이 섞여 반죽의 형태가 된 상태)에 매몰되어 근로자가 사망한 사건에서 D공사의 경영책임자 등에게 무죄를 선고하며, 중처법에 따른 의무가 현장의 직접적·구체적인 안전보건조치의무와는 구분된다는 점을 명시하였다. 그러면서 위 판결은 중대재해처벌법상의 의무가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른 현장의 직접적인 안전보건조치의무와 달리 경영책임자가 안전보건관리체계를 구축하고 재해재발방지 대책, 매뉴얼 등을 수립하는 등 중대재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인적·물적·제도적 시스템을 마련하고 그 시스템이 잘 운영되는지를 점검하는 의무라고 판단하였다. 즉, 경영책임자가 위험성평가 절차를 수립하여 운영하면서 정기적으로 그 작동 상황을 점검하고 미비점을 개선하였다면, 설령 해당 절차에서 지적되었던 유해·위험요인이 실현되어 중대재해가 발생하였어도 경영책임자가 위험성평가 절차를 마련하고 점검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중처법에 따른 의무의 내용과 취지를 정확히 짚은 대목으로 보인다.
     중대재해처벌법에 따른 의무는 현장의 의무와 구분돼야
    by 김동현
    2025.12.06 11:00:00
  • 유럽연합(EU)의 ‘포장 및 포장폐기물 규정’(PPWR)이 2026년 8월 12일부터 본격 시행된다. 이번 규정은 ‘유럽 그린딜’(European Green Deal)과 ‘순환경제 행동계획’(CEAP)에 따라 2025년 2월 11일 발효되었으며, 기존의 지침(PPWD)을 대체하는 EU 단일 규정이다. PPWR은 EU 시장에 유통되는 모든 포장재가 재사용・재활용 가능하도록 설계될 것을 요구하며, 포장 최소화, 재사용 시스템 확대, 재활용성 등급제 도입, 재활용 플라스틱 의무 사용 등을 핵심 의무로 담고 있다. 포장재는 제품 보호와 물류 과정에서 필수적인 요소다. 포장 제조업은 EU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상당한데, 2018년 EU 포장 제조업의 매출은 이미 3550억 유로(약 530조 원)에 이르렀다. 하지만 포장재 사용이 급증하면서 환경 부담도 빠르게 확대되었다. EU 집행위원회(EC)가 PPWR 제정을 위해 작성한 2022년 입법영향평가보고서는 포장 분야의 구조적 문제로 ① 포장폐기물의 지속적 증가, ② 재활용을 저해하는 비표준화된 설계・라벨링, ③ 재활용 품질 저하와 낮은 재활용원료 사용률을 지적하며, 이러한 구조적 한계가 자원 낭비와 환경 오염을 심화시키고 있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2023년 EU의 1인당 포장폐기물은 177.8㎏이고, 포장재는 EU 전체 플라스틱 사용량의 약 40%를 차지한다. 또한 EC의 보고서는 포장 시스템의 전체 환경 영향을 분석하면서, 포장재로 인해 발생하는 온실가스 배출량이 헝가리 전체의 연간 배출량과 유사한 규모에 달한다는 점도 지적한다. 즉, 폐기물 증가와 재활용 구조의 비효율성에 탄소 배출 부담까지 더해지며, EU는 포장 분야의 전면적이고 통합적인 규제 개편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사실 EU는 이미 1994년 제정된 ‘포장 및 포장폐기물 지침’(PPWD)을 통해 포장재의 구성 제한, 재사용・재활용 가능성, 특정 물질 사용 제한 등 기본 요건을 규율해 왔다. 그러나 지침(Directive)은 회원국이 각자 국내법으로 전환하는 방식이어서 국가별로 해석과 적용 기준이 달라지고, EU 시장 전역에서 통일된 규제가 작동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했다. 포장재는 생산부터 유통・폐기까지 국경을 넘나드는 초국경적 제품이기 때문에, 이러한 불일치는 내부시장 기능을 약화시키는 ‘규제 실패’로 평가되었다. 이번에 PPWR을 EU 전체 회원국에 통일적으로 적용되는 단일 규정(Regulation) 형태로 제정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다. PPWR은 산업・상업・가정 등 모든 분야의 포장재에 적용되며, 화장품・식품・생활용품과 같은 소비재뿐 아니라 전자・기계 부품 등 B2B 포장재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EU 시장에 제품을 공급하는 한국 기업은 이제 포장 최소화 기준, 재사용・재활용성 설계, 재활용 플라스틱 사용 의무 등을 점검하고, 적합성 선언서(DoC)와 기술문서(TD)를 준비해야 한다. 또한 재활용성 등급, 분리배출 라벨링 등 나머지 요건도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다. PPWR은 단순한 환경 규제가 아니라, 기업의 포장 전략 전반을 재구성하는 제도적 전환에 가깝다. 한국 기업들은 공급망을 아우르는 포장재 정보를 체계적으로 수집・파악하고, 포장 감축 및 재설계 가능성을 검토하며, 재활용성 중심의 디자인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이는 규제 대응을 넘어, 글로벌 순환경제 체제에서의 새로운 경쟁력 확보로 이어질 수 있다.
    EU의 PPWR과 포장재의 미래
    by 민창욱
    2025.12.06 09:00:00
  • 30여 년간 칠레 통신 인프라를 지배해온 스페인 자본이 물러나고 있다. 그 자리를 멕시코 자본이 빠르게 메우면서, 중남미 통신 권력의 중심축이 스페인에서 멕시코로 이동하고 있다. 칠레는 이 변화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무대다. 이는 단순한 기업 간 인수합병(M&A)이 아니라 디지털 인프라 패권의 이동이라는 상징적 사건이다. 1980년대 말 칠레는 군사정권 하에서 기간산업 민영화를 추진했다. 당시 국영 통신사 CTC는 기술 경쟁력이 취약해 외자 유치가 필요했다. 스페인의 텔레포니카(Telefonica)는 1989년 지분 43%를 인수하며 칠레 시장에 진입했다. 스페인은 자본·기술을, 칠레는 제도 안정성과 수요 기반을 제공하며 통신 현대화를 이끌었다. 텔레포니카는 칠레를 교두보로 페루,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브라질로 확장했다. 1990년대 말 중남미 통신시장에서 40% 이상의 점유율을 확보하는 등 사실상 독점적 지위를 누렸다. ‘총칼이 아닌 통신망으로 지배한다’는 신(新)식민주의 논란까지 촉발될 정도였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 이후 4세대(4G)·5세대(5G) 전환에 따른 투자 부담과 포화 경쟁 환경 속에서 텔레포니카의 수익성은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 틈을 타 멕시코의 통신재벌 카를로스 슬림이 부상했다. 그의 어메리카 모빌(AMX)은 공격적 가격 정책과 인수합병으로 남미 22개국에서 수억 명의 가입자를 확보하며 역내 최대 통신 기업으로 성장했다. 칠레에서는 2022년 Claro와 VTR을 합병해 모바일과고정 광대역을 통합 지배할 기반을 갖췄다. 텔레포니카는 결국 남미 사업을 단계적으로 정리하기로 했고, 칠레 법인인 모비스타 칠레(Movistar Chile) 역시 매각 대상으로 지목됐다. 스페인 자본의 퇴장 준비가 본격화된 것이다. 공백을 노리는 기업은 AMX와 칠레 최대 사업자 엔텔(Entel)이다. 칠레 유력 일간지 라 테르세라(La Tercera)는 두 기업이 한때 공동 인수전을 논의했으나 최근 각자 독자 입찰로 선회했다고 보도했다. 칠레 경제지 디아리오 피난시에로(Diario Financiero)는 “누가 인수하든 멕시코 자본의 영향력 확대는 불가피하며, 이는 칠레 통신시장 지배 구조의 근본적 재편을 뜻한다”고 분석했다. 주목할 점은 이 변화를 칠레 사회가 주권과 자존심의 문제로 본다는 것이다. 칠레는 중남미에서 가장 먼저 통신 민영화를 성공시킨 국가다. 이 성취는 ‘남미 기술 선도국’이라는 국가적 자부심을 뒷받침해 왔다. 그런데 그 상징적 자산이 같은 라틴아메리카의 경쟁자에게 넘어간다는 상황은 정치·사회적 감정을 자극하고 있다. 디아리오 피난시에로는 “우리가 이 정도도 스스로 지키지 못하는가”라는 비판 여론을 전했고, 라 테르세라는 이번 인수전이 “남미의 데이터 혈관을 누가 지배할 것인가”라는 디지털 주권 전쟁의 본질을 드러냈다고 해석했다. 통신망은 금융, 보안, 콘텐츠, AI 생태계를 아우르는 국가 주권의 핵심 기반이다. 그러나 감정과 현실은 다르다. 광대역 투자, 5G·인공지능(AI)·보안 인프라는 모두 막대한 자본이 필요한 영역이다. 글로벌 경쟁 환경 속에서 칠레 기업 단독 생존은 어렵다. 시장 논리가 자존심을 압도하는 국면인 것이다. 칠레 통신망의 지배권이 스페인에서 멕시코로 이동한다는 것은 곧 라틴아메리카 디지털 권력의 재편을 의미한다. 한 시대를 지배했던 스페인의 통신 제국은 종말을 맞고, 그 자리를 멕시코가 차지하고 있다. 칠레는 지금 글로벌 디지털 패권 이동의 최전선에 서 있다. 이 변화는 단순한 인수전이 아니라 새로운 권력 구조의 시작이다. 결국 이 질문이 남는다. “누가 중남미의 데이터 혈관을 지배할 것인가.”
    30년 칠레 통신 패권의 전환
    by 박선태
    2025.12.05 16:56:07
  • 지난 6월 스스로 30년간의 공직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많은 분들이 걱정하면서 만류했고 조직에서 나가라고 하지도 않는데 굳이 그만두려는 이유를 궁금해했다. 자진 퇴직의 이유를 하나하나 열거하자면 108개도 넘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죽음이었다. 살다보면 이유 없이 나를 좋아하는 분과 이유 없이 나를 싫어하는 분이 간혹 있다. 이모 선배는 이유 없이 필자를 좋아해 주셨던 분이었다. 대기업 이사까지 한 후 홀로 고향으로 내려가 거동이 불편한 노부모를 모신 분이었다. 노인 아들이 노인 부모를 봉양하는 이른바 노노(老老)봉양을 실천한 것이다. 때마다 지역특산물인 대추도 보내주시고 직접 농사지은 것이라면서 고구마를 보내주시곤 했다. 필자가 감사한 마음으로 약간의 사례라도 하려고 하면 손을 절레절레 흔드시며 완강하게 거절했다. 그냥 하염없이 주시려고만 했지 뭔가를 일절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마른 하늘의 날벼락처럼 이 선배가 숨졌다는 부고 문자가 왔다. 처음에는 믿지도 않았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아침에 그의 아버지가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어떤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그야말로 느닷없이 세상을 떠났다. 세상에 둘도 없는 효자가 부모보다 먼저 가는 불효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그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오랜 벗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소아과 의사로 엄청난 부를 모았지만 그 대부분을 사회에 기부하셨고 심지어 약간의 빚도 남기셨다고 한다. 대입 학력고사가 끝나 천방지축으로 돌아다니던 우리 친구들에게 삶의 방향성을 알려주시면서 처음으로 술을 따라줬던 어른이셨다. 선하디 선한 분이었지만 병원에서 꽤 오랫동안 고생하시다가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돌아가셨다. 두 어르신의 죽음을 보면서 남의 일처럼 느껴졌던 죽음이 바로 눈 앞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더구나 필자는 그분들에 비하면 효자도 아니요, 기부 액수도 미미하다. 앞으로도 그분들에 비해 효자의 삶을 살 것 같지도 않고 사회에 크게 기부하면서 살 것 같지도 않다. 하늘은 나 정도의 사람을 데려가기로 마음먹는 것에 전혀 거리낌이 없을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자다가 죽을 수도 있고 오랜 기간을 병상에 누워 의료기계에 의존해 숨만 쉬다가 죽을 수도 있다. 두렵다. 한 마디도 남길 수 없는 순간 찾아오는 죽음도, 고통과 같이 와서 서서히 말려 죽이는 죽음도 두렵다.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걸어가듯 살 것이 아니라면 결국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그 어떤 죽음 앞에서도 후회없는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그래 그거였다. 죽기 전에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어린 시절 딱지치기 하듯 신나게 하는 것이었다. 천상병 시인은 ‘귀천’이라는 시에서 인생살이를 소풍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지금까지의 삶이 전쟁이었다면 지금부터라도 소풍을 떠나자. 단 하루를 살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자. 마음이 여기에 이르니 그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나에게는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이 있지 않은가. 무엇을 더 주저할 것인가. 나의 이야기를 덤덤히 쓰고 강의하면서 살자. 두 어르신의 명복을 진심으로 빌면서 다시 한 번 다짐해본다.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신나게 하면서 살리라!
    30년 공직을 내려놓은 이유
    by 유상조
    2025.12.05 16:55:57
  • 프랑스의 작가인 생텍쥐페리(1900~1944년)의 소설 ‘어린 왕자’를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러나 요즘의 교육이나 양육을 보면 많은 부모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중요한 것들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더욱 중시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인다. 아이의 키가 얼마나 자랐는지, 어떤 영어 단어를 말하고 쓸 수 있는지, 학습지 문제를 얼마나 맞추었는지 등과 같은 보이는 결과에 매달리느라 정작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하는 힘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볼 여유가 없는 까닭이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어떠했을까? 아이가 태어나기 전 부모들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위해 애를 쓴다. 태아는 엄마의 뱃속에 있기에 눈으로 직접 볼 수는 없지만 태아의 생명력은 온전히 엄마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어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때로는 발로 차기도 하고 움직이기도 하는 태아를 위해 많은 엄마들이 태교를 한다. 태교는 교육의 시작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아이는 세상의 빛을 보기 전, 엄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부모가 자신을 향해 들려주는 많은 이야기들을 통해 정서적인 유대감과 부모를 향한 신뢰라는 보이지 않는 뿌리를 형성한다. 뇌과학적인 측면에서도 태아기에 엄마가 느꼈던 평온함이라든가 가슴 벅찬 감정 등과 같은 긍정적인 정서는 아이의 뇌 발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엄마와 아이의 따뜻한 교감은, 아이가 세상을 향해 첫발을 내딛었을 때 자존감의 형태로 드러나게 된다. 태교가 교육의 출발점이라면, 실질적인 영유아기 교육 역시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들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 예를 들면 인성이라든가 창의성, 상상력, 자존감, 신뢰, 애정 등과 같은 정서적 가치에 중점을 두어야 하지 않을까? 영유아기, 우리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커나간다. 아이의 자연스러운 발달을 지지해 주고 돕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지만, 정작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 올라오는 다른 아이들의 사진이나 영상을 보면서 비교하게 되고 보이는 것들에 집착을 하기가 쉽다. 누구 아이는 벌써 걷는다더라, 누구는 벌써 말을 하고 글도 읽는다더라 하는 등과 같이 보이는 성장에 조바심을 내게 되면, 정말 중요한 보이지 않는 성장은 들여다보지 못하게 된다. 예를 들어 아이가 블록 놀이를 할 때, 잘못 쌓아서 무너뜨린 후 다시 블록을 쌓는 모습을 보았을 때 보이는 성장에만 주목하면 ‘왜 다른 아이는 잘 쌓는데 우리 아이는 제대로 쌓지 못할까?’ 라고 실망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성장에 주목한다면, 내 아이는 실패한 것이 아니라 다시 도전하는 보이지 않는 힘인 회복 탄력성을 가진 특별한 아이가 된다. 친구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다가가 위로할 줄 아는 보이지 않는 공감 능력이 따뜻한 인성의 아이로 성장하게 만들며, 호기심에 가득 차 동식물을 관찰하는 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탐구능력이 되어 창의력과 과학적 사고의 토대가 된다. 이렇듯 교육은 보이지 않는 것을 단숨에 나타나게 하는 마술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씨앗 안에 꽃과 열매가 들어있음을 믿고 기다리며 물을 주는 인내의 과정이다. 그래서 교육을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고들 하며, 영유아기는 백 년 교육의 뿌리라 할 수 있다. 태교부터 시작된 교육은 보이지 않는 태아를 향한 부모의 사랑이었으며, 아이가 태어나 자라는 영유아기의 교육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만드는 힘을 키우는 뿌리 교육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당장 보이는 것들에 집착하는 모습으로 아이 역시 보이는 것들만 중시하게 만들 것인지, 보이지 않는 것들도 볼 수 있게 만드는 힘을 키워 아이 스스로 자신에게 숨겨진 보이지 않는 거대한 우주와도 같은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할 것인지 고민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백 년의 계획이자 백 년을 준비하는 중요한 교육에 있어서 스스로 사고하며 이를 행동으로 옮길 줄 아는 아이, 타인과 협력하는 아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아이로 키우는 것은 부모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만드는 힘을 가진 아이가 성장하여 우리 사회를 이끌 때, 비로소 보이는 놀라운 성과가 나타날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하는 힘
    by 한서정
    2025.12.02 13:31:16
  • 아내와 함께 영화 ‘국보’를 봤다. 모처럼 나를 영화관으로 이끈 건 가부키(歌舞伎)라는 독특한 소재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막이 오르자, 수년 전 다녀온 시코쿠가 떠올랐다. 벚꽃 흩날리던 그해 봄날 나는 시코쿠 고토히라의 가나마루 극장에서 가부키 공연을 관람했다. 일정에 없던 방문이었고, 내 인생 첫 가부키였다. 애초에는 고토히라 궁만 들릴 생각이었기에, 현지에 가서야 공연 일정을 확인했다. 15만 원짜리 1등 좌석만 남았다는 말에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잘한 선택이었다. 1835년에 건축돼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가부키 전용 극장에서 전통 가부키를 경험했으니 행운이었다. 그날 공연은 낯설지만 강렬했다. 퀴퀴한 다다미 냄새와 세월이 눌어붙은 나무 기둥으로 구성된 극장은 200년 시간을 고스란히 견디고 있었다. ‘온나가타(여장 남자 배우)’의 미세한 몸짓과 떨림에 객석은 숨을 죽였다. 그 적막과 긴장을 나는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 온나가타는 여성을 연기하지만 결코 여성이 될 수 없다. 그 모순은 긴장을 만들고, 긴장은 또다시 아름다움으로 이어진다. 그날 가부키 관람은 일본 전통예술과 장인정신을 깊이 체감한 시간이었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가부키는 나에게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세계였다. 영화 ‘국보’를 보면서 비로소 실마리를 찾았다. 야쿠자 집안에서 태어나 가부키 가문으로 들어간 키쿠오, 명문 가부키 집안의 적자인 슌스케. 두 사람은 피와 재능 사이에서 흔들리고 질투하며 또 서로에게 기대며 성장한다. 무대 위에서는 한 몸처럼 호흡한다. 그러나 막이 내리면 각자 출발선으로 돌아가 갈등한다. 영화는 이들의 몸짓과 표정, 작은 진동까지 정교하게 잡아냈다. 예술영화임에도 상영 3시간 내내 어느 한 군데 걸림 없다. 감독은 군더더기 없는 언어와 탁월한 영상 미학으로 가부키를 재해석했다. 덕분에 관객들은 ‘가부키가 이렇게 흥미로운 장르였나’ 하며 감동한다. 영화는 재능은 부족해도 안정적인 금수저와,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한계를 절감하는 흑수저를 대비시킨다. 이는 재일교포 3세인 이상일 감독이 스스로 ‘경계인’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울림을 준다. 그는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어로 영화를 만들지만, 이름 앞에는 늘 ‘재일’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일본 사회에서 재일교포는 경계선에 서 있다. 어쩌면 감독은 아직도 혈통과 가문을 중시하는 일본 사회에서 자신처럼 경계인이 겪는 소외를 에둘러 말하는지 모른다. 주인공 키쿠오의 절망이 감독의 고백처럼 다가오는 이유다. 가부키 역사는 약 400년에 달한다. ‘기울다, 기괴하게 꾸미다’를 뜻하는 ‘카부쿠(傾く)’에서 유래한 가부키는 당시 기준으로 ‘튀는 춤’이었다. 초기에는 여성 배우들이 활동했으나 곧 남성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여장 남성 배우의 연기는 야릇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유사 에로티즘으로 연결된다. 가부키가 서민 예술로 자리 잡은 건, 에도 중기 상업·도시 문화가 발달하면서다. 지금도 많은 일본인들은 가부키를 즐긴다. 연기·무용·노래·악기·무대미술·의상·분장·기계장치가 결합한 종합예술이기 때문이다. 명문 가부키 가문에 각별한 예우를 보내는 것도 장인을 대하는 연장선이다. 전통 가문을 향한 팬심은 K-pop 팬덤과도 닮았다. 무엇보다 가부키는 일본인의 밑바닥 정서를 관통한다. 주군이나 연인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이야기, 사무라이 미의식, 전통 의상, 운율 있는 대사는 일본인에게 친숙하다. 최근에는 현대적 재해석과 콘텐츠화를 통해 지평을 넓히고 있다. 젊은 배우들은 영화·드라마·예능·광고에 등장하며 현대적 가부키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서울 ‘윤별발레컴퍼니’가 전통 갓을 발레와 결합해 새로운 표현을 만든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해외에서 가부키는 ‘세계에 내놓을 일본 대표 예술’로 평가받고 있다. 가부키와 비슷한 우리 창극도 부활 조짐을 보이고 있으니 다행이다. 우리 창극이 그랬듯 가부키 역시 극장과 배우, 관객 모두 감소 추세에 있다. 대신 색다른 일본문화를 찾는 외국 관광객들이 그 자리를 메운다. 도쿄·교토·후쿠오카·오사카·시코쿠 가부키 극장에는 외국인 관객이 꾸준하다. 이들은 가부키를 보면서 일본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인증 샷을 남긴다. 시코쿠 가나마루처럼 극장 투어만 하는 관광객도 상당하다. ‘국보’가 일본 실사 영화 1위에 오른 데는 이런 분위기가 밑바탕 됐고, 열기는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영화 성공은 가부키가 한층 대중적이고 생명력 있는 장르로 확장될 가능성을 열어놨다. 영화관을 나서며 시코쿠 가나마루 극장과 우치코 극장을 떠올렸다. 당시에는 그 공간들이 훗날 일본 실사영화 역대 흥행 1위 기록, 그리고 재일교포 감독의 집요한 시선으로 이어지리라 상상하지 못했다. 일본에서 가부키는 먼지 쌓인 박제가 아니다. 오랜 세월을 딛고 감성을 흔들며 일본은 무엇인지 묻고 있다. 일본을 이해한다는 건 결국 그들이 집요하게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형식을 이해하는 일지도 모른다. 봄이 오면 다시 시코쿠 가부키 극장을 찾고 싶다.
    영화 '국보'를 계기로 살핀 가부키 문화
    by 임병식
    2025.12.02 13:31:05
  • 새 정부 들어 앞으로의 경제활력은 인공지능(AI)에서 찾고 AI를 기반으로 삼아 세계 경제를 이끌어 가겠다는 전략이다. 식품분야에서도 마찬가지로 AI 기반산업으로 K-푸드 세계 시장을 이끌 수 있도록 정책적인 측면에서 잘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정부의 이러한 AI 분위기를 타고 일부 분야의 이익을 위해서 자칫 정부 정책이 잘못가게 하는 위험성이 곳곳에서 보인다. 마치 지난 윤석열 정부에서 ‘푸드테크’가 다 해결해주는 것처럼 호도하여 식품산업정책이 잘못된 것처럼 그럴 개연성이 보인다. 식품분야에서 AI를 이용한다는 것이 어떤 면이고 우리가 경계하여야 할 무엇인지 주목하고자 한다, 우선 제일 경계해야 할 분야가 AI를 이용하면 새로운 식품을 새로 개발할 것이라는 측면이다. AI를 이용하면 표준화하여 대량생산이나 자동화를 통하여 가격경쟁에 우위를 점할 것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 AI를 기술혁명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식품은 공산품만이 아니다. 먹는 사람들마다 기호성과 느낌, 선택성이 각각 다르다. AI 시대는 식품업은 농업에서 각 개인의 식탁에 이르기까지 각각 다른 소비자의 욕구와 건강을 도우는 방향으로 매우 차별적으로 독특하게 연결되어 가는 구조이다. 이 주장은 생산적인 측면만 내세우는 구조이기 때문에 정부가 이 방향으로 갈까 염려하는 부분이다. 미래 식품 AI 산업은 자연과 친화하고, 전통과 문화 그리고 맛과 건강이 있는 식품을 AI가 소비자에게 맞추어 정확하게 연결해주는 것이 핵심이다. 이렇게 소비자와 생산자가 연결되는 AI 경쟁력이 음식·식품 분야의 플랫폼 개발을 선도적으로 개발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물론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에 정부가 집중할 정도는 아니다. AI 플랫폼은 미국, 중국, 한국 등 세계적인 기업이 경쟁할 것이다. 우리나라 기업이 이 경쟁에서 뒤진다고 우리나라 식품과 음식이 죽는 것은 아니다. 플랫폼의 경쟁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어차피 경쟁에서 살아남은 하나의 플랫폼일 것이므로 조용히 지켜보는 것이다. 어느 플랫폼이든 이 플랫폼 안에서 우리나라 음식과 식품이 다른 나라 식품과 경쟁에서 이기면 되는 것이다. 어떤 플랫폼에서도 우리나라 식품업은 다른 나라 음식과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잠재력이 맛, 건강, 문화, 다양성 측면에서 충분히 있다. 식품업에서 우리 AI 플랫폼이나 피지컬 AI가 식품 제조와 유통 연결에서 세계를 통일하게 하는 것이 우리 농업과 음식이 발달하는 것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나라 음식과 식품이 세계 사람들의 선택을 받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한편으로는 식품산업 업자들이 디지털전환 디바이스 개발 문제에 식품산업의 AI 성공여부라고 열심히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 데 이 또한 플랫폼 개발과 같이 잘못된 방향이다. 하나의 디바이스만 살아남게 될 것이고 우리는 우리 기업이든 미국이나 중국 기업이든 상관없이 이용하면 된다. 물론 우리 기업이 최종 승자가 되었으면 바람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면 미래 AI 시대 우리나라 식품업이 성공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세계 식품시장에서 K-푸드 즉 우리 식품이 세계 사람들이 건강하고 맛있는 식품으로 사랑받고 선택받게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AI 시대에 K-푸드가 맛이 있고 건강성이 있는 다양한 식품으로 AI가 인식하고 이를 소비자에게 알려주는 것이 AI 시대에 우리 나라 음식, 식품, 농업, 식당이 사는 길이다. AI가 어떤 사람의 건강상태나 식생활에 맞추어 어떤 음식을 먹을 것인지를 알려주고, 밀키트 같은 것으로 식재료를 제공해주거나, 맞는 레스토랑을 소개해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음식에 대한 컨텐츠, 즉 역사 문화, 맛과 건강요소, 농업 생산과 재료에 관한 모든 자료가 AI 플랫폼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 들어갈 우리 음식의 데이터나 콘텐츠가 없다. 이렇게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역대 정부가 아예 이런 콘텐츠 창출에는 관심이 없었다. 지금 정부도 잘 인식하지 못할까 두렵다. 오직 기업에 제품개발하여 기업이 돈 버는 구조에만 관심이 있었고, 문화적인 콘텐츠의 중요성도 K-푸드 열풍을 타고 인식되고 있다. AI 시대에는 맛과 건강, 역사와 문화에 대한 정확하고 과학적인 콘텐츠를 정확하게 갖는 것이 미래 AI 시대 핵심 경쟁력이다. 이러한 과학기술 발전에 발맞춰 AI 시대 식품업 시장에서 개인 맞춤형 식품시장이 가장 활성화될 것이며, 이 시장에서 우리나라 K-푸드가 가장 경쟁력이 있다. AI는 잘못된 정보에 의한 오류를 매우 혁신적으로 극복할 것이다. 또한 생명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의 물리적 환경과 생물학적 특성의 표현이 AI가 구분할 수 있도록 더욱 세밀하고 정확해질 것이며 AI에 의하여 인간의 생물학적 요구에 맞춤형 음식이나 식품이 정확하고 연결될 것이다. 맞춤형 식품의 시대를 열고 선도하기 위해서는 기술적인 문제가 핵심이 아니라, 얼마나 정확한 데이터나 컨텐츠가 있느냐가 핵심 경쟁력이다. 이를 위하여 우리나라 정부 연구자가 데이터 창출에 힘을 쏟아야 한다. 동시에 우리 몸이 갖고 있는 생물학적 특징, 개인 맛 기호성, 후성유전학적인 특성에 대한 데이터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음식이 갖고 있는 지리, 역사, 농업, 음식 특성, 환경, 민족문화, 미식, 건강성에 대한 수많은 데이터를 창출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술만 강조되는 요즘 시대에는 놓치기 쉬운 중요한 문제입니다. 미래 AI 시대 개인 맞춤형 음식 시대의 도래와 그에 대응하는 식품으로 한국 식품이 세계를 제패할 수 있도록 차분히 준비하여 나가야 한다.
    AI 시대 식품 분야에서 무엇을 대비하여야 할 것인가?
    by 권대영
    2025.12.02 13:30:43
  • 주식투자의 수익률제고를 위해서는 장기투자가 필요하다고 한다. 장기투자의 장점은 많은 통계가 보여준다. 통계는 주식이 다른 자산군에 비해 높은 수익률을 보인다고 설명하는데, 이는 주식의 장기간 보유를 전제로 한다. 하지만 장기투자를 일관되게 실천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시시각각 쏟아지는 다양한 정보는 기존에 구축된 의사결정을 흔들기 때문이다. 장기투자는 고사하고 잦은 매매로 인해 기대하는 성과보다는 매매비용만 지불하는 역설을 맞게 되는 경우도 흔하다. 장기투자를 실행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트렌드를 이해하는 것이다. 트렌드에 대한 일관된 판단이 서게 되면 다양한 정보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 과거에도 그러한 사례는 많이 발견된다. 특히 100년 전 미국에서 전개되었던 전자제품과 자동차의 대중화 과정을 보면 여러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당시 신기술은 뚜렷한 트렌드를 형성하면서 1920년대 내내 주식시장을 강세장으로 이끌었다. 지금의 모빌리티, 인공지능(AI) 등의 기술 혁신이 새로운 트렌드를 형성하는 것과 유사하다. 신기술의 확산과정에는 공통적인 성장 궤적이 존재한다. 초기에는 혁신수용자 중심으로 급성장하다 대중시장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증가세가 일시적으로 둔화되는 캐즘(Chasm) 현상을 겪는다. 이 일시적 둔화기를 지나 특이점을 통과하면 대중으로의 확산 모멘텀이 매우 강해지는 패턴인 이른바 ‘옆으로 누운 S커브’ 곡선을 그리며 성장한다. 전기차(EV) 생태계도 이러한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문재인 정부 시절 전기차 생태계를 육성하기 위한 노력이 범정부적으로 추진되었다. 전기차 확산을 위해서 보조금 등 재정투입을 통해 전기차 충전 인프라를 우선 조성하였다. 공공재라는 인식 아래 정부 주도로 완속, 급속충전 인프라를 빠르게 확산시킨 것이다. 문제는 큰 길을 닦았는데, 그 길을 달리는 자동차 확산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점이다. 충전 인프라 기반을 계획대로 조성해 큰 길을 만들어 놓았지만, 전기차 판매량 증가세는 내연기관차 대비 높은 자동차 가격, 화재 위험 등으로 인해서 주춤했다. 중국, 유럽에서 전기차 판매 증가율이 20~40% 씩 성장하는 흐름과 달리 한국에서는 오히려 2023년과 지난해 전기차 판매 증가율이 감소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트렌드의 힘과 그에 따른 궤적 형성은 전기차 판매량에서도 예외 없이 확인되고 있다. 올해들어 한국의 전기차 신차 판매량이 20만 대를 넘어 역사적 최고치를 기록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캐즘을 벗어나는 조짐이다. 가격 인하, 기술 발전, 충전 인프라 등이 결합하면서 소비자가 체감하는 내연기관차 대비 소유 비용과 효용이 개선되고 있다는 인식이 트렌드 회복의 원동력이다. 인프라 산업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있어, 정부의 정책 의지와 대안은 매우 중요하다. 정부는 강력한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NDC)를 천명하며 2030년까지 전기차 판매 목표를 400만 대 이상으로 제시하고 있다. 충전 인프라 확산을 위한 노력도 병행하고 있다. 향후 5년 동안 전기차 판매는 4배, 전기차 충전 인프라는 2배로 확충하겠다는 구체적 목표를 제시했다. 여기서 충전 인프라 확대를 위한 다양한 민간 참여 방안이 더 폭넓게 검토되어야 한다. 정부의 재정 투입이 마중물 역할을 수행했다면 이제는 풍부한 민간의 장기 투자자금이 충전 인프라 시장으로 유입되도록 제도적 혁신을 강화해야 한다 전기차 충전산업은 안정적인 장기 현금흐름이 꾸준히 발생하는 대표적인 인프라 비즈니스이다. 안정적인 현금 흐름이 장기투자를 필요로 하는 일반 개인, 또는 장기 기관투자가들의 수요와 연결되도록 세제 및 금융 솔루션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야 한다. 특히 캐즘을 벗어나려는 시기에 추진되는 정책 믹스는 정책의 마중물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촉매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지난주 안호영, 강득구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공동주최하고 한국전기자동차협회가 주관해 국회에서 열린 ‘전기차리더스 포럼’은 그 의미가 컸다. 탄소중립 목표 달성을 위한 전기차 대전환 가속화를 위한 방안과 역할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기후에너지환경부와 국토교통부 등 정부와 산·학·연 등에서 보여준 생태계 발전을 위한 지대한 관심은 추운 날씨를 녹이는 뜨거운 열기처럼 느껴졌다.앞으로 혁신적인 전기차 생태계를 구축해 기후위기에도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미래 성장동력도 재점화하기 위해 사회적 관심을 모을 때다.
    전기차 2차 성장과 투자 생태계 전환
    by 김세중
    2025.12.01 17:44:36
  • 최근 서울 집값 과열에 따른 주택 규제가 다시 강화되는 가운데, 지방 부동산 시장에도 전세 가격에 이어 매매 가격이 상승 전환하는 변화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 2~3년간 침체가 깊었던 지방 주요 도시들에서 최근 들어 거래량이 살아나고, 일부 지역에서는 매도 호가도 상승하는 추세다. 이런 상황 속 새 정부가 제시한 ‘5극 3특’ 전략이 더해지며 지방 부동산 시장에는 오랜만에 훈풍이 불어오길 기대하는 심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지방 시장에서 이 정책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단순한 경기 반등을 넘어 앞으로 지역 구조를 재편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5극 3특은 전국을 다섯 개의 광역 경제권(수도권·동남권·대경권·중부권·호남권)으로 묶고, 별도로 세 개의 특화 권역(제주·강원·전북)을 설정해 지역별 강점을 극대화하는 초광역 전략이다. 과거에는 각 도시가 자체적인 성장 전략을 추진했다면, 이제는 광역권을 하나의 경제·생활권 단위로 묶어 효율성을 높이고 역할을 분담하는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다. 실제로 최근 발표되는 각 지자체의 도시기본계획에서도 이러한 흐름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계획의 핵심으로 도시 간 이동 시간 단축, 생활권 확장, 산업 기능의 광역 배치 등이 제시됐으며,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할 교통·산업·주거 전략도 상세히 담겨 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역시 광역 교통 인프라 분야다. 예를 들어 동남권에서는 부전–마산 철도와 동해선 광역철도 확충, 그리고 부산·양산·울산을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으려는 광역전철 사업이 도시기본계획에 명시되며 권역 통합의 속도를 높이고 있다. 대경권은 대구경북신공항을 중심으로 공항철도와 중앙선 복선화가 추진되고 구미·경산·의성·영천을 연결하는 광역 교통축이 강화되는 중이다. 중부권에서는 광역철도 1·2단계 사업과 세종–대전 BRT 고도화가 진행되고, KTX 세종역 논의가 더해지며 사실상 단일 생활권으로의 통합이 가속화되고 있다. 호남권 역시 광주도시철도 2호선, 광주–나주 광역철도, 전라선 고속화 등 다양한 교통망 개선이 병행되며 도시 간 접근성이 크게 높아질 전망이다. 특화권역인 강원 역시 동서고속철도와 춘천–속초 고속철도 같은 굵직한 사업을 통해 관광·산업 기능을 강화하려는 흐름이 나타난다. 이처럼 각 권역에서 추진되는 교통망 확충은 단순히 ‘이동이 편해진다’는 수준을 넘어 도시의 생활권과 가치 축을 완전히 재편하는 힘을 갖는다. 지방 부동산을 바라보는 기준도 기존의 소규모 도시 단위에서 대규모 ‘권역 단위’로 확대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렇다면 이런 변화 속에서 각 권역의 새로운 핵심지는 어디가 될까. 서울 강남처럼 전국적 상징성을 갖춘 지역이 아니더라도, 광역 교통망의 중심이 되거나 교육 인프라가 집중된 지역은 앞으로도 꾸준히 중심축 역할을 강화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지방은 인구·경제학적으로 학군지의 영향력이 수도권보다 더 크게 작용하는 특징이 있다. 대표적으로 대구 수성구나 광주 봉선동처럼 교육·생활 인프라가 집적된 지역은 광역 생활권 확장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중심지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모든 지역이 같은 속도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광역 생활권의 혜택이 집중되는 지역이 있는가 하면, 교통망과 산업 배치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는 지역도 생길 수 있다. 즉 광역화가 균형 발전을 목표로 하더라도 실제 시장에서는 중심부와 주변부 간 격차가 오히려 커질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어느 권역에 속하는가’가 아니라, 그 권역 안에서도 어떤 지역이 교통·학군·일자리라는 세 가지 핵심 축을 확보하느냐가 향후 가치의 분기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5극 3특 전략은 지방 부동산 시장에 오랜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광역 생활권의 확장은 지방 시장의 잠재력을 넓히는 동시에, 그 안에서 새로운 중심지가 어디가 될지를 재정의하고 있다. 향후 지방의 주거 전략을 세울 때는 ‘지역 전체’가 아니라 ‘권역의 중심축’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변화의 흐름을 정확히 읽는다면 지방 부동산에서도 충분한 기회가 열릴 수 있다.
    '5극 3특'이 지방 부동산 시장에 일으키는 새로운 변화
    by 윤수민
    2025.11.29 07:20:00
  • “사르르, 파닥파닥…” 바람이 속삭이듯, 나비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칠흑 같은 공간을 가르며 전통피리 소리가 흘러나오자, 마치 시간을 거슬러 과거에서 훅? 날아온 듯했다. AI가 빚어낸 은빛 입자를 날개에 묻히고 미래를 향해 비상하는 그 생명 에너지는 꽃가루처럼 흩어져 부드러운 빛의 파동으로 퍼져나갔다. 이어 각국의 숨결을 머금은 수많은 나비들이 모여들었다. 무대는 어느새 미디어 아트와 K-팝 퍼포먼스의 향연으로 변했고, 그 빛의 무도회는 곧 세계 정상들이 앉은 만찬 테이블까지 날아가 그들의 손등 위에 건네진다. 이 하이브리드 로봇 나비는 과연 무엇을 속삭이고 싶었을까? 이달 초에 있었던 이번 2025 APEC은 단순한 경제 회의가 아니었다. 오감으로 역사를 느끼고 피부로 미래를 체험하게 한 하나의 ‘수행적 예술(Performative Art)’이었다. 미·중 정상이 동시에 이 경주라는 무대에 오른 장면은 그 자체로 이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한 사건이었다. 회의실 안의 딱딱한 프로토콜과 달리, 무대 위에서 펼쳐진 나비의 비상과 빛의 파동은 긴장과 경쟁 속에서도 인간적 공감을 끌어내는 새로운 외교 언어였다. 하지만 그 화려한 막 뒤에서, 세계의 냉정한 시선은 묻고 있었다. “21개 회원국으로 구성된 APEC은 지리적 인연 외에는 거의 공통점이 없는, 그리고 깊은 정치·경제적 분열선으로 나뉜 느슨한 연합체에 불과하다” 고 영국의 가디언지는 지적했다. 이 깊은 분열선을 K-컬처의 스펙터클이 과연 가릴 수 있는가? 화려한 문화 쇼케이스가 다자주의나 세계 무역 규칙 같은 실질적 외교 성과(substantive diplomatic achievement)를 대체할 수 있는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국제적 통합이나 협력의 깊이를 향하는 것이 아닌 한국의 문화적 자산을 과시하는 ‘쇼’에 머무는 것은 아닌가? 오늘날 국제사회는 소통 불능의 시대에 놓여 있다. 지정학적 위기, 보호무역주의, 기술 패권 경쟁 속에서 세계는 만성적인 피로에 젖어가고 있다. 차갑게 깜빡이는 데이터만 오가고 인간적 체온은 사라진 시대. 모두가 연결되어 있지만 누구도 진정으로 소통하지 못하는 이 세계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흥미롭게도 그 해답은 천년 고도 경주에서 발견되었다. 통일신라 왕실이 추구했던 조화와 상생의 정신, 즉 모든 분열과 파란을 잠재우고 평안을 불러온다는 ‘만파식적(萬波息笛)’의 상징성은 오늘날 세계의 갈등 구조와 기묘하게 겹쳐졌다. 금관의 황금빛이 일렁이며 상기시키는 동서 교류의 역사적 기억 속에서, 예술은 규약도 조약도 아닌, 굳어버린 몸과 마음을 풀어내는 ‘미학적 요법’이 되었다. 경주의 오래된 돌길, 신라 궁성의 유적, 고분 사이로 바람이 불면, 그 속에서 느껴지는 시간의 겹침은 회의장에서 논리와 숫자만 오가는 현실과 대조를 이뤘다. 대한민국은 APEC의 3대 목표인 ‘연결(Connect)·혁신(Innovate)·번영(Prosper)’을 딱딱한 문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은유, 즉 나비로 표현했다. 나비는 단순한 심볼이 아니라 동서양 철학을 담은 하나의 사상적 매개체였다. 그것은 현실과 꿈, 국가와 국가 사이의 장벽을 허무는 장자(莊子)의 나비, 각국의 고유성을 존중하면서도 더 온전한 공동체로 변화(Metamorphosis)하는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의 나비, 고정된 국익의 논리를 넘어어 생성(Becoming)이라는 예측 불가능한 관계를 만들어내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나비였다. 그들의 손등에 내려앉은 하이브리드 나비는 이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가장 부드러운 것이, 가장 단단한 것을 이길 수 있다.” 공식 만찬에서 이 철학은 현실이 되었다. 대금의 호흡이 천년 신라의 명상적 시간을 열고, 이어진 지드래곤의 미디어 아트와 K-팝의 전율은 전통과 미래가 공명하는 순간을 만들었다. BTS RM의 차분한 스피치는 진정한 연결은 프로토콜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이어주려는 노력에서 시작되며 K-컬처가 단순한 흥행 콘텐츠를 넘어 사유의 힘을 지닌 예술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한류가 단순한 ‘흥행 수출품’이 아니라, 정치·경제적 소화불량을 풀어내는 미학적 장치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밤하늘을 수놓은 드론쇼는 기술이 패권 경쟁의 무기가 아니라 ‘연결’과 ‘번영’을 향한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선언했다. 하지만 그 찬란함 뒤에 가려진 그림자도 있었다. 외신들이 지적한 경주의 인프라 한계,부족한 숙박시설과 비효율적인 교통은 화려한 쇼케이스에 비해 현실적 준비가 미흡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다. 문화 외교가 아무리 훌륭해도, 그것을 떠받치는 기반시설은 냉정한 현실이며, 이 균열은 미·중 사이에서 실질적인 중재자 역할을 하려는 한국의 전략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순간은 다른 곳에 있었다. 문화적 공감대는 다음 날 실제 외교 무대에서 힘을 발휘했다. 난항을 겪던 한미 관세 협상의 극적 타결은 단순한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어젯밤의 감동과 서사는 협상 테이블 위에 보이지 않는 ‘신뢰의 자본’을 쌓아 올렸다. 경주에서 보낸 하룻밤은, 문화가 어떻게 가장 정교한 외교 무기이며, 경제 전쟁의 보이지 않는 전선이 될 수 있는지를 세계사에 증명했다. ‘문화쇼’가 어떻게 ‘실질적 외교 성과’로 이어지는지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었다. 경주는 시간을 축적하는 도시다. 이곳에서 정상들은 ‘지금, 여기’의 첨예한 이해관계를 넘어, 천년 전 신라의 외교관과, 혹은 천년 후의 역사가와 대화하하는 듯한 시간의 교란을 경험했다. 그들은 ‘국가의 대표자’가 아닌, 문명의 지속을 고민하는 ‘역사적 존재’로 자신을 재인식하게 된다. 분절되고 피로한 시대. 우리는 경주에서 보았다.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폭풍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가장 섬세하고 조용한 날갯짓이 어떻게 폭풍을 잠재우고 새로운 질서를 생성하는지를. 문화는 더 이상 외교의 장식품이 아니다. 그것은 시대를 관통하는 가장 강력한 목소리이자, 우리에게 남겨진 마지막 희망의 언어일지 모른다. 그날 밤 경주 하늘 위에서 수천 마리의 나비가 은빛과 금빛으로 날아오르며 남긴 메시지는 분명했다. 그것은 외교의 미래였다. 진정한 외교란, 힘의 논리나 숫자 경쟁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이 맞닿는 섬세한 공감, 그리고 작은 것에서 출발하는 큰 변화임을. 세계 무대에서 하나의 현실로 증명된 순간이었다. 이제 남은 질문은 이 날갯짓을 일회성의 장면으로 남길 것인지, 지속 가능한 국제질서의 언어로 발전시킬 것인지에 대한 우리의 선택이다.
    APEC으로 되돌아본 분열과 만파식적의 정신
    by 이경화
    2025.11.27 15:39:59
  • 1718년 7월 영국 왕 조지 1세는 신대륙 항로를 위협하는 카리브해의 해적을 진압하기 위해 사면령을 내렸다. 당시 바하마 나소(Nassau)에서 ‘해적공화국’(Republic of Pirates)을 무대로 해적들이 극성을 부리던 시기다. 이 때 해적공화국의 우두머리 벤자민 호르니골드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해적이 사면을 받고 해적 생활을 청산했다. ‘검은 수염’ 에드워드 티치도 사면을 받아들였다가 다시 해적으로 복귀했다. 처음부터 사면을 거부한 거의 유일한 해적이 바로 찰스 베인이다. 조지 1세의 명령을 받고 새로운 총독이 부임하는 날, 찰스 베인은 배 한 척에 불을 질러 나소 항구로 들어오는 총독의 함대로 밀어 보냈다. 사면을 거부하는 노골적인 신호다. 한 술 더 떠 바로 주변에서 프랑스 함선을 약탈한 뒤 불을 질러 가라앉혔다. 한 마디로 ‘엿 먹어라’는 도발이다. 베인의 해적질은 늘 불과 연기로 가득했다. 사방팔방에 불을 지르고 화약을 터뜨려 겁을 주면서, 분노와 광기로 가리지 않고 노략질하는 전형적인 해적이다. 총독과 해적사냥군들이 포위망을 좁혀 오자, 베인은 상선을 하나 장악한 뒤, 해군이 다가오자 부하들을 약탈당한 불쌍한 선원인 것처럼 행세하게 했다. ‘선원’들이 작전대로 거짓 정보를 흘리자 해군이 엉뚱한 곳으로 뱃머리를 돌리면서, 베인은 기민하고 대범하게 항구를 빠져나갔다. 단순한 무력뿐 아니라 정보전과 기만술에 두루 능통했으며, 부하를 따르게 만드는 리더십도 탁월했다. 영리한 만큼 무리한 전투를 피하려 한 게 문제였을까? 1718년 11월 카리브 해의 윈드워드 해협에서 프랑스 군함과 마주쳤을 때, ‘캘리코 잭’ 존 래컴이 부추긴 부하들의 반란으로 겁쟁이로 몰려 배에서 내렸다. 작은 해적질을 계속 하던 그는 이듬해 폭풍으로 무인도에 고립됐다가 발견되어 자메이카로 압송됐다. 1720년 베인은 교수형을 선고받고, 포트로열 항구에 매달렸다. 그는 눈 가리개를 거부하고 당당하게 최후를 맞았다. 향년 40세. 찰스 베인의 강경한 해적질은 ‘오라클’(Oracle)의 래리 엘리슨의 저돌적인 경영과 닮았다. ‘오라클’이 장악한 기업용 데이터베이스 시장에, 1998년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NT에서 작동하는 SQL 서버 7.0을 앞세우고 쳐들어왔다. 엘리슨은 ‘마이크로소프트’를 격렬하게 비난하면서, 장난감 같은 SQL 서버에서 제대로 작동하는 프로그램을 보여주면 1000만 달러(약 140억 원)를 주겠다고 도발했다. 실리콘밸리의 대표적인 독설가다. 반항적인 기질도 비슷하다. 영국 해군의 해적 소탕작전을 조롱하듯 약탈을 서슴지 않던 베인처럼, 엘리슨도 경쟁사가 점점 커지자 적대적 인수합병(M&A)으로 시장을 장악해 버렸다. 2000년대 초 ‘피플소프트’(PeopleSoft)가 M&A로 몸집을 키우자, 엘리슨은 아예 ‘피플소프트’를 삼키기로 작정했다. ‘피플소프트’를 뒤흔들며 집요하게 법정 투쟁을 벌인 엘리슨은 2005년 103억 달러에 인수하는데 성공했다. 세계 기업 M&A 역사에서 가장 극적이고 호전적인 사례로 꼽힌다. 정보전과 기만술도 악명이 높다. 엘리슨은 턱없이 낮은 가격으로 인수를 제안한 뒤, 다른 정보를 흘려 이사진을 이간질하면서 집요하게 ‘피플소프트’를 괴롭혔다. 미국 법무부를 움직여 ‘마이크로소프트’에 반독점 소송을 걸면서, 엘리슨은 사설 탐정을 써서 마이크로소프트 거래처의 휴지통까지 뒤지면서 법정에서 시비를 걸었다. 경쟁사 휴지통까지 헤집는 악랄한 경영자로 낙인 찍혔지만, 그는 진실을 밝히기 위한 정당한 행동이라고 끝까지 강변했다. ‘실리콘밸리의 사무라이’라는 별명을 좋아하는 엘리슨은 해적이 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췄다. “나는 성공에 필요한 모든 단점을 다 가지고 있다”(I have had all the disadvantages required for success)는 것이다. 사생아부터 가난까지 겪은 역경들이다. 그는 스스로 해적이라고 밝혔다. “나는 해적이다. 지금까지 항상 그래 왔고,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이다”(I‘m a pirate. I always have been. I always will be). 누구를 롤모델로 삼았을까?
    집요하게 달라붙어라 : 찰스 베인 & 래리 엘리슨
    by 허두영
    2025.11.26 18:39:46
  • 1977년 신경생리학자 앨런 홉슨은 맥컬리(McCarley)와 함께 한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꿈을 꾸는 렘(REM) 수면은 원시뇌인 뇌간(brain stem)에서 시작하는 무작위적인 신경의 활성화(activation)를 바탕으로 꿈이 만들어진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꿈의 주된 동기는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생리적인 것”이라고 했다. 이는 꿈을 무의식적 소망의 표현으로 보았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관점에 정면으로 대립하는 신경생물학적 이론이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날 아내인 리아의 부정을 의심하는 꿈을 꾼다. “리아와 내가 유럽을 여행 중인데, 우리는 아주 많은 사람들과 함께 다리를 건너고 있다. 높은 아치형 중세 건너편에 있는 작은 마을을 향해 아주 작은 강을 미끄러지듯 간다. 배가 강기슭에 다다르자 이미 서로를 찾아내기가 어려워진다. 리아가 힐끗힐끗 보인다. 그녀가 누군가와 이야기 하고 있다. 어떤 남자다. 우리가 배에서 내리기 전 아니면 직후에 그녀가 나의 드릴 촉을 그 남자에게 주는, 또는 팔아버리는 모습이 보인다. 그 드릴 촉은 내가 버몬트주에서 나무에 구멍을 내기 위해 커다란 손잡이가 달린 드릴에 꽂아서 사용하던 것이다. 나는 깜짝 놀랐고 속이 좀 상했다. 또한 그 남자가 메고 있는 숄더백에 그 드릴 촉을 사용해서 완벽한 구멍을 낸 것이 보인다. 그런데 그 숄더백은 내 것과 아주 비슷한 것이다.” 꿈은 이어진다. “리아는 그 드릴 촉을 팔고 받은 돈을 나에게 주겠다고 해명한다. 내가 가장 아끼는 공구 중 하나를 나에게 묻지도 않고 낯선 사람에게 넘겼다는 사실이 여전히 뜻밖이다. 나는 아주 불안하고 짜증이 난다. 뭍에 다다르자 여관을 찾아서 돌아다니다가 여러 차례 서로 헤어진다. 같이 헤메는 어느 한때 그녀는 나에게 자기만의 비밀스런 삶이 필요하다고 분명히 밝힌다. 내가 그 남자에 대해서 묻자 그녀는 자신이 원하면 자유롭게 그 남자와 연인관계가 될 뜻이 있음을 명백히 한다. 나는 매우 당황스럽고 불안해서 내 걱정을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우리가 마침내 그 여관 같아 보이는 곳에 도착하자 또다시 그녀를 찾기 힘든 이상한 상황이 된다. 그러다가 부엌으로 보이는 곳에 그녀가 있는 게 보인다. 그녀는 무언가 음식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나는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건 너무나 알팍한 핑계이기 때문이다. 요리가 언제 끝날지를 물어보자 그녀는 시계를 보더니 45분이라고 답한다. 나는 그녀가 어느 낯선 남자를 선택하든 간에 45분이면 그와 사랑을 나누는 데 충분한 시간이 될 것이다. ‘그럼 그렇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꿈은 홉슨이 뇌졸중을 앓고 있던 60대 후반에 꾼 꿈이다. 병든 홉슨이 40대 초반으로 젊은 아내와 살면서 느끼는 심리적 불안감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뇌졸중이 발병한지 38일 지나서 이 꿈을 꾸었다. 홉슨은 이 꿈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이 꿈은 바로 나의 장애로 인해 리아와 계속 함께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지 않을까 하는 나 자신의 두려움이다. 깨여 있는 동안에는 이 두려움의 의식 속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데, 꿈 속에서는 리아가 다른 남자의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녀가 남자의 유혹에 쉽게 넘어갈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 자신이 분명히 잘 알고 있으면서도, 꿈속에서는 나의 두려움과 과거 나의 외도의 내력이 합세해서 그녀를 결혼이라는 보금자리를 박차고 나갈지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홉슨은 렘 수면 상태에서 이 꿈을 꾼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꿈 속에서 질투했던 낮선 남자는 정체불명에다가 행동도 이상하고, 드릴 촉과 내 숄더 백에 난 구멍은 ‘프로이트식으로 해석해야만 말이되고’, 호텔에서 내 아내가 요리를 한다는 것도 그럴듯하지 않은 일이다. 이런 이질적인 요소들은 하나로 묶는 일관적이고 강력한 정서가 이 꿈에 명백한 의미를 부여한다. 즉, 건강이 악화된 상태에서 나는 가장 중요한 동반자이자 강력한 지지자인 내 아내를 잃을까 봐 걱정을 하는 것이다.” 홉슨의 말대로 이 꿈은 심리몽으로 젊음과 건강을 상실한 홉슨의 두려움이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프로이트식으로 해석해야 말이 된다’는 의미는 드릴촉은 남성성, 백에난 구멍은 여성성을 상징한다는 뜻이다. 2005년에 발간한 홉슨은 자신의 저서 『프로이트가 꾸지 못한 13가지 꿈』의 서문을 이렇게 시작했다. “꿈이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는 열쇠라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믿음은 올바른 것이었다. 또한 과학적 심리학은 뇌에 토대를 둘 필요가 있다는 그이 가정도 올바른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 토대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 생각에 그가 마음의 과학에 기여한 바는 좋게 말하면 진부하고 나쁘게 말하면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홉슨은 프로이트의 꿈 해석에 대한 관점을 일부 인정하면서도 신경생리학적 측면에서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철회하지는 않았다. 꿈에 대한 신경생리학적인 홉슨의 견해는 또다른 신경생리학자에 의해서 크게 논박을 당했다. 그의 이름은 마크 솜스(Mark Solms)이다.
    아내의 외도를 의심하는 남편의 꿈
    by 국경복
    2025.11.26 18:30:20
  • 최근 몇 년 사이 상장회사를 둘러싼 경영권 분쟁이 급증하면서, 상장회사의 자금 운용 방식은 주주행동주의와 경영권 분쟁 상대 세력으로부터 정밀한 감시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상장 직후나 상장사 인수 직후 자주 목격하는 장면은 비슷하다. “상장으로 회사 신용도도 좋아졌으니, 그룹 전체 자금을 좀 더 효율적으로 돌려보자.” 이러한 의사결정은 겉으로는 효율적인 자금 운용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비상장 계열사나 오너 일가의 자금난을 상장회사 재원으로 메우려는 시도가 섞여 있는 경우가 많다. 이번 칼럼에서 다루는 상법 제542조의9, 상장회사의 신용공여 금지 규정은 이러한 유혹에 대해 법이 얼마나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조항이다. 상장과 동시에 시작되는 ‘돈줄 규제’ 상법 제542조의9는 상장회사가 주요주주, 이사·집행임원, 감사 및 그 특수관계인에게 자금을 대여하거나, 그 채무를 보증하거나, 자금 지원성 증권을 인수하는 등 신용공여를 원칙적으로 금지한다. 이를 위반하여 신용공여를 승인하거나 집행한 이사 등은 5년 이하 징역 또는 2억 원 이하 벌금에 처해질 수 있고, 회사도 양벌규정에 따라 함께 처벌된다. 단순히 의혹이 제기되는 거래 수준을 넘어 곧바로 형사책임으로 이어질 수 있는 행위다. 외부감사인 역시 외부감사법에 따라 이러한 부정행위를 인지하면 금융감독원 등에 보고할 의무를 진다. 이 규정은 상장회사 내부의 거버넌스 차원을 넘어, 형사책임·외부감사·공시의무가 동시에 연동되는 고위험 규정으로 기능한다. 한 번 잘못 판단하여 거래를 실행하면 사후적으로 되돌리기 어렵다는 점에서, 상장 직후 또는 상장사 인수 직후 특히 치명적이다. 신용공여 금지 - 단순히 대여만 막는 조항이 아니다 실무에서 가장 흔한 오해는 “대표이사나 대주주 개인 앞으로 대여만 안 받으면 되는 것 아니냐”는 인식이다. 그러나 법이 말하는 신용공여의 범위는 훨씬 넓다. 우선 금전·재산의 대여가 있다. 이는 명시적인 대여금 계약뿐 아니라, 반복적·장기적인 가지급금, 비정상적인 외상 거래 등 실질적으로 자금을 빌려주는 효과를 가지는 거래 전반을 포괄한다. 다음으로 채무이행 보증 및 담보 제공이 있다. 계열회사 대출에 상장사가 연대보증을 서거나, 상장사 명의 부동산·예금에 담보를 설정해 주는 경우가 전형적이다. 여기에 재무상태가 악화된 계열사 발행 신주·회사채·전환사채를 사실상 구제금융 성격으로 인수하는 자금 지원성 증권 매입, 이해관계자의 채무를 보완하기 위한 출자 이행 약정·자금보충약정 등도 모두 신용공여로 평가될 수 있다. 형식이 복잡한 파생상품 거래라고 해서 예외가 되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특수관계자가 보유한 자산을 상장사가 매입하면서 일정 기간 후 원금과 고정 수익을 더해 다시 되사는 구조(총수익스왑(TRS) 등)는 명목상 자산 거래지만, 실질은 “이자를 붙여 돈을 빌려주는 거래”에 가깝다. 결국 요지는 간명하다. 상대방이 채무불이행에 빠질 경우 그 손실을 상장사가 떠안는 구조라면, 형식이 어떻든 신용공여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이다. 누가 금지 대상인가 - ‘특수관계인 지도’부터 그려라 상법이 정한 금지 상대방의 범위는 생각보다 넓다. 이 규정은 우선 주요주주 및 그 특수관계인을 금지 대상으로 삼는다. 주요주주는 통상 의결권 있는 주식 10% 이상 보유자를 의미하지만, 그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회사의 주요 경영 사항에 사실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 역시 포함될 수 있다. 이른바 실질 지배주주 개념이다. 개인 주요주주의 배우자, 6촌 이내 혈족, 4촌 이내 인척뿐 아니라, 이들이 30% 이상 출자하거나 지배력을 행사하는 법인, 그리고 그 법인의 임원까지 모두 특수관계인이 된다. 여기에 법인 주요주주와 그 계열회사 및 임원까지 더해지면, 상장사 기준에서 보면 사실상 그룹 전체 지도가 신용공여 규제의 검토 대상 안에 들어온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사회·재무팀·법무팀이 공통으로 가져야 할 첫 번째 작업은 “그룹 지분 구조도 + 오너 일가 가족관계도”를 상시 업데이트해 두는 것이다. 이 기반 없이 신용공여 규정 준수 여부를 논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예외는 있다 - 그러나 ‘경영상 필요’는 좁게 본다 그렇다고 상장사가 이해관계자에게 어떠한 신용도 제공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상법은 세 가지 예외를 두고 있다. 첫째, 학자금·주택자금·의료비 등 임원 복리후생 목적의 금전대여다. 1인당 3억 원 한도 내에서만 허용되며, 용도·절차가 내부 규정에 따라 공정하게 운영돼야 한다. 둘째, 다른 법령에서 명시적으로 허용하는 신용공여다. 자본시장법이 허용하는 일정 범위의 임원 신용공여 등이 여기에 속한다. 셋째이자 핵심 예외가 “상장회사의 경영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필요하고, 상장회사의 경영건전성을 해칠 우려가 없는 신용공여”다. 계열사 간 시너지 창출, 사업 구조 재편 등 현실을 감안한 조항이지만 실제 적용 범위는 상당히 좁다. 이 예외를 주장하려면 적어도 네 가지 질문에 모두 “예”라고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거래가 오너가 아니라 상장회사 자신의 사업 목적 달성에 명백히 기여하는지, 신용공여의 상대방이 자연인이 아닌 법인 형태의 주요주주 또는 그 특수관계 법인인지, 상법 제398조에 따른 자기거래 승인 절차(이사회 사전 승인, 이해관계 이사 의결권 배제 등)를 빠짐없이 거쳤는지, 지원 규모와 조건을 감안할 때 상장회사의 재무 건전성을 해칠 우려가 없다는 점을 입증할 수 있는지가 그것이다. 이 중 어느 하나라도 자신 있게 설명하지 못한다면, “경영상 필요”라는 말은 법정에서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실제 사례 : 만도–한라 사건의 함의 이 규정이 단순 이론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가 이른바 만도–한라 사건이다. 2013년 한라건설은 대규모 제3자 배정 유상증자를 실시했고, 상장사 만도는 직접 참여하지 않고 자회사 마이스터에 출자한 뒤, 마이스터가 그 자금으로 한라건설 신주 대부분을 인수하는 구조를 택했다. 경제개혁연대는 이를 상장사 만도가 자회사를 우회해 그룹 지배회사 한라건설을 지원한 것이라고 보고, 상법상 신용공여 금지 및 계열사 부당지원 혐의로 고발했다. 검찰은 이 거래가 원칙적으로 자금 지원성 증권 매입에 해당하는 신용공여라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한라건설 지분 가치 상승 가능성, 그룹 재무 안정, 만도의 장기 성장 동력 유지 등을 이유로 상법 제542조의9 제2항 제3호의 ‘경영상 필요 거래’에 해당한다고 보아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반면 경제개혁연대는 “이러한 논리라면 거의 모든 부실 계열사 지원이 ‘경영상 필요’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이 사건은 그룹 전체의 추상적 이익과 상장회사 자신에게 귀속되는 구체적 이익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지, 그리고 신용공여 예외를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지에 관한 어려운 질문을 남겼다. 신규 상장·상장사 인수 직후, 반드시 거쳐야 할 점검 신규 상장 직후나 상장사 인수 직후 1~2년은 그룹 전체 자금 구조를 다시 짜는 시기다. 바로 이때 “한 번쯤은 괜찮겠지”라는 가벼운 판단이 수년 뒤 형사 고발과 경영권 분쟁으로 되돌아오는 경우를 실무에서 자주 목격한다. 따라서 경영진은 최소한 다음을 점검해야 한다. 이 거래가 신용공여에 해당하는지, 상대방이 주요주주·임원·특수관계인에 속하는지, 예외 사유를 주장한다면 이를 문서와 수치로 입증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설령 상법상 허용 범위 안에 있다 하더라도 업무상 배임, 공정거래법상 부당지원, 자본시장법상 공시 의무 위반 가능성은 없는지 별도로 검토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상장사의 돈은 내 돈이 아니다” 요약하면 상법 제542조의9는 상장회사 자금이 더 이상 오너 개인의 지갑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 주주와 채권자의 신뢰가 집적된 공적 자금이라는 점을 법적으로 확인하는 조항이다. 신규 상장이나 상장사 인수 이후 “가족 회사 이자 몇 달만 대신 내주자”, “지분 구조가 복잡하니 우리 쪽 페이퍼컴퍼니로 한 번 돌려놓자”는 식의 사소해 보이는 결정이 향후 형사처벌·상장적격성 실질심사·경영권 분쟁의 직접적인 기폭제가 될 수 있다. 상장회사 경영자가 기억해야 할 문장은 결국 하나다. “상장사의 돈은 내 돈이 아니다. ‘경영상 필요’라는 말은 내 입이 아니라, 법원과 검찰을 설득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좋아 보이는 딜보다 분쟁과 제재로부터 자유로운 딜을 선택하는 것, 상법 제542조의9를 정확히 이해하고 전제한 자금 구조 설계가 신규 상장·상장사 인수 이후 경영자가 가장 먼저 수행해야 할 진정한 거버넌스 작업이다.
    신규 상장 또는 상장사 인수 후, 주요주주·계열사 등 특수관계인에 대한 자금 지원은 원칙적으로 금지된다
    by 최승환
    2025.11.22 09:00:00
  • 대입시험은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다 대학수학능력시험, 일명 수능에 이르렀다. 가끔 재미삼아 국어와 영어 수능문제를 풀어보곤 한다. 학력고사 세대에겐 낯선 문제 유형이어서 답을 틀리기는 하지만 솔직히 못풀 정도로 어려운 문제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단 시간이 없다. 없어도 너무 없다. 지문의 양을 보면 엄두가 나지 않는다. 지문을 다시 읽는 순간 찍을 수밖에 없는 문제가 빤히 기다리고 있다. 결국 아는 문제를 틀리도록 만드는 아주 저질의 문제구조다. 속독 능력을 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시간이 충분하면 충분히 맞출 수 있는 문제를 내놓고 시간으로 공격해 들어온다. 이것을 대학에 진학해서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을 평가하는 문제라고 저렇게 버젓이 낸다.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또 미안할 뿐이다. 마루치 아라치를 추억하며 살아가는 학력고사 세대야 그렇다 치더라도 21세기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인공지능(AI)과 로봇과 경쟁하며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에게 이따위 문제로 줄을 세운다. 공자께서 “가르치지 않은 백성을 전쟁터로 보내는 것은 그들을 내다 버리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5지 선다형 문제를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고 기계적으로 풀도록 가르치고는 혁신적 생각으로 도전하지 않으면 망할 수밖에 없는 험한 세상속으로 뛰어들도록 하고 있으니 이것이 아이들을 내다 버리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렇다면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우선 확인해봐야 할 사항이 있다. 너무 미안한 이야기지만 일단 선생님들도 공개된 장소에서 아이들과 똑같은 조건에서 풀어 보자. 만약 자기도 시간 내에 풀 수 없는 문제를 내 놓고 아이들보고 풀라고 한 것이라면 세상에 이보다 더 뻔뻔스러운 짓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아이들에게 떳떳하게 보여주자. 시간내에 풀 수 있는 사람이 너희들을 가르쳤다는 것을. 그게 증명되어야 시험이 최소한의 정당성을 획득하지 않겠는가. 참고로 미국직무훈련기간 개인적으로 영어를 가르쳐 주던 미국인 친구도 시간 내에 풀어내지 못했다. 다음으로 대한의 교육은 끔찍할 정도로 망가졌다는 것을 인정하자. 슈바이처 박사의 전기를 읽고 의사가 되는 꿈을 갔게된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12년의 교육을 받으면 어떻게 변해 있을까? 꿈이 의사인 고등학생에게 슈바이처 박사를 읽었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할까? 그 인간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는 듯 어이없이 쳐다보지 않을까? 대한의 교육은 교육이랍시고 아이들의 순수함에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이런 아이들이 의대에 진학을 하니 의대생들이 이미 기성세대 의사보다 더 기득권에 집착하고 있지 않은가? 자신들이 속한 집단의 이해를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수업을 거부하고 심지어 환자를 거부까지 한다. 그야말로 똘똘 잘도 뭉친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되었을까. 어른들이 정신차려야 한다. 한 가지 제안을 해본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따르면 2026학년도 수능을 위해 수능 출제·검토위원 500여명, 진행·급식·보안 등 행정 업무 담당 230여명 등 총 730여명이 40일간 합숙 생활을 해왔다고 한다. 수 십년간 기막힌(?) 문제를 내느라고 쏟아부은 에너지의 반이라도 우리 교육의 근본적 문제 해결을 위해 쏟았다면 과연 이 문제가 지금 이토록 곪아 썩어 문드러졌겠는가. 문제가 있음에도 문제를 해결하려하지 않고 옛날 방식에서 허우적대는 이유가 무엇인가? 정말 이대로 침몰하는 대한민국호를 그대로 두고 볼 작정인가?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오로지 교육시스템 개혁에 몰입하기 위해 기꺼이 스스로를 감금할 열정이 있는 교육 전문가 500명을 모아 수능 출제·검토위원처럼 합숙 생활을 해보자. 불가능한 문제가 아니라 가능하지만 어려운 문제다. 우리가 아직 찾지 못했을 뿐 해결 방안은 분명 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더 늦기 전에 찾아내야 한다. 이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어른들의 엄중한 책무다. 단테의 말로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자신이 옛 사람들의 수고로 부유해진 이상, 자신도 후손을 위하여 수고함으로써 후손들에게도 그 덕분에 부유해질 만한 것들을 남겨야 한다. 사회 문제에 관한 이론을 습득한 사람으로서 국가에 어떤 이바지를 하고자 고심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자기 본분을 멀리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 힘든 여건에서도 진정한 스승으로 그리고 진정한 의료인으로 살고 계시는 분들에게 더없는 존경심을 보낸다. 혹시라도 위의 글로 마음에 상처받지 않으셨길 바란다.
    수능 단상(斷想)
    by 유상조
    2025.11.20 15:35:58
  • 전기는 잠깐 꺼져도 도시가 멈춘다. 우리 일상의 판박이인 디지털은 더하다. 결제·물류·의료·행정·교육·통신이 한순간 멎으면 피해는 가장 약한 고리부터 번진다. 정부나 기업은 해킹을 막는 보안에 익숙하지만, 멈추지 않게 하는 능력인 회복력(Resilience)을 법의 언어로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 이에 제안한다. 이름 그대로 (가칭) ‘디지털서비스 안전 및 회복력 확보를 위한 법률’의 제정이다. 약칭으로 ‘디지털 회복력법’이라 부르자. 몇 년 전 판교 데이터센터 화재로 민간의 부실한 대응을 보았다면 공공의 ‘국가정보자원관리원 사태’에서 보듯 오늘의 위험은 기술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이다. 데이터센터 한 곳의 화재·전력·냉각 이슈가 국가적 장애로 번지고, 클라우드·망·전력·해저케이블의 상호의존이 도미노 효과를 낸다.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서비스는 편의를 가져왔지만, 사이버와 현실의 복합적인 위험을 일상화하고 있다. 정부의 내부통제만으로는 공공서비스의 안전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점을 확인했다. 국가 차원의 최소 의무와 공적 감독, 투명한 정보 공유가 필요하다. 이를 위한 공공부문의 전문성 확보와 공공 클라우드를 확대할 필요가 크다는 점을 확인했다. ‘디지털 회복력법’의 목표는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예방을 통한 단일 장애지점을 줄이고 이원화·대체 경로를 갖춘다. 둘째, 대응을 통한 중대한 장애를 빠르고 투명하게 알리고 함께 대응한다. 셋째, 복구를 통한 정해진 시간과 시점 안에 정상화한다. 사고나 장애의 완벽한 통제는 불가능한 영역일 수 있다. 대신, 사전 안전조치와 사후 복구를 얼마나 빨리 하느냐는 디지털 탄력성 확보가 관건이다. 무엇보다 ‘디지털 회복력법’은 규제가 아니라 디지털 서비스의 빠른 복구를 위한 법이어야 한다. 과잉규제를 피하려면 핀셋이 필요하다. 사회·경제에 파급효과가 큰 서비스를 ‘중요 디지털서비스’로 지정하고, 등급으로 나눠 의무 강도를 달리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금융결제, 응급·의료, 통신·전력, 대국민 행정, 대규모 커머스·물류, 대형 클라우드·협업·교육 플랫폼이 여기에 해당한다. 핵심 서비스에는 다중 지역·가용영역, 전력·망 이원화 같은 설계 원칙을 요구한다. 공공과 민간을 동일한 영역에 놓되 비례성과 기술중립성을 원칙으로 삼는다. ‘디지털 회복력법’의 핵심 내용은 복잡하지 않다. 첫째, 연속성 지표의 의무화다. 가용성과 복구시간 목표(RTO), 복구시점 목표(RPO)를 등급별로 설정·공시한다. 말뿐인 ‘무중단’이 아니라 수치로 약속하도록 한다. 둘째, 모의훈련과 스트레스 테스트다. 카오스 엔지니어링처럼 실제 복원력을 검증하는 시험을 성과로 인정한다. 셋째, 공급망·서드파티 리스크 관리이다. 공공기관은 보안을 이유로 경쟁력있는 클라우드 도입을 지양하고 있다. 전문클라우드 기업이 오히려 탄력성이 있으나, 차선으로 민관협력 PPP형 클라우드를 확대하는 것도 방법이다. 넷째, 데이터 이동성과 락인 완화이다. 핵심 데이터·로그는 표준 포맷으로 백업하고, 필요시 핫·웜 스탠바이로 전환 가능해야 한다. 복구 과정에서도 암호화·접근통제·키관리를 유지해 정보보호와 회복력을 이중으로 확보할 수 있도록 한다. 마지막으로, 책임도 분명해야 한다. 클라우드사업자와 기업이나 기관의 공동책임 모델을 법률·표준계약으로 명문화한다. 사고조사를 위한 독립적인 조사위원회가 원인과 교훈을 공개하고, 결과는 공통 학습으로 환류한다. 실패에서 배우는 시스템이 곧 회복력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다만, 조사위원회는 회복을 방해해서는 않된다. 전반적인 상황을 다룰 거버넌스도 정비할 필요가 있다. 디지털 서비스의 안전 및 회복을 위한 거버넌스는 중앙정부, 지방정부 및 민간을 아우를 수 있어야 한다. 국무총리 산하 디지털안전위원회를 상설화해 컨트롤타워로 삼고, 해저케이블·국가 백본·전력 연계 같은 ‘보이지 않는 병목’을 주기적으로 점검하고 국가전략적 투자를 해야 한다. 한 번의 사태가 남긴 사회적 비용과 신뢰 훼손을 생각하면, 지금의 투자가 더 저렴하다. ‘비용’이 아니라 ‘보험료’로 생각할 일이다. 입법은 사업자나 기관을 옥죄려는 것이 아니다. 국가 신경망을 끊기지 않게 하는 사회적 약속이다. 끊김 없이 돌아가고, 사고가 나도 빨리 일어서는 나라, 그 상식을 법으로 만들 때이다. 디지털 대전환기, 안전과 회복력은 선택이 아니라 국민의 디지털 기본권을 위한 인프라이다. 그것이 AI 기본사회를 위한 초석이라고 본다.
    디지털 안전과 탄력성
    by 김윤명
    2025.11.20 15:33:34
  • 1701년 5월 영국 템즈강의 한 항구에서 가엾은 해적 선장이 교수형을 당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구석구석 결박당하고 목은 올가미에 걸린 채 축 늘어져 쇠창살에 갇힌 상태로 죽었다. 향년 47세. 당국은 해적질에 대한 경고로 썩어 문드러져 해골이 드러날 때까지 시신을 거두지 못하게 했다. 억울하게 해적으로 몰려 사형당했다가, 가장 유명한 해적으로 부활한 ‘캡틴 키드’(Captain Kidd)라는 애칭을 가진 윌리엄 키드다. ‘캡틴 키드’는 원래 영국 정부의 허가를 받고 해적질을 하는 사략선(私掠船)을 지휘했다. 무굴제국 황제 에우랑제브의 무역선 ‘콰다르 머천트’(Quedagh Merchant)는 왜 하필 그 때 프랑스 국기를 달았을까? ‘캡틴 키드’는 1698년 ‘콰다르 머천트’를 붙잡아 엄청난 보물을 털었다. 분노한 무굴제국의 협박에 영국은 ‘캡틴 키드’를 해적으로 몰고 대대적으로 수배령을 내렸다. 이 때 건 현상금만 해도 2000 파운드(100억원)를 넘었다고 한다. 정치의 세계는 그렇게 비굴한가? 졸지에 해적으로 몰린 ‘캡틴 키드’는 자신을 후원하던 뉴욕 식민지 총독 벨로몬트 경에게 편지를 보냈다. 살려주면 숨겨놓은 100만 파운드(5조원)의 보물을 넘겨주겠다는 것이다. 이 때 ‘캡틴 키드’가 준 보물지도로 뉴욕의 가디너 섬을 뒤진 결과 1만 파운드(500억원)의 보물이 발견됐다. 해적이 숨긴 보물을 보물지도로 찾아낸 매우 드문 사례다. 총독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자수한 ‘캡틴 키드’를 체포해서 보물과 함께 영국으로 보냈다. 보물은 재판에서 해적질 증거로 채택됐다. 편지는 해적 역사상 가장 낭만적인 전설을 만들어냈다. 보물지도만 있으면 보물섬에 가서 해적의 보물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캡틴 키드’가 숨긴 나머지 보물이 어느 외딴 섬에 묻혀 있을 것이라는 즐거운 상상이다.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 ‘황금풍뎅이’와 로버트 스티븐슨의 동화 ‘보물섬’은 ‘캡틴 키드’의 편지를 근거로 대중의 상상을 자극했다. 우연히 골동품 상자나 서류에서 ‘W.K.’(William Kidd)라는 서명이나, 시기를 뜻하는 연도 ‘1669’나, 장소를 가리키는 ‘China Sea’와 비슷한 흔적을 보면, ‘캡틴 키드’가 숨긴 보물을 찾는 단서가 아닐지 의심해 볼 일이다. 가엾은 ‘캡틴 키드’가 겪은 비극은 ‘메가업로드’(Megaupload) 창업자 킴 닷컴(Kim Dotcom)의 사례와 비슷해 보인다. 킴 닷컴은 디지털 밀레니엄 저작권법(DMCA)에서 사용자가 올린 콘텐츠의 책임은 서비스 제공자가 아닌 사용자에게 있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미국 법무부는 ‘메가업로드’가 저작권 침해를 방조한다며 조직적인 범죄집단으로 규정했다. 새로운 기술이 법규와 부딪힐 때, 법적인 위험을 감안해야 한다. 법률과 자본을 틀어쥔 정부 앞에 개인은 얼마나 무력한가? 킴 닷컴은 컴퓨터 보안 전문가로 협력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미국 정부가 자신에게 우호적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영화계와 음반계가 ‘메가업로드’를 디지털 해적으로 몰아 부치자, 미국 정부가 태도를 바꿔 ‘메가업로드’를 공공의 적으로 규정해 버렸다. 미국이 압박을 높이자 뉴질랜드 법원도 미국 송환에 동의한 가운데, 킴 닷컴은 아직도 건강을 핑계로 뉴질랜드에서 버티고 있다. 그렇다. 정부나 권력자는 언제든지 약속을 깰 수 있다! 영국 정부가 ‘해적’ 프레임을 씌우고 체포하려 하자, ‘캡틴 키드’는 쉽사리 보물지도를 넘겨주는 바람에 협상에서 주도권을 뺏겼다. 킴 닷컴도 마찬가지다. 미국 정부가 ‘범죄자’ 프레임을 씌우고 자산을 압류하거나 동결하면서 방어 수단이 사라진 것이다. 킴 닷컴은 스스로 ‘인터넷 자유의 수호자’(Guardian of Internet Freedom)라고 언론에 호소했지만, 지루한 법정 다툼이 10년 넘게 이어지면서 자금과 건강을 모두 소진해 버렸다. 해적-보물지도-보물섬으로 이어지는 해적 설화는 거의 대부분 ‘캡틴 키드’의 편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동화 ‘보물선’의 롱 존 실버나 ‘피터팬’의 후크 선장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해적의 대명사는 ‘검은 수염’ 에드워드 티치로 꼽힌다. 왜 ‘캡틴 키드’는 극적인 배경만 제공하고, 주인공이 되지 못한 걸까? 해적으로 낙인 찍히기 싫었던 ‘해적’이기 때문이다. 협상에 실패하면, 차라리 도끼를 들고 진짜 해적이 되는 게 낫지 않을까?
    정부의 약속을 믿지 마라 : 윌리엄 키드 & 킴 닷컴
    by 허두영
    2025.11.20 15:31:42
  • 성공하는 스타트업의 6가지 쌍디귿 자(똑, 때, 뜸, 뚝, 뚱, 똘) 법칙이 있다. ‘똑’은 똑똑함, 즉 전문성이다. 스타트업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전문성이다. 스타트업이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다. 적은 인력으로 틈새 시장 또는 새로운 시장을 발굴하여 그 기업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식당에 가고자 할 때, 한 곳은 ‘한국 식당’이고 다른 곳은 ‘한국 설렁탕’이라고 한다면 어디를 선택하겠는가? 아무래도 이것 저것 다하는 식당보다는 한 가지를 전문적으로 하는 식당이 맛도 더 있을 것이다. ‘때’는 시간, 즉 적기에 시장에서 필요한 제품 또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Time to Market)이다. 아무리 좋은 기술로 좋은 제품을 만들어도 시장에서 필요성을 못 느낀다면 의미가 없다. 수많은 기업들이 좋은 제품을 가지고도 이 ‘때’를 못 맞추어 실패를 하곤 한다. ‘때’는 기술, 자본, 인력, 생산, 판매 등 그 어떤 기업의 요소보다도 기업이 판단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뜸’은 기다림, 즉 성실함이다. 회사가 전문성을 가지고 시장이 원하는 좋은 제품을 만들어서 제공하더라도 성공 할 확률은 희박하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 회사는 이제 막 새로운 일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뚝’은 뚝심, 즉 끈기를 가지고 노력하는 정신이다. 전문적인 기술로 적기에 제품을 출시하고 시장이 형성되기까지 기다렸다고 하더라도 실패할 확률은 아직도 높다. 반대로 처음부터 너무 잘 팔려도 실패 할 확률은 높다. 이유는 바로 변동성이 있기 때문이다. 배를 타고 항해를 하는데 갑작스런 폭풍우에 배가 떠밀려 내려올 수도 있고, 또는 이제까지 잔잔한 바다에 익숙해져서 아무 준비 없이 항해를 하다 큰 폭풍우를 만난다면, 배는 부서지거나 좌초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때부터가 정말 중요하다. 끈기를 가지고 배를 다시 수리해서 목표를 향해 항해를 계속 해야 한다. 그런 뚝심을 가지고 있어야 성공이라는 항구에 도달할 수 있다. ‘뚱’은 뚱딴지 같은 생각, 즉 창의성이다. 스타트업에게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창의성이다. 뚱딴지 같은 생각들이 세상을 변화시킨다. 미국의 수많은 성공한 스타트업들은 이 뚱딴지 같은 생각으로 인해 큰 기업으로 성장했으며, 인류의 문화와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스타트업이 일반 기업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뚱’이다. 스타트업은 뚱딴지 같은 생각을 많이 낼 수 있는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갖추어야 하며, 뚱딴지 같은 아이디어가 나오면 그걸 빠르게 사업에 연결 시킬 줄 알아야 한다. ‘뚱’을 중요하게 여기고 살리는 기업만이 미래에도 살아 남을 수 있다. ‘똘’은 똘똘 뭉치는 것, 즉 ‘공동체 의식’이다. 스타트업의 가장 약점중의 하나는 약한 조직문화이다. 스타트업은 창의적이고 유연한 사고와 빠른 의사결정 및 행동에 맞는 조직 구조를 갖추어야 한다. 즉 구성원들이 획일적인 조직문화를 갖기보다는 개개인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 할 수 있는 조직문화를 가져야 한다. 이런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공동체 의식’이다. 공동체 의식은 구성원 모두가 기업 정신을 공유하고 기업의 가치를 공유하는 것이다. 구성원 모두가 똘똘 뭉쳐서 한마음이 될 수 있도록 기업의 비전을 만들고 공유하는 것이 다른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스타트업이 살아남고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필자는 이 6가지 쌍디귿 자(똑, 때, 뜸, 뚝, 뚱, 똘) 정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스타트업은 국제화된 경쟁 속에서 ‘똑’의 전문성으로 무장하고 ‘때’에 맞는 새로운 시장을 발굴하고 ‘뜸’의 성실함과 ‘뚝’의 열정으로 노력해야 하며, 더불어 ‘뚱’의 창의성을 갖는 기업 구성원들이 가치와 비전을 공유하는 ‘똘’똘 뭉치는 기업, 그런 사회와 인류에 기여하는 기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업의 진정한 목적은 혼자 할 수 없는 일을 여러 사람이 모여서 인류와 사회에 가치 있는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에 그 중요한 목적이 있다. 그렇다고 그 가치가 아주 대단한 것일 필요는 없다. 단순한 제품, 간단한 서비스도 그걸 사용하는 사람들이 행복해하고 필요성을 느낀다면 그것이 바로 사회와 인류에 가치있는 것을 제공하는 것이다.
    스타트업  쌍디귿 법칙
    by 안병익
    2025.11.13 15:56:51
  • 노사관계에 있어 사용자가 노조에 대해 의견을 표명한 것이 지배·개입에 의한 부당노동행위로 문제되어 노동청이나 검찰에 고소·고발되는 사례가 매우 빈번하게 발생한다. 사용자 역시 헌법상 의견 표명의 자유를 가진다. 그러나 근로자의 근로조건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용자 측의 비판적 의견 표명은 노조 활동에 큰 영향을 미치므로 법적 분쟁으로 이어지기 쉽다. 회사의 평판 훼손 등 예기치 못한 결과를 방지하기 위해, 정당한 의견 표명 시에도 법적 분쟁을 피할 수 있도록 다음의 사항을 유의해야 한다. 사용자의 의견 표명이 부당노동행위로 인정되는 가장 대표적인 유형은 징계, 급여 삭감 등 불이익 조치를 언급하거나 암시하는 경우이다. 법원은 ‘노조 설립 시 재정 지원 중단 및 구조조정 가능성 언급’, ‘분쟁 야기 시 전 직원 사표를 받고 공개 채용으로 재충원하겠다는 발언’ 등 직접적으로 불이익 조치를 언급하거나 암시하는 발언에 대해 지배·개입에 의한 부당노동행위를 인정하고 있다. 노조 활동에 비판적 견해를 표명할 상황이라도, 불이익한 조치를 언급하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노조원뿐만 아니라 비노조원까지 포함하는 전 직원 대상의 연말 훈시, 교육 설명회, 이메일 등을 통한 노조 관련 의견 표명도 지배·개입으로 문제될 수 있다. 다수의 직원을 대상으로 한 발언 중 노조에 대한 비판적 의견 표명은 노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심어 비노조원의 신규 가입을 저해하거나, 교섭에서 회사에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수사 기관이 판단할 수 있다. 전 직원을 상대하는 의사표명 시에도 지배·개입 문제가 생길 수 있음을 인식하고 매우 조심스럽게 커뮤니케이션해야 한다. 법원은 사용자의 특정 발언 자체에 국한하지 않고 해당 발언이 행해진 시기의 노사관계, 단체협약 교섭 과정, 과거 유사 발언 여부 등 노사관계 전반을 종합적으로 판단한다. 특히, 중요한 노사 관련 일정을 앞둔 시점(예: 쟁의행위 찬반투표 직전)의 사용자 측 발언은 노조에 대한 협상력·영향력 강화 목적으로 이뤄졌다고 볼 가능성이 높다. 분쟁이 잦거나 중요한 일정을 앞둔 시기에는 의견 표명의 수위를 신중하게 조절해야 한다. 명시적으로 노조를 비난하는 발언(‘태어나지 말아야 할 노동조합’)은 당연히 부당노동행위로 인정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직접적인 비방이 없더라도,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표현을 사용했을 때 그 전후 사정을 고려하여 부당노동행위가 문제되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하급심 판결 중 사용자가 교육 자리에서 예시를 들며 일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의미하는 용어로 ‘MOJO’를 사용하고, 그 반대어로 ‘No Enjoy’를 줄인 ‘NOJO’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노동조합측에서 사용자의 이러한 어휘 사용이 노동조합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려는 의도가 있다고 보고 부당노동행위를 문제 삼은 사례가 있다. 해당 사례에서 비록 관련 부분의 부당노동행위가 인정이 되지 않았으나 오해를 살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하여 법적 분쟁에 휘말리게 되면, 비록 지배·개입의 의사가 부정되더라도 관계 악화, 법적 비용 발생, 평판 저하 등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불필요한 오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표현 선택에 유의해야 한다. 부당노동행위 입증 책임은 원칙적으로 노조에 있지만, 실무에서는 사용자 측이 지배·개입의 의도가 없다는 구체적인 입증 자료를 제출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일상 업무의 일환이거나 정당한 권리 보전을 위한 발언이라도, 수사 당국은 특정 의도를 의심할 수 있다. 이때 사용자는 지배·개입의 의도가 없음을 입증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따라서 회사가 정당한 필요에 의해 의견 표명을 한 것임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를 평소에 구비하여 예상치 못한 법적 결과를 피해야 한다. 위와 같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더라도, 노사관계를 담당하는 임직원들의 노동조합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분쟁 해결은 어렵다. 편견이나 혐오감에서 나오는 반복적인 반노조 발언에 대해서는 부당노동행위가 인정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노동조합 활동을 존중하고 원만한 관계를 위한 인식 개선 및 교육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된다.
     분위기 띄우려고 한 말이 부당노동행위라고요?
    by 이태은
    2025.11.08 11:00:00
  • 1718년 11월 카리브 해의 윈드워드 해협에서 프랑스 군함과 마주친 해적선 ‘레인저’(Ranger)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공격과 후퇴를 놓고 의견이 갈린 것이다. 투표에 부친 결과 압도적인 차이(76 대 15)로 공격해야 했지만, 선장 찰스 베인은 체급에서 차이가 나는 군함과 굳이 싸울 필요가 없다며 계속 후퇴를 고집했다. 물러난 해적들은 선장을 겁쟁이라 놀리며 찰스 베인을 쫓아내고, 공격하자고 부추긴 존 래컴을 선장으로 추대했다. 래컴은 정말 프랑스 군함을 공격할 생각이었을까? 큰 바다에서 대형 무역선을 상대로 한 탕을 노리는 과감한 해적과 달리, 그는 기동력 좋은 작은 해적선으로 가까운 바다에서 혼자 다니는 작은 어선이나 무역선만 노리는 좀도둑 같은 해적질로 승률을 높였다. 자랑할만한 무용담이 없다. 탁월한 말발로 동료 해적을 선동해서 반란을 일으켜 선장 자리를 꿰차고, 유명한 해적인 것처럼 이름을 남겼을 뿐이다. 겉멋만 번지르르한 해적일 터다. 부를 과시하기 위해 벨벳을 즐겨 두른 여느 해적 선장과 달리, 래컴은 밝고 화려한 옥양목(Calico) 바지를 즐겨 입었다. 그래서 별명이 ‘캘리코 잭’(Calico Jack)이다. 패션 감각에 디자인 감각까지 뛰어났을까? 해골 아래 칼 두 자루를 엇갈리게 배치한 해적기 ‘졸리로저’(Jolly Roger)도 그의 작품이다. 더 놀라운 것은 여자 해적을 둘씩이나 거느리고 거드름을 피운 것이다. 앤 보니와 메리 리드를 해적선에 태우고 해적질 하는 그는 해적 세계의 최고 멋쟁이였다. 흥청망청한 그의 삶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1720년 노략질을 마치고 자메이카의 한 항구에 정박했을 때, 영국의 해적사냥군들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술과 향락에 취한 ‘캘리코 잭’과 해적들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붙잡혔다. 여자 해적 둘, 앤 보니와 메리 리드만이 끝까지 칼을 들고 저항했을 뿐이다. ‘캘리코 잭’이 교수대로 끌려갈 때 앤 보니가 외쳤다. “사내답게 싸웠다면, 개처럼 목 매달리진 않았을 거야”(If you had fought like a Man, you need not have been hang‘d like a Dog). 향년 37세. ‘캘리코 잭’의 낭만적인 해적질은 ‘위워크’(WeWork)의 애덤 노이먼의 과시적인 경영과 닮았다. 노이먼도 ‘캘리코 잭’처럼 청산유수(靑山流水) 달변이었다. 그는 ‘위’(We)라는 이상적인 단어를 앞세워, 공유오피스를 ‘세상을 바꾸는 커뮤니티’로 포장했다. 달콤한 비전과 열정적인 발표에 반한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같은 거물 투자자에게서 수십 억달러를 끌어 모았다. 화려한 언변과 강렬한 카리스마로 듣는 사람을 혹하게 만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성과가 없었다. ‘위워크’는 사업모델이 근본적으로 부실했다. 부동산 임대사업을 첨단 기술사업인 것처럼 포장했을 뿐이다. 엄청난 투자금을 끌어왔지만, 지속가능한 수익을 창출하지 못했다. 개인 전용기를 장만할 정도로 사치스러운 데다 부인을 끌어들여 방만하게 경영하고, 회사 자산을 개인적으로 유용하면서 2019년 결국 ‘위워크’에서 쫓겨났다. ‘캘리코 잭’의 몰락과 묘하게 겹치는 장면이다. 남은 것은 이미지다. ‘캘리코 잭’의 ‘졸리로저’는 검은 바탕 한 가운데 허연 해골과 해적 칼 두 자루를 X자로 걸어 놓았다. 공포를 단순하고 직관적으로 드러내는 가장 대중적인 해적기로 꼽힌다. 노이먼도 마찬가지다. 아무도 생각지도 못했던, ‘위’(We)를 기업 브랜드로 내세워 단순한 사무공간을 공동체의 상징으로 느끼게 만들었다. ‘위워크’(WeWork), ‘위리브’(WeLive), ‘위그로’(WeGrow) 같은 확장적인 브랜드로 공유경제의 깃발을 먼저 꽂은 것이다. ‘캘리코 잭’은 해적의 역사에 가장 상징적인 해적기를 펄럭였고, 애덤 노이먼은 공유경제의 역사에 가장 강력한 브랜드를 찍었다. 그들은 왜 자신이 제시한 비전대로 살지 않았을까? 못했을까?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가 중요했을 뿐, 실천하려는 진정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과시와 허세가 본질이었을 뿐, 자신이 만든 신화의 무게를 스스로 감당할 역량이 부족했던 것이다.
    신화의 무게를 감당하라 : 잭 래컴 & 애덤 노이먼
    by 허두영
    2025.11.07 16:45:37
  • 올해 10월 26일은 경주 APEC 회의에 가려 조용히 지나갔다. 그러나 한국인에게 10·26은 늘 각별한 기억을 불러낸다. 1909년 이날, 대한의군 안중근 중장은 일본 초대 총리를 지낸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역에서 저격했다. 70년 뒤 같은 날, 또 다른 육군 중장 출신 김재규는 자신을 중앙정보부장으로 발탁한 박정희 대통령을 사살했다. 정확히 70년을 사이에 둔 두 사건은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1979년 12월 12일자 아사히신문에는 이러한 기사가 실렸다. “안중근이 처형 직전 일본 헌병 치바 토시치에게 써준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 유묵이 한국으로 반환된다.” 일본에 있던 안 의사 유묵이 7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이었다. 지금 이 유묵은 서울 남산의 안중근기념관에 소장돼 있다. 그로부터 다시 19년 뒤인 1999년에는 일본 미야기현 즈이간지(瑞巌寺) 앞마당에 있던 ‘와룡매’가 이식돼 남산 안중근기념관으로 옮겨왔다. 유묵과 와룡매가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과정은 한·일 양국의 비극과 화해가 얽힌 역사이기도 하다. 안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오전 9시 55분, 사형집행 5분 전 치바에게 ‘위국헌신 군인본분’이라고 쓴 글을 건넸다. 군인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당연한 의무라는 뜻이었다. 처음 치바는 여느 일본군처럼 안 의사를 적대했지만, 5개월 동안 그의 인품과 동양평화사상에 감화돼 극진히 보살폈다. 안 의사는 “너도 나도 군인으로서 한 일일 뿐이니 부끄러워 말라”며 마지막 선물을 남긴 것이다. 전쟁에서 패한 뒤 고향 미야기현으로 돌아간 치바는 유묵과 영정을 집안에 모시고 평생 추도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아내가 그 일을 이어받았다. 치바 유족들은 안 의사 탄생 100주년인 1979년 유묵 반환을 제안했고, 1980년 8월 유묵은 한국에 도착했다. 약지가 잘린 손바닥 낙인이 선명한 유묵이 광복 이후 한국 땅을 밟기까지는 이렇게 길고 낯선 여정이 있었다. 한국 독립군과 일본 헌병의 이야기는 미야기현 다이린지(大林寺)의 사이토 주지에게 전해졌다. 그는 1981년 사찰 내에 ‘위국헌신 군인본분’ 비석을 세우고 지역 주민들과 추도 법회를 열기 시작했다. 이후 올해까지 44년 동안 단 한 해도 거르지 않았다. 일본 땅에서, 자신들의 ‘국부’를 죽인 조선 독립운동가를 위해 법회를 이어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아사히신문 기자 출신의 사이토 주지는 『내 마음의 안중근』에서 우익들의 협박과 비난을 감수해야 했던 과정을 담담히 적었다. 지금도 그는 일본 전역을 순회하며 제국주의 일본을 비판하고 동북아 평화를 역설한다. 책 속에는 안중근을 향한 한 일본인의 깊은 존경이 배어 있다. 그럼 와룡매는 왜 한국으로 돌아왔을까. 이는 다이린지 사이토 주지와 즈이간지 히라노 주지의 교분에서 비롯됐다. 즈이간지는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에 참전했던 센다이 번주 다테 마사무네가 재건한 사찰이다. 절 마당에 있는 와룡매는 다테가 조선을 떠나며 가져간 전리품으로, 본래 창덕궁 선정전 앞에 있던 나무였다. 와룡매는 400년 동안 일본 땅에서 뿌리내렸다. 안 의사의 행적에 감화된 히라노 주지가 반환을 결심하면서 와룡매는 후계목 형태로 1999년 서울로 왔다. 언론은 “400년 만의 귀환”이라며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 유랑의 끝에는 역시 안중근이 있었다. 김훈의 소설 『하얼빈』은 안 의사가 왜 이토를 죽였는지를 담담하게 복기한다. 안 의사는 검찰 조사와 재판에서 “이토는 대한의 주권을 찬탈한 원흉이자 동양평화를 해친 자”라며 “대한의군 사령관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개인적 이유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전쟁 중 적국의 수괴를 처단했다는 당당한 선언이었다.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오늘날 유럽연합(EU)을 연상케 하는 수준 높은 구상이었다. 한·중·일 3국이 뤼순항을 공동관리하고, 청년들로 구성된 공동 군대를 만들며, 중앙은행과 공동 화폐까지 창설하자는 내용이었다. 유묵과 와룡매의 귀환, 그리고 일본에서 이어지는 추도 법회에는 이렇게 깊고 복잡한 사연이 스며 있다. 비록 일부일지언정 일본인들의 참회와 연대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를 감상적인 화해의 미담으로만 소비할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가들의 결연한 희생을 기억하며 과잉 민족주의의 자기 위안을 넘어설 지혜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몇 해 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단지동맹비 앞에 섰을 때, 손가락을 잘라 맹세했던 12명의 결의가 떠올랐다.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유묵의 귀환도, 와룡매의 회귀도, 일본 땅의 추도 법회도 가능했다. 또 한 번 조용히 10·26이 지나갔다.
    10·26의 또 다른 이야기, 안중근 의사
    by 임병식
    2025.11.07 16:4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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