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408
  • 올해 문화계의 최대 화두는 단연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영화 ‘K-Pop Demon Hunters’, 이른바 ‘케데헌’일 것이다. ‘케데헌’의 성공은 세계 속에 우리 농산물의 가치를 재인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회이다. ‘케데헌’은 K팝 아이돌이 주인공으로 무대 위에서는 스타로, 무대 밖에서는 악마를 사냥하는 영웅으로 설정하여 한국적 정서와 감성을 세계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애니메이션 판타지 영화이다. 이 작품의 성공은 단순한 문화 콘텐츠의 성공이 아닌 우리 문화의 확장 가능성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으로, K-컬처의 영향력을 증명하였다. 하지만 성공의 이면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작품의 기획, 배급, 제작이 미국과 일본 및 다국적 스튜디오로 우리나라가 아닌 외부 자본과 인프라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는 우리나라 콘텐츠 산업의 구조적 한계로 산업 구조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 문화의 자립성과 주체성을 묻는 근본적 질문을 남긴다. 문화의 원천은 한국이지만, 부가가치는 해외로 흘러가는 것이다. 이는 문화산업의 한계만은 아니다. 우리는 1980년대 ‘신토불이(身土不二)’를 외쳤다. ‘우리 땅에서 자란 먹거리가 우리의 몸에 가장 잘 맞는다’는 단순한 진리는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이자 농업의 자존심으로 당시 생명운동의 철학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 시장은 ‘우리 것이 좋다’는 자부심만으로 설득되지 않는다. 신토불이는 보존의 언어가 아니라 확장의 언어로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 우리 땅의 자원을 지키는 것을 넘어, 세계와 공유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천지 만물을 따르는 자연법칙의 존중과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실천을 강조한 주자(朱子)와 양명(陽明)의 논설이 천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회자되는 이유는 자연 안에서 가장 이상적인 환경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탐구는 멈추지 않고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우리 농산물에 대한 자부심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맛을 세계인의 입맛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질문해야 하는 이유이다. 문화가 경계를 허물듯, 농업도 더 이상 지역의 울타리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케데헌’이 한국의 정서를 담아 세계인의 감성을 자극했듯이, 우리 농업도 지역 정체성과 세계 감각이 결합된 새로운 이야기를 써야 한다. 지난달 전남 완도군 완도읍 죽청리 농공단지를 방문했다. 끝없이 펼쳐진 청정 해역과 갯내음, 그곳에서 묵묵히 ‘K-해산물’의 세계화 확장을 위해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정대한 (유)대한물산 대표를 만났다. 그는 부모님과 그가 태어나고 자란 완도 바다의 자연 해산물인 김, 다시마, 파래 등에 원시 바다의 청정함 속에서 채취된 고순도 크리스탈 암염을 결합하여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을 프리미엄 식품을 개발하고 있었다. 또한 서울과 완도를 오가며 천연 암염의 식품학적 특성과 관리체계 구축에 몰두 중인 황원영 클레오파트라솔트 팀장과 김민후 팀장을 만났다. 이들은 청년 감성으로 글로벌 시장 도전과 품질 향상 시스템 정립에 몰두 중이었다. 지역 정체성과 글로벌 감각이 자연스럽게 결합된 그곳은 ‘K-푸드’의 미래와 K-컬처의 확장성을 보여주는 상징적 현장이었다. 이들의 시도는 단순한 상품 개발이 아닌, 우리 땅의 자원이 세계의 맛과 감성으로 재탄생하는 창조의 과정으로 그야말로 농촌유토피아가 추구하는 ‘로컬에서 글로벌로(Local to Global)’의 실천이며, 우리 농촌 문화 창조의 출발점이었다. 지금의 농촌은 단순한 먹거리 생산의 공간을 넘어, 문화와 산업, 농업의 경계를 허무는 새로운 가치 창조의 플랫폼으로 변화해야 한다. 지속가능성과 지역 정체성, 스토리텔링이 결합된 문화산업의 핵심 축으로 시선을 새로이 해야 한다. 이를 위한 민관 협력의 장기 투자, 인프라 구축, 세계관 설계 전문가 양성, 글로벌 유통 파트너십 등 콘텐츠 생태계 전반을 지원하는 국가적 전략이 시급하다. 농촌의 자원을 재해석하고, 글로벌 시장의 언어로 재현하는 노력, 그 변화의 시작이 일어나야 한다. 농촌의 변화가 멈추면, 우리의 미래도 멈추는 것이다. 농촌은 생존의 공간을 넘어, ‘가치를 창조하는 문화의 플랫폼’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케데헌’은 단순한 애니메이션이 아니다. 그것은 K-컬처의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며, 동시에 우리 농촌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신토불이의 철학은 ‘우리 땅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땅에서 출발해 세계로 나아가는 것’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K-신토불이, 즉, 세계 속의 우리 농산물과 세계를 품은 우리 농촌의 길이다. 이것이 농촌이 지속하는 길이며, 농촌유토피아의 새로운 정의가 될 것이다.
    케데헌과 신토불이
    by 조금평
    2025.11.07 16:41:19
  • 마루치 아라치는 초등학교 1학년 때인 1977년에 개봉한 대한민국 극장판 애니메이션이다. 정식 영화제목은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로 동시대를 살아온 분들이라면 줄거리의 대강을 기억할 것이다. 주제곡 ‘달려라 마루치, 날아라 아라치’는 누군가 선창만 해주면 어렵지않게 따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당시 관객수 16만명 이상을 기록한 우리나라 애니메이션 흥행에 있어 역사적 영화였다. 당시 부모님과 동행하지 않고 극장에서 벗들과 본 최초의 만화 영화였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도 기억될만한 영화였다. 당시 벗들은 영화관에서 마루치, 아라치와 같은 편이 되어 파란해골단과 용감하게 싸웠고 영화가 끝난 후에는 한참동안 마루치, 아라치의 발차기를 흉내내며 지냈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로 인터넷에 마루치 아라치를 검색해 보았고 다행스럽게도 50년 가까이 지난 영화를 다시 볼 수 있었다. 다시 만난 마루치 아라치는 마치 ‘시네마 천국’에서 토토가 알프레도가 마지막으로 남겨 준 필름(검열에서 삭제된 키스 장면들을 모아놓은 필름)을 다시 보는듯 가슴을 울렸다. 멀리 떨어져 살아 오랫동안 볼 수 없었던 그리운 벗을 준비 없이 갑작스레 만난 듯 뭔가 어색했지만 한 번 꼬옥 안아주고 싶은 영화였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마루치 아라치의 줄거리를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다. ‘물리학자 장동환 박사는 동해 수중 공원에서 열리는 핵물리학자회의에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결의를 하고자 한다. 이에 반해 파란해골단장은 장동환 박사를 납치해 광속으로 날아가는 우주선을 만들어 지구, 더 나아가 우주의 지배자가 되고자 한다. 물론 마루치 아라치가 수많은 역경을 극복한 후 파란해골단장을 쳐부수고 장동환 박사를 구출한다.’ 거의 정지화면 같은 장면들은 현대 애니메이션의 시각으로 보면 유치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장면 하나하나가 모여 중간중간 끊어질듯 이어지는 이야기들로 신기하게 재탄생한다. 지금보아도 시대를 앞서간 장면, 너무나도 인간적인 장면, 한껏 섬뜩한 장면, 은근 안타까운 장면, 웃음을 참기 어려운 장면들이 어울어져 만화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들이 되어 한 편의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잠시 영화 속 한 장면으로 들어가 보자. 양 사범과 장 선생이 마루치 아라치가 살고 있는 동굴에 들어와 이름을 묻는 장면에서 마루치는 선생이 순수 우리말도 모르냐고 핀잔을 주면서, 마루치의 마루는 산마루, 등마루 할 때처럼 가장 높은 꼭대기를 뜻하는 것이고, 아라치의 아라는 알, 아래, 아랑 등 아름다운 소녀를 뜻한다고 또박또박 말해준다. 1970년대의 현실에서 그런 태도로 어른들이나 스승님들에게 말했다면 상당히 강한 물리적 타격을 감수해야 했다. 우리 모두 하고 싶었던 말이지만 억눌린 현실에서 입도 뻥끗하기 어려웠던 말을 마루치가 대신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봐도 속이 확 뚫리는듯 시원하다. 마루치 아라치는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어깨가 쳐진 50대 중반의 아저씨, 아줌마들에게 권하고 싶은 영화다. 뭐든 다 할 수 있었던 씩씩했던 초등학교 어린이로 잠시나마 돌아가는 기적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연재를 시작한 ‘마루치 아라치 인문학’이 애니메이션처럼 으뜸이 된다면 좋겠고 아름다운 글이 된다면 좋겠다. 욕심을 좀더 부려본다면 몇십 년이 흐른 뒤 다시 읽히는 글이 되어 웃기기도 하고 울리기도 하면서 아련한 추억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를 바라본다. 초등학교 1학년 마루치처럼 발차기를 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마루치 아라치 인문학을 시작해본다.
    ‘마루치 아라치’다운 글
    by 유상조
    2025.11.05 15:37:24
  • 이번 APEC 경주대회의 또 다른 성과는 K-푸드를 세계 정상에 알리는 것이었다. 비록 단편적이고 지역적인 것이었지만 그 효과는 엄청난 것이었다. K-팝, K-컬쳐와 함께 우리나라의 문화적 위상이 세계적으로 매우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흔히 K-푸드와 한식(K-diet)와의 구분이 어렵다고 물어오는 데, 한식은 우리나라 조상 대대로 내려온 먹고 살아온 식과 습관을 대변하는 밥상을 말한다. 곧 밥상의 구조와 구성, 먹는 양식과 문화를 말한다. 우리 조상들은 주로 밥, 국, 김치, 장 등 기본 반찬 위에 매끼마다 대표음식을 하나씩 만들어 밥상을 차렸다. K-푸드는 이러한 한식이 시장화하는 과정에서 생긴 음식을 말하며. 처음에는 주로 밥상구조의 대표 음식이 한그릇 음식(one-dish, one-bowl)형태로 골목이나 시장에 나왔다. 장터에서 시작하여 주막에서 K-푸드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요즈음에는 이러한 포멀한 대표음식을 넘어서 각 지역이나 우리 조상들이 각 가정의 간식으로 먹었던 음식이 길거리나 시장에 나와서 K-푸드로 많이 알려진 경우가 있다. 우리는 베트남전의 기억을 잊지 못할 것이다. 다낭을 중심으로 남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이 북베트남, 특히 하이퐁만 근처에 엄청난 폭격을 퍼붓고도 미국이 승리하지 못하고 결국 철수하였다.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은 사람의 목숨을 잃는 것에 극히 조심하여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고 폭격만 하였기 때문이다. 보통 전쟁에서 최종 승리는 지상군이 투입되여 적의 심장부에 국기를 꽂는 것이다. 그것을 주저하고 폭격만 한다면 승리를 이를 수 없다. 문화전쟁도 마찬가지다. K-팝, K-드라마는 공중전의 전사이고, K-푸드는 지상군이다. 우리나라가 지금 K-팝, K-드라마로 전 세계를 공중에서 폭격하고 있는 중이다. 이를 승리로 완성하려면 K-푸드가 지상에서 차분하게 차근차근 점령해 나가야 한다. 지상군 없이 실체를 구상하기 어려운 공중전만 가지고는 세계화를 완성했다고 볼 수 없다. 과학적으로 시각이나 청각은 매우 민감하여 쉽게 받아들여지지만, 그만큼 쉽게 잊혀지거나 사라질 수 있다. 물질적인 미각이 따라주어야 한다. 그러나 음식은 매우 보수적이어서 받아들이는 데도 쉽지 않고 시간이 걸리지만 한번 받아들이면 쉽게 사라지거나 잊지 못한다. 후생유전학적(epigenomics)으로 음식의 맛이나 습관은 유전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케데헌(K-pop demon hunters)이 더 폭발적이고 우리나라에 외국인들이 많이 온 것은 케데헌 안에 K-푸드가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K-푸드의 세계화 절차는 세가지 단계를 걸쳐서 이루어 진다. 첫째 K-푸드를 알려야 한다. 두 번째로 K-푸드를 좋아하게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K-푸드를 이용하여 비즈니스가 뒤따라가야 한다. 이러한 목표 없는 K-푸드의 세계화는 생명력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그럼 K-푸드의 무엇을 알릴 것이며 어떻게 알릴 것인가? 어떻게 알릴 것인가를 고민하기 전에 무엇을 알릴 것인가를 고민하여야 한다. 이미 우리나라는 K-팝이나 K-드라마로 세계를 폭격하고 있으니 어떻게 알리는 기반은 충분하다. 지금과 같은 좋은 기회가 없으니 이번 기회를 꼭 살려야 한다. 먼저 K-푸드의 역사적 전통성, 독특성, 맛의 독특성, 건강성을 먼저 알려야 하고, 이들의 과학적 가치를 꾸준히 연구하여야 한다. 그래야 지속 가능한 세계화가 이루어진다. 두 번째로 K-푸드를 좋아하려면 이러한 기본적인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K-푸드를 먹어볼 기회를 많이 갖도록 하고 종국적으로는 한국으로 K-푸드를 먹어보기 위해 들어올 정도가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맛이 있어야 하고 더 중요한 것은 고유한 맛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고유의 맛은 설탕과 기름을 쓰지 않고 내는 여러 가지 기본 맛인데 요즈음은 설탕을 쓰는 것이 우리 맛인 줄 잘 못 알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설탕을 많이 쓰는 것이 우리의 맛인 것으로 외국인 오해하게 하면 안된다. 설탕으로 내는 맛이 우리 맛인 줄로 알면 K-푸드는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룰 수 없다. 설탕의 단맛은 패권을 추구하기 때문에 우리의 고유의 맛을 없애버리는 경향이 있어서 이점이 매우 우려된다. 여러 가지 맛을 내는 K-푸드가 많은데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것이 무궁무진하다. K-푸드를 좋아하여 한국 땅을 찾고 한국에서 K-팝과 K-컬쳐를 즐기는 외국인이 많도록 해야 한다. 먼저 K-푸드를 알리고 K-푸드를 좋아하면 K-푸드 비즈니스가 성공하게 된다. 세계적으로 한식 레스토랑이 많이 생기고, 기업은 K-푸드 상품을 만들 수 있고, 이를 세계 시장에 내놓으면 세계 시장에서 K-푸드 상품이 주류를 이룰 것이다. 그러나 정부나 많은 기업가들은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일에 우선하여야 하는 데, 우선 돈을 벌 생각으로 생산부터 생각한다. 순서가 틀렸다. K-푸드는 가격전쟁을 위한 공중전을 할 것이 아니라 가치전쟁으로 대인전, 지상전을 수행해야 한다. 칼로 정복할 것이 아니라 소비자의 마음을 사는 것이 우선이어야 한다.
    K-푸드의 세계화 길
    by 권대영
    2025.11.03 10:58:00
  • 인공지능 시대의 데이터는 하늘을 떠다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바다속을 달린다. 전 세계 인터넷과 모바일 트래픽의 95% 이상이 해저케이블로 전송된다. 국제 데이터의 대부분은 위성이 아니라 해저 광케이블을 통해 이동한다는 의미이다. 금융거래부터 원격의료, 디지털정부 서비스, 심지어 국가안보와 우주·항법 데이터까지 국가의 신경망인 유리섬유에 실려 심해를 가로지른다. 그럼에도 해저케이블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동안 정책적 관심을 두지 못했다. 문제는 관심의 부족이 곧 취약성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해저 지진과 해류, 어선 닻 걸림 같은 우발 요인에 더해, 특정 구간을 노린 고의 훼손이나 사이버공격 가능성까지 겹치면, 케이블 하나의 단절이 산업과 행정 등 국가 전반의 장애로 번질 수 있다. 해저케이블을 민간 통신설비로만 볼 것인가, 국가 기반으로 볼 것인가는 정책의 출발점을 가른다. 지금까지는 사업자 자율과 비용 효율이 우선이었지만, AI 전환과 클라우드 집중이 가속화되면서 기준을 바꿔야 한다. 핵심은 회복탄력성이다. 안전한 시스템은 고장이 ‘없다’가 아니라, 고장이 ‘나도 버틴다’. 이를 위해 첫째, 경로와 착륙지의 지리적 분산, 육상 구간 이원화 같은 다중화 설계를 의무화해야 한다. 둘째, 산업 특성에 맞춘 복구 시간 목표를 정해 장비·선박·인력의 상시 대기 체계를 제도화해야 한다. 셋째, 허가·조달·요금 인가 등 핵심 규제수단에 안전·복구 요건을 연동해, 안전이 비용 항목이 아니라 사업의 기본 조건이 되도록 해야 한다. 보안은 사이버와 물리를 함께 봐야 한다. 착륙국과 중계국에는 이중 전력과 냉각, 출입통제를 기본으로 하고, 24시간 보안관제와 이상징후 탐지를 표준화할 필요가 있다. 해상 구간은 선박자동식별시스템(AIS)과 해양 레이더, 드론·초계 체계를 연계해 위험구역을 동적으로 관리하고, 접근 패턴을 상시 모니터링해야 한다. 전 구간 트래픽은 강한 암호화를 기본값으로 삼되, 메타데이터 수준의 이상 탐지로 변조·유출 징후를 조기에 포착하는 체계를 병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통신·금융·클라우드·플랫폼이 함께하는 합동 레드팀·블루팀 훈련을 정례화하면 사이버-물리 융합 공격에도 대응력이 축적될 것이다. 민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은 국가가 뒷받침해야 한다. 다경로 확보나 심해 구간, 장거리 우회 루트처럼 수익성이 낮지만 국가에 반드시 필요한 투자에는 정책금융과 세제 지원이 유효하다. 대규모 장애에 대비한 재보험·공동보험 풀을 만들어 리스크를 분산하고, 정부·군·정보기관이 보유한 해양 위험지도를 민간과 상시 공유하면 설계·운영의 합리성이 높아진다. 더 나아가 인접국과 공동 매설과 상호 백업 협정을 추진해 지정학 리스크를 분산하는 외교적 해법도 병행할 때 효과가 커진다. 바다는 연결되어 있고, 연결이 곧 안전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해저케이블/클라우드/국가 AI 인프라는 하나의 삼각 구조로 설계되어야 한다. 공공 GPU와 국가 LLM, 데이터 안심구역, 디지털정부 서비스는 안정적인 백본 없이는 힘을 쓰지 못한다. 케이블의 용량과 지연, 가용성은 곧 클라우드와 AI의 성능지표다. 평소에는 효율을 따지되, 위기 시에는 원칙이 바뀌어야 한다. 트래픽의 우선순위를 재배치하고, 해외·대체 루트로 경로를 우회하며, 공공·금융 같은 필수 서비스에 필요한 대역폭·지연·손실 한도에 대한 서비스 품질(QoS)을 강제하는 국가 AI 비상모드가 필요하다. 이런 장치가 있어야 데이터 흐름이 끊기지 않고, 데이터 주권이 구호를 넘어 실제로 작동할 것이다. 해저케이블은 바다 밑에 숨은 신경망이다. 오늘날 하이퍼스케일러(빅테크)가 해저케이블 신설 투자와 공동 소유를 주도하고, 국제 데이터 사용 대역폭의 큰 몫을 차지하는 흐름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해저케이블의 60% 이상을 하이퍼스케일러가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현실은 해저 인프라를 국가 주권 차원의 전략 자산으로 다루어야 함을 시사한다. 민간의 효율에 국가의 책무를 더하고, 법·제도·재정이 맞물리는 구조로 전환할 때 우리는 위기에도 끊기지 않는 연결과 더 강한 데이터 주권을 갖게 된다. 국가의 소버린이 해저케이블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시작은 수면 아래 인프라를 국가 전략의 한가운데로 올려놓는 일이다.
    해저케이블과 데이터 안보
    by 김윤명
    2025.11.03 10:46:04
  • 올해는 2021년 혁신금융서비스(금융규제 샌드박스) 지정으로 시장에 첫선을 보인 조각투자상품이 법 개정을 통해 제도권으로 진입한 해로 기억될 것이다. 조각투자는 부동산·음원저작권과 같은 다양한 기초자산을 유동화하여 다수의 일반투자자에게 나누어 판매하는 것으로, 유동화 방법으로 증권의 공모를 활용하는 상품을 말한다. 현재까지 시장에 나온 조각투자상품은 (i) 발행인이 투자자와 공동사업 투자계약을 체결하고 투자계약증권을 발행하여 조달한 자금으로 기초자산의 소유권을 취득하면서 해당 기초자산의 소유권에 대한 공유지분을 투자자에게 이전하는 구조(투자계약증권 발행 방식), 또는 (ii) 기초자산을 신탁하고 해당 신탁관계에 근거하여 수익증권을 발행하는 구조(수익증권 발행 방식)를 취해 왔다. 전자의 경우 현행 자본시장법에 따르더라도 증권신고서를 제출해서 수리되면 투자계약증권 발행이 가능하고, 현재까지 한우·미술품 조각투자상품이 출시된 바 있다. 이와 달리 후자의 경우 현행 자본시장법령상 비(非)금전신탁 수익증권 발행 근거가 명확하지 않아서 그동안 샌드박스를 통해 제한적으로 운영되어 왔다(현재까지 부동산, 대출채권, 항공기엔진 조각투자상품이 혁신금융서비스 지정을 받았다). 이와 같은 수익증권 발행 방식의 조각투자상품이 올해 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을 통해 제도화된 것이다. 먼저 올해 6월에 조각투자 “발행”플랫폼(수익증권 발행, 인수 및 주선) 운영을 위한 수익증권 투자중개업 인가가 신설되었다. 참고로 비(非)금전신탁 수익증권 발행이 전면적으로 허용되려면 자본시장법 개정이 필요한데, 아직 자본시장법 개정이 마무리되지 않은 점을 고려하여 현재는 자산유동화법상 요건을 충족하는 자산보유자(금융회사·상장법인 등)가 소유하는 자산을 기초로 하는 신탁수익증권 발행만 허용된다. 이어 9월에는 조각투자 “유통”플랫폼 운영을 위한 수익증권 투자중개업 인가가 신설되었다. 자본시장법상 투자중개업자가 장외에서 증권을 중개하려면 1:1 중개로 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다수의 매도자·매수자를 동시에 중개하는 장외거래소 영업을 하기 위해서는 전용 인가단위가 별도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주의할 점은 혁신금융서비스 지정을 통해 발행업무와 유통업무를 겸영하고 있던 기존 조각투자사업자의 경우 앞으로는 발행플랫폼과 유통플랫폼 중 하나를 선택해서 인가를 신청해야 한다는 점이다(발행-유통 분리 원칙). 아울러 금융당국은 조각투자시장이 아직 초기단계로 거래규모가 크지 않고, 유통플랫폼이 난립할 경우 유동성이 분산되어 환금성이 낮아지는 등 투자자 피해로 연결될 우려가 있다는 점을 고려해서 유통플랫폼 인가는 최대 2개만 허용할 방침임을 밝혔다. 조각투자상품 제도화가 이루어지면서 기존 조각투자사업자 외에도 여러 금융회사들과 관계 기관들이 서로 제휴하거나 컨소시엄을 구성해서 시장을 선점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향후 전자증권법 개정으로 분산원장을 기반으로 하는 토큰증권 발행(STO)까지 허용되면 조각투자상품 시장은 여러 혁신적인 스타트업과 플랫폼회사에게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올 것으로 보인다. 아직 초기 단계이지만, 이번 제도화를 통해 조각투자시장이 더욱 활성화되어 투자자 입장에서 비정형적이고 특색 있는 상품에 대한 대체투자 기회가 늘어나고, 혁신적인 스타트업이나 중소기업에게는 자산을 유동화하고 자금조달 채널을 다양화할 수 있는 기회로 자리매김하기를 기대한다.
    조각투자상품의 제도권 진입
    by 유정한
    2025.11.01 12:15:00
  •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 부부는 왜 같은 성(姓)을 쓸까. 부부가 성이 같은 경우는 일본에서도 드물다. 한데 두 사람은 성이 같은 것은 물론이고, 남편이 아내 성을 따랐다는 점에서 궁금증을 유발한다. 우리나라도 부부가 합의하면 자녀는 엄마 성을 따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흔치 않고, 더구나 남편이 아내 성을 따라 바꾸는 경우는 없다. 어떤 이야기가 숨어있을까. 일본 민법은 “부부는 같은 성(姓)을 써야 한다”고 법으로 강제하고 있다. 남편 성이든, 아내 성이든 선택은 부부 권한이다. 다만 서로 다른 성을 유지한 채 혼인신고는 할 수 없다. 결국 한쪽 성으로 통일해야 한다. 일본은 주요 선진국 중 유일하게 부부동성을 의무화한 나라로써 항상 논쟁거리다. 현실에서는 대략 95% 이상 아내가 남편 성으로 바꾼다. “아내가 남편 성을 따른다”가 일반적이며, “남편이 아내 성을 따른다”는 아주 예외적이다. 이러니 다카이치 총리 부부에게 시선이 쏠리는 것은 당연하다.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와 다카이치 타쿠(高市 拓) 부부는 결혼과 이혼, 재혼을 반복했다. 이들이 처음 결혼한 2004년은 남편(당시 야마모토 타쿠)은 중의원 신분이었지만 아내(다카이치 사나에)는 중의원 4선 도전에 실패해 실의에 빠졌을 때였다. 둘 다 주목받는 정치인이라서 당시에도 화제였다. 이때는 이들도 일반적인 경우를 따랐다. 다카이치 사나에가 남편 성을 따라 야마모토 사나에(山本早苗)로 바꿨다. 다만 정치 활동, 언론 노출, 선거 과정에서는 ‘다카이치 사나에’를 썼다. 정치하면서 그동안 쌓은 ‘다카이치’라는 인지도를 활용하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두 사람은 결혼생활 13년 만인 2017년 7월 이혼했다. 사유는 “정치적 견해 차이와 진로 차이”였다. 둘은 2021년 12월 재혼했다. 이번에는 남편 야마모토 타쿠가 아내의 성을 받아 ‘다카이치 타쿠’로 변경했다. 현행법에 맞춰 누군가는 바꿔야 하는데, 남편이 바꾼 것이다. “왜 부부가 같은 성씨를 갖게 되었나?”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답은 혼인신고 자체가 안 되는 현행법을 이유로 들 수 있다. 그러면 왜 이번에는 남편이 바꿨을까 하는 의문이 뒤따른다. 다카이치 총리 부부는 그 이유를 공식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공개된 정보와 정치적 맥락을 토대로 추론하자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첫째, 정치적 이유다. 재혼한 2021년은 다카이치 사나에가 자민당 총재 경선에 나서면서 전국구 정치인으로 떠오른 시기다. ‘다카이치 사나에’라는 이름 자체가 ‘정치 브랜드’였다. 만약 남편 성(야마모토)으로 바꾸면 유권자들에게 혼선을 주고 선거 관리도 복잡해진다. 일본 여성 정치인 가운데 상당수는 법적으로는 남편 성이지만, 선거·의정 활동에서는 원래 성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이유 때문이다. 둘째, 상징성이다. 남편이 아내의 성을 따른 건 일본 사회 기준에서 보면 ‘역전된 선택’으로, 가치관의 전환을 뜻한다. 일본 언론이 ‘철의 여인’으로 부르는 다카이치 총리의 정치적 위상을 감안하면, 남편이 뒤에서 조용히 지지하는 모습은 ‘성역전(性逆轉)’의 시대적 상징으로 읽힌다. 실제로 남편 다카이치 타쿠는 “나는 스텔스 남편으로, 아내의 정책 추진에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돕겠다”고 밝혔다. 일본 언론은 그를 ‘보이지 않는 조력자’로 묘사했고, 직접 요리를 하고 집안일을 챙긴다는 기사도 이어졌다. 셋째, 현실적 고려다. 남편 타쿠는 뇌경색 후유증으로 정치 일선에서 한발 물러선 반면 아내는 국가를 이끄는 위치에 올랐다. 이제는 남편이 아내를 뒷받침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역할 분담이 된 것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2024~2025년 자민당 총재 선거, 2025년 10월 일본 최초 여성 총리까지 올랐다. 커리어 중심축이 누구에게 있는지 고려하면 남편이 성을 바꾸는 게 합리적 선택이다. 결국 “둘 중 누가됐든 바꿔야 했고, 정치적으로 전국구 인지도를 지닌 다카이치를 위해 남편이 ‘다카이치’를 택했다”가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이다. 그만큼 이번 결정에는 실용적 판단이 깔려 있다. 끝으로 재혼 당시 나이다. 두 사람 모두 60대였다. 60대는 젊은 신혼부부처럼 ‘집안 어르신’이 호적을 좌우하는 나이가 아니다. 당사자들 의지에 따라 정치적 전략을 우선한 것으로 보는 게 자연스럽다. 일본에는 ‘무코요시(婿養子)’로 불리는 제도가 있다. 아들이 없는 집안에 사위가 양자로 들어가 장인 집의 성을 잇는 관습이다. 그러나 이는 주로 상공인 가문에서 가업을 잇기 위한 제도였고, 정치인 부부의 선택과는 성격이 다르다. 다카이치 부부의 경우는 전통보다는 당사자의 의지와 정치적 상황이 우선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사례는 일본 사회에 미묘한 파장을 던졌다. ‘부부동성’ 제도가 여전히 강하게 작동하는 나라에서, 남편이 아내 성을 따랐다는 사실은 젠더 감수성의 변화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여론조사에서도 일본 국민 절반 이상이 ‘부부별성(夫婦別姓)’ 제도 도입에 찬성하고 있다. 그러나 보수 정치권의 반대는 여전하다. 역설적으로 부부동성 제도의 대표 사례가 다카이치 총리 자신이 된 셈이다. 결혼과 이혼, 재혼, 그리고 다시 하나의 성으로 이어진 이들 행보는 단순한 사생활을 넘어 일본 사회의 변화와 전통이 충돌하는 단면을 보여준다. 다카이치 부부의 ‘같은 성’은 일본 사회에 던지는 작은 파문이자, 변화의 신호로 읽힌다. 다카이치 총리의 파격적인 행보가 한일관계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한다.
    남편이 아내 성을 따른 다카이치 총리 부부의 '특별한 선택'
    by 임병식
    2025.10.30 16:01:02
  • 일본을 여행하다 보면 ‘사토’ ‘스즈키’ ‘다나카’ 같은 이름을 자주 본다. 같은 한자 문화권이지만 일본의 성씨는 유독 자연과 농경, 그리고 귀족 문화의 향취가 짙다. 부부의 성이 같은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총리 취임은 일본 성씨의 기원과 제도적 배경에 새삼 시선을 모으게 한다. 일본 성씨에는 왜 자연 지형이 많을까. 한국·중국과 달리 두 글자 성씨는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또 결혼하면 같은 성씨를 갖도록 한 배경은 무엇 때문일까. 일본 여행에서 흔히 접하는 궁금함이다. 다카이치 총리의 남편 이름은 다카이치 타구(高市 拓)다. 본명은 야마모토 타쿠(山本 拓)였으나 2021년 재혼하면서 부인과 같은 성씨로 바꿨다. 부부가 같은 성씨를 쓰는 일본 문화도 생소하고, 남편이 아내를 따라 성씨를 바꾸는 경우는 더욱 드물다. 일본 10대 성씨는 사토(佐藤), 스즈키(鈴木), 타카하시(高橋), 타나카(田中), 이토(伊藤), 와타나베(渡邊), 야마모토(山本), 나카무라(中村), 고바야시(小林), 가토(加藤)다. 밭(田)과 산(山), 나무(木), 마을(村), 다리(橋), 숲(林) 등 자연과 농촌이 눈에 들어온다. 가장 흔한 사토의 등(藤) 또한 등나무다. 일본 성씨가 농경문화 또는 자연과 밀접함을 알 수 있다. 또 ‘마을 가운데’(나카무라·中村), ‘나무 아래’(기시다·木下), ‘강 주변’(와타나베·渡?), ‘밭 가운데’(다나카·田中), ‘작은 샘’(고이즈미·小泉) 등 스토리텔링 요소도 보인다. 자연 친화적인 성씨와 밋밋한 일본 음식을 떠올리자면 이들이 제2차 세계대전 때 만행을 저지른 민족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일본 성씨에 자연 지형이나 농경문화가 녹아든 유래는 이렇다. 고대 씨족 사회에서 성씨는 귀족이나 무사, 제관의 전유물이었다. 후지와라(藤原), 미나모토(源本), 타이라(平) 등 엘리트 씨족만 성(姓)과 씨(氏)를 가졌다. 농민과 평민들은 마을명이나 지명에 근거해 아무렇게나 불렀다. 평민들까지 성씨를 갖게 된 건 메이지유신 직후다. 메이지 정부는 19세기 말부터 성씨를 강제했다. 세금 징수와 징병에 필요한 호적·인구조사 제도를 정비할 목적이었다. 이 때 많은 이들이 “밭 한가운데 살았다(田中)”, “다리 아래 거주했다(高橋)”, “강기슭에 살았다(渡邊)”며 주변 환경을 빌려 성씨를 만들었다. 이러니 대부분 성씨는 160년 안팎에 불과하다. 스즈키(鈴木)는 제관 가문에서 유래한 성씨다. 방울(鈴)은 제사를 지낼 때 필수 도구였다. 후지(藤)가 들어간 성씨는 유독 많은데 사토(佐藤), 이토(伊藤), 가토(加藤), 사이토(斎藤), 엔도(遠藤), 후지와라(藤原) 가문이 방계임을 암시한다. 후지와라는 일본 고대·중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귀족 가문이었다. ‘보랏빛 등꽃이 핀 넓은 들(고귀함과 평온함이 공존)’을 뜻하는 이름부터 럭셔리하다. 후지와라 가문과 후손들은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8~12세기) ‘섭정’과 ‘관백’ 직위를 독점하며 천황가 외척으로서 군림했다. 일본 정치에서 귀족 독점 체제는 후지와라 가문에서 시작됐다. 자연 지형과 생활환경, 귀족·무사 계통 영향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일본의 성씨는 사회 구조와 역사, 그리고 문화적 정체성이 응축된 결과다. ‘돕는다(佐)’와 ‘등나무(藤)’를 결합한 사토는 귀족의 위세가 평민 사회로 스며든 사례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분 질서가 무너질 때 가장 많이 생긴 성씨가 ‘김(金)·이(李)·박(朴)’이다. 이들 성씨에 왕족과 사대부가 많았기에 하층민들은 ‘김·이·박’ 족보를 사들여 신분 변화를 꾀했다. 무사 계통 미나모토(源)와 타이라(平), 조정 귀족인 타치바나(橘)도 4대 씨족으로 꼽는다. 여기에서 파생된 성씨가 퍼지면서 일본의 지명과 문화, 지역 정체성을 형성했다. 예컨대 미나모토씨에서 아시카가(足利) 가문, 타이라씨에서 히라노(平野) 가문이 나왔다. 두 가문은 가마쿠라와 무로마치 막부를 지탱한 핵심 세력이었다. 일본에서 부부가 같은 성씨를 쓰는 독특한 제도는 민법 750조에 근거한다. 법은 “부부는 혼인 시 동의한 성씨를 사용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결혼한 부부의 95%가 남편 성씨를 따르고 있다. 결혼해도 각자 성씨를 유지하는 우리와 다르다. 제도가 만들어진 배경 역시 흥미롭다. 메이지 정부는 호적 제도와 가족 단위 존속·상속을 중시했다. 가족이 단일 성씨를 공유하면 행정상·재산상·세제상 효율적이라는 판단이었다. ‘부부동성’은 근래에 개인의 정체성과 다양성을 제약한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각자 성씨를 유지해야 한다”며 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다카이치 총리 부부는 시대를 앞서간 셈이다. 이는 일본에서 성씨 제도와 젠더·사회 인식 변화가 교차점에 있음을 상징하는 사례다. 지역마다 다른 성씨가 분포하는 것도 특이하다. 홋카이도는 사토와 사사키, 간사이는 나카무라와 야마다, 규슈는 마에다와 마쓰오가 흔하다. 사회 구조 변화에 기인한 결과다. 사토와 스즈키가 귀족 혈통을, 다나카와 나카무라가 농민과 평민을 상징한다면 이는 일본 사회의 축소판이다. 일본은 귀족 피가 섞인 사토와 신사 제관의 후손 스즈키, 평민 다나카가 공존하는 나라다. 그 안에는 신분과 계층, 종교와 문화가 녹아 있다. 이름 하나에도 천년의 역사가 스민 나라, 이것이 일본이다. 어쩌면 일본을 이해하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중요한 열쇠는 ‘이름’이다. 다카이치 사나에는 ‘고귀한 땅에서 일찍 싹튼 생명’이다. 이름처럼 한일관계에 좋은 싹이 틀지 기대해 본다.
    ‘역사·문화 축소판’ 일본의 성씨
    by 임병식
    2025.10.27 13:04:06
  • 세상이 바뀌고 있다. 약으로 병을 억제하던 시대가 저물고 ‘내 세포로 내 몸을 다시 만드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이 의료 혁명은 의학을 넘어 경제, 산업, 그리고 인간의 삶의 방식을 바꾸게 된다. 기존 제약·의료가 ‘치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이제는 ‘재생’인 것이다. 이 패러다임의 전환은 ‘늙지 않고, 고치며, 다시 사는’ 인류의 오랜 꿈을 실현해줄 것이다. 자기세포로 장기를 완벽 재생하는 시대는 이미 시작됐다. 최근 세계 과학자들은 ‘Self Cell, Self Organ’, 즉 자기 세포로 자기 장기를 만드는 기술을 경쟁하듯 개발 중이다. 단순히 장기나 피부를 떼어낸 뒤 다시 붙이는 시대를 넘어 이제는 자신의 세포로 피부·연골·신장·심장 조직 등을 인공지능(AI)과 3D 바이오프린팅을 결합해 재생하는 것이다. ‘자가장기 제조소’로 바뀔 병원 이 기술이 상용화되면 병원은 단순한 치료소가 아니라 ‘나만의 장기·세포를 제조하는 곳’이 된다. 의사가 환자의 피나 조직을 소량 채취해 AI, 바이오 융합, 오가노이드(약물 스크리닝·질병 모델링·동물실험 대체용 인체 장기 유사체), 3D 바이오프린팅 기술 등을 통해 그 세포를 새로운 조직으로 복제·재생시켜 환자에게 다시 이식한다. 마치 기계가 공산품을 찍어내듯 병원이 사람의 세포를 맞춤 생산하는 맞춤장기 플랫폼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단순한 진단 치료가 아니라 AI를 통해 발생 가능한 질환을 개인별로 정확히 예측한 뒤 후생유전자 치료제나 바이오 건강식품으로 질병을 사전 예방하되 불행히도 질환이 발생할 경우에는 자가 세포장기로 재생시키는 시대가 도래했다. ‘헬스케어 산업을 리셋하는 제로 투 원(zero to one)’ 로킷헬스케어는 세계 당뇨발센터나 국립암센터 등에서 AI 장기재생 시스템으로 난치병인 당뇨발(당뇨병성 족부병증), 얼굴 피부암, 손상된 무릎 연골에서 80~90%의 재생율을 기록하고 있다. 기존 치료법의 4분의 1 수준에 불과한 가격으로 세계적으로 1만 명 가까이 치료했다. 예를 들어 근래 일본 및 남미의 노령 피부암 환자들은 AI 자기 세포 기반의 저온 재생 프로토콜을 적용받아 4~5주 만에 자기 피부처럼 95~100%의 회복률을 보였다. 피부가 다시 자라나고 색이 돌아오는 과정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 자기세포를 쓰니 부작용은 물론 인종 사이의 임상 차이 문제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최첨단 의료기술에 대해 미국, 유럽, 이스라엘, 중동, 일본, 남미의 의료기관들과 긴밀하게 협업하고 있고 남미, 미국 등에서는 공공 보험 등록도 이뤄지고 있다. 이 첨단 기술은 전통의학, 바이오미케닉스, 바이오일렉트릭스, 바이오재료공학, 줄기세포기술, 오가노이드기술, 멀티노믹스, 기계공학, AI 및 크라우딩기술, 바이오시스템공학 등과 융합되는 추세다. 암을 ‘자기세포 약’으로 고친다 기존에는 항암제 같은 약물이 오히려 환자의 몸을 공격해서 암도 죽지만 환자도 같이 숨지는 경우가 흔했다. 그러나 이제는 내 몸의 세포가 약이 되어 스스로 암을 공격하게 되면 부작용은 줄어들고 효율은 높아진다. ‘외부 물질 약물이 아니라 내 몸이 약이 된다’는 개념이 AI 자가재생 패러다임의 핵심이다. 이제 의사들은 암환자의 몸속에서 나온 세포를 가공해 ‘맞춤형 항암제’를 만든다. 이것은 고가의 가격에 이미 상용화돼 있으니 새로운 소식도 아니다. 이제는 한술 더 떠서 자가 종양세포를 가공해 백신화하는 개인 맞춤 항암 백신, 면역세포를 꺼낸 뒤 강화해 다시 주입하는 TIL 치료, 이물질이 아닌 자기 세포막을 입힌 나노입자가 항암제를 정확히 암세포에 전달하는 ‘셀 앤드 드럭(Cell and Drug)’ 기술까지 개발이 이뤄지고 있다. 메가트렌드가 될 ‘AI 자가 장기재생’ ‘내몸이 약.’ 이보다 강한 안전성과 효율성을 기록할 약은 없다. 이 혁명은 엄청난 의학의 진보를 가져올뿐 아니라 국가 경제의 구조를 바꿀 메가트렌드가 될 것이다. AI 장기재생과 역노화 기술은 인간의 건강수명을 늘려주는 것은 물론 노령화와 만성질환에 따른 의료비 폭증 완화와 신산업 창출로 이어질 것이다. AI, 세포공학, 재생의료 등이 결합한 이 새로운 흐름은 앞으로 10년 내 세계 국내총생산(GDP)를 새롭게 재편할 블루오션이 될 가능성이 크다. 바이오 산업의 변동에도 불구하고 이 분야는 ‘사람이 오래 사는 한 절대 사라지지 않을 산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의료 분야에서 ‘AI 자가 장기재생’이라는 혁명적 패러다임의 변화를 통해 ‘질병을 사전 예방하고 생명을 연장하는 세상’이라는 인류의 꿈을 실현하는 날이 올 것이다.
    ‘내 세포로 장기를 고친다’ 자가재생 패러다임 시대
    by 유석환
    2025.10.27 13:03:56
  • 하나의 회사에 담긴 가족의 꿈 최근 창업자들이 후대에게 경제적 유산을 안정적으로 물려주기 위해 ‘비상장주식회사’를 설립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창업자는 “사업과 재산을 따로 나누면 가족이 흩어진다”는 생각으로, 현금흐름이 뛰어난 사업과 고가의 부동산, 상장사 주식을 모두 한 회사에 담는다. 그리고 이 회사를 자녀들에게 균등하게 상속하거나 증여한다. 그 의도는 선량하지만, 결과는 종종 비극이다. 자녀들이 모두 경영에 뜻을 같이하지 않는 한, 주식회사는 가족이 아닌 법에 의해 움직인다. 상법이 정한 다수결 구조 속에서 자녀 간의 이해충돌이 불가피하게 드러난다. 균등한 주식이 곧 공평한 행복을 의미하지 않는 이유다. 비극의 서막은 상속·증여받은 형제·자매 중 일부가 연합하여 대주주를 구성하고 소외된 나머지 형제·자매가 소수주주로 전락하면서 펼쳐진다. “같이 물려받았는데, 왜 나는 배당도 못 받나요?” 상속된 비상장회사가 분쟁의 불씨가 되는 가장 대표적 이유는 이익배당의 불공정성이다. 창업자는 흔히 “자녀들이 배당금으로 생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상법상 이익배당은 주주총회 또는 이사회의 결의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주주는 결산기에 자동으로 배당을 받을 권리가 없고, 오로지 다수결로 통과된 결의에 따라야 한다. 결국 배당 여부는 대주주가 좌우한다. 대주주는 등기임원 또는 미등기임원으로 재직하며 보수를 받거나 회사와 거래를 통해 이익을 얻을 수 있지만, 소수주주는 배당이 유일한 수익 수단이다. 그럼에도 다수결의 원칙 아래 장기간 무배당 결의를 반복하면, 이는 다수결의 남용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현행법은 이를 직접 구제할 제도를 두지 않는다. 소수주주의 강제배당청구권은 입법적 논의가 될 뿐이며 현행법의 해석으로는 주주총회 또는 이사회의 결의 이전에는 배당을 청구할 구체적 권리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필자는 실제 자문 현장에서 “형제·자매가 공동 상속한 회사인데, 몇 년째 단 한 푼도 배당이 없다”며 찾아오는 사건을 자주 본다. 경영권에서 소외된 자녀는 매년 회사의 막대한 이익을 보고받더라도 그 과실을 누리기 어렵다. 상속받은 재산이 그저 ‘잠긴 자산’이 되는 셈이다. 비상장주식의 유동성 함정 상장주식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경영권 프리미엄을 포기하더라도 시장에서 매도하여 현금화할 수 있다. 그러나 비상장회사는 주식의 처분이 쉽지 않다. 대주주가 지배하는 구조에서는 지분 매각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소수주주인 가족 구성원은 명목상으로는 수십억 원의 주식을 보유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현금화할 수 없는 ‘유동성 함정’에 빠진다. 이는 상속·증여세 부담과 맞물릴 때 더욱 심각해진다. 예를 들어, 비상장주식의 평가액이 높게 산정되어 거액의 상속세를 납부해야 하지만, 실제 배당이나 처분이 불가능하면 그 세금은 결국 다른 개인 재산을 처분해서 마련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가족 간의 원망과 갈등은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악화된다. 2세에서 3세로 이어지는 재산의 ‘독(毒)’ 창업자의 2세가 비상장주식을 물려받아 보유하다가, 그 자녀인 3세에게 다시 상속이 이뤄질 때 문제가 폭발한다. 이 시점에는 형제·자매 간 유대가 약화되고, 친족 간 신뢰도 거의 남지 않는다. 상속의 선택지는 단 두 가지뿐이다 - 전부 수락하거나 전부 포기하는 것. 평가가 높게 책정된 비상장주식이 전체 상속재산에 포함되면, 3세는 원치 않는 주식과 함께 막대한 상속세를 떠안는다. 배당도, 처분도 불가능한 주식이 가족 관계를 ‘재정적으로 파산’시키는 사례가 속출한다. 2세가 별도로 축적한 재산마저 창업자로부터 물려받은 비상장주식으로 인해서 처분되어야 할 지경이다. 상속이 가업 승계가 아니라, 가문의 분열로 이어지는 것이다. 창업자의 오판과 가족법·회사법의 교차점 이러한 비극은 대부분 “가족 간에는 싸우지 않는다”는 창업자의 낙관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주식회사는 가족애로 운영되지 않는다. 법인격은 가족 구성원의 의사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그 지배는 오로지 주주총회·이사회 등 회사법이 정한 절차에 따른다. 창업자가 회사를 단순히 재산의 그릇으로 생각한 결과, 상속 이후 가족들은 ‘재산권 분쟁의 법적 당사자’가 된다. 형제·자매 간에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등 각종 경영권 분쟁 소송이 제기되고, 서로 상대를 배임·횡령죄로 형사고소하는 지경까지 발전하는 것이 현실이다. 필자는 회계사이자 변호사로서, 이 같은 사건을 수십 건 이상 다뤄왔다. 소수주주인 가족의 상담에서는 절망이 느껴지고, 반대로 대주주 측을 대리할 때는 사건의 전망이 지나치게 유리하게 보인다. 결국, 비상장회사의 균등 상속은 균등하지 않은 권력 구조를 낳는다. “가장 나쁜 시나리오”부터 설계하라 창업자는 자녀의 행복을 바란다면 ‘좋은 시나리오’가 아니라 ‘가장 나쁜 시나리오’를 기준으로 상속·증여를 설계해야 한다. 상속 전에 최소한 다음 2가지는 검토해보아야 한다. 각 자녀에게 공평한 재산 분배를 하되, 주식과 사업 경영권은 경영에 능력과 의욕이 있는 자녀에게만 개별 주식회사를 단위로 상속·증여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 다른 자녀들에게는 개별적으로 처분이 가능한 현금·부동산 등의 자산을 상속·증여한다. 사업을 그대로 물려주고 싶다면 가족 간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해 미리 잘 설계된 주주간계약을 체결하거나, 신탁을 통해 경영과 소유를 분리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 주주간계약, 유언, 신탁 등 법적 장치를 조합하여 패밀리거버넌스를 구축하는 방안이다. 결론 - 가족을 지키는 법적 설계 한국은 이제 “창업보다 승계가 더 어려운 시대”에 들어섰다. 창업자 세대가 가업을 일구었다면, 2세·3세 세대는 그 가업을 법과 제도 안에서 유지해야 한다. 비상장주식의 균등 상속은 이상적으로 들리지만, 실상은 가족 관계를 해체시키는 도화선이 될 수 있다. 상속을 재산의 이전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책임의 이전으로도 보는 관점이 필요하다. 창업자들은 자녀의 우애를 믿기보다, 법의 구조를 신뢰해야 한다. ‘좋은 회사’보다 ‘분쟁이 없는 회사’를 남기는 것이 진정한 유산이다.
    비상장주식의 균등 상속·증여가 남긴 가족의 파국
    by 최승환
    2025.10.25 09:00:00
  • 신경생리학자 앨런 홉슨(Allan Hobson)이 자신의 저서 『프로이트가 꾸지 못한 13가지의 꿈』에서 소개한 꿈이다. 홉슨은 자신이 꾼 꿈을 소개하고, 해석하면서 프로이트가 세웠던 가설들을 공격한다. “토요일 아침 리아(홉슨의 부인)가 아침식사를 준비하려고 일어난 후에 나는 놀라운 꿈을 두 가지 꾸었다. 이 꿈속에서 나는 키스를 하고 있었다. 첫 번째 꿈에서 나의 키스 상대인 여성은 보이지 않았고 사실상 신체가 없는 게 아닌가! 오로지 보이는 것이라곤 아주 음탕하게 확 벌어진 입뿐이었다. 그렇게나 생생하고 관능적인 감각을 내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가 최근 몇년 사이에 느꼈던 어떤 것보다도 강렬한 감각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깨어났다가 다시 잠들어서 두 번째 꿈을 꾸었는 데, 비록 실제로 오르가즘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그에 비할 만큼 강렬한 꿈이었다. 이 꿈에서 키스하기 전에 순간적으로 그 여성을 바라보았을 때 아무리 프렌치 키스라고 해도 키스가 그렇게나 육감적일 수 있다는 게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서는 내가 타원형으로 벌려진 그 입술에 내 혀를 갖다 대고 둥그렇게 문지르려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입술에 내 혀가 닿기도 전에 짜릿한 성적 에너지가 내 몸 전체에서 느껴지는 게 아닌가! 그럴 수가 없어 보이기는 했지만, 이게 두 번째로 꾸는 꿈이고, 아주 얕은 잠을 자고 있었을 것이 분명한데도 내가 꿈을 꾸고 있다고는 나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홉슨은 이 꿈들을 해석하기 위해서 자신의 과거 경험을 회상하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 꿈을 꾼 것은 내가 <수면의 역설>이라는 국제학술대회에 참석차 프랑스 리옹에 갔다가 돌아온 직후였다. 이번 여행과 그 학술대회는 아주 감정적인 기억들을 떠올리게 했다. 1963년도에 내가 어떤 프랑스 여성과 첫 번째로 바람을 피웠던 기억이 주로 떠올랐다. 그건 육욕적인 면이 너무나 강한 일이었는데, 내가 성적인 관계를 장기간 유지한 최초의 경우였다. 이 관계는 상대가 갑작스럽게 죽은 1969년까지 6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나의 두 번째 결혼생활은 행복했고 2001년 2월에 겪은 뇌졸중 이후 리비도(본능적 욕망)가 현저히 감소했기 때문에 나는 새로 바람을 피우기는 커녕 옛 애인을 다시 만나보고픈 생각도 전혀 없었다. 그런데 2003년 9월에 개최된 국제학술대회에서 또다른 옛 연인 마리안느를 만났다. 그녀와는 공항에서 작별 키스를 했다. 미국에 도착하니 그녀에게서 연애편지가 도착해있었다. 며칠을 망설이다가 그녀에게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이틀 후에 이 프랜치 키스 꿈을 꾸었다.” 홉슨의 해석이다. “내 경험상 꿈이 오르가즘으로까지 이어지는 일은 아주 드물다. 시상하부(hypothalamus)가 성을 담당한다고 가정할 때, 잠자는 동안 이 성감 뇌(erotic brain)가 활성화 될 수 있다.” 현대 뇌과학에 의해 밝혀진 바에 의하면 뇌 안에 있는 시상하부의 중요한 기능 중에 하나가 성적인 욕구 등을 조절하는 것이다. 따라서 프랜치 키스 꿈은 수면 중 시상하부의 활성화에 의하여 만들어 졌다는 홉슨의 주장은 타당해 보인다. 꿈을 꾸게 만드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기억이다. 홉슨은 젊은 시절 프랑스에서 여성들과 로맨스가 있었다. 이러한 경험들이 뇌에 저장되어 있다가 그가 한 최근 체험이 촉발요인이 되어 프렌치 키스의 꿈이 만들어진 것이다. 홉슨은 이 심리적인 꿈을 프로이트가 제안한 해석방식과 비교하면서 프로이트를 비판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성감 뇌에 대해 무언가를 알 수 있다. 이게 금지된 욕망을 위장하고 검열을 받은 결과일까? 전혀 아니다. 그건 절대로 소멸되지 않는 욕망이 다시 불붙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홉슨의 이러한 지적은 프로이트가 성적인 욕망은 억압되었다가 뇌의 검열을 거쳐서 위장된 방식으로 꿈이 드러난다고 가정한 것에 대해서 비판한 것이다. 홉슨은 덧붙인다.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되면 의지를 능가하는 본능의 힘을 확인하게 되는데, 이것을 인식하고 강조한 공은 프로이트에게 돌려야 한다. 하지만 내 꿈들이 보여주는 것은 욕망, 성적 흥분과 같은 황홀감의 대부분이 순전히 뇌 부위들의 활성화의 결과로서 마음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홉슨은 프로이트의 가설들은 비판하면서도 프로이트가 꿈의 진정한 의미를 찾기 위해서 제안한 자유연상(free association)법을 이용해서 자신의 성적 편력을 회상하고 있다. 그리고 뇌 안에 있는 시상하부가 성적 욕구를 담당한다는 사실은 1975년 양전자방출 단층촬영(PET)기술과 1990년 기능성자기공명영상(fMRI) 기술이 각각 발명되어, 꿈 꾸는 뇌의 영상촬영이 가능해지면서 밝혀지게 된다. 프로이트는 1939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이같은 사실을 알 수는 없었다.
    엘런 홉슨의 꿈 '프렌치 키스'
    by 국경복
    2025.10.21 14:30:13
  • 해적이 호화선을 붙잡고나서 배를 서로 교환한 뒤 돌려보내는 희한한 사건이 벌어졌다. 1717년 2월 ‘블랙샘’ 사무엘 벨라미가 이끄는 해적선 ‘술타나’는 카리브해에서 영국 호화 노예선 ‘위다’를 사흘 동안 뒤쫓았다. 경고사격 대포 한 발에 놀란 ‘위다’는 저항하지 않고 바로 항복했다. ‘블랙샘’은 ‘위다’에 대포를 옮겨 기함으로 삼고, 포로로 잡은 선장과 선원은 ‘술타나’를 타고 떠나게 했다. 해적이 포로를 배려하고 아량을 베푼 드문 사례다. 두 달 뒤 뉴잉글랜드 근처에서 중형 무역선을 나포한 뒤, ‘블랙샘’은 선장에게 해적으로 합류할 것을 권했지만 종교적인 이유로 거절당했다. ‘블랙샘’은 선량한 선장에게 무역선을 돌려주려고 했지만, 해적들이 반대하자 투표에 부쳐 결국 배에 불을 질러 바다에 가라앉혀야 했다. 못내 미안했는지, 그는 선장에게 변명했다. “그들은 이익이 되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려 하지 않아”(They scorn to do anyone a mischief, when it is not for their advantage). ‘바다의 로빈후드’로 알려진 ‘블랙샘’이 해적질 하는 방식이다. 따르는 해적들도 스스로 ‘로빈후드의 부하들’이라고 불리기를 원했다. ‘우리는 가난해서 해적이 되었고, 그들이 가진 것을 나눠 가질 뿐이다’는 것이다. 정당한 분노와 혁명적인 공감으로 다진 리더십이다. 해적들은 가발을 쓰지 않은 검은 생머리에 검은 머리띠를 두르고 검은 외투를 즐겨 걸친 그를 ‘블랙샘’ 이라는 애칭을 붙였다. ‘로빈후드’의 삶은 왜 그리 짧은가? 무역선을 불태운 며칠 뒤, 위용을 자랑하던 해적선 ‘위다’는 미국 매사추세츠 앞바다에서 갑작스러운 폭풍에 시달리다 결국 침몰했다. ‘블랙샘’을 포함해서 모두 144명이 물에 빠져 죽고 2명이 구조됐다. 향년 28세. 난폭한 해적에게 정의롭고 관대하며 민주적인 리더십이 어떻게 먹혔을까? ‘블랙샘’은 불과 1년 남짓한 해적 생활에서 약탈한 규모가 120만 달러로, 해적 1위(Forbes. 2008)로 평가된다. ‘블랙샘’이 제시한 정의 리더십은 ‘자포스’ 최고경영자(CEO)인 토니 셰이의 행복 리더십과 닮았다. ‘블랙샘’은 대중을 착취하는 지배계급의 횡포에 분노하고 로빈후드처럼 ‘정의로운 해적’을 비전으로 내세웠다. 셰이는 그저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단순한 기업 문화에 분노했다. 즐거움과 열정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는 ‘행복 전달’이라는 깃발을 걸고 직원은 ‘행복 전도사’, 본인은 ‘최고행복경영자’라고 불렀다. 타성에 물든 조직에 낯선 비전을 심는 것은 쉽지 않다. ‘블랙샘’이 포로를 대하는 방식에 해적들은 처음에 거북해서 투표까지 하자고 했지만, 결국 ‘로빈후드의 부하들’이라는 호칭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셰이는 2013년 위계적인 기업 운영방식을 뒤엎는 홀라크러시(Holacracy)를 도입했다. 직책이 아니라 역할을 중심으로, 투명한 규칙 아래 스스로 책임지고 의사 결정하는 구조다. 수평적인 소통과 협업을 강조한 것이다. ‘덧없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표현일 것이다. ‘블랙샘’도 셰이도 인생 최고의 정점에서 한창 젊은 나이에 엉뚱한 사고로 요절했다. ‘블랙샘’은 느닷없는 폭풍에 배가 침몰하면서 물에 빠져 죽었고, 셰이는 창고에서 발생한 의문의 화재로 불에 타 죽었다. 각각 향년 28세와 46세. ‘블랙샘’은 약탈 규모가 해적 1위에 올랐고, 셰이는 ‘자포스’를 ‘아마존’에 10억 달러(1조4000억 원)에 매각한 뒤다. 해적의 바다와 자본의 시장에서 각각 가장 빛나던 시기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혁신 리더는 삶을 옥죄는 현실에 분노할 줄 알아야 한다. 분노를 비전으로 바꾸고 공감을 얻어야 한다. ‘블랙샘’은 분노를 바로 공감으로 연결했다. “그들은 법이란 가면 아래 가난한 사람을 강탈하고, 우리는 용기라는 보호막 아래 부자를 약탈한다”(They rob the poor under the cover of law, and we plunder the rich under protection of our own courage). 셰이는 ‘신발 판매’를 행복을 전달하는 ‘고객서비스’로 공감을 창출했다. “자포스는 우연히 신발을 팔게 된 고객서비스 회사입니다”(Zappos is a customer service company that just happens to sell shoes).
     분노하고 공감하라_사무엘 벨라미 & 토니 셰이
    by 허두영
    2025.10.15 21:00:15
  • 페루 의회가 9일 밤 디나 볼루아르테 대통령을 ‘도덕적 무능(incapacidad moral, moral incapacity)’을 이유로 압도적 표결로 해임했다. 전체 130명의 의원 중 123명이 찬성했고 반대는 단 한 표도 없었다. 이로써 페루는 2016년 이후 무려 8번째 대통령 궐위 사태를 맞게 됐다. 지난 9년 동안 대통령직을 수행한 인물은 쿠친스키, 비스카라, 메리노, 사가스티, 카스티요, 볼루아르테, 그리고 이번에 승계한 헤리까지 총 7명이다. 이 가운데 임기를 제대로 마친 대통령은 단 한 명도 없다. 이번 탄핵은 돌발적 사건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예고된 ‘시간 문제’였다. 볼루아르테는 2022년 12월 부통령 시절 페드로 카스티요 전 대통령이 친위 쿠데타를 시도하다 해임되면서 헌법에 따라 자동 승계로 대통령직에 올랐다. 그러나 정치적 기반과 지지율은 취임 직후부터 취약했다. 재임 중 8차례의 탄핵안이 발의됐고 4건은 본회의에 상정됐으나, 분열된 의회 구도 탓에 절대다수인 87표를 넘지 못해 무산돼 왔다. 하지만 내년 4월 대선을 앞두고 정당들이 선거 전략에 돌입하면서, 지지율 3%의 대통령과 선을 긋는 것이 정치적으로 유리하다는 판단이 확산됐다. 결국 우파와 중도 정당이 일제히 입장을 바꾸면서 탄핵은 몇 시간 만에 성사됐다. 결정적 계기는 8일 밤 리마에서 열린 인기 그룹 아과 마리나의 공연 중 범죄 조직의 총격 사건 때문이었다. 밴드 단원 4명과 관객 한 명이 부상한 이 사건 직후 치안 악화를 이유로 다섯 건의 파면 동의안이 동시에 제출되면서 정국은 급류를 탔다. 여기에 반정부 시위 진압 과정에서 60명 이상이 사망한 사건, ‘롤렉스게이트'로 불리는 고급 시계·보석 미신고 파문, 성형수술을 위한 직무 이탈 등이 누적되며 정치적 신뢰는 급격히 붕괴됐다. 검찰은 그녀에 대해 출국금지 조치를 취했다.. 헌법에 따라 대통령이 탄핵되면 권력 서열에 따라 부통령 또는 국회의장이 대통령에 즉시 취임한다. 국회의장은 매년 정당 합의로 교체돼, 준비되지 않은 인물이 순번에 따라 대통령에 오르는 경우가 잦다. 이번에 취임한 38세의 호세 헤리 역시 정치 경험이 얕고, 성폭력 및 부패 의혹으로 조사를 받은 전력이 있다.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 2016.7–2018.3 (약 1년 8개월) 경제장관, 민간경제인 선거 당선 오데브레히트 의혹, 사임 *마르틴 비스카라 2018.3–2020.11 (약 2년 8개월) 부통령, 주지사 부통령 승계 뇌물 수수 의혹, 탄핵 *마누엘 메리노 2020.11.10–2020.11.15 (5일) 국회의장 국회의장 승계 대규모 시위로 인한 사임 *프란시스코 사가스티 2020.11–2021.7 (약 8개월) 국회의원(과도연합) 국회의장 승계 과도정부 수반, 임기 종료 *페드로 카스티요 2021.7–2022.12 (약 1년 5개월) 교사·노조 지도자 선거 당선 자가 쿠데타 시도, 탄핵 및 체포 *디나 볼루아르테 2022.12–2025.10 (약 2년) 부통령 부통령 승계 ‘도덕적 무능’ 표결로 탄핵 *호세 헤리 2025.10–2026.7 (예정, 약 9개월) 국회의장 국회의장 승계 헌법상 승계(대선 전 과도정부) ‘도덕적 무능’ 조항은 19세기 헌법에 포함된 모호한 규정으로, 대통령을 형사소추 없이도 신속히 해임할 수 있게 한 근거가 됐다. 문제는 이를 견제할 사법·헌법적 절차가 전무하다는 점이다. 헌법재판소 사전 심사나 상원 재심 절차 없이 국회 표결만으로 탄핵이 확정된다. BBC는 이를 “의회의 손에 지나치게 집중된 해임 권한이 만들어낸 구조적 불안정”이라 평했고, 니콜라스 왓슨 테네오컨설팅 대표는 “경험이 부족한 헤리 정부가 초기에 흔들릴 경우 정치적 공백이 커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내년 4월 예정된 대선에는 43명의 후보가 등록했다. 군소정당이 난립해 정강·정책이 맞지 않아도 유명 인사를 영입하며 합종연횡이 반복되고, 선거 후 의회는 극도로 파편화돼 어떤 대통령도 과반을 확보하지 못한다. 이런 구조가 탄핵 정치를 되풀이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페루 경제는 비교적 견조하다. IMF에 따르면 2023년 -0.6% 역성장 후 2024년 3.3%로 회복했고, 2025년에도 3%대 성장이 예상된다. 구리 생산 증가와 공공투자가 경기의 버팀목 역할을 하고, 인플레이션도 1.8% 수준으로 안정적이다. 페루의 정치 위기는 한 정권의 몰락이 아니라, 탄핵이 정치 경쟁 수단으로 기능하는 구조적 문제의 반복이다. 이러한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9년 8명의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는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9년간 7번째 대통령…페루의 정치 불안
    by 박선태
    2025.10.15 20:48:13
  • 매년 10월 초가 되면 한국 언론은 국정감사 보도에 몰두하지만, 세계 언론의 시선은 노벨상 수상자 발표에 쏠린다. 인류가 만든 상 가운데 가장 영예로운 것으로 꼽는 노벨상은 수상자 개인을 넘어 한 나라의 학문 수준과 국력의 척도로까지 여겨진다. 올해 일본 열도는 특히 들떠 있다. 오사카대 사카구치 시몬 교수가 생리의학상을, 교토대 스스무 키타가와 교수가 화학상 수상자로 호명되었기 때문이다. 단숨에 두 명이나 배출하면서 일본의 역대 수상자는 모두 31명으로 늘었다. 한국의 2명과 대비된다. 노벨상 수상자 숫자보다 눈여겨봐야 할 건 내용이다. 일본 노벨상 수상자 31명 가운데 87%인 27명이 과학 분야 수상자다. 기초과학에서 일본이 얼마나 탄탄한 기반을 갖췄는지 웅변한다. 소재·부품·장비 분야에서 일본의 기술력은 독일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이미 우리는 2019년 한국에 대한 일본의 수출 규제 때문에 심각한 홍역을 치른 바 있다. 불화수소와 포토레지스트 등 반도체 핵심 소재가 막히자 한국 산업은 휘청거렸다. 그제야 소부장(소재, 부품, 장비)의 중요성을 깨닫고 기술 자립에 나섰지만, 여전히 격차는 크다. 일본의 기초과학은 왜 뿌리가 깊을까. 해답은 새로운 문물을 빠르게 흡수하는 역사적 전통, 기술자와 과학을 우대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가고시마의 센간엔 정원에서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근대적 실험을 시도했다. 그는 일본 최초로 반사로를 세우고 고품질 쇠를 뽑아 증기선과 대포를 만들었다. 동아시아가 칼과 조총에 머무르던 시대에 대포와 증기선은 전쟁 패러다임을 바꾼 첨단무기였다. 나리아키라는 개명 군주로 추앙받았고, 시마즈 가문은 메디치 가문에 비견될 만큼 존경을 받았다. 1865년 그가 선발해 영국에 보낸 유학생 17명은 훗날 사쓰마 번의 근대화 역사에 주춧돌이 되었다. 가고시마 중앙역 광장에 서 있는 ‘젊은 사쓰마의 군상’ 동상은 160년 전의 그 순간을 기린다. 사쓰마와 적대 관계에 있던 조슈 번도 뒤지지 않았다. 조슈 번은 이토 히로부미를 포함 5명을 영국에 파견했다. 이들이 귀국해 메이지유신의 핵심 세력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같은 시기 조선의 흥선대원군은 전국 곳곳에 척화비를 세우고 스스로 문을 걸어 잠궜다. 조선과 일본의 기술력 격차는 그때 이미 벌어지기 시작한 건 아닌지 모른다. 나가사키 데지마도 중요한 단서다. 네덜란드는 218년 동안 일본과 독점적 교역을 하며 서양 학문을 전했다. 난학(蘭學)이라 불린 이 흐름을 통해 서양 의학과 천문학, 화학, 지리학이 일본에 들어왔다. 당시 일본 지식인들은 ‘외부의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받아들였다. 메이지 정부가 파견한 이와쿠라 사절단은 바로 이런 호기심과 학습 열정을 제도화한 사례다. 100여 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은 1년 10개월 동안 미국과 유럽 12개국을 돌며 의회 제도, 교육, 철도, 통신, 은행 시스템을 직접 조사했다. 공업화의 길도 이때 닦였다. 일본 근대국가의 설계도는 해외 현장에서 얻은 체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 기초과학을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빼놓을 수 없다.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심수관을 비롯한 조선 도공들은 대부분 그곳에 정착했다. 조선에서 천대받던 자신들이 일본에서는 사무라이 대우를 받으며 기술자로 존중받았기 때문이다. 일본에 수백 년을 이어온 중소기업이 많은 것도 이런 장인정신과 무관하지 않다. 2002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다나카 고이치 역시 대기업 연구소 소속이 아니라 중소기업 시마즈제작소의 평범한 엔지니어였다. 그는 작은 회사지만 엔지니어로서 인정받고 세계적인 성과를 냈다. 시마즈제작소가 뿌리를 두고 있는 곳이 바로 시마즈 가문의 실험장이었던 센간엔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긴 시간의 축적이 과학기술로 이어졌다. 올해 수상자인 사카구치 교수는 학계의 비주류였다. 그러나 호기심을 좇아 묵묵히 기초연구를 이어왔다. 키타가와 교수 역시 수십 년 동안 한 분야만 파고들었다. 단기 성과주의가 아니라 인내와 호기심의 산물이다. 반면 한국은 산업화 이후 ‘빨리빨리’ 문화와 단기 성과 중심의 연구 풍토가 강했다. 윤석열 정부에서는 R&D 예산을 대폭 삭감함으로써 기초과학 기반까지 뒤흔들었다. 우리는 응용 기술과 제조업에서는 강했지만 기초연구 기반은 여전히 허약하다. 2018년 일본의 수출 규제로 뒤늦게 ‘소부장 자립’을 외쳤으나, 일본은 이미 수백 년 전부터 그 길을 걸어왔다. 간단치 않은 시간을 뛰어넘으려면 어떠해야 할지 자명하다. 기초과학은 단기간에 결실을 맺지 않는다. 수많은 실패와 시행착오를 견디며, 긴 안목으로 연구자의 호기심을 존중할 때 뿌리 내린다. 일본은 그 과정을 수백 년 동안 축적해 왔다. 한국이 일본을 따라잡으려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흔들리는 단기 과제가 아니라 50년, 100년을 내다보는 백년대계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연구자에게 실패할 자유를 보장하고, 호기심을 존중하는 생태계는 절실하다. 반일은 쉽지만, 극일은 험난하다. 일본의 노벨상 수상 소식을 불편한 시선으로만 바라볼 게 아니다. 백 년을 준비하는 자극으로 받아들이자.
    기초과학이 강한 일본
    by 임병식
    2025.10.15 20:34:47
  •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마두로 정권으로 이어진 권위주의적 통치와 구조적 인권 유린, 민주주의의 붕괴, 극심한 빈곤과 배고픔을 피해 지난 수년간 전체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약 750만 명의 국민들이 콜롬비아·페루·칠레 등 인근 국가로 탈출해 국경을 넘는 피난 행렬을 이루었다. 불안정한 정착, 삶의 기반을 잃은 채 방황하는 수많은 베네수엘라인들의 현실은 단순한 국가 위기를 넘어선 21세기 라틴아메리카의 집단적 비극이었다. 과거 이러한 장면을 수없이 목격해 왔다. 중남미 국가들의 식당에서, 택시 운전사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 속에서 만난 이들의 얼굴에는 꺼지지 않은 희망과 깊은 절망감이 교차하는 것 같았다. 오스카 무리요 정치 전문가는 최근 CNN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노벨평화상은 베네수엘라 국민이 오랫동안 이어온 민주주의 투쟁에 다시금 국제적 조명을 비추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경험 속에서, 민주주의와 인권 수호의 상징이자 권위주의에 맞서 비폭력으로 싸워온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가 2025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은 깊은 감동과 역사적 의미로 다가왔다. 그녀의 수상은 단지 한 개인의 영예가 아니라, 억압과 침묵 속에서도 자유를 포기하지 않았던 베네수엘라 국민 전체의 투쟁과 희망에 대한 국제사회의 응답이라고 느껴졌다. 마차도는 수상 직후 “이 상은 나 개인의 것이 아니라 자유를 위해 싸워온 모든 베네수엘라 국민의 것이다”라고 말했다. 마차도는 1967년 카라카스 출신으로 2002년 시민 감시단체 ‘수마테(Sumate)’를 창립하며 정치에 뛰어든 이후 20년 넘게 비폭력적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지키는 활동을 이어왔다. 권위주의 정권의 무력에 맞서 무장투쟁이 아닌 시민 조직, 선거 감시, 정치 참여를 통해 변화를 모색해온 점이 그녀의 가장 큰 특징이다. 2024년 베네수엘라 대선에서 출마가 금지된 이후에도 야권을 단일화해 에드문도 곤살레스를 지지하며 정권 교체를 시도했고, 선거 후 탄압 속에서 지하로 숨어들었다. 노벨위원회는 그녀를 “독재에서 민주주의로의 정의롭고 평화로운 전환을 위해 싸워온 인물이며, 어둠 속에서 민주주의의 불씨를 지켜온 사람”으로 평가했다. 마차도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일곱 번째 노벨평화상 수상자다. 그러나 이전 수상자들이 주로 국가 간 분쟁 중재나 내전 종식, 군사독재 하의 인권운동에 집중했다면, 마차도는 현직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시민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회복하려는 투쟁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수상의 성격이 다르다. 이는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 수상 당시와 유사한 맥락으로,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전례 없는 사례다. 수상 발표 직후 라틴아메리카 각국의 반응도 뚜렷이 갈렸다. 콜롬비아의 페트로 대통령은 “대화를 통한 평화를” 언급하며 축하 메시지를 보냈고, 에콰도르·파라과이·아르헨티나 등은 공개적으로 그녀의 용기와 리더십을 높이 평가했다. 반면 멕시코는 자국 헌법에 명시된 ‘비간섭 원칙’을 이유로 거리를 두었고, 쿠바·니카라과 등 권위주의 정권과 가까운 정부들은 침묵하거나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는 지역 내 이념적 균열이 여전히 강하게 존재함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국제인권단체와 서방 주요국들은 환영의 뜻을 밝혔다. 휴먼라이츠워치(HRW)는 “이번 수상이 베네수엘라의 민주적 전환을 위한 국제적 노력에 새로운 동력을 줄 것”이라고 평가했고, 유럽연합과 여러 유엔 특별보고관들도 그녀의 용기와 비폭력 저항을 높이 평가했다. 반면 트럼프 행정부는 “정치가 평화를 앞질렀다”고 반발했고,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노벨상이 정치화됐다”고 비판했다. 수상 자체가 국제 외교 무대에서도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진영 간의 대립 구도를 드러내는 상징적 사건이 된 것이다. 국경을 넘어 흩어진 수백만 명의 베네수엘라인들, 그리고 오슬로의 무대에서 울려 퍼진 마차도의 노벨평화상 수상 소식은 한 국가의 정치적 사건을 넘어, 라틴아메리카 민주주의의 향방을 가늠하는 분수령이 되고 있다. 그의 이번 수상이 베네수엘라 민주주의 회복의 전환점이 되고, 수많은 난민과 디아스포라가 다시 조국의 자유와 존엄을 되찾는 날이 앞당겨지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난민 750만 명, 그리고 한 여성의 이름이 울려퍼졌다
    by 박선태
    2025.10.15 20:28:37
  • 일본 정치가 또다시 안갯속이다. 자민당 총재가 곧 총리라는 일본 정치의 공식은 이제 깨지기 직전이다. 첫 여성 총리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앞에 둔 다카이치 사나에를 둘러싼 정국은 격랑으로 빠져들었다. 26년 동안 파트너였던 공명당이 등을 돌리면서 모든 계산은 틀어졌다. 도쿄 치요다구(우리의 여의도)에서는 “다카이치는 못 올라선다”는 찌라시가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자민당은 전체 중의원 의석 465석 중 196석으로 단독 과반은 어렵다. 공명당 24석을 합쳐도 부족하다. ‘총재=총리’라는 등식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일본 정치는 ‘단명 총리’의 무덤이다. 2006년 고이즈미 퇴임 이후 2012년 아베 신조가 재집권하기까지 6년 동안 총리만 여섯 번 바뀌었다. 하토야마, 간 나오토, 노다 요시히코 등 민주당 정권 총리들은 모두 단명에 그쳤다. 길어야 1년, 짧으면 몇 달짜리 돌려막기 총리였다. 의원내각제가 빚은 허약한 리더십, 뿌리 깊은 자민당 파벌정치가 주된 원인이다. 일본 총리는 늘 파벌의 눈치를 보고, 연정 파트너에게 표를 구걸한다. 다카이치가 직면한 상황도 다르지 않다. 설령 총리에 취임해도 그는 아소파 그늘에 있다. 연정은 일본 정치의 숙명이다. 1994년 선거제도 개편으로 중의원은 소선거구와 비례대표 병립제로 선출한다. 이는 자민당의 절대 우위를 어렵게 만들었다. 자민당은 1999년부터 공명당과 불안한 동거를 시작했다. 지난 26년간 이어진 자민·공명 연정은 일본 정치의 상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공명당은 그동안 자민당의 정치자금 스캔들, 야스쿠니 참배, 극우적 언행을 경고해 왔다. 2023년 아베파의 비자금 스캔들은 결정타였다. 정경유착, 보고서 조작, 솜방망이 징계에 유권자들은 분노했다. 공명당은 ‘정치자금 투명화’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자민당에 제도적 개혁을 요구했지만 자민당은 귀를 닫았다. 오히려 다카이치는 정치자금에 연루된 인사들을 중용하고 극우 색채를 감추지 않았다. 공명당이 “더는 동행할 수 없다”며 문을 닫은 건 당연했다. 일본 정치가 ‘타협의 연속극’이 아니라 ‘불신의 희극’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그럼에도 자민당은 왜 무너지지 않는가. 답은 분명하다. 이익집단과 끈끈한 유착, 권력을 나눠 먹는 파벌 구조, 그리고 난립한 야권 때문이다. 일본 유권자들의 관성적 선택, “그래도 자민당”이라는 체념과 무관심도 자민당을 지탱한 요인이다. 차악의 정치, 파벌 정치가 자민당 장기 집권의 비결이다. 자민당은 무너질 듯 무너지지 않는, 전후 정치의 기묘한 산물이다. 그 사이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을 보냈다. 국제정세가 급변하는데도 자신들이 쌓은 성안에서 뒷걸음질 쳤다. 심하게 표현하면 자폐 정치다. 한국 보수 정치가 대구·경북이라는 성역에 안주하는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카이치가 보여주듯 자민당 안에서 극우 담론은 여전히 주류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 과거사 부정, 혐한과 혐중 발언은 강성 지지층을 묶는 정치적 자산이다. 또 걸그룹과 코미디언, 탤런트 출신 정치인이 가세하면서 일본 정치는 ‘희화화’됐다. 정치와 예능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한국 정치는 일본과 다른 방식으로 황폐화했다. 대통령 단명은 없지만, 진영 대립과 적대 정치는 훨씬 치명적이다. 상대의 주장은 무조건 반대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어느 편이냐’가 판단 기준이 됐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여야는 처지를 바꿔 장외 투쟁에 나서고 국회는 길거리 확성기로 전락했다. 일본 정치가 코미디라면, 한국 정치는 상대를 궤멸하는 잔혹사다. 일본식 연정에서 우리가 배울 점은 있다. 귀를 열고 상대를 동반자로 대하는 정치 문화다. 하지만 일본식 연정은 안정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것도 교훈이다. 그렇다고 대화조차 시도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끝내 적대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다. 한국과 일본 정치는 공통된 병을 앓고 있다. 정치의 품격이 실종됐다는 점이다. 일본은 극우와 희화화로, 한국은 적대와 혐오로 품위를 상실했다. 정치는 사회를 통합하는 매개다. 그러나 양국 모두 정치로 인해 오히려 사회는 분열하고 국민은 지쳤다. 일본 정치가 희망을 말하려면 정치자금과 권력 파벌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한국 정치가 미래를 열려면 적대와 혐오를 내려놓고 협치와 연정에 나서야 한다. 그럴 때 양국 정치도, 양국 관계도 진전된 방향으로 나아간다. 자민당과 공명당의 결별은 어떻게 끝을 맺을까. 일본 첫 여성 총리라는 정치 실험은 성공할까, 아니면 구태의 반복일까. 한국은 일본보다 12년 앞서 2013년 첫 여성 대통령을 배출했다. 그렇다고 한국 정치가 일본보다 12년 앞섰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주지하다시피 첫 여성 대통령은 탄핵으로 중도 하차했다.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한다면 ‘처음’이란 수사는 공허하다. 정치는 사람의 일이고, 사회를 움직이는 근간이다.
    단명 총리, 자민당 독주는 왜?
    by 임병식
    2025.10.11 15:57:04
  • “우리에게는 해자(Moat)가 없고, 오픈 AI에게도 없다. 불편한 진실은 인공지능(AI) 경쟁에서 승리할 회사는 우리나 오픈 AI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글은 2023년 구글의 사내 메시지로 AI 시대의 진정한 승자는 플랫폼 기업이 아니라 데이터 해자 기업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데이터 해자’는 기업이 구축하는 독점적 데이터 자산을 의미한다. 이 개념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성을 둘러싼 해자처럼, 경쟁자가 접근하기 어려운 데이터 자산을 구축하여 경쟁력을 지키는 것에서 유래했다. 데이터 해자를 보유한 기업은 경쟁자가 쉽게 따라올 수 없는 막강한 고유 데이터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 AI 에이전트(Agent) 기술을 통한 AI의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면서 그 중심에는 기업들의 경쟁 우위 확보 및 생존을 위한 ‘데이터 해자’가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데이터 해자의 핵심은 단순한 데이터 보유가 아니라 데이터를 독점적으로 활용하는 시스템 구축에 있다. 누구나 구축하고 복제하기 쉬운 데이터를 우리만 쓸 수 있는 독자적인 자산으로 만드는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 AI 에이전트는 생성형 AI와는 다르게 정보 수집부터 추론, 실행, 피드백까지 복잡한 과정을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자율적 AI 시스템이다. 사용자의 요청을 받아 데이터를 수집하고 데이터를 기반으로 행동을 결정하며, 외부 시스템과 연동해 임무를 수행한다. 이전의 작업 경험을 스스로 학습해 나간다는 점에서 종래의 SaaS(Software as a Service) 시스템과는 다르다. SW시스템 분야에서 “데이터는 새로운 석유다” 라고 하는 개념은 지난 10년간의 슬로건 이었다. 그동안 기업들은 데이터가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를 알게 되었고, 기업들은 더 많은 데이터를 모으고 이를 분석하는 것에 투자했으며, 테라바이트 단위의 데이터를 스토리지에 저장하며 활용했다. 그러나 생성형 AI 가 등장하면서 종래의 법칙은 무너졌다. 생성형 AI 모델은 데이터를 갖고 있지 않아도 원하는 정보를 척척 제공한다. 이로 인해 이제 보편적 데이터 보유는 더 이상 경쟁력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데이터 해자는 AI 시대 기업의 필수 생존 전략으로 독점적 데이터를 기반으로 기업을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데이터의 독점성, 업무 운영과 깊숙하게 얽힌 배타성, 전문가의 노하우 데이터화,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 환각) 현상 최소화 등이 필요하다. 의료나 금융 분야처럼 법이나 제도적 규제가 있거나 실제 운영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독보적인 데이터, 전문가의 직관 같은 노하우를 데이터화 하는 것이다. 특히 AI 모델이 부정확한 정보를 생성하는 할루시네이션 현상은 데이터 해자를 추구하는 기업에게는 가장 큰 기회의 영역이다. 단 1% 미만의 미미한 환각 비율이라도 수백만 건의 데이터를 처리하다 보면 감당할 수 없는 재앙적 오류가 발행하게 된다. AI 에이전트 기반의 기술 패러다임이 기존 SaaS를 넘어서는 데이터 중심의 플랫폼 가치 전환을 촉진하고 있다. 기업의 플랫폼 경쟁력 평가 기준이 기존 트래픽 지표에서 데이터의 고유성과 포괄성지표로 변하고 있다. 이제 플랫폼 경쟁력은 독점적 데이터 자산을 얼마나 많이 확보 하고 있는가가 핵심이 되었다. 대표적 사례로 미국의 팔란티어 테크놀로지가 있다. 팔란티어는 온톨로지 기반 정부기관 및 기업의 대규모 AI 분석 솔루션을 제공하는 회사다. 팔란티어의 솔루션을 활용하는 기관이 많아지면 많아질 수록 팔란티어가 보유하게 되는 독점적 데이터 자산은 기하 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되고, 이는 곧 경쟁자가 따라올 수 없는 독보적인 데이터 해자를 구축하게 될 것이다. 식신은 MAU(월간 방문자수) 350만 명의 국내 최대 규모의 맛집(외식) 데이터를 보유한 플랫폼 기업이다. 매월 350만 명의 이용자가 앱과 웹을 통해 남긴 행동 데이터(검색, 리뷰, 클릭 등), 100만 건 이상 축적된 식당 정보와 모바일식권 e식권 결제 데이터를 기반으로 GPT로 찾을 수 없는 차별화된 외식 데이터 해자를 만들어 낸다. 식신은 AI 분석을 통하여 약 1000만 건의 인기 메뉴, 각종 편의정보, 영업시간 등 업종 정보와 함께 식당별로 방문 목적, 맛평가, 분위기, 서비스 등 약 100여 개 세분화된 속성 정보를 ‘AI 할루시네이션’이 없이 정확하게 추출할 수 있다. 앞으로 모든 산업 분야에서 AI 에이전트의 도입이 활발하게 일어날 전망이다. AI 에이전트는 맥락을 이해하고 내외부 데이터를 수집 및 통합하며, 스스로 개선하는 능력을 갖춘 진화된 형태의 인공지능이다. AI 에이전트 시대에는 단순 트래픽이 아닌 희소성과 맥락이있고 할루시네이션이 없는 데이터를 보유한 기업이 장기적인 경쟁 우위를 확보할 것이다. 독점적 데이터 자산을 갖춘 데이터 해자 기업들은 AI 시대를 이끌며 더욱더 성장할 전망이다.
    AI 데이터 해자와 할루시네이션
    by 안병익
    2025.10.11 15:56:55
  • 해상 운송은 전 세계 상품 교역의 80%를 차지하는 국제 무역의 주요 기반이다. 해운 부문의 온실가스 배출은 전 세계 배출량의 약 3%에 달한다. 현재 운항 중인 선박의 92.8%가 기존 화석 연료에 의존하고 있으며 평균 선령은 13년 수준이다. 선박의 평균 수명이 약 25년임을 감안하면, 향후 10여 년 동안 에너지 효율이 낮은 노후 선박 등에서 배출되는 온실가스가 크게 줄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2020년부터 2024년까지 해운 부문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3.7% 증가했다. 전 세계적으로 탄소중립 달성을 위한 움직임이 강화되면서 해운 분야에 대한 탈탄소화 요구도 거세지고 있다. 국제해사기구(IMO)는 2023년 ‘온실가스 감축 전략’(IMO GHG Strategy 2023)을 채택해 2050년까지 온실가스 순배출 제로 달성을 선언했고, 2025년 4월에는 ‘넷제로 프레임워크’를 발표해 대형 선박의 온실가스 초과 배출량에 탄소부과금(Levy)을 도입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기존의 선박 에너지 효율 규제(EEDI, EEXI, CII)에 더해, 탄소 배출에 비용을 매겨 감축을 유도하는 시장 기반 조치(Market-Based Measure)로 한 걸음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EU는 2024년부터 해운 부문을 배출권거래제(EU ETS)에 편입했고, 2025년 1월부터는 선박 연료의 탄소 집약도를 단계적으로 낮추는 별도의 규제(FuelEU Maritime)도 시행했다. 국제사회의 규제가 강화되면서 친환경 연료를 사용하는 선박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클락슨 리서치에 따르면, 전 세계 선박 수주량에서 LNG, 메탄, 암모니아 등 대체 연료 추진선의 비중은 2020년 28%에서 2024년 50%까지 상승했다. 연료 전환 이외에도 선체 저항 감소, 추진 시스템 효율 개선, 운항 경로 최적화, 감속 등 기술적・운항적 조치를 통한 감축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특히 디지털 기술을 접목한 스마트 선박은 운항 데이터를 분석해 연료 소비를 줄이고 효율을 높이는 주요 수단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와 함께 눈에 띄는 변화는 중국 조선업의 약진이다. OECD의 분석에 의하면, 2024년 9월 기준 친환경 연료 선박 제조 비중은 중국 47%, 한국 42%, 유럽 6%, 일본 3%이다. 과거 중국은 낮은 인건비를 활용해 저가 선박 위주로 수주했지만, 최근에는 기술력을 갖춰 컨테이너선이나 가스운반선 등 고부가가치 선박의 수주량을 늘리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중국 정부는 5개년 계획을 수립할 때마다 조선업을 전략 산업으로 지정해 집중 육성해 왔으며, 그 결과 세계 조선시장에서 점유율은 1999년 5% 미만에서 2023년 50% 이상으로 확대됐다. 특히 중국은 2023년 ‘조선업 녹색발전 행동개요(2024-2030)’를 발표하면서 친환경 선박의 설계, 연구・개발, 건조・수리뿐만 아니라 탄소발자국 관리, 친환경 기자재 공급망 구축, 국제 협력 강화 등을 체계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 조선업의 확장을 견제하고 있다.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중국의 조선업 성장을 단순한 경제적 리스크가 아닌 미국의 국가 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평가했다. 중국은 군-민 융합(Military-Civil Fusion) 전략에 따라 국영 조선소(CSSC)에서 상업용 선박과 최첨단 군함을 병행하여 건조하고 있으며, 중국의 선박 건조 역량 강화는 군사력 증강과 직결된다는 것이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2024년 4월 무역법 제301조에 따라 중국의 조선・해운・물류 부문에 대한 조사를 개시했고, 2025년 4월 중국 정부의 보조금, 국영기업 우대, 금융지원 등 비시장적 조치가 불공정하다고 판단하면서 중국 선사 및 중국산 선박에 대한 입항료 부과를 결정했다. 미국 의회도 같은 달 초당적 법안인 ‘선박법’(SHIPs for America Act)을 재발의하여 외국 선사가 중국의 국영 조선소에서 신조선을 발주할 경우 발주 비율에 따라 벌칙세(penalty tax)를 추가로 부과하는 조항을 신설했다. 즉, 미국은 현재의 중국 선박뿐만 아니라 향후 중국 조선소에서 건조될 선박에 대해서도 광범위한 통상 제재를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이러한 조치가 조선시장에 미칠 실제 영향은 아직 불확실하다. 다만 미・중 간 산업 패권 경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한국의 조선 산업은 축적된 기술력과 품질 경쟁력을 기반으로 새로운 수주 기회를 확보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특히 유럽의 선주들은 연료 전환과 ESG 경영을 발주 조건으로 강화하고 있어, 국제사회의 탈탄소화 규제 동향을 면밀히 살피고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노력이 중요하다. 친환경 연료 기술 개발, 공급망 ESG 리스크 관리 강화, 투명한 탄소정보 공개 등은 앞으로의 수주 경쟁력을 좌우할 핵심 요소가 될 수 있다. 정부와 조선・해운업계, 금융기관이 협력해 친환경 선박 인프라와 산업 생태계를 함께 구축한다면, 한국은 기술 경쟁력에 더해 지속가능성 경쟁에서도 선도적인 위치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해운 분야의 탈탄소화와 조선업의 대응
    by 민창욱
    2025.10.11 08:00:00
  • 1720년 6월 캐나다 펀들랜드 남동쪽 트레파시 항구에 검은 ‘졸리로저’(Jolly Roger)를 내건 해적선 ‘로열포츈’(Royal Fortune)이 다가왔다. 검은 깃발은 순순히 항복하면 자비를 베풀겠다는 신호다. 온 항구가 갑자기 얼어붙었다. 정박했던 프랑스 함선과 상선 172척이 두려움에 질려 도망가거나 항복해버렸다. 해적선은 총 한 발 쏘지 않고, 칼 한 번 휘두르지 않고 항구를 장악했다. ‘로열포츈’ 한 척에 60명 남짓한 해적이 타고 있었을 뿐인데도 말이다. ‘검은 남작’(Black Bart) 바르톨로뮤 로버츠는 가장 성공한 해적으로 꼽힌다. 불과 3년 남짓 해적질 하면서 무려 470척이 넘는 배를 약탈했다. 요즘 가치로 치면 3200만 달러(한화 420억 원)쯤 된다. 노예선을 타다가 해적에게 붙잡혔지만, 뛰어난 항해 실력으로 6주 만에 선장으로 추대됐다. 자신을 배려해 주던 선장의 죽음에 복수하기 위해 첫 작전에서 아프리카 서해안의 섬 프린시페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해적이 되기 싫어서 그랬을까? ‘검은 남작’은 흉악한 해적이 아니라 멋진 신사처럼 보였다. 화려한 진홍색 코트에 다이아몬드 십자목걸이를 걸고 검은 깃털을 단 모자를 쓰고 전투를 지휘했다. 술은 입에 대지 않고 차를 즐겨 마셨다. 해적선에서 도박과 싸움을 금지하고, 항상 청결을 유지하도록 했으며, 해적이 지켜야 할 조항을 담은 ‘해적규정’(Pirate Code)을 만들어 다 같이 서명하고 성서에 손을 얹고 맹세하게 했다. ‘검은 남작’은 ‘졸리로저’에 모래시계를 든 해골을 그려 넣었다. ‘죽음을 잊지 마라’(Memento Mori)는 경계일까? 1722년 2월 아프라키 서해안에서 평소처럼 멋진 차림으로 영국 해군과의 전투를 지휘하다, 갑자기 날아온 포탄 파편에 가슴을 맞고 즉사했다. 향년 39세. 해적들은 그의 시신을 바로 돛으로 둘둘 감싸 바다 깊숙이 가라앉혔다. 해군에 잡혀 모욕을 당하지 않고 기사처럼 당당하게 죽겠다는 평소의 유언 때문이다. 해적 ‘검은 남작’이 제시한 상징 리더십은 스티브 잡스의 카리스마와 닮았다. 잡스는 검은 터틀넥과 청바지로 ‘무장’하고 신제품을 발표할 때마다 명장면을 연출했다. 기품 있는 완벽주의와 미니멀리즘이다. 특히 2007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아이폰’을 발표한 날은 ‘검은 남작’이 ‘로열포츈’을 이끌고 트레파시에 나타난 것처럼, 무대는 물론 온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한 입 베어 문 사과 로고와 ‘Think Different’ 슬로건이 ‘검은 남작’의 ‘졸리로저’처럼 강렬했다. 엄격한 원칙과 규율도 마찬가지다. 잡스는 애플에서 극도의 완벽주의와 비밀주의를 요구하며, 까다로운 기준에 맞지 않는 제품이나 직원은 가차 없이 내쫓았다. ‘매킨토시’를 기획할 때 회로설계팀에는 칩과 회로까지 아름답게 배치하라고 다그치고, 제품설계팀에는 아무나 컴퓨터 내부를 볼 수 없도록 특수 나사로 잠그라고 지시했다. 또 화가가 작품을 마무리하듯, 개발팀이 회로 기판에 서명을 남기도록 하는 식으로, 보이지 않는 곳까지 꼼꼼하게 챙겼다.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성찰의 태도도 ‘검은 남작’을 연상시킨다. 잡스는 지난 2005년 스탠퍼드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죽음은 하나밖에 없는 최고의 발명품이다”(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고 말했다. 췌장에 생긴 신경내분비종양을 수술로 떼어낸 시한부 삶을 고백한 것이다. ‘Stay Foolish’였을까? 신념을 행동으로 증명하는 잡스의 리더십 앞에 다들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리더는 방향을 제시하고 이끌어야 한다. ‘검은 남작’과 잡스는 신념을 제시하고 행동으로 증명했다. 제시하지 않으면 리더가 될 수 없고, 증명하지 못하면 리더로 남을 수 없다. ‘검은 남작’은 태동하는 새로운 해양제국의 질서에 저항했고, 잡스는 컴퓨터산업을 지배하던 빅브라더(Big Brother)의 관성에 맞섰다. 기존 질서에 결코 순응하지 않고, 각각 해적의 무력과 혁신의 법칙으로 자신의 깃발이 휘날리는 새로운 세상을 구현한 것이다.
    방향을 제시하고 증명하라: 바르톨로뮤 로버츠 & 스티브 잡스
    by 허두영
    2025.10.10 16:32:25
  • 최근 한국과학기술한림원에서 커리어디시젼스 강연이 있었다. 그 강연에서 우리집은 일년에 제사가 거의 20번 정도 있었는데 우리 어머니는 이 제사 음식과 일년에 한번 있는 시제(時祭, 문중 제례) 음식을 다르게 준비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했더니 ‘뭐가 다르고 왜 다르냐?’라고 질문이 많이 들어 왔다. 기본적으로 제사와 시제의 차이를 보면 제사는 돌아가신 분 1인을 모시고 기억하고 기리는 것이고 시제는 종친들이 묘소나 릉을 찾아가 시조를 기리고 후손들의 안녕과 평강을 비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임금이 서울에서부터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릉을 행차하여 의례를 지내는 것이 시제의 모범이고 제례의 표본이다. 순우리말인 한가위를 부르는 추석은 중국의 중추절과 비슷하지만 중국과는 다르게 독립적으로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명절로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농사를 잘 짓게 해준 하늘과 땅에 감사하고 동시에 모든 고을사람의 평강을 기원하며 음식을 나누는 우리 고유의 문화이다. 물론 한해 풍년을 기원하는 정월대보름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요즘은 풍성한 추수를 할 수 해주신 신에 대한 감사 위에 조상님에 대한 감사와 제사를 지내는 것까지 추가되어버렸다. 아마도 종친들이 따로 쉽게 다 모이지 못하기 때문에 시제의 기회가 줄어들어 추석에 조상들께 제사 지내는 시제의 기능까지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으로 보면 제사는 고려시대 이전부터 있었고, 시제나 의례는 성리학이 들어온 조선시대 이후에 들어온 것이다. 한가위나 정월 대보름은 제사와 같이 고려시대 이전부터 내려온 우리 고유의 전통과 문화이다. 시제는 기본은 조선시대 이후 궁궐에서 진행된 졔례일 것이고 이를 유생들에 의하여 서원에 파급되어 시제까지 확대되었다. 이와 같이 시제와 제사는 뿌리가 다르기 때문에 당연히 음식도 다르다. 즉 우리 어머니가 어렸을 때 보여준 제사음식과 시제음식이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고려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제사음식은 돌아가신 분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으로 그 지방에서 가장 맛있는 것으로 지냈다. 시제나 제례 음식은 조선시대 이후 남성 중심의 성리학자 양반들이 주도하다 보니 맛보다는 격식을 중요하게 따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평범한 여성들이 만든 우리 음식은 차례상에서 멀어지고 남성들이 책으로 접한 중국 음식이 주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그 밑바닥에는 아마도 아낙들이 만드는 우리 음식은 천하고 중국 음식은 귀하다는 사대사상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고춧가루나 양념이 없는 기름기 있는 음식이 차례상에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몇 년 전 성균관 학자들이 추석에 부치는 전이 우리 음식이 아니라는 말을 공식적으로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이렇게 궁중이나 양반 종가에서 제례 음식이 필요했으니 홍만선(洪萬選)과 같은 학자들이 중국의 제민요술(齊民要術)이나 거가필용(居家必用) 같은 책을 번역하여 산림경제(山林經濟)를 편찬한 것이다. 그래서 시제음식이 색깔과 맛이 밋밋한 것이다. 중국음식은 기름으로 요리하여야 하는 데 우리나라는 기름도 많지 않고 기름으로 맛을 내는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보통 제례음식이 맛이 없다. 조선시대 이후 의례나 제례음식은 우리 음식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요즘 흔히 말하는 궁중음식과 종가음식은 우리 음식에 뿌리를 둔 음식이 아니다. 우리 음식의 종류를 궁중음식, 종가음식, 서민음식으로 가르치는 것은 잘못 되었다. 프랑스와 같이 왕이 즐겨 먹는 음식이 궁중음식이어야 하는 데 조선 시대는 제례나 의례를 위해 궁중에서 만드는 음식이 궁중음식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요즈음은 제사도 한 분을 위해 돌아가신 그날그날 모시는 것이 아니라 조상들의 기일을 묶어서 단체로 한 번에 하는 집이 많아졌다. 또한 추석과 시제의 개념이 불분명하여 시제를 지내지 않고 추석 때 조상들의 공덕을 기리는 집이 많아 한가위의 본래 개념과도 벗어나 버렸다. 이와 같은 문화의 변화와 함께 요즘은 제사음식, 시제음식, 추석음식의 개념도 섞여버린 기분이 든다
    제사음식과 제례음식 차이
    by 권대영
    2025.10.10 16:12:49
  • 최근 영국 우주사령부는 러시아가 영국 군사위성을 상대로 주간 단위로 전파 방해(Jamming)를 시도하고 있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는 우주 영역이 근본적으로 변화고 있음을 알리는 강력한 신호로 볼 수 있다. 또한 러시아 위성이 영국 군사위성에 근접 궤도비행하며 정보를 수집하는 스토킹(Stalking) 행위를 한 것은 우주 궤도가 이미 적대적인 행위로 가득 찬 ‘제4의 전장’으로 전환되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러한 우주 위협에 대해 미국과 영국 등 우주 선도국들은 단순히 우주영역인식(SDA: Space Domain Awareness)을 넘어 우주위협을 능동적으로 인지하고 방어하는 우주 생존력(Resilience) 확보를 최우선 전략으로 설정하고 획기적인 방어책들을 실행하고 있다. 우주위협 탐지: ‘능동 방어’ 첨단화 오늘날 우주 적대국의 위협은 레이저 공격과 같은 정교한 지향성 에너지 무기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레이저는 위성을 추적하거나 센서를 무력화(Dazzling/Blinding)시켜 기능을 마비시킬 수 있다. 이에 대응하여 영국은 현재 적대국 레이저 위협을 탐지하고 분석하는 신규 위성 센서 기술에 집중 투자하고 있다. 이 위성 센서는 레이저의 특성과 출처(지상 또는 우주 기반)를 정밀하게 식별하여 지휘관이 위성에 대한 방어 조치를 즉각 취할 수 있도록 필수 정보를 제공하게 된다. 또한 중국과 러시아 등의 우주 대응(counter-space) 능력 위협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해 설립된 미 우주군 산하의 우주신속능력사무소(SpRCO: Space Rapid Capabilities Office)는 자체 위성 인식(Own-Ship Awareness) 능력 프로그램으로 정지궤도(GEO) 위성에 항공기의 레이더 경보 수신기(RWR, Radar Warning Receiver)와 유사한 탑재형 RWR 장착을 추진 중이다. 이 시스템은 접근하는 물체의 레이더 신호를 감지해 자국 위성이 추적 또는 표적화되고 있는지를 운영자에게 조기에 경고하는데, 미 우주군 SpRCO는 이 위성 탑재 RWR 능력을 ‘궤도 전쟁(orbital warfare)’ 수행을 위한 핵심 기반으로 간주하며 개발을 서두르고 있다. 사이버 훈련장과 우주기밀 정보 ‘공조’ 체계의 구축 오늘날 우주 위협은 물리적 충돌뿐 아니라 사이버 공격의 형태로 전방위적으로 증대되고 있다. 지상 시스템과 궤도 자산이 얽힌 우주 운영 아키텍처는 “더욱 복잡하고, 분산되며, 동적”으로 진화하고 있어 전통적인 보안 방법으로는 방어가 어렵다. 이러한 난제 해결을 위해 우주 기술 계약업체 딜로이트는 전자레인지 크기의 소형 위성 ‘Deloitte-1’을 발사했다. 이 위성은 궤도상에서 실제 사이버 공격과 방어 테스트를 수행하는 ‘실사격 사이버 훈련장(live-fire cyber range)’ 역할을 하며 탑재된 침입 탐지 시스템(Silent Shield)으로 위성의 사이버 회복 탄력성을 검증하고 강화할 예정이다. 이러한 궁극적인 우주 방어 시스템은 정부와 민간의 경계를 허무는 협력 속에서 완성될 예정으로 미 우주군(USSF)은 ‘Orbital Watch’ 프로그램을 통해 상업 우주 산업 파트너들에게 우주 기밀 위협 정보를 공유하는 새로운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향후 양방향 정보 공유를 통해 민간 위성이 감지한 이상 징후나 우주 위협 정보도 역으로 우주군에 제공되는 시스템을 갖추게 된다. 우주 패권의 기준: 방어와 회복 탄력성 오늘날 우주 시대의 오디세이(대항해)는 이미 평화로운 탐사가 아닌, 생존을 건 치열한 기술 및 정보 전쟁으로 그 성격이 명확히 바뀌었다. 러시아의 공격적 ‘의지’와 중국의 ‘기술적 정교함’으로 대변되는 우주 위협 환경은 이제 논쟁의 여지가 없는 현실이다. 미국과 같은 우주 선진국은 위성 탑재 레이더 경보수신기(RWR)를 통한 자체 위협 인식 능력 보유, ‘Deloitte-1’을 통한 궤도상 사이버 방어 훈련, 그리고 ‘Orbital Watch’를 통한 정부-민간의 우주기밀 정보 공조 등으로 우주 자산을 능동적으로 방어할 예정이다. 이제 미래 우주 패권은 단순히 누가 더 많은 위성을 쏘아 올리느냐가 아니라, 누가 위협에 맞서 자국과 동맹의 우주 시스템을 더 빠르고 유연하게 방어하고 회복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 역시 이러한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고, 능동적인 우주 생존력 확보를 위한 대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
    우주 위협에 맞선 ‘능동 방어’와 ‘우주정보 공조’
    by 최성환
    2025.10.10 16:01:30
1 2 3 4 5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