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88
  • 아멜리아(Amelia, 가명)은 32세의 사무직 여성으로 폭동 한가운데에 있던 군중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그녀는 달리는 차량의 창문을 뚫고 들어온 벽돌에 이마를 정면으로 맞아 머리에 심한 골절을 입었다. 아멜리아는 한동안 의식을 잃었고 2일동안 기억상실증을 겪게된다. 의사는 그녀의 괴사(죽은)한 뇌 조직을 제거하는 수술을 했다. CT촬영 결과, 전두엽(앞이마) 안쪽에 광범위한 손상(병변)이 확인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수술 후 신체적으로는 회복이 된다. 그러나 신경행동평가결과, 머리에 부상을 당하고 나서, 몇주 동안 생생한 악몽을 자주 꾸었다고 보고했다. 그녀는 주로 뱀이나 뱀파이어가 나오거나 몸에 바늘이 꽃히는 꿈을 꾸었다. 꿈의 내용은 항상 불쾌했다. 어느날 밤에는 속옷에 무었인가 꿈틀거리는 꿈을 꾸었는데, 손을 넣어보니 끔찍하게도 뱀이었다. 아멜리아가 꾼 꿈을 악몽(nightmare)이라고 한다. 미국 정신의학회가 내린 정의에 의하면, 악몽이란 ‘길고 극도로 불쾌한 꿈으로, 위협, 불안, 공포, 분노, 슬픔과 같은 부정적 감정을 포함한다. 임상적으로 현저한 고통이나 손상으로 사회적, 직업적, 학업적, 또는 다른 중요한 기능 영역에서 현저한 고통이나 손상을 초래’하는 꿈을 말한다. 신경생리학자인 마크 솜스(Mark Solms)가 조사한 보고에 의하면, 뇌의 손상을 입은 114명 중 9명의 환자가 반복하는 악몽을 경험했다고 한다. 이는 전체환자의 7.9%에 해당하는 비율이다. 뇌전증(epilepsy)이 원인이 되어 악몽에 시달리는 사례도 있다. 사라(Sara, 가명)는 33세로 예술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뇌의 우측 측두엽(뇌의 우측 측면 부위)이 손상되어 뇌전증을 겪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에 관한 악몽을 반복해서 꾼다. 사라의 뇌전증 병력은 평생동안 조절되지 않아서, 고통스러운 나머지 자살시도를 한 적도 있었다. 또다른 뇌전증 환자인 필립(Philip, 가명)은 24세로 대학생이다. 그는 뇌의 측두엽에서 뇌전증 병소가 확인되었다. 그의 발작은 주로 수면 중에 발생하였는데, “도로에 널려 있는 부서진 시체”와 “교통사고로 인해 토막 난 시체” 보는 악몽을 반복해서 꾼다. 뇌전증은 예전에는 간질이라고 불렸으나, 사회적인 편견때문에 간질이라는 말은 더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뇌세포간의 정보전달은 전기신호로 이루어지는데, 뇌전증은 전기신호가 비정상적으로 이루어져 일시적이고 불규칙적인 이상흥분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정상적으로 흐르던 전류가 갑자기 합선이 일어나서 불꽃이 튀는 현상에 비유할 수 있다. 뇌전증은 몸의 경련이나 반복적인 발작현상을 초래한다. 마크 솜스 등의 연구에 의하면 측두엽에서 비롯되는 뇌전증 환자는 악몽을 반복해서 꾼다고 한다. 특히, 안쪽 측두엽은 감정을 담당하는 편도체와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가 이웃 사촌처럼 아주 가까이 있다. 솜스는 측두엽 뇌전증 환자에게 발생하는 비정상적인 전기적 방전이 편도체를 자극하면, 수면 중 강렬한 공포 감정반응과 생생한 시각적 환각이 결합되어 악몽으로 나타난다고 본다. 이같은 악몽은 우울, 불안, 자살충동, 트라우마 등으로 인하여 꾸게되는 심리몽과 같은 심리적 잔여물이 아니라 물리적인 뇌 방전으로 인한 직접적인 결과물이다. 뇌전증은 뇌에서 발생하는 물리적인 오작동으로 야기된 전기적 방전현상으로 인하여 발생한다. 솜스는 증상을 유발하는 뇌전증을 약물이나 수술을 통해서 성공적으로 치료를 하면 거듭되던 악몽이 사라진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편도체와 해마를 포함하고 있는 변연계 부위의 방전이 이러한 꿈들을 만들어내는 실제적인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추정한다. 나는 이러한 꿈을 뇌손상몽(brain injury dreams)이라고 부른다. 뇌손상몽은 심리적인 결과물이아니라 뇌의 일정부위가 물리적인 사고로 손상되거나 화학물질의 과도한 자극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악몽을 말한다.
    뇌 손상 환자의 악몽과 치료
    by 국경복
    2026.01.20 15:12:08
  • 튀르키예 출신의 미디어 아티스트인 레픽 아나돌은 도시와 건축, 미술관의 방대한 데이터를 인공지능(AI)으로 학습시켜 작품들을 만들었다. 기계가 기억한 세계를 거대한 시각적 파노라마로 펼쳐 보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기술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스펙터클은 뉴욕 현대미술관(MoMA)을 비롯하여 세계 유수 미술관과 전시를 통해 소개되며 흥행에 성공했다. 트레버 패글렌과 케이트 크로포드의 ‘ImageNet Roulette’는 사람들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서 #ImageNetRoulette 로 사진을 올리면 AI가 라벨을 붙이는 방식으로 밀라노의 프라다 재단의 전시 ‘Training Humans’와도 연결되어 주목받았다. AI가 인간을 인식하도록 훈련시키는 데이터와 분류 정치학을 드러내는 사례로 소개된다. ‘AI가 사람을 분류하는 것’의 위험성을 대중이 체감하게 만들었다고 강조한다. 이 두 작업은 방향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AI를 전면에 세운다.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떠올려볼 수 있다. 기술이 이렇게까지 전면에 나서는 상황에서 정작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 AI가 일상이 되며 우리는 더 빠르게 연결되고 더 많은 정보를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요즘 “훨씬 편해졌는데 마음은 더 피곤하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무엇을 믿어야 할지’, 심지어 ‘지금의 나는 어떤 상태인지’조차 잠시 멈추지 않으면 진정으로 무언가를 느끼기 어려워진다. 이럴 때 예술은 다른 방식으로 다가온다. 설명하지 않고 설득하지 않으며 그저 잠시 멈추게 만든다. 그 멈춤의 순간에 우리는 비로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강남 한복판에 자리한 LG유플러스의 문화 공간인 ‘일상비일상의틈’은 바로 그런 질문을 조용히 던지게 하는 장소다. ‘보러 가는 공간’으로 규정된 전시장을 일상의 동선 속에서 의도하지 않게 예술과 마주치게 되는 틈으로 만든 것이다. 또한 이해를 요구하기보다 감각을 먼저 열어두는 방식은 지금의 시대와 닮아 있다. 이 공간의 방향은 최근 LG유플러스가 강조해온 태도와도 맞닿아 있다. 이 기업의 홍범식 대표는 취임 이후, 기술과 서비스가 고도화될수록 고객이 체감하는 신뢰와 확신, 그리고 일상의 온도가 더욱 중요해진다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강조해왔다. 복잡함을 더 설명하기보다는, 오히려 덜 고민해도 되는 선택을 가능하게 하려는 태도다. 그 선택들이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쌓이며, 조금 더 밝은 방향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철학이 읽힌다. 현재 이 공간에서 준비 중인 전시에서 ‘인간’과 공동으로 주제가 되는 ‘AI’는 작품을 대신 말하지 않고, 작품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돕는 ‘도구’로 작동한다. 관람객이 궁금해하는 지점에만 반응하고, 각자의 속도와 관심에 맞게 정보를 건넨다. 기술은 한 발 물러나고, 다시 사람의 감각과 해석이 중심에 놓인다. 이 선택이 중요한 이유는 분명하다. 지금까지의 AI 예술이 ‘기계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면, 이 공간이 시도하는 것은 사람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를 묻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예술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이미 지나치고 있던 감각을 다시 느끼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기술이 모든 것을 대신해주는 시대일수록, 스스로 질문하고 해석하는 능력은 분명 더 중요한 감각이 된다.
    AI와 예술   
    by 박소정
    2026.01.16 19:31:21
  • 미국의 베네수엘라 공격과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 체포를 둘러싼 국제사회의 반응은 극명히 엇갈린다. 그럼에도 주권국의 현직 대통령을 무력으로 체포해 연행한 행위는 유엔 헌장 제2조 제4항이 금지하는 무력 사용과 주권 침해에 해당하는 국제법 위반이라는 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간 마두로 정권의 권위주의와 부패, 독재적 통치, 각종 범죄 연루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국제사회의 기본 규범을 무너뜨리는 수단까지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특히 브라질·멕시코·콜롬비아를 비롯한 다수의 중남미 국가는 이번 사태를 국제법 위반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우려를 표하고 있다.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베네수엘라 장기 독재의 종식을 환영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번 사태는 어느 한쪽의 논리만으로 재단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질문을 국제사회에 던지고 있다. 무엇보다 이 위기의 중심에는 사람의 삶이 놓여있다. 중남미 여러 나라의 거리에서 수많은 베네수엘라 사람들을 직접 본 결과, 시장과 버스터미널, 국경 인근에서 만난 이들은 정치 구호를 외치지 않았다. 대신 ‘돌아갈 수 없는 나라’에 대해 말하며 슬픔과 체념을 토로했다. 의사와 교사, 기술자였던 사람들이 이제는 불안정한 일용직과 노점에 의존해 살아가고 있었다. 이 장면은 국가의 붕괴가 개인의 삶을 어떻게 잠식해 가는지를 통계가 아닌 현실로 보여주었다. 이 지점에서 피할 수 없는 질문이 제기된다. 과연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 권력이 국민을 보호하지 못한 채 전체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약 750만 명을 굶주림과 절망 속에서 타국으로 내몰았음에도 그 체제는 여전히 ‘주권 국가’라는 이유만으로 존중받아야 하는가? 선거라는 형식은 유지되지만 결과를 왜곡하며 장기 집권을 이어 가는 체제를 국제법이라는 이름으로 방치해 온 태도는 과연 중립이었는지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의문이 남는다. 베네수엘라의 야권 지도자 출신으로 지난해 노벨 평화상을 받은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는 “미국이 개입해서라도 자국민에게 민주주의와 자유를 되돌려 줘야 한다”고 호소한 바 있다. 베네수엘라에서 민주와 자유가 사실상 붕괴된 상황을 방치하는 것이 과연 더 도덕적인 선택인지에 대해 묻는 것이다. 실제 베네수엘라에서 독재 정권을 계속 방치했다면 세계는 어떤 모습이 됐을까? 독재 정권이 수십 년씩 지속되고 이들과 연대한 부패한 정치·범죄 집단들이 국경을 넘어 서로 연결된다면 이는 더 이상 한 나라의 비극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악은 고립될 때보다 연결될 때 훨씬 빠르게 확산한다. 오늘의 내정 문제는 내일의 국제 문제가 되고 방치는 결국 더 큰 비용으로 되돌아온다. 그렇다면 미국의 직접 개입 이전까지 중남미 국가들은 무엇을 해왔는가? 자유와 인권이 체계적으로 유린되는 동안 ‘주권 존중’과 ‘대화 촉구’라는 정치적으로 안전한 언어는 반복되었다. 그러나 그 언어가 실제로 굶주림을 막았는지, 탈출을 줄였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을 찾기 어렵다. 물론 콜롬비아·페루·브라질 등 다수의 중남미 국가는 수백만 명의 베네수엘라 탈주민을 받아들이며 삶의 터전을 제공해 왔다. 이는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었고 각국 사회가 감당해야 할 부담도 컸다. 다만 이들은 고통의 결과를 나누는 데에는 연대했지만 그 원인을 바꾸기 위한 결단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미국의 이번 베네수엘라 내정 간섭은 국제사회에서 스스로를 ‘무소불위’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이제 관건은 그 다음이다. 만약 미국이 조기에 베네수엘라 시민들을 전면에 세우고 다자적 관리 체계와 명확한 권한 이양 및 철수 로드맵, 민생 중심의 가시적 개선 조치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국제 사회에서 현재의 유보적 시선은 빠르게 부정적 평가로 전환될 가능성이 크다. 현재 국제 사회에서는 이번 미국의 군사 개입이 베네수엘라의 민주주의 회복과 인권 개선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기보다는 현지의 엄청난 원유를 포함한 전략적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라는 의문을 품는 시각도 많다. 이러한 인식이 확산된다면 논의의 초점은 베네수엘라의 독재 종식이나 인권 회복이 아니라 강대국의 이해관계 이슈로 전환되며 미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가 크게 흔들릴 수 있다. 미국이 국제법과 주권을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선택적으로 해석했다는 인식이 굳어질수록 국제사회에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도덕적 언어로 비판할 정당성도, 중국이 대만을 둘러싸고 무력 행동에 나설 경우 이를 규범의 언어로 제어할 명분도 각각 약화될 수밖에 없다. 규범이 흔들리는 순간 가장 먼저 피해를 입는 것은 강대국이 아니라 중소국과 약자다. 안정적 국제 질서는 강자의 일방적 선언이 아니라 일관성과 절제된 행동을 통해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번 사태의 성패는 워싱턴이 아니라 베네수엘라 국민들의 선택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트럼프 미 행정부의 영향력 못지 않게 베네수엘라인들이 이번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면서 본인들의 적극적인 참여 속에서 새 질서를 만들어가느냐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베네수엘라에서 미국의 역할은 자국 이익에 경도된 방식의 강압적 통치가 아니라 베네수엘라의 자유와 민주를 회복하는 조력자에 머물러야 한다.
    베네수엘라 사태, 개입과 방치 사이의 딜레마
    by 박선태
    2026.01.05 17:16:18
  • 한국 음식에 대하여 과학적으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한식의 과학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없다. 그러나 한식의 과학을 모르면 한식에 대하여 잘못된 비과학적인 이야기가 쉽게 침투하여 한식의 본질을 왜곡하는 풍토가 생긴다. 닭도리탕이 일본말에서 왔다느니, 파오차이와 김치가 뿌리가 같다느니, 김치가 200년밖에 안되었다느니, 원래 김치는 백김치였다느니 등이 한식의 본질을 흐리는 대표적인 잘못된 것들이다. 우리 음식의 과학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온 풍설 등이다. 한식의 과학은 크게 어떻게 한식이란 음식이 한반도, 아니 고조선을 기반으로 한 우리 민족의 고유한 음식으로 탄생하였는가와 발효과학 그리고 왜 한식은 건강한 음식인가 측면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 먼저 여기서는 한식의 탄생 이야기를 먼저 다루고자 한다. 세계 모든 고유의 토속음식은 그 지역의 지리적, 농경학적 풍토에서 탄생한다. 즉 어느 민족이 처한 지리적, 농경학적으로 처한 환경에서 어떻게 하면 먹고 살아가는 처절한 환경에서 지혜와 과학이 쌓여가면서 자연발생적으로 고유의 음식이 탄생하는 것이다, 지리생물학적으로 만주를 포함한 한반도에서는 밀보다 쌀이, 쌀 중에서도 장립종(Indica type)보다 단립종(Japonica type)이 원산지로 자리 잡고 있어서 수렵채집 생활에서 농경생활로 전환되어 나갈 때 쌀문화, 그것도 단립종을 기반으로 하는 밥문화가 정착하게 된 것이다. 수년 전에 유전자 분석 결과 단립종 쌀의 원산지가 만주를 포함한 한반도라는 주장이 생명과학자에게서 발표되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국뽕이라고 폄하하기도 하면서, 쌀의 원형이 양자강 지방에서 시작되어 남쪽과 북쪽으로 전파되어 갔기 때문에 쌀(쌀과 식물)의 원산지가 양자강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진화생물학이 발달하기 전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요즈음은 인류가 지구상에 나타나기 전인 수백만년 전(길게는 수천만년 전)에 쌀이 지구상의 어느 지역에서 탄생하여 지구상에 퍼진 것을 따져 원산지로 주장하는 것은 인류화적 측면에서 보면 항상 옳지 않다. 다시 말하면 인류가 지구상에 나타나기 전에 사람이 아닌 요인에 의하여 쌀의 과(family)나 속(genus)가 이미 여러 지역으로 진화하여 퍼진 것을 놓고 어느 지역이 원산지라 이야기하는 것은 인류학적으로는 무의미하다. 수십만년전 (길게는 수백만년전) 인류가 지구상에 나타나서 보니 그 지역에 특별한 식물이 자라고 있었고 오로지 사람에 의하여 퍼지게 될 때 원산지라는 개념이 유의미하다. 어떻게 보면 원산지라는 개념은 매우 인문학적인 개념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콩이나 단립종 쌀의 원산지가 만주를 포함한 한반도라는 과학적인 주장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밀로 빵을 만들 때 빵이 잘 부풀려 모양을 잘 유지하기 위하여 소금을 넣어 굽는다. 그렇기 때문에 구운 빵만으로도 먹을 수도 있고, 가지고 다니면서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쌀을 에너지원으로 먹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는 밥을 먹으려면 쌀을 호화를 시키기 위해 밥을 지어야 했고, 밥만 먹으면 쉽게 질리거나 물려서 많이 먹을 수가 없다. 반드시 맛을 낼 수 있는 소금성분이 들어 있는 것과 같이 먹어야 맛있게 밥을 많이 먹고 힘을 내고 살아갈 수 있다. 과학적으로 소금은 모든 동물에게는 본능적으로 필요하고 가장 맛을 잘 내는 성분이다. 밥을 맛있게 먹으려면 어떤 도움이 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반찬이다. 밥과 반찬이 같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밥상이 필요하고 이렇게 생긴 문화가 밥상문화이다. 여기에 우리 조상들은 밥을 먹을 때 목에서 음식을 잘 내려가게 하는 국을 준비했다. 김치와 장도 항상 먹었다. 그때그때 철과 필요에 따라 한 가지 정도 특별한 요리를 만들어 가족들이 밥상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면서 맛있게 먹었다. 단백질 공급원인 닭, 꿩, 생선, 두부, 소나 돼지고기를 구비한 특별한 식사를 하거나 사정이 여의치 않을 경우 맛있게 무친 나물을 밥상에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면 반찬은 무엇으로 만들었는가? 그리고 왜 김치나 장은 항상 밥상에 올려 졌을까? 전적으로 지리적 환경에서 결정되었다. 우리나라 같이 풍족하지 않은 환경에서 김치나 장의 탄생은 필연적이었다. 중국과 같이 풍족하지도 맛을 내는 기름도 없었고, 단맛을 내는 설탕도 없는 어려운 환경에서 이를 극복하는 우리 민족의 오랜 생활경험과 지혜로 탄생한 것이 식물(풀)을 기반으로 한 반찬이다. 기본적으로 김치나 장을 우리 몸에 필요하고 항상 맛있는 맛을 내는 성분인 소금을 활용해 만들었다. 이런 측면이 김치나 장이 항상 밥상에 올려진 이유이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김치나 장은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은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세계 어떤 맛있는 음식이라고 한끼도 빼먹지 않고 며칠 계속해서 먹으면 질려서 다시 먹고 싶지 않은 게 사람의 본성이다. 그러나 장과 김치는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은 특성이 있기에 매일매일 반찬으로 올려도 질리지 않은 것이다. 똑같은 김치를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후성유전학적(nutriepigenomics)으로 김치나 장은 매일 같이 먹으면 질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이 박혀서 다시 찾게 되는 것으로 밝혀진 바 있다. 그만큼 한식에는 과학적으로 흥미로운 대목이 적지 않은데 앞으로 많은 연구를 통해 비과적인 요소를 걷어냈으면 한다.
    한식에 담긴 과학
    by 권대영
    2026.01.02 17:46:09
  • 아르헨티나는 내년 2월을 앞두고 이른바 ‘빙하법’ 개정을 둘러싸고 사회적 논쟁이 뜨겁다. 환경 보호를 이유로 한 반대와 이제는 개발을 통해 국가의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우리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주제다. ‘빙하법’이라는 말부터 낯설고, 빙하가 왜 한 나라의 경제 문제와 직결되는지 쉽게 와닿지 않는다. 그러나 이 논쟁은 단순한 환경 법률 문제를 넘어 아르헨티나와 중남미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구조적 단서를 제공한다. 이 법의 이름부터 오해를 부른다. 빙하법은 빙하라는 얼음을 보호하는 법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상류 수자원 관리가 핵심이다. 안데스 고산지대의 빙하와 만년설은 녹아 계곡을 따라 내려오며 하천의 기저 유량을 유지한다. 이 물은 농업과 지역 공동체의 생존과 직결된다. 광산 개발이 물의 흐름을 바꾸거나 사용량을 늘리고 수질 오염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우려가 이 법의 출발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빙하법은 환경 상징을 앞세운 법이라기보다 수자원을 보호하기 위한 매우 강력한 사전 차단 장치에 가깝다. 빙하법은 2010년에 제정됐다. 비교적 최근의 법이다. 그럼에도 “이 법 때문에 아르헨티나는 광산 개발을 못 해왔다”는 말이 나온다. 이는 절반만 맞는 이야기다. 사실 아르헨티나는 빙하법 이전부터 이미 광업 개발이 뒤처진 나라였다. 문제는 자원이 아니라 국가가 선택해 온 발전 전략과 제도 구조에 있었다. 아르헨티나는 전통적으로 농업 중심 국가였다. 곡물과 축산 분야에서 비교우위가 있었고 국가 성장 전략 역시 농업과 내수에 무게가 실려 있었다. 광업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권한이 복잡하게 얽혀 있고 환경·외환·조세 문제까지 동시에 다뤄야 하는 까다로운 산업이었다. 그 결과, 광업은 정책 우선순위에서 밀려났고 국가 전략의 중심에 서지 못했다. 같은 안데스 산맥을 공유하면서도 칠레와 페루가 일찍부터 광업을 국가 경제의 축으로 키운 것과는 다른 길을 걸어온 셈이다. 이런 구조 위에서 2000년대 후반 환경 갈등이 겹쳤다. 일부 광산을 둘러싸고 수질 오염과 물 부족에 대한 불안이 커졌고, 정부와 기업의 관리 약속에 대한 불신도 확산됐다. 정치권은 ‘관리된 개발’이라는 복잡한 해법 대신 가장 확실한 선택을 택했다. 아예 문을 닫아버리는 것이었다. 빙하법은 광업이 활발해서 이를 통제하려 만든 법이 아니라, 애초부터 관심과 역량이 부족했던 광업을 제도적으로 더 멀리 밀어낸 결정이었다. 그러나 환경은 그대로인 반면, 경제 환경은 달라졌다. 에너지 전환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구리는 전기차, 신재생에너지, 전력망 확충에 필수적인 전략 자원이 됐다. 이 과정에서 아르헨티나가 보유한 구리 잠재력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업계와 국제기구의 분석에 따르면, 현재 보류 중인 주요 구리 프로젝트들이 빙하법 개정을 계기로 본격 가동될 경우 아르헨티나는 세계 구리 수출국 순위에서 네 번째 수준까지 도약할 가능성이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같은 안데스를 공유한 칠레·페루에 이어, 글로벌 구리 공급망에서 의미 있는 축으로 편입될 수 있다는 의미다. 이 지점에서 같은 안데스를 공유한 칠레와 페루의 사례는 중요한 대비를 이룬다. 흔히 이들 국가에서 광업이 국내총생산의 약 10% 안팎을 차지한다고 말하지만, 이는 광산에서의 직접 생산만 반영한 보수적인 수치다. 실제로 광업은 물류와 운송, 에너지, 건설, 장비 산업은 물론 금융, 법률, 회계, 엔지니어링 같은 전문 서비스까지 함께 움직인다. 이러한 간접 효과와 유발 효과까지 포함하면, 광업은 이들 국가에서 국내총생산의 4분의 1 이상을 떠받치는 산업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다. 광업은 단순한 채굴 산업이 아니라, 국가 경제 구조 하나를 통째로 가동시키는 플랫폼 산업인 셈이다. 반면 아르헨티나는 이 구조를 거의 활용하지 못했다. 광업의 직접 효과만 놓고 보면 경제 기여도는 미미했고, 그에 따라 광업을 중심으로 형성될 수 있었던 산업 생태계 역시 작동하지 못했다. 같은 안데스를 가지고도 주변국들이 수십 년에 걸쳐 누려온 경제적 효과를 아르헨티나는 얻지 못해 온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빙하법 개정 논쟁은 ‘광산을 더 파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수자원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그리고 그 보호를 과학과 제도, 나아가 신뢰 가능한 절차로 관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가깝다. 절대적으로 보호해야 할 지역은 분명히 보호하되, 모든 고산 지형을 동일하게 취급하는 일괄 금지에서 벗어나 사전 검증과 독립적 판단을 통해 관리 가능한 영역을 구분할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아르헨티나의 빙하법 논쟁은 중남미를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준다. 중남미는 단순히 자원이 많은 지역도, 개발이 더딘 지역도 아니다. 그 이면에는 자원을 둘러싼 제도와 신뢰, 그리고 역사적 선택이 켜켜이 쌓여 있다. 같은 안데스를 공유하고도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이유는 지질이 아니라, 바로 그 선택의 축적에 있다. 아르헨티나는 이제 다시 한 번 그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아르헨티나 ‘빙하법’ 논쟁
    by 박선태
    2025.12.30 10:28:08
  • 26세의 레오(가명)는 장래가 유망한 실험과학자로 아시아계 영국인이다. 그는 스코틀랜드에 있는 한 대학에서 무기화학을 공부하고, 평판 높은 기술연구소 신임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주말 휴일에 친구들과 함께 차를 몰다가 사고를 당했다. CT촬영을 해보니 뇌의 왼쪽 두정엽에 출혈이 있고 심한 손상이 보였다. 두정엽은 뇌의 윗부분에 위치한 영역으로 다양한 감각정보를 해석하고 언어를 이해하며 공간기억을 저장하는 등의 기능을 담당한다. 그는 사고 후 25일 동안 인공호흡기 신세를 졌다. 39일 뒤에는 말하기 요청을 받았을 때, 말을 하지 못하는 실어증 상태에 있었다. 그는 3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언어와 물리 치료를 받았다. 사고가 난 지 21주 뒤에 신경심리학적 평가가 진행되었다. 임상장면에서 언어장애가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는 발음을 잘못할 뿐만아니라 단어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레오는 아무런 연상도하지 못했고 그의 꿈 꾸기는 중단되어 있었다. 뇌의 어느 부위를 다치면 꿈 꾸기가 중단되는가? 바꾸어서 말하면 뇌의 어느 부위가 꿈 꾸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느냐의 문제이다. 1977년 앨런 홉슨이 발표한 논문에 의하면 ‘꿈은 사람의 원시뇌인 뇌간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꿈의 주된 동기는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생리적인 것이며 동기에 있어서 중립적이고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한다. 홉슨의 이 견해는 이후 신경과학계의 지배적인 학설이 되었다. 홉슨이 주장한 학설에 대한 극적인 반전은 어느 한 정신과 의사로부터 시작된다. 그의 이름은 마크 솜스(Mark Solms)다. 솜스의 가족은 서남아프리카의 독일 식민지에서 살고 있었다. 솜스는 자기 형인 리(Lee)와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사이좋게 어울렸다. 그러던 어느날 당시 6살이던 그의 형이 지붕에서 미끌어져 떨어지며 뇌를 다치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리는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딴 사람이 되었고, 동생 마크는 일생에 거쳐 뇌과학을 연구하는 탐험의 길로 들어섰다. 1980년대 초 솜스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에서 신경과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는 뇌의 표면적인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많이 배웠지만, 정작 깊이 있는 의문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친구의 권유로 프로이트의 꿈 이론 강의에 참석하였다. 그는 당시를 회상한다. “꿈꾸기의 토대를 이루는 뇌의 기능에 관한 프로이트의 이론을 들으면서 나는 말 그대로 넋이 빠졌습니다. 소망, 욕구, 강렬한 정서 처리, 그 모두가 우리의 실제 삶과 관련이 있었어요. 신경과학 강의에서는 듣지 못했던 것이었죠.” 그는 홉슨의 1977년도 논문이 ‘지나치게 단정적이며, 부당한 방법을 써서 프로이트의 역작을 실제보다 하찮게 만들었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코 홉슨 이론의 오류를 증명할 생각은 아니었다. 솜스는 런던의 신경외과 병원에서 뇌졸증과 뇌종양 또는 자기 형처럼 사고로 다친 뇌를 환자를 연구했다. 솜스는 환자들에게 뇌 손상으로 꿈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조사는 성공적이었다. 어느 환자는 아무런 꿈도 꾸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 환자는 두정엽 손상 환자였다. 두정엽은 다양한 감각 정보들을 조합하여 공간적 정향성과 정신적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부위이다. 두정엽의 활동으로 우리는 남태평양 해변에서 휴식을 취하는 공상을 할 수 있고, 은행에 가는 길을 떠올리는 상상을 할 수 있다. 뇌파기록을 보면 이 환자들은 여전히 렘수면을 경험하고 있었다. 렘수면의 시초가 되는 뇌간의 신호들이 전과 다름없이 전송되고 있지만, 그 신호를 받아서 그림으로 만드는 전뇌조직이 망가졌기 때문에 꿈을 꾸지 않는 것이라고 가정했다. 그는 뇌간의 손상환자들이 꿈을 꾸고 있다는 보고하는 환자 집단을 만났다. 홉슨의 꿈 생성이론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솜스는 뇌의 손상이 있으면 꿈 꾸기가 중단되는 또 다른 부위가 있음을 발견한다. 그 부위는 앞이마 아래 안쪽에 있는 백질부분이다. 의학용어로는 복증측 전두 백질(Ventromesial Frontal White Matter)부위라고 한다. 이 부분은 우리 인간의 동기를 유발하는 영역으로 꿈이 우리의 가장 은밀한 소망이나 두려움을 표출한다는 프로이트의 견해에도 들어 맞는 부위이다. 이 부위는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이 지나가는 경로이기도 하다. 해서, 뇌과학자들은 이 부위를 ‘보상(reward)’체계 혹은 ‘나는 그것을 원해!’라는 ‘원함(wanting)’ 혹은 ‘추구(seeking)’체계라고도 부른다. 1997년 솜스는 ‘꿈을 만들어 내는 제1의 추진력은 일차적 욕구를 추구할 때 활성화되는 백질의 탐색계(소망)’ 라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한다. 홉슨이 프로이트를 비판한 꿈 이론을 발표한지 정확히 20년 후의 일이었다. 다시 두정엽을 크게 다친 레오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사고를 당한 후 꿈 꾸기가 중단되었던 레오는 치료를 받은 몇개월 후 ‘꿈을 꾸었어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어떤 꿈을 꾸었는지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나중에 뇌의 기능이 회복되면서 다음과 같은 일상적인 꿈도 꾸었다. ‘나는 소호(런던의 한 구역)에 있는 내 아파트에서부터 거리를 걸어 내려 가던 중인데 중국인을 만났어요. 어른 한 사람과 아이 셋이었죠 나는 조금 더 걸어가다가 방금 보았던 똑같은 가족들의 어머니와 친구 한 사람을 만났어요.’ 레오는 이 꿈에서 아무런 연상도 내놓지 못했고, 꿈 속의 등장인물들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가 떠올린 생각은 꿈 속에서 그가 정상인이었음을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그가 꿈을 다시 꾸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에게 대단히 중요한 일임이 틀림이 없다. 그에게 있어서 그 꿈은 자신 내면의 삶과 심리적 회복에 관한 활력의 징후이다. 이제 우리 모두는 뇌과학적인 사실을 안다. 기억을 하던, 하지 못하던 정상적인 뇌기능을 가진 사람은 모두 하루 8시간 수면 중 1시간반이나 2시간 동안 꿈을 꾼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는 우리 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의미라는 사실도.
    '꿈'을 꾸지 않는 뇌 환자
    by 국경복
    2025.12.30 10:27:13
  • 국가의 영공을 지키는 일은 어떤 정치적 이념이나 경제 위기보다 앞선다. 그러나 아르헨티나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이 기본 원칙을 지키지 못한 대표적 국가였다. 경제 회복이 더 시급하다는 사회적 인식, 말비나스 전쟁의 상처, 군부 독재에 대한 불신이 겹치며 국방은 정치적 관심에서 밀려났다. 그 결과 전투기를 보유하고도 제대로 띄울 수 없는, 형식적 공군만 존재하는 상태가 수십 년 지속되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최근 덴마크 공군이 운용하던 중고 F-16 전투기 6대가 아르헨티나에 도착했다. 이는 총 24대 구매 계약 중 첫 인도분이다. 밀레이 대통령은 이 전투기들을 “국민을 지키는 천사들”이라 부르며 “오늘부터 아르헨티나가 조금 더 안전해진 날”이라고 말했다. 정치적 수사처럼 들리지만, 지난 40년의 공백을 돌아보면 결코 가벼운 표현이 아니다. 말비나스 전쟁 이후 아르헨티나는 군에 대한 투자를 사실상 멈췄고, 그 결과 조종사 양성은 중단되다시피 했으며 노후한 기체는 사고와 부품 부족으로 퇴역했다. 공군력의 붕괴는 국가 자존심의 문제를 넘어 주권 기능 자체가 흔들린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도입은 냉혹한 경제 현실과 맞물려 있다. 아르헨티나는 극심한 인플레이션, 부채 상환 압박, 국제 금융시장의 신뢰 부재 속에서 긴축에 의존해 국가 재정을 유지하고 있다. 최신형 4.5세대 전투기나 5세대 기종은 선택지조차 될 수 없었다. 가격뿐 아니라 장기 운용비, 정비·훈련 체계까지 감당할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결국 F-16은 현실적으로 접근 가능한 거의 유일한 대안이었다. 문제는 주변국과의 비교에서 드러난다. 콜롬비아는 최근 덴마크·스웨덴 Saab사의 Gripen E 15대, Gripen F 2대 도입 계약을 체결했고, 페루 역시 24대 규모의 신형 전투기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브라질은 이미 스웨덴과 Gripen을 공동 생산해 배치하고 있다. 이러한 현대화 흐름 속에서 아르헨티나가 40년 된 4세대 기종을, 그것도 중고로 도입해야 하는 상황은 국가적 자존심을 자극하기 충분하다. 신형과 중고 전투기가 맞붙었을 때의 성능 격차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국방에서 중요한 것은 ‘가장 좋은 선택’이 아니라 ‘가능한 선택’이다. F-16은 세계 26개국에서 운용되는 검증된 플랫폼이며 유지비가 상대적으로 낮고 정비체계가 안정적이다. 아르헨티나의 현재 상황을 고려하면 “현실 안에서 최선을 다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영국의 무기 금수 조치로 인해 부품 하나까지 영국산 여부를 확인해야 했던 구조적 제약 속에서, 중고 F-16 도입은 합리적 해법이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구매 대금의 5년 무이자 분할 조건은 극도로 열악한 재정 여건을 감안할 때 이례적으로 유리한 계약이다. 물론 전투기만 들여온다고 공군이 재건되는 것은 아니다. 조종사 양성, 정비 인력 훈련, 기지 인프라 개선, 안정적 국방 예산 구조 등 뒤늦게 무너진 모든 요소를 다시 세워야 한다. 장비는 시작일 뿐이며, 국방은 결국 사람과 체계가 만든다. 경제가 회복되어야 군사력도 회복된다. 전투기는 국가 체력의 결과이지, 그 자체가 체력을 대신할 수는 없다. 아르헨티나는 여전히 위기에 놓여 있지만, 동시에 거대한 잠재력을 지닌 나라이다. 농업과 광물 자원, 젊은 인구, 문화적 영향력은 이 나라가 다시 일어설 기반이 될 수 있다. 이번 F-16 도입이 굴욕의 상징이 아니라 오히려 정상국가로 돌아가기 위한 첫 단추가 되기를 바란다. 언젠가 아르헨티나가 자존심이 아니라 능력으로 자신의 하늘을 지키는 날이 다시 오기를, 중남미를 오래 지켜봐 온 한 사람으로서 조용히 응원의 마음을 전한다.
    아르헨 중고 F-16으로 본 국가의 자존심과 현실
    by 박선태
    2025.12.13 00:01:07
  • 30여 년간 칠레 통신 인프라를 지배해온 스페인 자본이 물러나고 있다. 그 자리를 멕시코 자본이 빠르게 메우면서, 중남미 통신 권력의 중심축이 스페인에서 멕시코로 이동하고 있다. 칠레는 이 변화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무대다. 이는 단순한 기업 간 인수합병(M&A)이 아니라 디지털 인프라 패권의 이동이라는 상징적 사건이다. 1980년대 말 칠레는 군사정권 하에서 기간산업 민영화를 추진했다. 당시 국영 통신사 CTC는 기술 경쟁력이 취약해 외자 유치가 필요했다. 스페인의 텔레포니카(Telefonica)는 1989년 지분 43%를 인수하며 칠레 시장에 진입했다. 스페인은 자본·기술을, 칠레는 제도 안정성과 수요 기반을 제공하며 통신 현대화를 이끌었다. 텔레포니카는 칠레를 교두보로 페루,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브라질로 확장했다. 1990년대 말 중남미 통신시장에서 40% 이상의 점유율을 확보하는 등 사실상 독점적 지위를 누렸다. ‘총칼이 아닌 통신망으로 지배한다’는 신(新)식민주의 논란까지 촉발될 정도였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 이후 4세대(4G)·5세대(5G) 전환에 따른 투자 부담과 포화 경쟁 환경 속에서 텔레포니카의 수익성은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 틈을 타 멕시코의 통신재벌 카를로스 슬림이 부상했다. 그의 어메리카 모빌(AMX)은 공격적 가격 정책과 인수합병으로 남미 22개국에서 수억 명의 가입자를 확보하며 역내 최대 통신 기업으로 성장했다. 칠레에서는 2022년 Claro와 VTR을 합병해 모바일과고정 광대역을 통합 지배할 기반을 갖췄다. 텔레포니카는 결국 남미 사업을 단계적으로 정리하기로 했고, 칠레 법인인 모비스타 칠레(Movistar Chile) 역시 매각 대상으로 지목됐다. 스페인 자본의 퇴장 준비가 본격화된 것이다. 공백을 노리는 기업은 AMX와 칠레 최대 사업자 엔텔(Entel)이다. 칠레 유력 일간지 라 테르세라(La Tercera)는 두 기업이 한때 공동 인수전을 논의했으나 최근 각자 독자 입찰로 선회했다고 보도했다. 칠레 경제지 디아리오 피난시에로(Diario Financiero)는 “누가 인수하든 멕시코 자본의 영향력 확대는 불가피하며, 이는 칠레 통신시장 지배 구조의 근본적 재편을 뜻한다”고 분석했다. 주목할 점은 이 변화를 칠레 사회가 주권과 자존심의 문제로 본다는 것이다. 칠레는 중남미에서 가장 먼저 통신 민영화를 성공시킨 국가다. 이 성취는 ‘남미 기술 선도국’이라는 국가적 자부심을 뒷받침해 왔다. 그런데 그 상징적 자산이 같은 라틴아메리카의 경쟁자에게 넘어간다는 상황은 정치·사회적 감정을 자극하고 있다. 디아리오 피난시에로는 “우리가 이 정도도 스스로 지키지 못하는가”라는 비판 여론을 전했고, 라 테르세라는 이번 인수전이 “남미의 데이터 혈관을 누가 지배할 것인가”라는 디지털 주권 전쟁의 본질을 드러냈다고 해석했다. 통신망은 금융, 보안, 콘텐츠, AI 생태계를 아우르는 국가 주권의 핵심 기반이다. 그러나 감정과 현실은 다르다. 광대역 투자, 5G·인공지능(AI)·보안 인프라는 모두 막대한 자본이 필요한 영역이다. 글로벌 경쟁 환경 속에서 칠레 기업 단독 생존은 어렵다. 시장 논리가 자존심을 압도하는 국면인 것이다. 칠레 통신망의 지배권이 스페인에서 멕시코로 이동한다는 것은 곧 라틴아메리카 디지털 권력의 재편을 의미한다. 한 시대를 지배했던 스페인의 통신 제국은 종말을 맞고, 그 자리를 멕시코가 차지하고 있다. 칠레는 지금 글로벌 디지털 패권 이동의 최전선에 서 있다. 이 변화는 단순한 인수전이 아니라 새로운 권력 구조의 시작이다. 결국 이 질문이 남는다. “누가 중남미의 데이터 혈관을 지배할 것인가.”
    30년 칠레 통신 패권의 전환
    by 박선태
    2025.12.05 16:56:07
  • 새 정부 들어 앞으로의 경제활력은 인공지능(AI)에서 찾고 AI를 기반으로 삼아 세계 경제를 이끌어 가겠다는 전략이다. 식품분야에서도 마찬가지로 AI 기반산업으로 K-푸드 세계 시장을 이끌 수 있도록 정책적인 측면에서 잘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정부의 이러한 AI 분위기를 타고 일부 분야의 이익을 위해서 자칫 정부 정책이 잘못가게 하는 위험성이 곳곳에서 보인다. 마치 지난 윤석열 정부에서 ‘푸드테크’가 다 해결해주는 것처럼 호도하여 식품산업정책이 잘못된 것처럼 그럴 개연성이 보인다. 식품분야에서 AI를 이용한다는 것이 어떤 면이고 우리가 경계하여야 할 무엇인지 주목하고자 한다, 우선 제일 경계해야 할 분야가 AI를 이용하면 새로운 식품을 새로 개발할 것이라는 측면이다. AI를 이용하면 표준화하여 대량생산이나 자동화를 통하여 가격경쟁에 우위를 점할 것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 AI를 기술혁명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식품은 공산품만이 아니다. 먹는 사람들마다 기호성과 느낌, 선택성이 각각 다르다. AI 시대는 식품업은 농업에서 각 개인의 식탁에 이르기까지 각각 다른 소비자의 욕구와 건강을 도우는 방향으로 매우 차별적으로 독특하게 연결되어 가는 구조이다. 이 주장은 생산적인 측면만 내세우는 구조이기 때문에 정부가 이 방향으로 갈까 염려하는 부분이다. 미래 식품 AI 산업은 자연과 친화하고, 전통과 문화 그리고 맛과 건강이 있는 식품을 AI가 소비자에게 맞추어 정확하게 연결해주는 것이 핵심이다. 이렇게 소비자와 생산자가 연결되는 AI 경쟁력이 음식·식품 분야의 플랫폼 개발을 선도적으로 개발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물론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에 정부가 집중할 정도는 아니다. AI 플랫폼은 미국, 중국, 한국 등 세계적인 기업이 경쟁할 것이다. 우리나라 기업이 이 경쟁에서 뒤진다고 우리나라 식품과 음식이 죽는 것은 아니다. 플랫폼의 경쟁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어차피 경쟁에서 살아남은 하나의 플랫폼일 것이므로 조용히 지켜보는 것이다. 어느 플랫폼이든 이 플랫폼 안에서 우리나라 음식과 식품이 다른 나라 식품과 경쟁에서 이기면 되는 것이다. 어떤 플랫폼에서도 우리나라 식품업은 다른 나라 음식과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잠재력이 맛, 건강, 문화, 다양성 측면에서 충분히 있다. 식품업에서 우리 AI 플랫폼이나 피지컬 AI가 식품 제조와 유통 연결에서 세계를 통일하게 하는 것이 우리 농업과 음식이 발달하는 것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나라 음식과 식품이 세계 사람들의 선택을 받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한편으로는 식품산업 업자들이 디지털전환 디바이스 개발 문제에 식품산업의 AI 성공여부라고 열심히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 데 이 또한 플랫폼 개발과 같이 잘못된 방향이다. 하나의 디바이스만 살아남게 될 것이고 우리는 우리 기업이든 미국이나 중국 기업이든 상관없이 이용하면 된다. 물론 우리 기업이 최종 승자가 되었으면 바람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면 미래 AI 시대 우리나라 식품업이 성공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세계 식품시장에서 K-푸드 즉 우리 식품이 세계 사람들이 건강하고 맛있는 식품으로 사랑받고 선택받게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AI 시대에 K-푸드가 맛이 있고 건강성이 있는 다양한 식품으로 AI가 인식하고 이를 소비자에게 알려주는 것이 AI 시대에 우리 나라 음식, 식품, 농업, 식당이 사는 길이다. AI가 어떤 사람의 건강상태나 식생활에 맞추어 어떤 음식을 먹을 것인지를 알려주고, 밀키트 같은 것으로 식재료를 제공해주거나, 맞는 레스토랑을 소개해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음식에 대한 컨텐츠, 즉 역사 문화, 맛과 건강요소, 농업 생산과 재료에 관한 모든 자료가 AI 플랫폼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 들어갈 우리 음식의 데이터나 콘텐츠가 없다. 이렇게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역대 정부가 아예 이런 콘텐츠 창출에는 관심이 없었다. 지금 정부도 잘 인식하지 못할까 두렵다. 오직 기업에 제품개발하여 기업이 돈 버는 구조에만 관심이 있었고, 문화적인 콘텐츠의 중요성도 K-푸드 열풍을 타고 인식되고 있다. AI 시대에는 맛과 건강, 역사와 문화에 대한 정확하고 과학적인 콘텐츠를 정확하게 갖는 것이 미래 AI 시대 핵심 경쟁력이다. 이러한 과학기술 발전에 발맞춰 AI 시대 식품업 시장에서 개인 맞춤형 식품시장이 가장 활성화될 것이며, 이 시장에서 우리나라 K-푸드가 가장 경쟁력이 있다. AI는 잘못된 정보에 의한 오류를 매우 혁신적으로 극복할 것이다. 또한 생명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의 물리적 환경과 생물학적 특성의 표현이 AI가 구분할 수 있도록 더욱 세밀하고 정확해질 것이며 AI에 의하여 인간의 생물학적 요구에 맞춤형 음식이나 식품이 정확하고 연결될 것이다. 맞춤형 식품의 시대를 열고 선도하기 위해서는 기술적인 문제가 핵심이 아니라, 얼마나 정확한 데이터나 컨텐츠가 있느냐가 핵심 경쟁력이다. 이를 위하여 우리나라 정부 연구자가 데이터 창출에 힘을 쏟아야 한다. 동시에 우리 몸이 갖고 있는 생물학적 특징, 개인 맛 기호성, 후성유전학적인 특성에 대한 데이터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음식이 갖고 있는 지리, 역사, 농업, 음식 특성, 환경, 민족문화, 미식, 건강성에 대한 수많은 데이터를 창출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술만 강조되는 요즘 시대에는 놓치기 쉬운 중요한 문제입니다. 미래 AI 시대 개인 맞춤형 음식 시대의 도래와 그에 대응하는 식품으로 한국 식품이 세계를 제패할 수 있도록 차분히 준비하여 나가야 한다.
    AI 시대 식품 분야에서 무엇을 대비하여야 할 것인가?
    by 권대영
    2025.12.02 13:30:43
  • “사르르, 파닥파닥…” 바람이 속삭이듯, 나비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칠흑 같은 공간을 가르며 전통피리 소리가 흘러나오자, 마치 시간을 거슬러 과거에서 훅? 날아온 듯했다. AI가 빚어낸 은빛 입자를 날개에 묻히고 미래를 향해 비상하는 그 생명 에너지는 꽃가루처럼 흩어져 부드러운 빛의 파동으로 퍼져나갔다. 이어 각국의 숨결을 머금은 수많은 나비들이 모여들었다. 무대는 어느새 미디어 아트와 K-팝 퍼포먼스의 향연으로 변했고, 그 빛의 무도회는 곧 세계 정상들이 앉은 만찬 테이블까지 날아가 그들의 손등 위에 건네진다. 이 하이브리드 로봇 나비는 과연 무엇을 속삭이고 싶었을까? 이달 초에 있었던 이번 2025 APEC은 단순한 경제 회의가 아니었다. 오감으로 역사를 느끼고 피부로 미래를 체험하게 한 하나의 ‘수행적 예술(Performative Art)’이었다. 미·중 정상이 동시에 이 경주라는 무대에 오른 장면은 그 자체로 이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한 사건이었다. 회의실 안의 딱딱한 프로토콜과 달리, 무대 위에서 펼쳐진 나비의 비상과 빛의 파동은 긴장과 경쟁 속에서도 인간적 공감을 끌어내는 새로운 외교 언어였다. 하지만 그 화려한 막 뒤에서, 세계의 냉정한 시선은 묻고 있었다. “21개 회원국으로 구성된 APEC은 지리적 인연 외에는 거의 공통점이 없는, 그리고 깊은 정치·경제적 분열선으로 나뉜 느슨한 연합체에 불과하다” 고 영국의 가디언지는 지적했다. 이 깊은 분열선을 K-컬처의 스펙터클이 과연 가릴 수 있는가? 화려한 문화 쇼케이스가 다자주의나 세계 무역 규칙 같은 실질적 외교 성과(substantive diplomatic achievement)를 대체할 수 있는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국제적 통합이나 협력의 깊이를 향하는 것이 아닌 한국의 문화적 자산을 과시하는 ‘쇼’에 머무는 것은 아닌가? 오늘날 국제사회는 소통 불능의 시대에 놓여 있다. 지정학적 위기, 보호무역주의, 기술 패권 경쟁 속에서 세계는 만성적인 피로에 젖어가고 있다. 차갑게 깜빡이는 데이터만 오가고 인간적 체온은 사라진 시대. 모두가 연결되어 있지만 누구도 진정으로 소통하지 못하는 이 세계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흥미롭게도 그 해답은 천년 고도 경주에서 발견되었다. 통일신라 왕실이 추구했던 조화와 상생의 정신, 즉 모든 분열과 파란을 잠재우고 평안을 불러온다는 ‘만파식적(萬波息笛)’의 상징성은 오늘날 세계의 갈등 구조와 기묘하게 겹쳐졌다. 금관의 황금빛이 일렁이며 상기시키는 동서 교류의 역사적 기억 속에서, 예술은 규약도 조약도 아닌, 굳어버린 몸과 마음을 풀어내는 ‘미학적 요법’이 되었다. 경주의 오래된 돌길, 신라 궁성의 유적, 고분 사이로 바람이 불면, 그 속에서 느껴지는 시간의 겹침은 회의장에서 논리와 숫자만 오가는 현실과 대조를 이뤘다. 대한민국은 APEC의 3대 목표인 ‘연결(Connect)·혁신(Innovate)·번영(Prosper)’을 딱딱한 문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은유, 즉 나비로 표현했다. 나비는 단순한 심볼이 아니라 동서양 철학을 담은 하나의 사상적 매개체였다. 그것은 현실과 꿈, 국가와 국가 사이의 장벽을 허무는 장자(莊子)의 나비, 각국의 고유성을 존중하면서도 더 온전한 공동체로 변화(Metamorphosis)하는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의 나비, 고정된 국익의 논리를 넘어어 생성(Becoming)이라는 예측 불가능한 관계를 만들어내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나비였다. 그들의 손등에 내려앉은 하이브리드 나비는 이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가장 부드러운 것이, 가장 단단한 것을 이길 수 있다.” 공식 만찬에서 이 철학은 현실이 되었다. 대금의 호흡이 천년 신라의 명상적 시간을 열고, 이어진 지드래곤의 미디어 아트와 K-팝의 전율은 전통과 미래가 공명하는 순간을 만들었다. BTS RM의 차분한 스피치는 진정한 연결은 프로토콜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이어주려는 노력에서 시작되며 K-컬처가 단순한 흥행 콘텐츠를 넘어 사유의 힘을 지닌 예술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한류가 단순한 ‘흥행 수출품’이 아니라, 정치·경제적 소화불량을 풀어내는 미학적 장치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밤하늘을 수놓은 드론쇼는 기술이 패권 경쟁의 무기가 아니라 ‘연결’과 ‘번영’을 향한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선언했다. 하지만 그 찬란함 뒤에 가려진 그림자도 있었다. 외신들이 지적한 경주의 인프라 한계,부족한 숙박시설과 비효율적인 교통은 화려한 쇼케이스에 비해 현실적 준비가 미흡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다. 문화 외교가 아무리 훌륭해도, 그것을 떠받치는 기반시설은 냉정한 현실이며, 이 균열은 미·중 사이에서 실질적인 중재자 역할을 하려는 한국의 전략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순간은 다른 곳에 있었다. 문화적 공감대는 다음 날 실제 외교 무대에서 힘을 발휘했다. 난항을 겪던 한미 관세 협상의 극적 타결은 단순한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어젯밤의 감동과 서사는 협상 테이블 위에 보이지 않는 ‘신뢰의 자본’을 쌓아 올렸다. 경주에서 보낸 하룻밤은, 문화가 어떻게 가장 정교한 외교 무기이며, 경제 전쟁의 보이지 않는 전선이 될 수 있는지를 세계사에 증명했다. ‘문화쇼’가 어떻게 ‘실질적 외교 성과’로 이어지는지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었다. 경주는 시간을 축적하는 도시다. 이곳에서 정상들은 ‘지금, 여기’의 첨예한 이해관계를 넘어, 천년 전 신라의 외교관과, 혹은 천년 후의 역사가와 대화하하는 듯한 시간의 교란을 경험했다. 그들은 ‘국가의 대표자’가 아닌, 문명의 지속을 고민하는 ‘역사적 존재’로 자신을 재인식하게 된다. 분절되고 피로한 시대. 우리는 경주에서 보았다.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폭풍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가장 섬세하고 조용한 날갯짓이 어떻게 폭풍을 잠재우고 새로운 질서를 생성하는지를. 문화는 더 이상 외교의 장식품이 아니다. 그것은 시대를 관통하는 가장 강력한 목소리이자, 우리에게 남겨진 마지막 희망의 언어일지 모른다. 그날 밤 경주 하늘 위에서 수천 마리의 나비가 은빛과 금빛으로 날아오르며 남긴 메시지는 분명했다. 그것은 외교의 미래였다. 진정한 외교란, 힘의 논리나 숫자 경쟁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이 맞닿는 섬세한 공감, 그리고 작은 것에서 출발하는 큰 변화임을. 세계 무대에서 하나의 현실로 증명된 순간이었다. 이제 남은 질문은 이 날갯짓을 일회성의 장면으로 남길 것인지, 지속 가능한 국제질서의 언어로 발전시킬 것인지에 대한 우리의 선택이다.
    APEC으로 되돌아본 분열과 만파식적의 정신
    by 이경화
    2025.11.27 15:39:59
  • 1977년 신경생리학자 앨런 홉슨은 맥컬리(McCarley)와 함께 한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꿈을 꾸는 렘(REM) 수면은 원시뇌인 뇌간(brain stem)에서 시작하는 무작위적인 신경의 활성화(activation)를 바탕으로 꿈이 만들어진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꿈의 주된 동기는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생리적인 것”이라고 했다. 이는 꿈을 무의식적 소망의 표현으로 보았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관점에 정면으로 대립하는 신경생물학적 이론이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날 아내인 리아의 부정을 의심하는 꿈을 꾼다. “리아와 내가 유럽을 여행 중인데, 우리는 아주 많은 사람들과 함께 다리를 건너고 있다. 높은 아치형 중세 건너편에 있는 작은 마을을 향해 아주 작은 강을 미끄러지듯 간다. 배가 강기슭에 다다르자 이미 서로를 찾아내기가 어려워진다. 리아가 힐끗힐끗 보인다. 그녀가 누군가와 이야기 하고 있다. 어떤 남자다. 우리가 배에서 내리기 전 아니면 직후에 그녀가 나의 드릴 촉을 그 남자에게 주는, 또는 팔아버리는 모습이 보인다. 그 드릴 촉은 내가 버몬트주에서 나무에 구멍을 내기 위해 커다란 손잡이가 달린 드릴에 꽂아서 사용하던 것이다. 나는 깜짝 놀랐고 속이 좀 상했다. 또한 그 남자가 메고 있는 숄더백에 그 드릴 촉을 사용해서 완벽한 구멍을 낸 것이 보인다. 그런데 그 숄더백은 내 것과 아주 비슷한 것이다.” 꿈은 이어진다. “리아는 그 드릴 촉을 팔고 받은 돈을 나에게 주겠다고 해명한다. 내가 가장 아끼는 공구 중 하나를 나에게 묻지도 않고 낯선 사람에게 넘겼다는 사실이 여전히 뜻밖이다. 나는 아주 불안하고 짜증이 난다. 뭍에 다다르자 여관을 찾아서 돌아다니다가 여러 차례 서로 헤어진다. 같이 헤메는 어느 한때 그녀는 나에게 자기만의 비밀스런 삶이 필요하다고 분명히 밝힌다. 내가 그 남자에 대해서 묻자 그녀는 자신이 원하면 자유롭게 그 남자와 연인관계가 될 뜻이 있음을 명백히 한다. 나는 매우 당황스럽고 불안해서 내 걱정을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우리가 마침내 그 여관 같아 보이는 곳에 도착하자 또다시 그녀를 찾기 힘든 이상한 상황이 된다. 그러다가 부엌으로 보이는 곳에 그녀가 있는 게 보인다. 그녀는 무언가 음식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나는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건 너무나 알팍한 핑계이기 때문이다. 요리가 언제 끝날지를 물어보자 그녀는 시계를 보더니 45분이라고 답한다. 나는 그녀가 어느 낯선 남자를 선택하든 간에 45분이면 그와 사랑을 나누는 데 충분한 시간이 될 것이다. ‘그럼 그렇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꿈은 홉슨이 뇌졸중을 앓고 있던 60대 후반에 꾼 꿈이다. 병든 홉슨이 40대 초반으로 젊은 아내와 살면서 느끼는 심리적 불안감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뇌졸중이 발병한지 38일 지나서 이 꿈을 꾸었다. 홉슨은 이 꿈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이 꿈은 바로 나의 장애로 인해 리아와 계속 함께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지 않을까 하는 나 자신의 두려움이다. 깨여 있는 동안에는 이 두려움의 의식 속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데, 꿈 속에서는 리아가 다른 남자의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녀가 남자의 유혹에 쉽게 넘어갈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 자신이 분명히 잘 알고 있으면서도, 꿈속에서는 나의 두려움과 과거 나의 외도의 내력이 합세해서 그녀를 결혼이라는 보금자리를 박차고 나갈지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홉슨은 렘 수면 상태에서 이 꿈을 꾼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꿈 속에서 질투했던 낮선 남자는 정체불명에다가 행동도 이상하고, 드릴 촉과 내 숄더 백에 난 구멍은 ‘프로이트식으로 해석해야만 말이되고’, 호텔에서 내 아내가 요리를 한다는 것도 그럴듯하지 않은 일이다. 이런 이질적인 요소들은 하나로 묶는 일관적이고 강력한 정서가 이 꿈에 명백한 의미를 부여한다. 즉, 건강이 악화된 상태에서 나는 가장 중요한 동반자이자 강력한 지지자인 내 아내를 잃을까 봐 걱정을 하는 것이다.” 홉슨의 말대로 이 꿈은 심리몽으로 젊음과 건강을 상실한 홉슨의 두려움이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프로이트식으로 해석해야 말이 된다’는 의미는 드릴촉은 남성성, 백에난 구멍은 여성성을 상징한다는 뜻이다. 2005년에 발간한 홉슨은 자신의 저서 『프로이트가 꾸지 못한 13가지 꿈』의 서문을 이렇게 시작했다. “꿈이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는 열쇠라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믿음은 올바른 것이었다. 또한 과학적 심리학은 뇌에 토대를 둘 필요가 있다는 그이 가정도 올바른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 토대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 생각에 그가 마음의 과학에 기여한 바는 좋게 말하면 진부하고 나쁘게 말하면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홉슨은 프로이트의 꿈 해석에 대한 관점을 일부 인정하면서도 신경생리학적 측면에서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철회하지는 않았다. 꿈에 대한 신경생리학적인 홉슨의 견해는 또다른 신경생리학자에 의해서 크게 논박을 당했다. 그의 이름은 마크 솜스(Mark Solms)이다.
    아내의 외도를 의심하는 남편의 꿈
    by 국경복
    2025.11.26 18:30:20
  • 이번 APEC 경주대회의 또 다른 성과는 K-푸드를 세계 정상에 알리는 것이었다. 비록 단편적이고 지역적인 것이었지만 그 효과는 엄청난 것이었다. K-팝, K-컬쳐와 함께 우리나라의 문화적 위상이 세계적으로 매우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흔히 K-푸드와 한식(K-diet)와의 구분이 어렵다고 물어오는 데, 한식은 우리나라 조상 대대로 내려온 먹고 살아온 식과 습관을 대변하는 밥상을 말한다. 곧 밥상의 구조와 구성, 먹는 양식과 문화를 말한다. 우리 조상들은 주로 밥, 국, 김치, 장 등 기본 반찬 위에 매끼마다 대표음식을 하나씩 만들어 밥상을 차렸다. K-푸드는 이러한 한식이 시장화하는 과정에서 생긴 음식을 말하며. 처음에는 주로 밥상구조의 대표 음식이 한그릇 음식(one-dish, one-bowl)형태로 골목이나 시장에 나왔다. 장터에서 시작하여 주막에서 K-푸드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요즈음에는 이러한 포멀한 대표음식을 넘어서 각 지역이나 우리 조상들이 각 가정의 간식으로 먹었던 음식이 길거리나 시장에 나와서 K-푸드로 많이 알려진 경우가 있다. 우리는 베트남전의 기억을 잊지 못할 것이다. 다낭을 중심으로 남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이 북베트남, 특히 하이퐁만 근처에 엄청난 폭격을 퍼붓고도 미국이 승리하지 못하고 결국 철수하였다.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은 사람의 목숨을 잃는 것에 극히 조심하여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고 폭격만 하였기 때문이다. 보통 전쟁에서 최종 승리는 지상군이 투입되여 적의 심장부에 국기를 꽂는 것이다. 그것을 주저하고 폭격만 한다면 승리를 이를 수 없다. 문화전쟁도 마찬가지다. K-팝, K-드라마는 공중전의 전사이고, K-푸드는 지상군이다. 우리나라가 지금 K-팝, K-드라마로 전 세계를 공중에서 폭격하고 있는 중이다. 이를 승리로 완성하려면 K-푸드가 지상에서 차분하게 차근차근 점령해 나가야 한다. 지상군 없이 실체를 구상하기 어려운 공중전만 가지고는 세계화를 완성했다고 볼 수 없다. 과학적으로 시각이나 청각은 매우 민감하여 쉽게 받아들여지지만, 그만큼 쉽게 잊혀지거나 사라질 수 있다. 물질적인 미각이 따라주어야 한다. 그러나 음식은 매우 보수적이어서 받아들이는 데도 쉽지 않고 시간이 걸리지만 한번 받아들이면 쉽게 사라지거나 잊지 못한다. 후생유전학적(epigenomics)으로 음식의 맛이나 습관은 유전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케데헌(K-pop demon hunters)이 더 폭발적이고 우리나라에 외국인들이 많이 온 것은 케데헌 안에 K-푸드가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K-푸드의 세계화 절차는 세가지 단계를 걸쳐서 이루어 진다. 첫째 K-푸드를 알려야 한다. 두 번째로 K-푸드를 좋아하게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K-푸드를 이용하여 비즈니스가 뒤따라가야 한다. 이러한 목표 없는 K-푸드의 세계화는 생명력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그럼 K-푸드의 무엇을 알릴 것이며 어떻게 알릴 것인가? 어떻게 알릴 것인가를 고민하기 전에 무엇을 알릴 것인가를 고민하여야 한다. 이미 우리나라는 K-팝이나 K-드라마로 세계를 폭격하고 있으니 어떻게 알리는 기반은 충분하다. 지금과 같은 좋은 기회가 없으니 이번 기회를 꼭 살려야 한다. 먼저 K-푸드의 역사적 전통성, 독특성, 맛의 독특성, 건강성을 먼저 알려야 하고, 이들의 과학적 가치를 꾸준히 연구하여야 한다. 그래야 지속 가능한 세계화가 이루어진다. 두 번째로 K-푸드를 좋아하려면 이러한 기본적인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K-푸드를 먹어볼 기회를 많이 갖도록 하고 종국적으로는 한국으로 K-푸드를 먹어보기 위해 들어올 정도가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맛이 있어야 하고 더 중요한 것은 고유한 맛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고유의 맛은 설탕과 기름을 쓰지 않고 내는 여러 가지 기본 맛인데 요즈음은 설탕을 쓰는 것이 우리 맛인 줄 잘 못 알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설탕을 많이 쓰는 것이 우리의 맛인 것으로 외국인 오해하게 하면 안된다. 설탕으로 내는 맛이 우리 맛인 줄로 알면 K-푸드는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룰 수 없다. 설탕의 단맛은 패권을 추구하기 때문에 우리의 고유의 맛을 없애버리는 경향이 있어서 이점이 매우 우려된다. 여러 가지 맛을 내는 K-푸드가 많은데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것이 무궁무진하다. K-푸드를 좋아하여 한국 땅을 찾고 한국에서 K-팝과 K-컬쳐를 즐기는 외국인이 많도록 해야 한다. 먼저 K-푸드를 알리고 K-푸드를 좋아하면 K-푸드 비즈니스가 성공하게 된다. 세계적으로 한식 레스토랑이 많이 생기고, 기업은 K-푸드 상품을 만들 수 있고, 이를 세계 시장에 내놓으면 세계 시장에서 K-푸드 상품이 주류를 이룰 것이다. 그러나 정부나 많은 기업가들은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일에 우선하여야 하는 데, 우선 돈을 벌 생각으로 생산부터 생각한다. 순서가 틀렸다. K-푸드는 가격전쟁을 위한 공중전을 할 것이 아니라 가치전쟁으로 대인전, 지상전을 수행해야 한다. 칼로 정복할 것이 아니라 소비자의 마음을 사는 것이 우선이어야 한다.
    K-푸드의 세계화 길
    by 권대영
    2025.11.03 10:58:00
  • 신경생리학자 앨런 홉슨(Allan Hobson)이 자신의 저서 『프로이트가 꾸지 못한 13가지의 꿈』에서 소개한 꿈이다. 홉슨은 자신이 꾼 꿈을 소개하고, 해석하면서 프로이트가 세웠던 가설들을 공격한다. “토요일 아침 리아(홉슨의 부인)가 아침식사를 준비하려고 일어난 후에 나는 놀라운 꿈을 두 가지 꾸었다. 이 꿈속에서 나는 키스를 하고 있었다. 첫 번째 꿈에서 나의 키스 상대인 여성은 보이지 않았고 사실상 신체가 없는 게 아닌가! 오로지 보이는 것이라곤 아주 음탕하게 확 벌어진 입뿐이었다. 그렇게나 생생하고 관능적인 감각을 내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가 최근 몇년 사이에 느꼈던 어떤 것보다도 강렬한 감각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깨어났다가 다시 잠들어서 두 번째 꿈을 꾸었는 데, 비록 실제로 오르가즘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그에 비할 만큼 강렬한 꿈이었다. 이 꿈에서 키스하기 전에 순간적으로 그 여성을 바라보았을 때 아무리 프렌치 키스라고 해도 키스가 그렇게나 육감적일 수 있다는 게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서는 내가 타원형으로 벌려진 그 입술에 내 혀를 갖다 대고 둥그렇게 문지르려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입술에 내 혀가 닿기도 전에 짜릿한 성적 에너지가 내 몸 전체에서 느껴지는 게 아닌가! 그럴 수가 없어 보이기는 했지만, 이게 두 번째로 꾸는 꿈이고, 아주 얕은 잠을 자고 있었을 것이 분명한데도 내가 꿈을 꾸고 있다고는 나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홉슨은 이 꿈들을 해석하기 위해서 자신의 과거 경험을 회상하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 꿈을 꾼 것은 내가 <수면의 역설>이라는 국제학술대회에 참석차 프랑스 리옹에 갔다가 돌아온 직후였다. 이번 여행과 그 학술대회는 아주 감정적인 기억들을 떠올리게 했다. 1963년도에 내가 어떤 프랑스 여성과 첫 번째로 바람을 피웠던 기억이 주로 떠올랐다. 그건 육욕적인 면이 너무나 강한 일이었는데, 내가 성적인 관계를 장기간 유지한 최초의 경우였다. 이 관계는 상대가 갑작스럽게 죽은 1969년까지 6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나의 두 번째 결혼생활은 행복했고 2001년 2월에 겪은 뇌졸중 이후 리비도(본능적 욕망)가 현저히 감소했기 때문에 나는 새로 바람을 피우기는 커녕 옛 애인을 다시 만나보고픈 생각도 전혀 없었다. 그런데 2003년 9월에 개최된 국제학술대회에서 또다른 옛 연인 마리안느를 만났다. 그녀와는 공항에서 작별 키스를 했다. 미국에 도착하니 그녀에게서 연애편지가 도착해있었다. 며칠을 망설이다가 그녀에게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이틀 후에 이 프랜치 키스 꿈을 꾸었다.” 홉슨의 해석이다. “내 경험상 꿈이 오르가즘으로까지 이어지는 일은 아주 드물다. 시상하부(hypothalamus)가 성을 담당한다고 가정할 때, 잠자는 동안 이 성감 뇌(erotic brain)가 활성화 될 수 있다.” 현대 뇌과학에 의해 밝혀진 바에 의하면 뇌 안에 있는 시상하부의 중요한 기능 중에 하나가 성적인 욕구 등을 조절하는 것이다. 따라서 프랜치 키스 꿈은 수면 중 시상하부의 활성화에 의하여 만들어 졌다는 홉슨의 주장은 타당해 보인다. 꿈을 꾸게 만드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기억이다. 홉슨은 젊은 시절 프랑스에서 여성들과 로맨스가 있었다. 이러한 경험들이 뇌에 저장되어 있다가 그가 한 최근 체험이 촉발요인이 되어 프렌치 키스의 꿈이 만들어진 것이다. 홉슨은 이 심리적인 꿈을 프로이트가 제안한 해석방식과 비교하면서 프로이트를 비판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성감 뇌에 대해 무언가를 알 수 있다. 이게 금지된 욕망을 위장하고 검열을 받은 결과일까? 전혀 아니다. 그건 절대로 소멸되지 않는 욕망이 다시 불붙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홉슨의 이러한 지적은 프로이트가 성적인 욕망은 억압되었다가 뇌의 검열을 거쳐서 위장된 방식으로 꿈이 드러난다고 가정한 것에 대해서 비판한 것이다. 홉슨은 덧붙인다.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되면 의지를 능가하는 본능의 힘을 확인하게 되는데, 이것을 인식하고 강조한 공은 프로이트에게 돌려야 한다. 하지만 내 꿈들이 보여주는 것은 욕망, 성적 흥분과 같은 황홀감의 대부분이 순전히 뇌 부위들의 활성화의 결과로서 마음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홉슨은 프로이트의 가설들은 비판하면서도 프로이트가 꿈의 진정한 의미를 찾기 위해서 제안한 자유연상(free association)법을 이용해서 자신의 성적 편력을 회상하고 있다. 그리고 뇌 안에 있는 시상하부가 성적 욕구를 담당한다는 사실은 1975년 양전자방출 단층촬영(PET)기술과 1990년 기능성자기공명영상(fMRI) 기술이 각각 발명되어, 꿈 꾸는 뇌의 영상촬영이 가능해지면서 밝혀지게 된다. 프로이트는 1939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이같은 사실을 알 수는 없었다.
    엘런 홉슨의 꿈 '프렌치 키스'
    by 국경복
    2025.10.21 14:30:13
  • 페루 의회가 9일 밤 디나 볼루아르테 대통령을 ‘도덕적 무능(incapacidad moral, moral incapacity)’을 이유로 압도적 표결로 해임했다. 전체 130명의 의원 중 123명이 찬성했고 반대는 단 한 표도 없었다. 이로써 페루는 2016년 이후 무려 8번째 대통령 궐위 사태를 맞게 됐다. 지난 9년 동안 대통령직을 수행한 인물은 쿠친스키, 비스카라, 메리노, 사가스티, 카스티요, 볼루아르테, 그리고 이번에 승계한 헤리까지 총 7명이다. 이 가운데 임기를 제대로 마친 대통령은 단 한 명도 없다. 이번 탄핵은 돌발적 사건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예고된 ‘시간 문제’였다. 볼루아르테는 2022년 12월 부통령 시절 페드로 카스티요 전 대통령이 친위 쿠데타를 시도하다 해임되면서 헌법에 따라 자동 승계로 대통령직에 올랐다. 그러나 정치적 기반과 지지율은 취임 직후부터 취약했다. 재임 중 8차례의 탄핵안이 발의됐고 4건은 본회의에 상정됐으나, 분열된 의회 구도 탓에 절대다수인 87표를 넘지 못해 무산돼 왔다. 하지만 내년 4월 대선을 앞두고 정당들이 선거 전략에 돌입하면서, 지지율 3%의 대통령과 선을 긋는 것이 정치적으로 유리하다는 판단이 확산됐다. 결국 우파와 중도 정당이 일제히 입장을 바꾸면서 탄핵은 몇 시간 만에 성사됐다. 결정적 계기는 8일 밤 리마에서 열린 인기 그룹 아과 마리나의 공연 중 범죄 조직의 총격 사건 때문이었다. 밴드 단원 4명과 관객 한 명이 부상한 이 사건 직후 치안 악화를 이유로 다섯 건의 파면 동의안이 동시에 제출되면서 정국은 급류를 탔다. 여기에 반정부 시위 진압 과정에서 60명 이상이 사망한 사건, ‘롤렉스게이트'로 불리는 고급 시계·보석 미신고 파문, 성형수술을 위한 직무 이탈 등이 누적되며 정치적 신뢰는 급격히 붕괴됐다. 검찰은 그녀에 대해 출국금지 조치를 취했다.. 헌법에 따라 대통령이 탄핵되면 권력 서열에 따라 부통령 또는 국회의장이 대통령에 즉시 취임한다. 국회의장은 매년 정당 합의로 교체돼, 준비되지 않은 인물이 순번에 따라 대통령에 오르는 경우가 잦다. 이번에 취임한 38세의 호세 헤리 역시 정치 경험이 얕고, 성폭력 및 부패 의혹으로 조사를 받은 전력이 있다.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 2016.7–2018.3 (약 1년 8개월) 경제장관, 민간경제인 선거 당선 오데브레히트 의혹, 사임 *마르틴 비스카라 2018.3–2020.11 (약 2년 8개월) 부통령, 주지사 부통령 승계 뇌물 수수 의혹, 탄핵 *마누엘 메리노 2020.11.10–2020.11.15 (5일) 국회의장 국회의장 승계 대규모 시위로 인한 사임 *프란시스코 사가스티 2020.11–2021.7 (약 8개월) 국회의원(과도연합) 국회의장 승계 과도정부 수반, 임기 종료 *페드로 카스티요 2021.7–2022.12 (약 1년 5개월) 교사·노조 지도자 선거 당선 자가 쿠데타 시도, 탄핵 및 체포 *디나 볼루아르테 2022.12–2025.10 (약 2년) 부통령 부통령 승계 ‘도덕적 무능’ 표결로 탄핵 *호세 헤리 2025.10–2026.7 (예정, 약 9개월) 국회의장 국회의장 승계 헌법상 승계(대선 전 과도정부) ‘도덕적 무능’ 조항은 19세기 헌법에 포함된 모호한 규정으로, 대통령을 형사소추 없이도 신속히 해임할 수 있게 한 근거가 됐다. 문제는 이를 견제할 사법·헌법적 절차가 전무하다는 점이다. 헌법재판소 사전 심사나 상원 재심 절차 없이 국회 표결만으로 탄핵이 확정된다. BBC는 이를 “의회의 손에 지나치게 집중된 해임 권한이 만들어낸 구조적 불안정”이라 평했고, 니콜라스 왓슨 테네오컨설팅 대표는 “경험이 부족한 헤리 정부가 초기에 흔들릴 경우 정치적 공백이 커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내년 4월 예정된 대선에는 43명의 후보가 등록했다. 군소정당이 난립해 정강·정책이 맞지 않아도 유명 인사를 영입하며 합종연횡이 반복되고, 선거 후 의회는 극도로 파편화돼 어떤 대통령도 과반을 확보하지 못한다. 이런 구조가 탄핵 정치를 되풀이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페루 경제는 비교적 견조하다. IMF에 따르면 2023년 -0.6% 역성장 후 2024년 3.3%로 회복했고, 2025년에도 3%대 성장이 예상된다. 구리 생산 증가와 공공투자가 경기의 버팀목 역할을 하고, 인플레이션도 1.8% 수준으로 안정적이다. 페루의 정치 위기는 한 정권의 몰락이 아니라, 탄핵이 정치 경쟁 수단으로 기능하는 구조적 문제의 반복이다. 이러한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9년 8명의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는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9년간 7번째 대통령…페루의 정치 불안
    by 박선태
    2025.10.15 20:48:13
  •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마두로 정권으로 이어진 권위주의적 통치와 구조적 인권 유린, 민주주의의 붕괴, 극심한 빈곤과 배고픔을 피해 지난 수년간 전체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약 750만 명의 국민들이 콜롬비아·페루·칠레 등 인근 국가로 탈출해 국경을 넘는 피난 행렬을 이루었다. 불안정한 정착, 삶의 기반을 잃은 채 방황하는 수많은 베네수엘라인들의 현실은 단순한 국가 위기를 넘어선 21세기 라틴아메리카의 집단적 비극이었다. 과거 이러한 장면을 수없이 목격해 왔다. 중남미 국가들의 식당에서, 택시 운전사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 속에서 만난 이들의 얼굴에는 꺼지지 않은 희망과 깊은 절망감이 교차하는 것 같았다. 오스카 무리요 정치 전문가는 최근 CNN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노벨평화상은 베네수엘라 국민이 오랫동안 이어온 민주주의 투쟁에 다시금 국제적 조명을 비추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경험 속에서, 민주주의와 인권 수호의 상징이자 권위주의에 맞서 비폭력으로 싸워온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가 2025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은 깊은 감동과 역사적 의미로 다가왔다. 그녀의 수상은 단지 한 개인의 영예가 아니라, 억압과 침묵 속에서도 자유를 포기하지 않았던 베네수엘라 국민 전체의 투쟁과 희망에 대한 국제사회의 응답이라고 느껴졌다. 마차도는 수상 직후 “이 상은 나 개인의 것이 아니라 자유를 위해 싸워온 모든 베네수엘라 국민의 것이다”라고 말했다. 마차도는 1967년 카라카스 출신으로 2002년 시민 감시단체 ‘수마테(Sumate)’를 창립하며 정치에 뛰어든 이후 20년 넘게 비폭력적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지키는 활동을 이어왔다. 권위주의 정권의 무력에 맞서 무장투쟁이 아닌 시민 조직, 선거 감시, 정치 참여를 통해 변화를 모색해온 점이 그녀의 가장 큰 특징이다. 2024년 베네수엘라 대선에서 출마가 금지된 이후에도 야권을 단일화해 에드문도 곤살레스를 지지하며 정권 교체를 시도했고, 선거 후 탄압 속에서 지하로 숨어들었다. 노벨위원회는 그녀를 “독재에서 민주주의로의 정의롭고 평화로운 전환을 위해 싸워온 인물이며, 어둠 속에서 민주주의의 불씨를 지켜온 사람”으로 평가했다. 마차도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일곱 번째 노벨평화상 수상자다. 그러나 이전 수상자들이 주로 국가 간 분쟁 중재나 내전 종식, 군사독재 하의 인권운동에 집중했다면, 마차도는 현직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시민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회복하려는 투쟁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수상의 성격이 다르다. 이는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 수상 당시와 유사한 맥락으로,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전례 없는 사례다. 수상 발표 직후 라틴아메리카 각국의 반응도 뚜렷이 갈렸다. 콜롬비아의 페트로 대통령은 “대화를 통한 평화를” 언급하며 축하 메시지를 보냈고, 에콰도르·파라과이·아르헨티나 등은 공개적으로 그녀의 용기와 리더십을 높이 평가했다. 반면 멕시코는 자국 헌법에 명시된 ‘비간섭 원칙’을 이유로 거리를 두었고, 쿠바·니카라과 등 권위주의 정권과 가까운 정부들은 침묵하거나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는 지역 내 이념적 균열이 여전히 강하게 존재함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국제인권단체와 서방 주요국들은 환영의 뜻을 밝혔다. 휴먼라이츠워치(HRW)는 “이번 수상이 베네수엘라의 민주적 전환을 위한 국제적 노력에 새로운 동력을 줄 것”이라고 평가했고, 유럽연합과 여러 유엔 특별보고관들도 그녀의 용기와 비폭력 저항을 높이 평가했다. 반면 트럼프 행정부는 “정치가 평화를 앞질렀다”고 반발했고,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노벨상이 정치화됐다”고 비판했다. 수상 자체가 국제 외교 무대에서도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진영 간의 대립 구도를 드러내는 상징적 사건이 된 것이다. 국경을 넘어 흩어진 수백만 명의 베네수엘라인들, 그리고 오슬로의 무대에서 울려 퍼진 마차도의 노벨평화상 수상 소식은 한 국가의 정치적 사건을 넘어, 라틴아메리카 민주주의의 향방을 가늠하는 분수령이 되고 있다. 그의 이번 수상이 베네수엘라 민주주의 회복의 전환점이 되고, 수많은 난민과 디아스포라가 다시 조국의 자유와 존엄을 되찾는 날이 앞당겨지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난민 750만 명, 그리고 한 여성의 이름이 울려퍼졌다
    by 박선태
    2025.10.15 20:28:37
  • 최근 한국과학기술한림원에서 커리어디시젼스 강연이 있었다. 그 강연에서 우리집은 일년에 제사가 거의 20번 정도 있었는데 우리 어머니는 이 제사 음식과 일년에 한번 있는 시제(時祭, 문중 제례) 음식을 다르게 준비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했더니 ‘뭐가 다르고 왜 다르냐?’라고 질문이 많이 들어 왔다. 기본적으로 제사와 시제의 차이를 보면 제사는 돌아가신 분 1인을 모시고 기억하고 기리는 것이고 시제는 종친들이 묘소나 릉을 찾아가 시조를 기리고 후손들의 안녕과 평강을 비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임금이 서울에서부터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릉을 행차하여 의례를 지내는 것이 시제의 모범이고 제례의 표본이다. 순우리말인 한가위를 부르는 추석은 중국의 중추절과 비슷하지만 중국과는 다르게 독립적으로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명절로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농사를 잘 짓게 해준 하늘과 땅에 감사하고 동시에 모든 고을사람의 평강을 기원하며 음식을 나누는 우리 고유의 문화이다. 물론 한해 풍년을 기원하는 정월대보름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요즘은 풍성한 추수를 할 수 해주신 신에 대한 감사 위에 조상님에 대한 감사와 제사를 지내는 것까지 추가되어버렸다. 아마도 종친들이 따로 쉽게 다 모이지 못하기 때문에 시제의 기회가 줄어들어 추석에 조상들께 제사 지내는 시제의 기능까지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으로 보면 제사는 고려시대 이전부터 있었고, 시제나 의례는 성리학이 들어온 조선시대 이후에 들어온 것이다. 한가위나 정월 대보름은 제사와 같이 고려시대 이전부터 내려온 우리 고유의 전통과 문화이다. 시제는 기본은 조선시대 이후 궁궐에서 진행된 졔례일 것이고 이를 유생들에 의하여 서원에 파급되어 시제까지 확대되었다. 이와 같이 시제와 제사는 뿌리가 다르기 때문에 당연히 음식도 다르다. 즉 우리 어머니가 어렸을 때 보여준 제사음식과 시제음식이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고려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제사음식은 돌아가신 분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으로 그 지방에서 가장 맛있는 것으로 지냈다. 시제나 제례 음식은 조선시대 이후 남성 중심의 성리학자 양반들이 주도하다 보니 맛보다는 격식을 중요하게 따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평범한 여성들이 만든 우리 음식은 차례상에서 멀어지고 남성들이 책으로 접한 중국 음식이 주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그 밑바닥에는 아마도 아낙들이 만드는 우리 음식은 천하고 중국 음식은 귀하다는 사대사상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고춧가루나 양념이 없는 기름기 있는 음식이 차례상에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몇 년 전 성균관 학자들이 추석에 부치는 전이 우리 음식이 아니라는 말을 공식적으로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이렇게 궁중이나 양반 종가에서 제례 음식이 필요했으니 홍만선(洪萬選)과 같은 학자들이 중국의 제민요술(齊民要術)이나 거가필용(居家必用) 같은 책을 번역하여 산림경제(山林經濟)를 편찬한 것이다. 그래서 시제음식이 색깔과 맛이 밋밋한 것이다. 중국음식은 기름으로 요리하여야 하는 데 우리나라는 기름도 많지 않고 기름으로 맛을 내는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보통 제례음식이 맛이 없다. 조선시대 이후 의례나 제례음식은 우리 음식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요즘 흔히 말하는 궁중음식과 종가음식은 우리 음식에 뿌리를 둔 음식이 아니다. 우리 음식의 종류를 궁중음식, 종가음식, 서민음식으로 가르치는 것은 잘못 되었다. 프랑스와 같이 왕이 즐겨 먹는 음식이 궁중음식이어야 하는 데 조선 시대는 제례나 의례를 위해 궁중에서 만드는 음식이 궁중음식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요즈음은 제사도 한 분을 위해 돌아가신 그날그날 모시는 것이 아니라 조상들의 기일을 묶어서 단체로 한 번에 하는 집이 많아졌다. 또한 추석과 시제의 개념이 불분명하여 시제를 지내지 않고 추석 때 조상들의 공덕을 기리는 집이 많아 한가위의 본래 개념과도 벗어나 버렸다. 이와 같은 문화의 변화와 함께 요즘은 제사음식, 시제음식, 추석음식의 개념도 섞여버린 기분이 든다
    제사음식과 제례음식 차이
    by 권대영
    2025.10.10 16:12:49
  • 한류가 전 세계를 휩쓸며 이제는 한국의 매운맛도 글로벌 시장에 확고히 자리 잡았다. 김치, 고추장, 매운 라면이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는 가운데, 최근 남미 파라과이에서 한국의 태양초 고추를 재배해 고추가루로 가공해 미국으로 수출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단순한 농업 뉴스 같지만 그 안에는 중남미와 한국, 그리고 세계를 잇는 식문화의 순환이 숨어 있다. 학계의 다수 견해에 따르면 고추는 중남미가 원산지로 멕시코와 볼리비아, 페루 등지에서 오래전부터 재배되어 왔다. 15세기 콜럼버스 교역을 거치며 유럽으로 전해지고, 다시 아시아로 건너왔다는 학설이 주류다. 전래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중요한 것은 고추가 김치와 만나 한국인의 식문화에 깊이 스며들었다는 점이다. 태양초는 그 상징이라 할 수 있다. 파라과이는 고온다습한 기후와 강한 일조량을 지녀 고추 재배에 이상적이다. 참깨, 콩 등 작물 수출 경험도 풍부하다. 과거 외교관으로 근무하면서 중남미 여러 나라를 다니며 다양한 고추(Chile) 품종을 봤지만 태양초 고추를 본 적이 없다. 고춧가루 생산 이야기도 들은 기억이 없다. 그런데 파라과이에서 태양초를 재배해 미국으로 수출한다는 소식이 들여왔으니 놀라웠다. 세계 식문화의 흐름 속에서 중남미에서 ‘한국 고추’가 재배되는 새로운 장면이다. 이 변화는 김치 수요 확대와 맞물려 있다. 미국 김치 시장은 2024년 약 6억8000만 달러에서 2030년 9억4000만 달러로 성장할 전망이다. 고춧가루 수출은 김치 소비 증가의 반증이다. 40여 년 전 처음 중남미에 갔을 때 현지인들은 김치를 ‘삐깐테(Picante, 매운 음식)’라고 불렀다. 즉 김치는 매운 음식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지금은 ‘건강식’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 칠레, 콜롬비아, 파라과이의 한국 식당들은 주말마다 만석이라고 한다. 2011년 칠레에서 근무할 당시 김치 담그기 행사와 전시회를 열었을 때 현지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파라과이 명문가에 김치를 선물했을 때 하루 만에 다 먹고 다음 날 “더 없냐”는 전화를 받았던 기억도 있다. 콜롬비아의 한 기업인 아들이 선물 중에서도 특히 고추장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한 것도 인상 깊었다. 요즘은 대사관 직원들이나 지인들 집마다 김치가 상비되어 있다고 들었다. 고추는 단순한 양념이 아니다. 안데스의 태양 아래에서 시작된 고추가 지구를 한 바퀴 돌아 한국에서 태양초로 다시 피어나고, 이제 파라과이에서 재배돼 미국으로 수출되고 있다. 고추가루 한 포대에는 김치와 한국의 매운맛이 세계 식문화 속으로 스며드는 순환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제 정부도 한류를 통해 문화 영향력을 넓히고 국가 이미지를 높이려는 목표를 분명히 하고 있다. 김치가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지만 중남미에는 내세울 만한 한식당이 거의 없는 현실은 아쉽다. 한류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음식 문화 세계화를 위한 인프라 구축과 인력 양성에 전략적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한류가 일시적 유행을 넘어, 지속 가능한 문화 교류의 토대로 자리 잡을 수 있다.
    김치가 열어준 '고추'의 세계 여행
    by 박선태
    2025.10.10 15:38:49
  • 엘 띠엠뽀(El Tiempo) 보도에 따르면 콜롬비아 정부가 스웨덴 Saab사의 Gripen 전투기 18대를 약 39억 달러 규모로 도입을 사실상 확정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한국은 명함조차 내밀지 못했다. 한국전쟁 참전국이자 오랜 우방인 콜롬비아에서조차 기회를 잡지 못했다는 것은 단순한 무기 수출 실패가 아니라, 방산외교의 취약점을 드러낸 사건이다. 정부는 방산외교 강화를 내세워 군 출신 고위 인사를 최전선에 배치했지만, 기대만큼의 성과는 없었다. 대통령과의 독대는 물론 고위 참모, 의회 인사와의 접촉에도 실패하면서 방산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네트워킹을 확보하지 못한 것이다. 방산 사업은 군의 필요성과 기술 사양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무기 성능은 자료와 전문가 설명으로 충분하다. 외교 현장에서 공관장이 맡아야 할 역할은 정치·재정 결정권자와 신뢰를 쌓고 설득의 길을 여는 일이다. KF-21은 Gripen보다 성능이 뒤지지 않을 뿐 아니라 가격·유지보수 측면에서도 더 유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경쟁의 장에조차 서지 못했다. 기술력이 아니라 외교적 준비와 설득력 부족이 패인의 본질이었다. 대규모 방산사업은 본래 쉽지 않다. 국제 경쟁이 치열하고, 최선을 다해도 결과가 불확실하다. 그러나 한국과 콜롬비아의 관계를 고려하면 이번 결과는 더욱 아쉽다. 콜롬비아는 한국전쟁에 파병한 유일한 중남미 국가이며, 오랜 세월 우호 협력 관계를 쌓아왔다. 이런 배경에도 불구하고 스웨덴보다 뒤질 이유가 없는데도 경쟁조차 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곱씹어야 할 대목이다. 방산 수출의 성패는 기술력보다 정치적 신뢰와 전략적 접근에서 갈린다. 특히 많은 국가들이 무기 계약과 함께 옵셋(offset), 즉 산업협력·기술이전·현지투자를 요구한다. 대사관은 무기를 파는 창구가 아니라, 옵셋 의제를 발굴하고 조율하는 협상의 장이 되어야 한다. 이번 실패는 바로 이런 외교적 준비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번 사례는 방산외교를 군사기술 차원에만 한정하는 좁은 시각에 경종을 울린다. 방산외교의 본질은 정치적 설득, 외교적 네트워킹, 경제적 이해관계 조율에 있다. 출신보다 중요한 것은 역량과 열정, 국익을 지켜낼 전략적 안목이다. 방산외교는 곧 실리외교다. 상대국이 “이 협력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국민과 사회, 정치권을 설득하는 공공외교 능력도 필요하다. 외교는 기술과 논리만으로 성과를 내지 못한다. 상대의 마음을 움직여 감동을 불러낼 때 비로소 성과가 온다. 콜롬비아 전투기 구매 사례는 한국 방산외교가 놓친 아픈 경험이다. 더구나 이번 계약 규모는 한국이 콜롬비아에 매년 수출하는 총액의 4년치를 합한 것과 맞먹는 거대한 금액이었다. 그만큼 기회가 컸던 만큼, 이번 실패의 교훈은 더욱 무겁다. 이제는 형식보다 실질, 출신보다 역량, 명분보다 성과를 앞세워야 한다. 그것이 국익을 지켜내는 길이며, 방산외교뿐 아니라 한국 외교 전반에 반드시 새겨야 할 교훈이다.
    콜롬비아 전투기 사업과 한국 외교의 빈틈
    by 박선태
    2025.10.01 11:34:11
  • 2025년 9월 27일, 미국 국무부는 콜롬비아 구스타보 페트로 대통령의 비자를 전격 취소했다. 동맹국 대통령의 입국 자격을 박탈한 것은 전례 없는 조치였다. 유엔 총회 참석 계기 뉴욕 집회에서 그가 미군 병사들에게 “트럼프 대통령의 명령을 거부하라(Refuse President Trump’s orders)”, “인류의 명령을 따르라(Follow humanity’s orders)”고 촉구한 것이 직접적 이유였다. 미국은 이를 곧바로 “경솔하고 선동적”(reckless and incendiary) 행동으로 규정했다. 콜롬비아 외교부는 즉각 이번 조치가 국제법과 외교 관례를 위반한 것이라며 문제를 제기했지만, 본질은 단순한 비자 문제가 아니라 미국의 분명한 외교적 경고였다. 그럼에도 페트로 대통령은 사태를 가볍게 받아넘겼다. 그는 자신이 유럽 시민권을 보유하고 있어 미국 무비자 전자여행허가제(ESTA)로도 입국할 수 있다고 언급하며, 미국의 경고를 희화화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미국의 강력한 메시지와 대통령의 가벼운 반응이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논란은 더욱 확산되었다. 물론 이번 발언을 단순히 경솔함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국제무대에서 미국의 정책에 정면으로 맞서 목소리를 낸 것은 흔치 않은 용기였다. 페트로 대통령은 지지층에게 ‘원칙 있는 지도자’라는 인상을 주었고, 라틴아메리카 좌파 진영에서는 그 상징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그러나 지지층에게는 원칙 있는 지도자로 비쳤지만, 국익의 관점에서는 외교적 고립과 경제적 비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더 크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작전은 인도주의 위기를 심화한다는 국제사회의 비판에 직면해 있다. 이런 맥락에서 페트로 대통령의 메시지는 지지층 결집에는 효과가 있었을지 몰라도, 국가적 과제를 앞둔 콜롬비아에 꼭 필요한 선택이었는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언론 반응도 엇갈렸다. 콜롬비아의 엘 에스펙타도르(El Espectador), 베네수엘라의 텔레수르(Telesur), 아르헨티나의 파히나 12(Pagina/12) 등은 대통령 발언을 ‘표현의 자유’ 차원에서 옹호했다. 반면 엘 티엠포(El Tiempo), 세마나(Semana), 페루의 엘 코메르시오(El Comercio) 등 주류 매체는 외교·경제적 부담을 경고했다. 가디언(The Guardian) 은 “표현의 자유와 외교적 책임의 충돌”로, 엘 파이스(El Pais) 는 “콜롬비아 외교에 무거운 부담을 남겼다”고 평가했다. 이번 사태는 정치적·외교적 파장을 넘어 금융시장에도 불안 요인이 되고 있다. IMF의 81억 달러 유연신용공여(FCL)가 조건부로 전환되면서 콜롬비아는 필요할 때 자금을 확보하기가 더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이는 신용도 의구심을 키우며, 투자자 신뢰 위축 → 차입 비용 상승 → 환율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다. 페루 경제지 헤스티온(Gestion) 은 투자와 조달 조건 악화를 경고했고, 콜롬비아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은 11%대를 유지하고 있다(TradingEconomics). 블룸버그는 “기업 채권 발행이 70% 이상 급감했다”며 재정 불확실성이 이미 현실화됐다고 지적했다(Bloomberg). 역사적으로 콜롬비아는 대표적 친미 국가였다. 미국은 2000~2018년 플랜 콜롬비아(Plan Colombia) 를 통해 100억 달러 이상을 지원했다. 이후 규모는 줄었지만 군사·치안 협력과 연례 원조(연 4억 달러 안팎)는 유지되고 있다. 콜롬비아 대외정책의 근간이 미국과의 협력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번 사태는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양국 관계를 뒤흔드는 상징적 사건으로 기록될 수 있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은 여권이 “제국에 맞서 소신을 드러낸 대통령”을, 야권이 “국익을 해친 무모한 발언”을 내세우며 공방을 벌일 가능성이 크다. 그 과정에서 국론은 분열되고 금융시장의 불안도 커질 수 있다. 국제사회 일부는 이번 사태를 반미 행보나 친중 전환의 신호로 해석할 수 있어, 외교적 고립과 경제적 비용이 동시에 확대될 위험이 있다. 이번 사건은 단순한 외교 해프닝이 아니다. 표현의 자유라는 깃발이, 아이러니하게도 콜롬비아 경제와 외교의 발목을 잡는 족쇄로 바뀔 수 있음을 보여준다. 순간의 함성과 박수는 곧 사라지지만, 신뢰를 잃은 국익의 비용은 오래 남는다. 지금 콜롬비아에 필요한 것은 순간의 함성이 아니라, 국익을 지켜낼 절제된 언어와 신중한 외교다.
    페트로 콜롬비아 대통령 , 용기인가 만용인가
    by 박선태
    2025.09.29 09:22:26
  • 몇년 전 한 지상파 방송이 당차게 기획한 드라마가 조선시대 우리 음식을 잘못 이해하고 중국음식이 마치 우리 음식의 뿌리인 것처럼 표현했다가 호되게 비판을 받고 결국 그 드라마도 방영되지 못하는 사고가 있었다. 최근 지상파와 넷플릭스에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도 자세히 보면 우리 음식을 왜곡하고 있는 부분이 많은데 버젓이 방영되고 있다. 드라마 작가들의 우리 음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잘못 알려진 부분을 과학적으로 검증하여 고쳐지지 않고 쉽게 음식에 기대어 흥미를 끌어가려는 풍토가 문제이다. 우리 음식의 뿌리나 본질에 있어서 비과학적인 사대주의적 발상을 못 버리고 거기에 기대어 너무나 쉽게 극을 전개하려는 사람들이 우리 음식에 대한 이해도를 떨어뜨리고 있다. 대표적인 사대주의적 발상은 우리 음식은 중국이나 일본에서 들여와서 발전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우리 조상들이 만주지방과 한반도의 어려운 지리적, 농경학적 환경하에서 수백~수천 년 동안 갖은 노력과 좌절 속에 헤쳐나오고 수많은 시행착오 속에 지혜가 쌓여 탄생되고 발전해 온 음식이다. 이러한 지리적, 농경생물학적, 민족적 특징을 먼저 이해하지 못하고 쉽게 중국 문헌에 기대어 우리 음식을 이해하여 왔기 때문에 많은 오류가 있는 것이다. 이런 한자 등 사대주의적 우월성이 우리 조상들의 전통적, 문화적 고유성을 파괴하고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고추가 지구상에서 퍼진 것은 인간보다 수천 년, 수만 년 먼저 나타난 새(鳥流)에 수백만 년 전에 이미 이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10~20만 년밖에 살지 않은 인간(Homo sapiens)에 의해서만 수백년 전에 퍼지고 진화되었다고 단정하여 결국 초기에는 우리 김치나 고추장이 없었고 이들의 역사를 100여년으로 축소 왜곡한 것이다. 또한 한자가 고작 수천 년도 안된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말이 다른 우리 민족이 수만 년 전부터 따로 먹어오고 발전시킨 우리 음식을 대변할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농경학적으로 보면 우리 나라와 중국의 지리적 특성이 무척 다르다. 영토의 크기, 평야의 크기 등 거의 모든 측면에서 우리나라는 중국에 열악하다. 물론 지금의 중국영토가 고대 중국의 영토가 다는 아니지만 춘추전국시대, 삼국시대를 걸쳐 당송 시대의 영토 크기만 하더라도 우리 민족의 뿌리가 되는 만주를 걸친 한반도 영토를 다 합치더라도 비교가 안되고 농경자원도 풍부하다. 설탕만 우리나라에 있었어도 우리 조상들이 그렇게 음식을 맛있게 하는 데 갖은 고생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설탕은 중국이나 우리나라에 없었다. 만일 설탕이 우리나라에 풍부하게 있었다면 오늘날과 같이 우리 음식이 그렇게 다양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농경학적 차이는 기름(脂肪) 자원에 있다. 중국은 돼지기름, 생선기름과 같은 동물성 기름이 풍부했다. 그들은 돼지를 잡을 때도 기름을 먼저 쩠다. 기름을 이용하여 고열에서 음식을 만들고 튀기면 우선 음식이 맛이 있어지고 나중에도 먹을 수 있는 저장성도 확보하였다. 기름은 쉽게 300-400℃까지 쉽게 올릴 수 있다. 이 온도에서 요리하면 많은 향이나 구수한 냄새가 나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맛을 낼 필요가 없다. 그래서 중국은 재료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요리 방법의 다양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중국처럼 기름이 풍부하지 않았다. 그렇다보니 맛을 내기 위하여 다양한 양념으로 맛을 내 식사를 하였다.. 참기름이나 들기름이 있어도 이들을 이용하여 음식을 튀길 생각은 해보지도 못하고 오로지 향이나 맛을 낼 때 조금씩 얹혀 먹는 정도였다. 우리 조상들은 기름 없이 물을 이용하여 아무리 불을 때도 100℃ 이상으로 온도를 올릴 수 없었다. 물은 100℃에서 끓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100℃이하에서 손으로 맛을 낼 수 있었다. 가장 쉽게 중국요리와 우리 요리를 아는 방법은 100℃ 이상에서 맛을 내면 중국음식, 100℃ 이하에서 맛을 내면 우리음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 다만 지금 중국의 동북3성에 기반을 둔 청나라 요리를 이 기준으로 들이대는 데는 고려해야 할 사항이 많다. 그래서 우리 요리는 ‘손맛’이고 중국요리는 ‘불맛’이다.
    양념의 한식, 불맛의 중식
    by 권대영
    2025.09.25 17:3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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