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K-팝과 K-드라마가 세계 여러 곳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있다. 때로는 한국의 팝과 드라마가 세계 문화의 주류가 될 것이라는 의견도 접한다. 이에 대해 생각해 보자. 세계에 알려지고 있는 한국의 드라마들은 TV 드라마이고, 그 주제는 잘 사는 가정이나 궁중 이야기들이다. 쉽게 말하자면, ‘이야기-즐기기’의 드라마들이다. 한국의 TV 드라마는 과거의 진실을 파헤치는 역사·사회적 또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 질문, 현실에 대한 반성 등의 지성적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영화 역시 비슷하다. 이념 선전에 치우친 영화들이 대부분이다. 역사적 사실을 추구해야 하는 다큐멘터리 마저 사실 규명을 소홀히 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20세기 중반 이후 대중문화가 전통 상류문화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대중문화가 귀족문화를 밀어낸 것은 대중시대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대중문화가 전적으로 오락에만 빠져든 것은 아니다. 유럽에서는 진지함을 추구하는 지성적 작품이 이어져 온다. 체코 태생의 헝가리 감독인 벨라 타르(Bela Tarr)의 ‘사탄 탱고’(1994년)와 ‘토리노의 말’(2011년)이 좋은 예일 것이다. 대단한 작품들이다. ‘사탄 탱고’의 상영 시간은 439분으로,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긴 시간의 영화였다. ‘토리노의 말’은 한국에서도 상영되었고 벨라 타르 감독은 부산 영화제에도 참여했었다. 아시아를 보자. 이슬람의 종교적 족쇄 하에서도 이란은 ‘올리브 나무 사이로’(1994)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와 같은 아름다운 영화를 발표한다. 이들과 어깨를 겨룰 수 있는 한국의 영화가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2000년 이후 제작된 한국의 영화를 끝까지 본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자신 있게 말하지는 못 하겠다. 욕설과 폭력으로 뒤덮힌 초기 장면을 견디기 어려워 초반을 넘겨 본 영화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K-팝은 어떤가? 노래는 멜로디와 가사로 이루어져 있다. 멜로디에는 좌우의 이념이 없다. 정치적 이념에 무관심한 대중이 몰두하는 곳이 스포츠와 음악이 아닐까? ‘푸른 곰팡이’(BTS)와 ‘사건의 지평’(유하)은 항생제와 블랙홀의 용어를 가사로 사용한다. 이념에 무관심하다는 제스처다. 음악 이야기를 하면, 애호가들은 “클래식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 한다. 베토벤, 브람스에 이어 20세기 초, 바르톡, 스트라빈스키로 이어진 클래식이 어떻게 변모했는지 궁금한 것이다. 음악과 미술은 20세기 중반 이후 개념 예술로의 길을 간다. 개념화된 예술이 무엇인지, 대중이 떠나 버린 그림과 음악을 살펴 보기로 하자. 그림은 기억 속의 남아 있는 모습을 그리는 작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암각화가 그렇고 성당의 벽화와 성화가 그러했다. 이들에게는 멀리 있는 사물을 작게 그려야 할 이유가 없었다. 기억 속의 그림은 크기의 구별이 없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를 지나면서, 원근법이 등장해 그림을 지배한다. 원근법에 의하면 멀리 있는 것은 작게 그리고 가까이 있는 것은 크게 그려야 한다. 현실을 분석한 것이다. 19세기에 이르면 색채 역시 분해해서 그린다. 지적인 분석이다. 이 모든 변화는 그려야 할 대상을 지적으로 분석한 결과다. 대상에 대한 과학적 접근인 셈이다. 그후 관심은 대상에서 주체로 옮겨 온다. 19세기의 문화적 특징이다. 그림의 경우, 한 시점이, 두 시점으로 분산된다. 앞에서 본 얼굴과 옆에서 본 얼굴을 겹쳐 그리게 된 것이다. 두개의 객관이 하나의 주관 안에 들어온 것이다. 대상을 보는 ‘내’가 탈-시간화된 것이다. 그후 지적 관심은 “그림이란 무엇인가”로 도약한다. 1917년 마르셀 듀쌍은 소변기를 ‘Fountain’(샘)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하고, 1929년 르네 마그리뜨는 ‘La Trahison des Images’(이미지의 배반)을 발표한다. 그림 안의 문구인 'Ceci n'est pas une pipe'(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의 메시지는 “이것은 그림, 즉 파이프의 기호이지 입에 물 수 있는 실물 파이프가 아니다”이다. “그림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인 셈이다. 그림은 대상의 미적 표현을 넘어선다. 화가의 철학적 신념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변모한 것이다. 그림이 철학적 의견이 되었다. 다음의 세 그림은 미국의 마크 로스코(1903-1970)의 추상화다. 첫 그림은 ‘세계는 검은 색 속의 오랜지 색’이라는 철학적 견해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런 상징적 해석이 싫다면 색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보아야 한다. 이때 색은 사물을 벗어난 색, 즉 추상이다. 이 그림을 보고 “이런 그림이라면 나도 그리겠다”고 이견을 제기한다면, “콜럼버스의 달걀을 생각하세요”라는 답을 들을 것이다. 음악에 대해서 살펴보자. 바로크 시대 이후, 제1주제와 제2주제를 각각 tonic(으뜸조)과 dominant(딸림조)의 두 조 위에 얹은 것은 ‘아랫 마을과 윗 마을’이라는 두 공간을 도입해 음악적 공간을 확대하기 위함이었다. 그후 바그너는 이 기법을, 짧은 시간 동안 여러 조를 정신 없이 드나드는 기법으로 확산시킨다. 쇤베르크는 그렇게 하느니 차라리 옥타브의 열두 음 하나하나를 독립된 공간으로 생각해, 열 두개의 공간 연속체를 만들자고 제안한다. 12음 음열이다. 시간 흐름에 의해 파악되는 공간 에서 시간을 빼앗은 것이다. 음악의 진행이 공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간이 시간을 먹어버린 결과를 낳는다. 음악의 시간적 청취가 없어진 것이다. 쉽게 생각해보자. 쇤베르크의 12음 음악은 멜로디를, 12개의 음열로 대체한다. 이는 대상, 즉 각 성부의 수평적 진행의 아름다움인 멜로디의 포기한 것이다. 감성적 판단의 자리를 수학의 아름다움이 빼앗은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하나의 물체를 창조한 것이다. 그곳에 ‘들음’, 즉 청취는 없다. 음악 듣기에는 음들의 상하 관계가 있었다. 음열 음악에서는 그러한 으뜸-딸림의 위계가 없어진다. 멜로디가 없어진 추상-음악이 된 것이다. 1960년 이후, 한국 대학의 클래식 작곡가들은, 쇤베르크가 내다 버린 ‘대상의 감성적 아름다움’를 가슴에 안은 채, 12음 기법으로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려고 매달린다. 모순된 일이다. 지금도 여전하다. 이처럼 개념화된 그림과 음악이 대중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남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화가와 작곡가들의 기괴한 행동과 포퍼먼스가 등장한다. 호기심을 자극해 대중을 갤러리와 콘써트홀로 유도하려는 시도였다. 화가들의 기괴한 행동은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여기서는 현대음악 작곡가의 기괴함을 보기로 한다. 슈토크하우젠(1928-2007)은 9.11 테러 당시 언론을 향해, "이런 사건에서도 나는 음악적 영감을 얻는다"고 공언한 후 언론의 맹렬한 질타를 받는다. 이어 그는 며칠 전 안드로메다 성운을 다녀 왔다고 주장한다. 기자들의 여러 번의 질문에도 끝까지 자기 주장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연주자에게 기하학적 그림을 제시하며, 보고 생각나는 대로 연주하라고 요구한다. 지금까지 유럽의 지성적 예술이었던 그림과 음악의 개념화 과정을 살펴보았다. 몰락에 가까운 변질이다. 20세기의 문화는 지성과는 무관한 대중이 소비자인 문화다. 전통 예술의 입장에서 보자면, 음악과 미술이라는 한 쪽이 죽어버린 가지 사이에서 새로운 싹이 솟아나는 현상으로 비유해야 할 것이다. 음악의 경우, 대중음악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미술의 경우, 설치미술, 환경미술, 액션페인팅 등의 여러 모습으로 변모한다. 세계의 여러 나라의 경우를 보자면, 드라마와 영화는 여전히 지적 작품을 생산하고 있다. 넓게 보자면 문학, 즉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도 이제 시간 때우기를 넘어선 인간과 역사 그리고 경험하는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에 근거한 질문을 던지고 이를 추구해야 한다. 그것이 문화가 가야 할 바른 길이기 때문이다. 1900년 이후 우리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마주하는 지정학적 조건 아래 살아 왔다. 20세기 후반, 놀라운 경제 발전을 이루었고, 우파들이 경제에 열중하는 동안, ‘종북 가짜 진보’들이 대중 문화를 뒤덮어 왔다. 이제 가짜의 세계를 벗고 진실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진정한 질문을 할 수 있는 시대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K-팝과 K-드라마가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다는 말에 취하지 말고 미래의 올바른 문화를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토리노의 말’을 한번 보기를 권한다. 보고 나면 잠시 생각에 잠기게 될 것이다. 긴 시간 동안 수레를 끄는 말의 몸 구석구석을 관찰하면서 역사적 팩트를 직시해야 함을 느끼기 바란다. 우리도 이제 이런 드라마를 만들어야 한다.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약력]서울대 명예교수 [저서]시와 리듬(1981, 개정판 2011), 음악을 본다(2009), 세계의 음악(2014) 등 [번역]기호학 이론(U. Ecco, 1984), 서양음악사(D. J. Grout,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