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74
  • 아내와 함께 영화 ‘국보’를 봤다. 모처럼 나를 영화관으로 이끈 건 가부키(歌舞伎)라는 독특한 소재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막이 오르자, 수년 전 다녀온 시코쿠가 떠올랐다. 벚꽃 흩날리던 그해 봄날 나는 시코쿠 고토히라의 가나마루 극장에서 가부키 공연을 관람했다. 일정에 없던 방문이었고, 내 인생 첫 가부키였다. 애초에는 고토히라 궁만 들릴 생각이었기에, 현지에 가서야 공연 일정을 확인했다. 15만 원짜리 1등 좌석만 남았다는 말에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잘한 선택이었다. 1835년에 건축돼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가부키 전용 극장에서 전통 가부키를 경험했으니 행운이었다. 그날 공연은 낯설지만 강렬했다. 퀴퀴한 다다미 냄새와 세월이 눌어붙은 나무 기둥으로 구성된 극장은 200년 시간을 고스란히 견디고 있었다. ‘온나가타(여장 남자 배우)’의 미세한 몸짓과 떨림에 객석은 숨을 죽였다. 그 적막과 긴장을 나는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 온나가타는 여성을 연기하지만 결코 여성이 될 수 없다. 그 모순은 긴장을 만들고, 긴장은 또다시 아름다움으로 이어진다. 그날 가부키 관람은 일본 전통예술과 장인정신을 깊이 체감한 시간이었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가부키는 나에게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세계였다. 영화 ‘국보’를 보면서 비로소 실마리를 찾았다. 야쿠자 집안에서 태어나 가부키 가문으로 들어간 키쿠오, 명문 가부키 집안의 적자인 슌스케. 두 사람은 피와 재능 사이에서 흔들리고 질투하며 또 서로에게 기대며 성장한다. 무대 위에서는 한 몸처럼 호흡한다. 그러나 막이 내리면 각자 출발선으로 돌아가 갈등한다. 영화는 이들의 몸짓과 표정, 작은 진동까지 정교하게 잡아냈다. 예술영화임에도 상영 3시간 내내 어느 한 군데 걸림 없다. 감독은 군더더기 없는 언어와 탁월한 영상 미학으로 가부키를 재해석했다. 덕분에 관객들은 ‘가부키가 이렇게 흥미로운 장르였나’ 하며 감동한다. 영화는 재능은 부족해도 안정적인 금수저와,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한계를 절감하는 흑수저를 대비시킨다. 이는 재일교포 3세인 이상일 감독이 스스로 ‘경계인’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울림을 준다. 그는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어로 영화를 만들지만, 이름 앞에는 늘 ‘재일’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일본 사회에서 재일교포는 경계선에 서 있다. 어쩌면 감독은 아직도 혈통과 가문을 중시하는 일본 사회에서 자신처럼 경계인이 겪는 소외를 에둘러 말하는지 모른다. 주인공 키쿠오의 절망이 감독의 고백처럼 다가오는 이유다. 가부키 역사는 약 400년에 달한다. ‘기울다, 기괴하게 꾸미다’를 뜻하는 ‘카부쿠(傾く)’에서 유래한 가부키는 당시 기준으로 ‘튀는 춤’이었다. 초기에는 여성 배우들이 활동했으나 곧 남성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여장 남성 배우의 연기는 야릇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유사 에로티즘으로 연결된다. 가부키가 서민 예술로 자리 잡은 건, 에도 중기 상업·도시 문화가 발달하면서다. 지금도 많은 일본인들은 가부키를 즐긴다. 연기·무용·노래·악기·무대미술·의상·분장·기계장치가 결합한 종합예술이기 때문이다. 명문 가부키 가문에 각별한 예우를 보내는 것도 장인을 대하는 연장선이다. 전통 가문을 향한 팬심은 K-pop 팬덤과도 닮았다. 무엇보다 가부키는 일본인의 밑바닥 정서를 관통한다. 주군이나 연인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이야기, 사무라이 미의식, 전통 의상, 운율 있는 대사는 일본인에게 친숙하다. 최근에는 현대적 재해석과 콘텐츠화를 통해 지평을 넓히고 있다. 젊은 배우들은 영화·드라마·예능·광고에 등장하며 현대적 가부키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서울 ‘윤별발레컴퍼니’가 전통 갓을 발레와 결합해 새로운 표현을 만든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해외에서 가부키는 ‘세계에 내놓을 일본 대표 예술’로 평가받고 있다. 가부키와 비슷한 우리 창극도 부활 조짐을 보이고 있으니 다행이다. 우리 창극이 그랬듯 가부키 역시 극장과 배우, 관객 모두 감소 추세에 있다. 대신 색다른 일본문화를 찾는 외국 관광객들이 그 자리를 메운다. 도쿄·교토·후쿠오카·오사카·시코쿠 가부키 극장에는 외국인 관객이 꾸준하다. 이들은 가부키를 보면서 일본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인증 샷을 남긴다. 시코쿠 가나마루처럼 극장 투어만 하는 관광객도 상당하다. ‘국보’가 일본 실사 영화 1위에 오른 데는 이런 분위기가 밑바탕 됐고, 열기는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영화 성공은 가부키가 한층 대중적이고 생명력 있는 장르로 확장될 가능성을 열어놨다. 영화관을 나서며 시코쿠 가나마루 극장과 우치코 극장을 떠올렸다. 당시에는 그 공간들이 훗날 일본 실사영화 역대 흥행 1위 기록, 그리고 재일교포 감독의 집요한 시선으로 이어지리라 상상하지 못했다. 일본에서 가부키는 먼지 쌓인 박제가 아니다. 오랜 세월을 딛고 감성을 흔들며 일본은 무엇인지 묻고 있다. 일본을 이해한다는 건 결국 그들이 집요하게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형식을 이해하는 일지도 모른다. 봄이 오면 다시 시코쿠 가부키 극장을 찾고 싶다.
    영화 '국보'를 계기로 살핀 가부키 문화
    by 임병식
    2025.12.02 13:31:05
  • 1718년 7월 영국 왕 조지 1세는 신대륙 항로를 위협하는 카리브해의 해적을 진압하기 위해 사면령을 내렸다. 당시 바하마 나소(Nassau)에서 ‘해적공화국’(Republic of Pirates)을 무대로 해적들이 극성을 부리던 시기다. 이 때 해적공화국의 우두머리 벤자민 호르니골드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해적이 사면을 받고 해적 생활을 청산했다. ‘검은 수염’ 에드워드 티치도 사면을 받아들였다가 다시 해적으로 복귀했다. 처음부터 사면을 거부한 거의 유일한 해적이 바로 찰스 베인이다. 조지 1세의 명령을 받고 새로운 총독이 부임하는 날, 찰스 베인은 배 한 척에 불을 질러 나소 항구로 들어오는 총독의 함대로 밀어 보냈다. 사면을 거부하는 노골적인 신호다. 한 술 더 떠 바로 주변에서 프랑스 함선을 약탈한 뒤 불을 질러 가라앉혔다. 한 마디로 ‘엿 먹어라’는 도발이다. 베인의 해적질은 늘 불과 연기로 가득했다. 사방팔방에 불을 지르고 화약을 터뜨려 겁을 주면서, 분노와 광기로 가리지 않고 노략질하는 전형적인 해적이다. 총독과 해적사냥군들이 포위망을 좁혀 오자, 베인은 상선을 하나 장악한 뒤, 해군이 다가오자 부하들을 약탈당한 불쌍한 선원인 것처럼 행세하게 했다. ‘선원’들이 작전대로 거짓 정보를 흘리자 해군이 엉뚱한 곳으로 뱃머리를 돌리면서, 베인은 기민하고 대범하게 항구를 빠져나갔다. 단순한 무력뿐 아니라 정보전과 기만술에 두루 능통했으며, 부하를 따르게 만드는 리더십도 탁월했다. 영리한 만큼 무리한 전투를 피하려 한 게 문제였을까? 1718년 11월 카리브 해의 윈드워드 해협에서 프랑스 군함과 마주쳤을 때, ‘캘리코 잭’ 존 래컴이 부추긴 부하들의 반란으로 겁쟁이로 몰려 배에서 내렸다. 작은 해적질을 계속 하던 그는 이듬해 폭풍으로 무인도에 고립됐다가 발견되어 자메이카로 압송됐다. 1720년 베인은 교수형을 선고받고, 포트로열 항구에 매달렸다. 그는 눈 가리개를 거부하고 당당하게 최후를 맞았다. 향년 40세. 찰스 베인의 강경한 해적질은 ‘오라클’(Oracle)의 래리 엘리슨의 저돌적인 경영과 닮았다. ‘오라클’이 장악한 기업용 데이터베이스 시장에, 1998년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NT에서 작동하는 SQL 서버 7.0을 앞세우고 쳐들어왔다. 엘리슨은 ‘마이크로소프트’를 격렬하게 비난하면서, 장난감 같은 SQL 서버에서 제대로 작동하는 프로그램을 보여주면 1000만 달러(약 140억 원)를 주겠다고 도발했다. 실리콘밸리의 대표적인 독설가다. 반항적인 기질도 비슷하다. 영국 해군의 해적 소탕작전을 조롱하듯 약탈을 서슴지 않던 베인처럼, 엘리슨도 경쟁사가 점점 커지자 적대적 인수합병(M&A)으로 시장을 장악해 버렸다. 2000년대 초 ‘피플소프트’(PeopleSoft)가 M&A로 몸집을 키우자, 엘리슨은 아예 ‘피플소프트’를 삼키기로 작정했다. ‘피플소프트’를 뒤흔들며 집요하게 법정 투쟁을 벌인 엘리슨은 2005년 103억 달러에 인수하는데 성공했다. 세계 기업 M&A 역사에서 가장 극적이고 호전적인 사례로 꼽힌다. 정보전과 기만술도 악명이 높다. 엘리슨은 턱없이 낮은 가격으로 인수를 제안한 뒤, 다른 정보를 흘려 이사진을 이간질하면서 집요하게 ‘피플소프트’를 괴롭혔다. 미국 법무부를 움직여 ‘마이크로소프트’에 반독점 소송을 걸면서, 엘리슨은 사설 탐정을 써서 마이크로소프트 거래처의 휴지통까지 뒤지면서 법정에서 시비를 걸었다. 경쟁사 휴지통까지 헤집는 악랄한 경영자로 낙인 찍혔지만, 그는 진실을 밝히기 위한 정당한 행동이라고 끝까지 강변했다. ‘실리콘밸리의 사무라이’라는 별명을 좋아하는 엘리슨은 해적이 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췄다. “나는 성공에 필요한 모든 단점을 다 가지고 있다”(I have had all the disadvantages required for success)는 것이다. 사생아부터 가난까지 겪은 역경들이다. 그는 스스로 해적이라고 밝혔다. “나는 해적이다. 지금까지 항상 그래 왔고,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이다”(I‘m a pirate. I always have been. I always will be). 누구를 롤모델로 삼았을까?
    집요하게 달라붙어라 : 찰스 베인 & 래리 엘리슨
    by 허두영
    2025.11.26 18:39:46
  • 1701년 5월 영국 템즈강의 한 항구에서 가엾은 해적 선장이 교수형을 당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구석구석 결박당하고 목은 올가미에 걸린 채 축 늘어져 쇠창살에 갇힌 상태로 죽었다. 향년 47세. 당국은 해적질에 대한 경고로 썩어 문드러져 해골이 드러날 때까지 시신을 거두지 못하게 했다. 억울하게 해적으로 몰려 사형당했다가, 가장 유명한 해적으로 부활한 ‘캡틴 키드’(Captain Kidd)라는 애칭을 가진 윌리엄 키드다. ‘캡틴 키드’는 원래 영국 정부의 허가를 받고 해적질을 하는 사략선(私掠船)을 지휘했다. 무굴제국 황제 에우랑제브의 무역선 ‘콰다르 머천트’(Quedagh Merchant)는 왜 하필 그 때 프랑스 국기를 달았을까? ‘캡틴 키드’는 1698년 ‘콰다르 머천트’를 붙잡아 엄청난 보물을 털었다. 분노한 무굴제국의 협박에 영국은 ‘캡틴 키드’를 해적으로 몰고 대대적으로 수배령을 내렸다. 이 때 건 현상금만 해도 2000 파운드(100억원)를 넘었다고 한다. 정치의 세계는 그렇게 비굴한가? 졸지에 해적으로 몰린 ‘캡틴 키드’는 자신을 후원하던 뉴욕 식민지 총독 벨로몬트 경에게 편지를 보냈다. 살려주면 숨겨놓은 100만 파운드(5조원)의 보물을 넘겨주겠다는 것이다. 이 때 ‘캡틴 키드’가 준 보물지도로 뉴욕의 가디너 섬을 뒤진 결과 1만 파운드(500억원)의 보물이 발견됐다. 해적이 숨긴 보물을 보물지도로 찾아낸 매우 드문 사례다. 총독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자수한 ‘캡틴 키드’를 체포해서 보물과 함께 영국으로 보냈다. 보물은 재판에서 해적질 증거로 채택됐다. 편지는 해적 역사상 가장 낭만적인 전설을 만들어냈다. 보물지도만 있으면 보물섬에 가서 해적의 보물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캡틴 키드’가 숨긴 나머지 보물이 어느 외딴 섬에 묻혀 있을 것이라는 즐거운 상상이다.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 ‘황금풍뎅이’와 로버트 스티븐슨의 동화 ‘보물섬’은 ‘캡틴 키드’의 편지를 근거로 대중의 상상을 자극했다. 우연히 골동품 상자나 서류에서 ‘W.K.’(William Kidd)라는 서명이나, 시기를 뜻하는 연도 ‘1669’나, 장소를 가리키는 ‘China Sea’와 비슷한 흔적을 보면, ‘캡틴 키드’가 숨긴 보물을 찾는 단서가 아닐지 의심해 볼 일이다. 가엾은 ‘캡틴 키드’가 겪은 비극은 ‘메가업로드’(Megaupload) 창업자 킴 닷컴(Kim Dotcom)의 사례와 비슷해 보인다. 킴 닷컴은 디지털 밀레니엄 저작권법(DMCA)에서 사용자가 올린 콘텐츠의 책임은 서비스 제공자가 아닌 사용자에게 있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미국 법무부는 ‘메가업로드’가 저작권 침해를 방조한다며 조직적인 범죄집단으로 규정했다. 새로운 기술이 법규와 부딪힐 때, 법적인 위험을 감안해야 한다. 법률과 자본을 틀어쥔 정부 앞에 개인은 얼마나 무력한가? 킴 닷컴은 컴퓨터 보안 전문가로 협력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미국 정부가 자신에게 우호적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영화계와 음반계가 ‘메가업로드’를 디지털 해적으로 몰아 부치자, 미국 정부가 태도를 바꿔 ‘메가업로드’를 공공의 적으로 규정해 버렸다. 미국이 압박을 높이자 뉴질랜드 법원도 미국 송환에 동의한 가운데, 킴 닷컴은 아직도 건강을 핑계로 뉴질랜드에서 버티고 있다. 그렇다. 정부나 권력자는 언제든지 약속을 깰 수 있다! 영국 정부가 ‘해적’ 프레임을 씌우고 체포하려 하자, ‘캡틴 키드’는 쉽사리 보물지도를 넘겨주는 바람에 협상에서 주도권을 뺏겼다. 킴 닷컴도 마찬가지다. 미국 정부가 ‘범죄자’ 프레임을 씌우고 자산을 압류하거나 동결하면서 방어 수단이 사라진 것이다. 킴 닷컴은 스스로 ‘인터넷 자유의 수호자’(Guardian of Internet Freedom)라고 언론에 호소했지만, 지루한 법정 다툼이 10년 넘게 이어지면서 자금과 건강을 모두 소진해 버렸다. 해적-보물지도-보물섬으로 이어지는 해적 설화는 거의 대부분 ‘캡틴 키드’의 편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동화 ‘보물선’의 롱 존 실버나 ‘피터팬’의 후크 선장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해적의 대명사는 ‘검은 수염’ 에드워드 티치로 꼽힌다. 왜 ‘캡틴 키드’는 극적인 배경만 제공하고, 주인공이 되지 못한 걸까? 해적으로 낙인 찍히기 싫었던 ‘해적’이기 때문이다. 협상에 실패하면, 차라리 도끼를 들고 진짜 해적이 되는 게 낫지 않을까?
    정부의 약속을 믿지 마라 : 윌리엄 키드 & 킴 닷컴
    by 허두영
    2025.11.20 15:31:42
  • 1718년 11월 카리브 해의 윈드워드 해협에서 프랑스 군함과 마주친 해적선 ‘레인저’(Ranger)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공격과 후퇴를 놓고 의견이 갈린 것이다. 투표에 부친 결과 압도적인 차이(76 대 15)로 공격해야 했지만, 선장 찰스 베인은 체급에서 차이가 나는 군함과 굳이 싸울 필요가 없다며 계속 후퇴를 고집했다. 물러난 해적들은 선장을 겁쟁이라 놀리며 찰스 베인을 쫓아내고, 공격하자고 부추긴 존 래컴을 선장으로 추대했다. 래컴은 정말 프랑스 군함을 공격할 생각이었을까? 큰 바다에서 대형 무역선을 상대로 한 탕을 노리는 과감한 해적과 달리, 그는 기동력 좋은 작은 해적선으로 가까운 바다에서 혼자 다니는 작은 어선이나 무역선만 노리는 좀도둑 같은 해적질로 승률을 높였다. 자랑할만한 무용담이 없다. 탁월한 말발로 동료 해적을 선동해서 반란을 일으켜 선장 자리를 꿰차고, 유명한 해적인 것처럼 이름을 남겼을 뿐이다. 겉멋만 번지르르한 해적일 터다. 부를 과시하기 위해 벨벳을 즐겨 두른 여느 해적 선장과 달리, 래컴은 밝고 화려한 옥양목(Calico) 바지를 즐겨 입었다. 그래서 별명이 ‘캘리코 잭’(Calico Jack)이다. 패션 감각에 디자인 감각까지 뛰어났을까? 해골 아래 칼 두 자루를 엇갈리게 배치한 해적기 ‘졸리로저’(Jolly Roger)도 그의 작품이다. 더 놀라운 것은 여자 해적을 둘씩이나 거느리고 거드름을 피운 것이다. 앤 보니와 메리 리드를 해적선에 태우고 해적질 하는 그는 해적 세계의 최고 멋쟁이였다. 흥청망청한 그의 삶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1720년 노략질을 마치고 자메이카의 한 항구에 정박했을 때, 영국의 해적사냥군들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술과 향락에 취한 ‘캘리코 잭’과 해적들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붙잡혔다. 여자 해적 둘, 앤 보니와 메리 리드만이 끝까지 칼을 들고 저항했을 뿐이다. ‘캘리코 잭’이 교수대로 끌려갈 때 앤 보니가 외쳤다. “사내답게 싸웠다면, 개처럼 목 매달리진 않았을 거야”(If you had fought like a Man, you need not have been hang‘d like a Dog). 향년 37세. ‘캘리코 잭’의 낭만적인 해적질은 ‘위워크’(WeWork)의 애덤 노이먼의 과시적인 경영과 닮았다. 노이먼도 ‘캘리코 잭’처럼 청산유수(靑山流水) 달변이었다. 그는 ‘위’(We)라는 이상적인 단어를 앞세워, 공유오피스를 ‘세상을 바꾸는 커뮤니티’로 포장했다. 달콤한 비전과 열정적인 발표에 반한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같은 거물 투자자에게서 수십 억달러를 끌어 모았다. 화려한 언변과 강렬한 카리스마로 듣는 사람을 혹하게 만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성과가 없었다. ‘위워크’는 사업모델이 근본적으로 부실했다. 부동산 임대사업을 첨단 기술사업인 것처럼 포장했을 뿐이다. 엄청난 투자금을 끌어왔지만, 지속가능한 수익을 창출하지 못했다. 개인 전용기를 장만할 정도로 사치스러운 데다 부인을 끌어들여 방만하게 경영하고, 회사 자산을 개인적으로 유용하면서 2019년 결국 ‘위워크’에서 쫓겨났다. ‘캘리코 잭’의 몰락과 묘하게 겹치는 장면이다. 남은 것은 이미지다. ‘캘리코 잭’의 ‘졸리로저’는 검은 바탕 한 가운데 허연 해골과 해적 칼 두 자루를 X자로 걸어 놓았다. 공포를 단순하고 직관적으로 드러내는 가장 대중적인 해적기로 꼽힌다. 노이먼도 마찬가지다. 아무도 생각지도 못했던, ‘위’(We)를 기업 브랜드로 내세워 단순한 사무공간을 공동체의 상징으로 느끼게 만들었다. ‘위워크’(WeWork), ‘위리브’(WeLive), ‘위그로’(WeGrow) 같은 확장적인 브랜드로 공유경제의 깃발을 먼저 꽂은 것이다. ‘캘리코 잭’은 해적의 역사에 가장 상징적인 해적기를 펄럭였고, 애덤 노이먼은 공유경제의 역사에 가장 강력한 브랜드를 찍었다. 그들은 왜 자신이 제시한 비전대로 살지 않았을까? 못했을까?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가 중요했을 뿐, 실천하려는 진정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과시와 허세가 본질이었을 뿐, 자신이 만든 신화의 무게를 스스로 감당할 역량이 부족했던 것이다.
    신화의 무게를 감당하라 : 잭 래컴 & 애덤 노이먼
    by 허두영
    2025.11.07 16:45:37
  • 올해 10월 26일은 경주 APEC 회의에 가려 조용히 지나갔다. 그러나 한국인에게 10·26은 늘 각별한 기억을 불러낸다. 1909년 이날, 대한의군 안중근 중장은 일본 초대 총리를 지낸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역에서 저격했다. 70년 뒤 같은 날, 또 다른 육군 중장 출신 김재규는 자신을 중앙정보부장으로 발탁한 박정희 대통령을 사살했다. 정확히 70년을 사이에 둔 두 사건은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1979년 12월 12일자 아사히신문에는 이러한 기사가 실렸다. “안중근이 처형 직전 일본 헌병 치바 토시치에게 써준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 유묵이 한국으로 반환된다.” 일본에 있던 안 의사 유묵이 7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이었다. 지금 이 유묵은 서울 남산의 안중근기념관에 소장돼 있다. 그로부터 다시 19년 뒤인 1999년에는 일본 미야기현 즈이간지(瑞巌寺) 앞마당에 있던 ‘와룡매’가 이식돼 남산 안중근기념관으로 옮겨왔다. 유묵과 와룡매가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과정은 한·일 양국의 비극과 화해가 얽힌 역사이기도 하다. 안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오전 9시 55분, 사형집행 5분 전 치바에게 ‘위국헌신 군인본분’이라고 쓴 글을 건넸다. 군인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당연한 의무라는 뜻이었다. 처음 치바는 여느 일본군처럼 안 의사를 적대했지만, 5개월 동안 그의 인품과 동양평화사상에 감화돼 극진히 보살폈다. 안 의사는 “너도 나도 군인으로서 한 일일 뿐이니 부끄러워 말라”며 마지막 선물을 남긴 것이다. 전쟁에서 패한 뒤 고향 미야기현으로 돌아간 치바는 유묵과 영정을 집안에 모시고 평생 추도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아내가 그 일을 이어받았다. 치바 유족들은 안 의사 탄생 100주년인 1979년 유묵 반환을 제안했고, 1980년 8월 유묵은 한국에 도착했다. 약지가 잘린 손바닥 낙인이 선명한 유묵이 광복 이후 한국 땅을 밟기까지는 이렇게 길고 낯선 여정이 있었다. 한국 독립군과 일본 헌병의 이야기는 미야기현 다이린지(大林寺)의 사이토 주지에게 전해졌다. 그는 1981년 사찰 내에 ‘위국헌신 군인본분’ 비석을 세우고 지역 주민들과 추도 법회를 열기 시작했다. 이후 올해까지 44년 동안 단 한 해도 거르지 않았다. 일본 땅에서, 자신들의 ‘국부’를 죽인 조선 독립운동가를 위해 법회를 이어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아사히신문 기자 출신의 사이토 주지는 『내 마음의 안중근』에서 우익들의 협박과 비난을 감수해야 했던 과정을 담담히 적었다. 지금도 그는 일본 전역을 순회하며 제국주의 일본을 비판하고 동북아 평화를 역설한다. 책 속에는 안중근을 향한 한 일본인의 깊은 존경이 배어 있다. 그럼 와룡매는 왜 한국으로 돌아왔을까. 이는 다이린지 사이토 주지와 즈이간지 히라노 주지의 교분에서 비롯됐다. 즈이간지는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에 참전했던 센다이 번주 다테 마사무네가 재건한 사찰이다. 절 마당에 있는 와룡매는 다테가 조선을 떠나며 가져간 전리품으로, 본래 창덕궁 선정전 앞에 있던 나무였다. 와룡매는 400년 동안 일본 땅에서 뿌리내렸다. 안 의사의 행적에 감화된 히라노 주지가 반환을 결심하면서 와룡매는 후계목 형태로 1999년 서울로 왔다. 언론은 “400년 만의 귀환”이라며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 유랑의 끝에는 역시 안중근이 있었다. 김훈의 소설 『하얼빈』은 안 의사가 왜 이토를 죽였는지를 담담하게 복기한다. 안 의사는 검찰 조사와 재판에서 “이토는 대한의 주권을 찬탈한 원흉이자 동양평화를 해친 자”라며 “대한의군 사령관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개인적 이유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전쟁 중 적국의 수괴를 처단했다는 당당한 선언이었다.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오늘날 유럽연합(EU)을 연상케 하는 수준 높은 구상이었다. 한·중·일 3국이 뤼순항을 공동관리하고, 청년들로 구성된 공동 군대를 만들며, 중앙은행과 공동 화폐까지 창설하자는 내용이었다. 유묵과 와룡매의 귀환, 그리고 일본에서 이어지는 추도 법회에는 이렇게 깊고 복잡한 사연이 스며 있다. 비록 일부일지언정 일본인들의 참회와 연대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를 감상적인 화해의 미담으로만 소비할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가들의 결연한 희생을 기억하며 과잉 민족주의의 자기 위안을 넘어설 지혜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몇 해 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단지동맹비 앞에 섰을 때, 손가락을 잘라 맹세했던 12명의 결의가 떠올랐다.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유묵의 귀환도, 와룡매의 회귀도, 일본 땅의 추도 법회도 가능했다. 또 한 번 조용히 10·26이 지나갔다.
    10·26의 또 다른 이야기, 안중근 의사
    by 임병식
    2025.11.07 16:45:28
  • 올해 문화계의 최대 화두는 단연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영화 ‘K-Pop Demon Hunters’, 이른바 ‘케데헌’일 것이다. ‘케데헌’의 성공은 세계 속에 우리 농산물의 가치를 재인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회이다. ‘케데헌’은 K팝 아이돌이 주인공으로 무대 위에서는 스타로, 무대 밖에서는 악마를 사냥하는 영웅으로 설정하여 한국적 정서와 감성을 세계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애니메이션 판타지 영화이다. 이 작품의 성공은 단순한 문화 콘텐츠의 성공이 아닌 우리 문화의 확장 가능성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으로, K-컬처의 영향력을 증명하였다. 하지만 성공의 이면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작품의 기획, 배급, 제작이 미국과 일본 및 다국적 스튜디오로 우리나라가 아닌 외부 자본과 인프라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는 우리나라 콘텐츠 산업의 구조적 한계로 산업 구조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 문화의 자립성과 주체성을 묻는 근본적 질문을 남긴다. 문화의 원천은 한국이지만, 부가가치는 해외로 흘러가는 것이다. 이는 문화산업의 한계만은 아니다. 우리는 1980년대 ‘신토불이(身土不二)’를 외쳤다. ‘우리 땅에서 자란 먹거리가 우리의 몸에 가장 잘 맞는다’는 단순한 진리는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이자 농업의 자존심으로 당시 생명운동의 철학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 시장은 ‘우리 것이 좋다’는 자부심만으로 설득되지 않는다. 신토불이는 보존의 언어가 아니라 확장의 언어로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 우리 땅의 자원을 지키는 것을 넘어, 세계와 공유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천지 만물을 따르는 자연법칙의 존중과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실천을 강조한 주자(朱子)와 양명(陽明)의 논설이 천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회자되는 이유는 자연 안에서 가장 이상적인 환경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탐구는 멈추지 않고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우리 농산물에 대한 자부심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맛을 세계인의 입맛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질문해야 하는 이유이다. 문화가 경계를 허물듯, 농업도 더 이상 지역의 울타리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케데헌’이 한국의 정서를 담아 세계인의 감성을 자극했듯이, 우리 농업도 지역 정체성과 세계 감각이 결합된 새로운 이야기를 써야 한다. 지난달 전남 완도군 완도읍 죽청리 농공단지를 방문했다. 끝없이 펼쳐진 청정 해역과 갯내음, 그곳에서 묵묵히 ‘K-해산물’의 세계화 확장을 위해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정대한 (유)대한물산 대표를 만났다. 그는 부모님과 그가 태어나고 자란 완도 바다의 자연 해산물인 김, 다시마, 파래 등에 원시 바다의 청정함 속에서 채취된 고순도 크리스탈 암염을 결합하여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을 프리미엄 식품을 개발하고 있었다. 또한 서울과 완도를 오가며 천연 암염의 식품학적 특성과 관리체계 구축에 몰두 중인 황원영 클레오파트라솔트 팀장과 김민후 팀장을 만났다. 이들은 청년 감성으로 글로벌 시장 도전과 품질 향상 시스템 정립에 몰두 중이었다. 지역 정체성과 글로벌 감각이 자연스럽게 결합된 그곳은 ‘K-푸드’의 미래와 K-컬처의 확장성을 보여주는 상징적 현장이었다. 이들의 시도는 단순한 상품 개발이 아닌, 우리 땅의 자원이 세계의 맛과 감성으로 재탄생하는 창조의 과정으로 그야말로 농촌유토피아가 추구하는 ‘로컬에서 글로벌로(Local to Global)’의 실천이며, 우리 농촌 문화 창조의 출발점이었다. 지금의 농촌은 단순한 먹거리 생산의 공간을 넘어, 문화와 산업, 농업의 경계를 허무는 새로운 가치 창조의 플랫폼으로 변화해야 한다. 지속가능성과 지역 정체성, 스토리텔링이 결합된 문화산업의 핵심 축으로 시선을 새로이 해야 한다. 이를 위한 민관 협력의 장기 투자, 인프라 구축, 세계관 설계 전문가 양성, 글로벌 유통 파트너십 등 콘텐츠 생태계 전반을 지원하는 국가적 전략이 시급하다. 농촌의 자원을 재해석하고, 글로벌 시장의 언어로 재현하는 노력, 그 변화의 시작이 일어나야 한다. 농촌의 변화가 멈추면, 우리의 미래도 멈추는 것이다. 농촌은 생존의 공간을 넘어, ‘가치를 창조하는 문화의 플랫폼’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케데헌’은 단순한 애니메이션이 아니다. 그것은 K-컬처의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며, 동시에 우리 농촌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신토불이의 철학은 ‘우리 땅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땅에서 출발해 세계로 나아가는 것’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K-신토불이, 즉, 세계 속의 우리 농산물과 세계를 품은 우리 농촌의 길이다. 이것이 농촌이 지속하는 길이며, 농촌유토피아의 새로운 정의가 될 것이다.
    케데헌과 신토불이
    by 조금평
    2025.11.07 16:41:19
  • 올해는 2021년 혁신금융서비스(금융규제 샌드박스) 지정으로 시장에 첫선을 보인 조각투자상품이 법 개정을 통해 제도권으로 진입한 해로 기억될 것이다. 조각투자는 부동산·음원저작권과 같은 다양한 기초자산을 유동화하여 다수의 일반투자자에게 나누어 판매하는 것으로, 유동화 방법으로 증권의 공모를 활용하는 상품을 말한다. 현재까지 시장에 나온 조각투자상품은 (i) 발행인이 투자자와 공동사업 투자계약을 체결하고 투자계약증권을 발행하여 조달한 자금으로 기초자산의 소유권을 취득하면서 해당 기초자산의 소유권에 대한 공유지분을 투자자에게 이전하는 구조(투자계약증권 발행 방식), 또는 (ii) 기초자산을 신탁하고 해당 신탁관계에 근거하여 수익증권을 발행하는 구조(수익증권 발행 방식)를 취해 왔다. 전자의 경우 현행 자본시장법에 따르더라도 증권신고서를 제출해서 수리되면 투자계약증권 발행이 가능하고, 현재까지 한우·미술품 조각투자상품이 출시된 바 있다. 이와 달리 후자의 경우 현행 자본시장법령상 비(非)금전신탁 수익증권 발행 근거가 명확하지 않아서 그동안 샌드박스를 통해 제한적으로 운영되어 왔다(현재까지 부동산, 대출채권, 항공기엔진 조각투자상품이 혁신금융서비스 지정을 받았다). 이와 같은 수익증권 발행 방식의 조각투자상품이 올해 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을 통해 제도화된 것이다. 먼저 올해 6월에 조각투자 “발행”플랫폼(수익증권 발행, 인수 및 주선) 운영을 위한 수익증권 투자중개업 인가가 신설되었다. 참고로 비(非)금전신탁 수익증권 발행이 전면적으로 허용되려면 자본시장법 개정이 필요한데, 아직 자본시장법 개정이 마무리되지 않은 점을 고려하여 현재는 자산유동화법상 요건을 충족하는 자산보유자(금융회사·상장법인 등)가 소유하는 자산을 기초로 하는 신탁수익증권 발행만 허용된다. 이어 9월에는 조각투자 “유통”플랫폼 운영을 위한 수익증권 투자중개업 인가가 신설되었다. 자본시장법상 투자중개업자가 장외에서 증권을 중개하려면 1:1 중개로 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다수의 매도자·매수자를 동시에 중개하는 장외거래소 영업을 하기 위해서는 전용 인가단위가 별도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주의할 점은 혁신금융서비스 지정을 통해 발행업무와 유통업무를 겸영하고 있던 기존 조각투자사업자의 경우 앞으로는 발행플랫폼과 유통플랫폼 중 하나를 선택해서 인가를 신청해야 한다는 점이다(발행-유통 분리 원칙). 아울러 금융당국은 조각투자시장이 아직 초기단계로 거래규모가 크지 않고, 유통플랫폼이 난립할 경우 유동성이 분산되어 환금성이 낮아지는 등 투자자 피해로 연결될 우려가 있다는 점을 고려해서 유통플랫폼 인가는 최대 2개만 허용할 방침임을 밝혔다. 조각투자상품 제도화가 이루어지면서 기존 조각투자사업자 외에도 여러 금융회사들과 관계 기관들이 서로 제휴하거나 컨소시엄을 구성해서 시장을 선점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향후 전자증권법 개정으로 분산원장을 기반으로 하는 토큰증권 발행(STO)까지 허용되면 조각투자상품 시장은 여러 혁신적인 스타트업과 플랫폼회사에게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올 것으로 보인다. 아직 초기 단계이지만, 이번 제도화를 통해 조각투자시장이 더욱 활성화되어 투자자 입장에서 비정형적이고 특색 있는 상품에 대한 대체투자 기회가 늘어나고, 혁신적인 스타트업이나 중소기업에게는 자산을 유동화하고 자금조달 채널을 다양화할 수 있는 기회로 자리매김하기를 기대한다.
    조각투자상품의 제도권 진입
    by 유정한
    2025.11.01 12:15:00
  •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 부부는 왜 같은 성(姓)을 쓸까. 부부가 성이 같은 경우는 일본에서도 드물다. 한데 두 사람은 성이 같은 것은 물론이고, 남편이 아내 성을 따랐다는 점에서 궁금증을 유발한다. 우리나라도 부부가 합의하면 자녀는 엄마 성을 따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흔치 않고, 더구나 남편이 아내 성을 따라 바꾸는 경우는 없다. 어떤 이야기가 숨어있을까. 일본 민법은 “부부는 같은 성(姓)을 써야 한다”고 법으로 강제하고 있다. 남편 성이든, 아내 성이든 선택은 부부 권한이다. 다만 서로 다른 성을 유지한 채 혼인신고는 할 수 없다. 결국 한쪽 성으로 통일해야 한다. 일본은 주요 선진국 중 유일하게 부부동성을 의무화한 나라로써 항상 논쟁거리다. 현실에서는 대략 95% 이상 아내가 남편 성으로 바꾼다. “아내가 남편 성을 따른다”가 일반적이며, “남편이 아내 성을 따른다”는 아주 예외적이다. 이러니 다카이치 총리 부부에게 시선이 쏠리는 것은 당연하다.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와 다카이치 타쿠(高市 拓) 부부는 결혼과 이혼, 재혼을 반복했다. 이들이 처음 결혼한 2004년은 남편(당시 야마모토 타쿠)은 중의원 신분이었지만 아내(다카이치 사나에)는 중의원 4선 도전에 실패해 실의에 빠졌을 때였다. 둘 다 주목받는 정치인이라서 당시에도 화제였다. 이때는 이들도 일반적인 경우를 따랐다. 다카이치 사나에가 남편 성을 따라 야마모토 사나에(山本早苗)로 바꿨다. 다만 정치 활동, 언론 노출, 선거 과정에서는 ‘다카이치 사나에’를 썼다. 정치하면서 그동안 쌓은 ‘다카이치’라는 인지도를 활용하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두 사람은 결혼생활 13년 만인 2017년 7월 이혼했다. 사유는 “정치적 견해 차이와 진로 차이”였다. 둘은 2021년 12월 재혼했다. 이번에는 남편 야마모토 타쿠가 아내의 성을 받아 ‘다카이치 타쿠’로 변경했다. 현행법에 맞춰 누군가는 바꿔야 하는데, 남편이 바꾼 것이다. “왜 부부가 같은 성씨를 갖게 되었나?”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답은 혼인신고 자체가 안 되는 현행법을 이유로 들 수 있다. 그러면 왜 이번에는 남편이 바꿨을까 하는 의문이 뒤따른다. 다카이치 총리 부부는 그 이유를 공식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공개된 정보와 정치적 맥락을 토대로 추론하자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첫째, 정치적 이유다. 재혼한 2021년은 다카이치 사나에가 자민당 총재 경선에 나서면서 전국구 정치인으로 떠오른 시기다. ‘다카이치 사나에’라는 이름 자체가 ‘정치 브랜드’였다. 만약 남편 성(야마모토)으로 바꾸면 유권자들에게 혼선을 주고 선거 관리도 복잡해진다. 일본 여성 정치인 가운데 상당수는 법적으로는 남편 성이지만, 선거·의정 활동에서는 원래 성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이유 때문이다. 둘째, 상징성이다. 남편이 아내의 성을 따른 건 일본 사회 기준에서 보면 ‘역전된 선택’으로, 가치관의 전환을 뜻한다. 일본 언론이 ‘철의 여인’으로 부르는 다카이치 총리의 정치적 위상을 감안하면, 남편이 뒤에서 조용히 지지하는 모습은 ‘성역전(性逆轉)’의 시대적 상징으로 읽힌다. 실제로 남편 다카이치 타쿠는 “나는 스텔스 남편으로, 아내의 정책 추진에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돕겠다”고 밝혔다. 일본 언론은 그를 ‘보이지 않는 조력자’로 묘사했고, 직접 요리를 하고 집안일을 챙긴다는 기사도 이어졌다. 셋째, 현실적 고려다. 남편 타쿠는 뇌경색 후유증으로 정치 일선에서 한발 물러선 반면 아내는 국가를 이끄는 위치에 올랐다. 이제는 남편이 아내를 뒷받침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역할 분담이 된 것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2024~2025년 자민당 총재 선거, 2025년 10월 일본 최초 여성 총리까지 올랐다. 커리어 중심축이 누구에게 있는지 고려하면 남편이 성을 바꾸는 게 합리적 선택이다. 결국 “둘 중 누가됐든 바꿔야 했고, 정치적으로 전국구 인지도를 지닌 다카이치를 위해 남편이 ‘다카이치’를 택했다”가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이다. 그만큼 이번 결정에는 실용적 판단이 깔려 있다. 끝으로 재혼 당시 나이다. 두 사람 모두 60대였다. 60대는 젊은 신혼부부처럼 ‘집안 어르신’이 호적을 좌우하는 나이가 아니다. 당사자들 의지에 따라 정치적 전략을 우선한 것으로 보는 게 자연스럽다. 일본에는 ‘무코요시(婿養子)’로 불리는 제도가 있다. 아들이 없는 집안에 사위가 양자로 들어가 장인 집의 성을 잇는 관습이다. 그러나 이는 주로 상공인 가문에서 가업을 잇기 위한 제도였고, 정치인 부부의 선택과는 성격이 다르다. 다카이치 부부의 경우는 전통보다는 당사자의 의지와 정치적 상황이 우선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사례는 일본 사회에 미묘한 파장을 던졌다. ‘부부동성’ 제도가 여전히 강하게 작동하는 나라에서, 남편이 아내 성을 따랐다는 사실은 젠더 감수성의 변화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여론조사에서도 일본 국민 절반 이상이 ‘부부별성(夫婦別姓)’ 제도 도입에 찬성하고 있다. 그러나 보수 정치권의 반대는 여전하다. 역설적으로 부부동성 제도의 대표 사례가 다카이치 총리 자신이 된 셈이다. 결혼과 이혼, 재혼, 그리고 다시 하나의 성으로 이어진 이들 행보는 단순한 사생활을 넘어 일본 사회의 변화와 전통이 충돌하는 단면을 보여준다. 다카이치 부부의 ‘같은 성’은 일본 사회에 던지는 작은 파문이자, 변화의 신호로 읽힌다. 다카이치 총리의 파격적인 행보가 한일관계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한다.
    남편이 아내 성을 따른 다카이치 총리 부부의 '특별한 선택'
    by 임병식
    2025.10.30 16:01:02
  • 일본을 여행하다 보면 ‘사토’ ‘스즈키’ ‘다나카’ 같은 이름을 자주 본다. 같은 한자 문화권이지만 일본의 성씨는 유독 자연과 농경, 그리고 귀족 문화의 향취가 짙다. 부부의 성이 같은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총리 취임은 일본 성씨의 기원과 제도적 배경에 새삼 시선을 모으게 한다. 일본 성씨에는 왜 자연 지형이 많을까. 한국·중국과 달리 두 글자 성씨는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또 결혼하면 같은 성씨를 갖도록 한 배경은 무엇 때문일까. 일본 여행에서 흔히 접하는 궁금함이다. 다카이치 총리의 남편 이름은 다카이치 타구(高市 拓)다. 본명은 야마모토 타쿠(山本 拓)였으나 2021년 재혼하면서 부인과 같은 성씨로 바꿨다. 부부가 같은 성씨를 쓰는 일본 문화도 생소하고, 남편이 아내를 따라 성씨를 바꾸는 경우는 더욱 드물다. 일본 10대 성씨는 사토(佐藤), 스즈키(鈴木), 타카하시(高橋), 타나카(田中), 이토(伊藤), 와타나베(渡邊), 야마모토(山本), 나카무라(中村), 고바야시(小林), 가토(加藤)다. 밭(田)과 산(山), 나무(木), 마을(村), 다리(橋), 숲(林) 등 자연과 농촌이 눈에 들어온다. 가장 흔한 사토의 등(藤) 또한 등나무다. 일본 성씨가 농경문화 또는 자연과 밀접함을 알 수 있다. 또 ‘마을 가운데’(나카무라·中村), ‘나무 아래’(기시다·木下), ‘강 주변’(와타나베·渡?), ‘밭 가운데’(다나카·田中), ‘작은 샘’(고이즈미·小泉) 등 스토리텔링 요소도 보인다. 자연 친화적인 성씨와 밋밋한 일본 음식을 떠올리자면 이들이 제2차 세계대전 때 만행을 저지른 민족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일본 성씨에 자연 지형이나 농경문화가 녹아든 유래는 이렇다. 고대 씨족 사회에서 성씨는 귀족이나 무사, 제관의 전유물이었다. 후지와라(藤原), 미나모토(源本), 타이라(平) 등 엘리트 씨족만 성(姓)과 씨(氏)를 가졌다. 농민과 평민들은 마을명이나 지명에 근거해 아무렇게나 불렀다. 평민들까지 성씨를 갖게 된 건 메이지유신 직후다. 메이지 정부는 19세기 말부터 성씨를 강제했다. 세금 징수와 징병에 필요한 호적·인구조사 제도를 정비할 목적이었다. 이 때 많은 이들이 “밭 한가운데 살았다(田中)”, “다리 아래 거주했다(高橋)”, “강기슭에 살았다(渡邊)”며 주변 환경을 빌려 성씨를 만들었다. 이러니 대부분 성씨는 160년 안팎에 불과하다. 스즈키(鈴木)는 제관 가문에서 유래한 성씨다. 방울(鈴)은 제사를 지낼 때 필수 도구였다. 후지(藤)가 들어간 성씨는 유독 많은데 사토(佐藤), 이토(伊藤), 가토(加藤), 사이토(斎藤), 엔도(遠藤), 후지와라(藤原) 가문이 방계임을 암시한다. 후지와라는 일본 고대·중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귀족 가문이었다. ‘보랏빛 등꽃이 핀 넓은 들(고귀함과 평온함이 공존)’을 뜻하는 이름부터 럭셔리하다. 후지와라 가문과 후손들은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8~12세기) ‘섭정’과 ‘관백’ 직위를 독점하며 천황가 외척으로서 군림했다. 일본 정치에서 귀족 독점 체제는 후지와라 가문에서 시작됐다. 자연 지형과 생활환경, 귀족·무사 계통 영향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일본의 성씨는 사회 구조와 역사, 그리고 문화적 정체성이 응축된 결과다. ‘돕는다(佐)’와 ‘등나무(藤)’를 결합한 사토는 귀족의 위세가 평민 사회로 스며든 사례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분 질서가 무너질 때 가장 많이 생긴 성씨가 ‘김(金)·이(李)·박(朴)’이다. 이들 성씨에 왕족과 사대부가 많았기에 하층민들은 ‘김·이·박’ 족보를 사들여 신분 변화를 꾀했다. 무사 계통 미나모토(源)와 타이라(平), 조정 귀족인 타치바나(橘)도 4대 씨족으로 꼽는다. 여기에서 파생된 성씨가 퍼지면서 일본의 지명과 문화, 지역 정체성을 형성했다. 예컨대 미나모토씨에서 아시카가(足利) 가문, 타이라씨에서 히라노(平野) 가문이 나왔다. 두 가문은 가마쿠라와 무로마치 막부를 지탱한 핵심 세력이었다. 일본에서 부부가 같은 성씨를 쓰는 독특한 제도는 민법 750조에 근거한다. 법은 “부부는 혼인 시 동의한 성씨를 사용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결혼한 부부의 95%가 남편 성씨를 따르고 있다. 결혼해도 각자 성씨를 유지하는 우리와 다르다. 제도가 만들어진 배경 역시 흥미롭다. 메이지 정부는 호적 제도와 가족 단위 존속·상속을 중시했다. 가족이 단일 성씨를 공유하면 행정상·재산상·세제상 효율적이라는 판단이었다. ‘부부동성’은 근래에 개인의 정체성과 다양성을 제약한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각자 성씨를 유지해야 한다”며 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다카이치 총리 부부는 시대를 앞서간 셈이다. 이는 일본에서 성씨 제도와 젠더·사회 인식 변화가 교차점에 있음을 상징하는 사례다. 지역마다 다른 성씨가 분포하는 것도 특이하다. 홋카이도는 사토와 사사키, 간사이는 나카무라와 야마다, 규슈는 마에다와 마쓰오가 흔하다. 사회 구조 변화에 기인한 결과다. 사토와 스즈키가 귀족 혈통을, 다나카와 나카무라가 농민과 평민을 상징한다면 이는 일본 사회의 축소판이다. 일본은 귀족 피가 섞인 사토와 신사 제관의 후손 스즈키, 평민 다나카가 공존하는 나라다. 그 안에는 신분과 계층, 종교와 문화가 녹아 있다. 이름 하나에도 천년의 역사가 스민 나라, 이것이 일본이다. 어쩌면 일본을 이해하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중요한 열쇠는 ‘이름’이다. 다카이치 사나에는 ‘고귀한 땅에서 일찍 싹튼 생명’이다. 이름처럼 한일관계에 좋은 싹이 틀지 기대해 본다.
    ‘역사·문화 축소판’ 일본의 성씨
    by 임병식
    2025.10.27 13:04:06
  • 해적이 호화선을 붙잡고나서 배를 서로 교환한 뒤 돌려보내는 희한한 사건이 벌어졌다. 1717년 2월 ‘블랙샘’ 사무엘 벨라미가 이끄는 해적선 ‘술타나’는 카리브해에서 영국 호화 노예선 ‘위다’를 사흘 동안 뒤쫓았다. 경고사격 대포 한 발에 놀란 ‘위다’는 저항하지 않고 바로 항복했다. ‘블랙샘’은 ‘위다’에 대포를 옮겨 기함으로 삼고, 포로로 잡은 선장과 선원은 ‘술타나’를 타고 떠나게 했다. 해적이 포로를 배려하고 아량을 베푼 드문 사례다. 두 달 뒤 뉴잉글랜드 근처에서 중형 무역선을 나포한 뒤, ‘블랙샘’은 선장에게 해적으로 합류할 것을 권했지만 종교적인 이유로 거절당했다. ‘블랙샘’은 선량한 선장에게 무역선을 돌려주려고 했지만, 해적들이 반대하자 투표에 부쳐 결국 배에 불을 질러 바다에 가라앉혀야 했다. 못내 미안했는지, 그는 선장에게 변명했다. “그들은 이익이 되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려 하지 않아”(They scorn to do anyone a mischief, when it is not for their advantage). ‘바다의 로빈후드’로 알려진 ‘블랙샘’이 해적질 하는 방식이다. 따르는 해적들도 스스로 ‘로빈후드의 부하들’이라고 불리기를 원했다. ‘우리는 가난해서 해적이 되었고, 그들이 가진 것을 나눠 가질 뿐이다’는 것이다. 정당한 분노와 혁명적인 공감으로 다진 리더십이다. 해적들은 가발을 쓰지 않은 검은 생머리에 검은 머리띠를 두르고 검은 외투를 즐겨 걸친 그를 ‘블랙샘’ 이라는 애칭을 붙였다. ‘로빈후드’의 삶은 왜 그리 짧은가? 무역선을 불태운 며칠 뒤, 위용을 자랑하던 해적선 ‘위다’는 미국 매사추세츠 앞바다에서 갑작스러운 폭풍에 시달리다 결국 침몰했다. ‘블랙샘’을 포함해서 모두 144명이 물에 빠져 죽고 2명이 구조됐다. 향년 28세. 난폭한 해적에게 정의롭고 관대하며 민주적인 리더십이 어떻게 먹혔을까? ‘블랙샘’은 불과 1년 남짓한 해적 생활에서 약탈한 규모가 120만 달러로, 해적 1위(Forbes. 2008)로 평가된다. ‘블랙샘’이 제시한 정의 리더십은 ‘자포스’ 최고경영자(CEO)인 토니 셰이의 행복 리더십과 닮았다. ‘블랙샘’은 대중을 착취하는 지배계급의 횡포에 분노하고 로빈후드처럼 ‘정의로운 해적’을 비전으로 내세웠다. 셰이는 그저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단순한 기업 문화에 분노했다. 즐거움과 열정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는 ‘행복 전달’이라는 깃발을 걸고 직원은 ‘행복 전도사’, 본인은 ‘최고행복경영자’라고 불렀다. 타성에 물든 조직에 낯선 비전을 심는 것은 쉽지 않다. ‘블랙샘’이 포로를 대하는 방식에 해적들은 처음에 거북해서 투표까지 하자고 했지만, 결국 ‘로빈후드의 부하들’이라는 호칭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셰이는 2013년 위계적인 기업 운영방식을 뒤엎는 홀라크러시(Holacracy)를 도입했다. 직책이 아니라 역할을 중심으로, 투명한 규칙 아래 스스로 책임지고 의사 결정하는 구조다. 수평적인 소통과 협업을 강조한 것이다. ‘덧없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표현일 것이다. ‘블랙샘’도 셰이도 인생 최고의 정점에서 한창 젊은 나이에 엉뚱한 사고로 요절했다. ‘블랙샘’은 느닷없는 폭풍에 배가 침몰하면서 물에 빠져 죽었고, 셰이는 창고에서 발생한 의문의 화재로 불에 타 죽었다. 각각 향년 28세와 46세. ‘블랙샘’은 약탈 규모가 해적 1위에 올랐고, 셰이는 ‘자포스’를 ‘아마존’에 10억 달러(1조4000억 원)에 매각한 뒤다. 해적의 바다와 자본의 시장에서 각각 가장 빛나던 시기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혁신 리더는 삶을 옥죄는 현실에 분노할 줄 알아야 한다. 분노를 비전으로 바꾸고 공감을 얻어야 한다. ‘블랙샘’은 분노를 바로 공감으로 연결했다. “그들은 법이란 가면 아래 가난한 사람을 강탈하고, 우리는 용기라는 보호막 아래 부자를 약탈한다”(They rob the poor under the cover of law, and we plunder the rich under protection of our own courage). 셰이는 ‘신발 판매’를 행복을 전달하는 ‘고객서비스’로 공감을 창출했다. “자포스는 우연히 신발을 팔게 된 고객서비스 회사입니다”(Zappos is a customer service company that just happens to sell shoes).
     분노하고 공감하라_사무엘 벨라미 & 토니 셰이
    by 허두영
    2025.10.15 21:00:15
  • 매년 10월 초가 되면 한국 언론은 국정감사 보도에 몰두하지만, 세계 언론의 시선은 노벨상 수상자 발표에 쏠린다. 인류가 만든 상 가운데 가장 영예로운 것으로 꼽는 노벨상은 수상자 개인을 넘어 한 나라의 학문 수준과 국력의 척도로까지 여겨진다. 올해 일본 열도는 특히 들떠 있다. 오사카대 사카구치 시몬 교수가 생리의학상을, 교토대 스스무 키타가와 교수가 화학상 수상자로 호명되었기 때문이다. 단숨에 두 명이나 배출하면서 일본의 역대 수상자는 모두 31명으로 늘었다. 한국의 2명과 대비된다. 노벨상 수상자 숫자보다 눈여겨봐야 할 건 내용이다. 일본 노벨상 수상자 31명 가운데 87%인 27명이 과학 분야 수상자다. 기초과학에서 일본이 얼마나 탄탄한 기반을 갖췄는지 웅변한다. 소재·부품·장비 분야에서 일본의 기술력은 독일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이미 우리는 2019년 한국에 대한 일본의 수출 규제 때문에 심각한 홍역을 치른 바 있다. 불화수소와 포토레지스트 등 반도체 핵심 소재가 막히자 한국 산업은 휘청거렸다. 그제야 소부장(소재, 부품, 장비)의 중요성을 깨닫고 기술 자립에 나섰지만, 여전히 격차는 크다. 일본의 기초과학은 왜 뿌리가 깊을까. 해답은 새로운 문물을 빠르게 흡수하는 역사적 전통, 기술자와 과학을 우대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가고시마의 센간엔 정원에서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근대적 실험을 시도했다. 그는 일본 최초로 반사로를 세우고 고품질 쇠를 뽑아 증기선과 대포를 만들었다. 동아시아가 칼과 조총에 머무르던 시대에 대포와 증기선은 전쟁 패러다임을 바꾼 첨단무기였다. 나리아키라는 개명 군주로 추앙받았고, 시마즈 가문은 메디치 가문에 비견될 만큼 존경을 받았다. 1865년 그가 선발해 영국에 보낸 유학생 17명은 훗날 사쓰마 번의 근대화 역사에 주춧돌이 되었다. 가고시마 중앙역 광장에 서 있는 ‘젊은 사쓰마의 군상’ 동상은 160년 전의 그 순간을 기린다. 사쓰마와 적대 관계에 있던 조슈 번도 뒤지지 않았다. 조슈 번은 이토 히로부미를 포함 5명을 영국에 파견했다. 이들이 귀국해 메이지유신의 핵심 세력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같은 시기 조선의 흥선대원군은 전국 곳곳에 척화비를 세우고 스스로 문을 걸어 잠궜다. 조선과 일본의 기술력 격차는 그때 이미 벌어지기 시작한 건 아닌지 모른다. 나가사키 데지마도 중요한 단서다. 네덜란드는 218년 동안 일본과 독점적 교역을 하며 서양 학문을 전했다. 난학(蘭學)이라 불린 이 흐름을 통해 서양 의학과 천문학, 화학, 지리학이 일본에 들어왔다. 당시 일본 지식인들은 ‘외부의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받아들였다. 메이지 정부가 파견한 이와쿠라 사절단은 바로 이런 호기심과 학습 열정을 제도화한 사례다. 100여 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은 1년 10개월 동안 미국과 유럽 12개국을 돌며 의회 제도, 교육, 철도, 통신, 은행 시스템을 직접 조사했다. 공업화의 길도 이때 닦였다. 일본 근대국가의 설계도는 해외 현장에서 얻은 체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 기초과학을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빼놓을 수 없다.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심수관을 비롯한 조선 도공들은 대부분 그곳에 정착했다. 조선에서 천대받던 자신들이 일본에서는 사무라이 대우를 받으며 기술자로 존중받았기 때문이다. 일본에 수백 년을 이어온 중소기업이 많은 것도 이런 장인정신과 무관하지 않다. 2002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다나카 고이치 역시 대기업 연구소 소속이 아니라 중소기업 시마즈제작소의 평범한 엔지니어였다. 그는 작은 회사지만 엔지니어로서 인정받고 세계적인 성과를 냈다. 시마즈제작소가 뿌리를 두고 있는 곳이 바로 시마즈 가문의 실험장이었던 센간엔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긴 시간의 축적이 과학기술로 이어졌다. 올해 수상자인 사카구치 교수는 학계의 비주류였다. 그러나 호기심을 좇아 묵묵히 기초연구를 이어왔다. 키타가와 교수 역시 수십 년 동안 한 분야만 파고들었다. 단기 성과주의가 아니라 인내와 호기심의 산물이다. 반면 한국은 산업화 이후 ‘빨리빨리’ 문화와 단기 성과 중심의 연구 풍토가 강했다. 윤석열 정부에서는 R&D 예산을 대폭 삭감함으로써 기초과학 기반까지 뒤흔들었다. 우리는 응용 기술과 제조업에서는 강했지만 기초연구 기반은 여전히 허약하다. 2018년 일본의 수출 규제로 뒤늦게 ‘소부장 자립’을 외쳤으나, 일본은 이미 수백 년 전부터 그 길을 걸어왔다. 간단치 않은 시간을 뛰어넘으려면 어떠해야 할지 자명하다. 기초과학은 단기간에 결실을 맺지 않는다. 수많은 실패와 시행착오를 견디며, 긴 안목으로 연구자의 호기심을 존중할 때 뿌리 내린다. 일본은 그 과정을 수백 년 동안 축적해 왔다. 한국이 일본을 따라잡으려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흔들리는 단기 과제가 아니라 50년, 100년을 내다보는 백년대계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연구자에게 실패할 자유를 보장하고, 호기심을 존중하는 생태계는 절실하다. 반일은 쉽지만, 극일은 험난하다. 일본의 노벨상 수상 소식을 불편한 시선으로만 바라볼 게 아니다. 백 년을 준비하는 자극으로 받아들이자.
    기초과학이 강한 일본
    by 임병식
    2025.10.15 20:34:47
  • 일본 정치가 또다시 안갯속이다. 자민당 총재가 곧 총리라는 일본 정치의 공식은 이제 깨지기 직전이다. 첫 여성 총리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앞에 둔 다카이치 사나에를 둘러싼 정국은 격랑으로 빠져들었다. 26년 동안 파트너였던 공명당이 등을 돌리면서 모든 계산은 틀어졌다. 도쿄 치요다구(우리의 여의도)에서는 “다카이치는 못 올라선다”는 찌라시가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자민당은 전체 중의원 의석 465석 중 196석으로 단독 과반은 어렵다. 공명당 24석을 합쳐도 부족하다. ‘총재=총리’라는 등식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일본 정치는 ‘단명 총리’의 무덤이다. 2006년 고이즈미 퇴임 이후 2012년 아베 신조가 재집권하기까지 6년 동안 총리만 여섯 번 바뀌었다. 하토야마, 간 나오토, 노다 요시히코 등 민주당 정권 총리들은 모두 단명에 그쳤다. 길어야 1년, 짧으면 몇 달짜리 돌려막기 총리였다. 의원내각제가 빚은 허약한 리더십, 뿌리 깊은 자민당 파벌정치가 주된 원인이다. 일본 총리는 늘 파벌의 눈치를 보고, 연정 파트너에게 표를 구걸한다. 다카이치가 직면한 상황도 다르지 않다. 설령 총리에 취임해도 그는 아소파 그늘에 있다. 연정은 일본 정치의 숙명이다. 1994년 선거제도 개편으로 중의원은 소선거구와 비례대표 병립제로 선출한다. 이는 자민당의 절대 우위를 어렵게 만들었다. 자민당은 1999년부터 공명당과 불안한 동거를 시작했다. 지난 26년간 이어진 자민·공명 연정은 일본 정치의 상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공명당은 그동안 자민당의 정치자금 스캔들, 야스쿠니 참배, 극우적 언행을 경고해 왔다. 2023년 아베파의 비자금 스캔들은 결정타였다. 정경유착, 보고서 조작, 솜방망이 징계에 유권자들은 분노했다. 공명당은 ‘정치자금 투명화’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자민당에 제도적 개혁을 요구했지만 자민당은 귀를 닫았다. 오히려 다카이치는 정치자금에 연루된 인사들을 중용하고 극우 색채를 감추지 않았다. 공명당이 “더는 동행할 수 없다”며 문을 닫은 건 당연했다. 일본 정치가 ‘타협의 연속극’이 아니라 ‘불신의 희극’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그럼에도 자민당은 왜 무너지지 않는가. 답은 분명하다. 이익집단과 끈끈한 유착, 권력을 나눠 먹는 파벌 구조, 그리고 난립한 야권 때문이다. 일본 유권자들의 관성적 선택, “그래도 자민당”이라는 체념과 무관심도 자민당을 지탱한 요인이다. 차악의 정치, 파벌 정치가 자민당 장기 집권의 비결이다. 자민당은 무너질 듯 무너지지 않는, 전후 정치의 기묘한 산물이다. 그 사이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을 보냈다. 국제정세가 급변하는데도 자신들이 쌓은 성안에서 뒷걸음질 쳤다. 심하게 표현하면 자폐 정치다. 한국 보수 정치가 대구·경북이라는 성역에 안주하는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카이치가 보여주듯 자민당 안에서 극우 담론은 여전히 주류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 과거사 부정, 혐한과 혐중 발언은 강성 지지층을 묶는 정치적 자산이다. 또 걸그룹과 코미디언, 탤런트 출신 정치인이 가세하면서 일본 정치는 ‘희화화’됐다. 정치와 예능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한국 정치는 일본과 다른 방식으로 황폐화했다. 대통령 단명은 없지만, 진영 대립과 적대 정치는 훨씬 치명적이다. 상대의 주장은 무조건 반대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어느 편이냐’가 판단 기준이 됐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여야는 처지를 바꿔 장외 투쟁에 나서고 국회는 길거리 확성기로 전락했다. 일본 정치가 코미디라면, 한국 정치는 상대를 궤멸하는 잔혹사다. 일본식 연정에서 우리가 배울 점은 있다. 귀를 열고 상대를 동반자로 대하는 정치 문화다. 하지만 일본식 연정은 안정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것도 교훈이다. 그렇다고 대화조차 시도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끝내 적대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다. 한국과 일본 정치는 공통된 병을 앓고 있다. 정치의 품격이 실종됐다는 점이다. 일본은 극우와 희화화로, 한국은 적대와 혐오로 품위를 상실했다. 정치는 사회를 통합하는 매개다. 그러나 양국 모두 정치로 인해 오히려 사회는 분열하고 국민은 지쳤다. 일본 정치가 희망을 말하려면 정치자금과 권력 파벌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한국 정치가 미래를 열려면 적대와 혐오를 내려놓고 협치와 연정에 나서야 한다. 그럴 때 양국 정치도, 양국 관계도 진전된 방향으로 나아간다. 자민당과 공명당의 결별은 어떻게 끝을 맺을까. 일본 첫 여성 총리라는 정치 실험은 성공할까, 아니면 구태의 반복일까. 한국은 일본보다 12년 앞서 2013년 첫 여성 대통령을 배출했다. 그렇다고 한국 정치가 일본보다 12년 앞섰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주지하다시피 첫 여성 대통령은 탄핵으로 중도 하차했다.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한다면 ‘처음’이란 수사는 공허하다. 정치는 사람의 일이고, 사회를 움직이는 근간이다.
    단명 총리, 자민당 독주는 왜?
    by 임병식
    2025.10.11 15:57:04
  • 1720년 6월 캐나다 펀들랜드 남동쪽 트레파시 항구에 검은 ‘졸리로저’(Jolly Roger)를 내건 해적선 ‘로열포츈’(Royal Fortune)이 다가왔다. 검은 깃발은 순순히 항복하면 자비를 베풀겠다는 신호다. 온 항구가 갑자기 얼어붙었다. 정박했던 프랑스 함선과 상선 172척이 두려움에 질려 도망가거나 항복해버렸다. 해적선은 총 한 발 쏘지 않고, 칼 한 번 휘두르지 않고 항구를 장악했다. ‘로열포츈’ 한 척에 60명 남짓한 해적이 타고 있었을 뿐인데도 말이다. ‘검은 남작’(Black Bart) 바르톨로뮤 로버츠는 가장 성공한 해적으로 꼽힌다. 불과 3년 남짓 해적질 하면서 무려 470척이 넘는 배를 약탈했다. 요즘 가치로 치면 3200만 달러(한화 420억 원)쯤 된다. 노예선을 타다가 해적에게 붙잡혔지만, 뛰어난 항해 실력으로 6주 만에 선장으로 추대됐다. 자신을 배려해 주던 선장의 죽음에 복수하기 위해 첫 작전에서 아프리카 서해안의 섬 프린시페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해적이 되기 싫어서 그랬을까? ‘검은 남작’은 흉악한 해적이 아니라 멋진 신사처럼 보였다. 화려한 진홍색 코트에 다이아몬드 십자목걸이를 걸고 검은 깃털을 단 모자를 쓰고 전투를 지휘했다. 술은 입에 대지 않고 차를 즐겨 마셨다. 해적선에서 도박과 싸움을 금지하고, 항상 청결을 유지하도록 했으며, 해적이 지켜야 할 조항을 담은 ‘해적규정’(Pirate Code)을 만들어 다 같이 서명하고 성서에 손을 얹고 맹세하게 했다. ‘검은 남작’은 ‘졸리로저’에 모래시계를 든 해골을 그려 넣었다. ‘죽음을 잊지 마라’(Memento Mori)는 경계일까? 1722년 2월 아프라키 서해안에서 평소처럼 멋진 차림으로 영국 해군과의 전투를 지휘하다, 갑자기 날아온 포탄 파편에 가슴을 맞고 즉사했다. 향년 39세. 해적들은 그의 시신을 바로 돛으로 둘둘 감싸 바다 깊숙이 가라앉혔다. 해군에 잡혀 모욕을 당하지 않고 기사처럼 당당하게 죽겠다는 평소의 유언 때문이다. 해적 ‘검은 남작’이 제시한 상징 리더십은 스티브 잡스의 카리스마와 닮았다. 잡스는 검은 터틀넥과 청바지로 ‘무장’하고 신제품을 발표할 때마다 명장면을 연출했다. 기품 있는 완벽주의와 미니멀리즘이다. 특히 2007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아이폰’을 발표한 날은 ‘검은 남작’이 ‘로열포츈’을 이끌고 트레파시에 나타난 것처럼, 무대는 물론 온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한 입 베어 문 사과 로고와 ‘Think Different’ 슬로건이 ‘검은 남작’의 ‘졸리로저’처럼 강렬했다. 엄격한 원칙과 규율도 마찬가지다. 잡스는 애플에서 극도의 완벽주의와 비밀주의를 요구하며, 까다로운 기준에 맞지 않는 제품이나 직원은 가차 없이 내쫓았다. ‘매킨토시’를 기획할 때 회로설계팀에는 칩과 회로까지 아름답게 배치하라고 다그치고, 제품설계팀에는 아무나 컴퓨터 내부를 볼 수 없도록 특수 나사로 잠그라고 지시했다. 또 화가가 작품을 마무리하듯, 개발팀이 회로 기판에 서명을 남기도록 하는 식으로, 보이지 않는 곳까지 꼼꼼하게 챙겼다.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성찰의 태도도 ‘검은 남작’을 연상시킨다. 잡스는 지난 2005년 스탠퍼드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죽음은 하나밖에 없는 최고의 발명품이다”(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고 말했다. 췌장에 생긴 신경내분비종양을 수술로 떼어낸 시한부 삶을 고백한 것이다. ‘Stay Foolish’였을까? 신념을 행동으로 증명하는 잡스의 리더십 앞에 다들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리더는 방향을 제시하고 이끌어야 한다. ‘검은 남작’과 잡스는 신념을 제시하고 행동으로 증명했다. 제시하지 않으면 리더가 될 수 없고, 증명하지 못하면 리더로 남을 수 없다. ‘검은 남작’은 태동하는 새로운 해양제국의 질서에 저항했고, 잡스는 컴퓨터산업을 지배하던 빅브라더(Big Brother)의 관성에 맞섰다. 기존 질서에 결코 순응하지 않고, 각각 해적의 무력과 혁신의 법칙으로 자신의 깃발이 휘날리는 새로운 세상을 구현한 것이다.
    방향을 제시하고 증명하라: 바르톨로뮤 로버츠 & 스티브 잡스
    by 허두영
    2025.10.10 16:32:25
  • 최근 영국 우주사령부는 러시아가 영국 군사위성을 상대로 주간 단위로 전파 방해(Jamming)를 시도하고 있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는 우주 영역이 근본적으로 변화고 있음을 알리는 강력한 신호로 볼 수 있다. 또한 러시아 위성이 영국 군사위성에 근접 궤도비행하며 정보를 수집하는 스토킹(Stalking) 행위를 한 것은 우주 궤도가 이미 적대적인 행위로 가득 찬 ‘제4의 전장’으로 전환되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러한 우주 위협에 대해 미국과 영국 등 우주 선도국들은 단순히 우주영역인식(SDA: Space Domain Awareness)을 넘어 우주위협을 능동적으로 인지하고 방어하는 우주 생존력(Resilience) 확보를 최우선 전략으로 설정하고 획기적인 방어책들을 실행하고 있다. 우주위협 탐지: ‘능동 방어’ 첨단화 오늘날 우주 적대국의 위협은 레이저 공격과 같은 정교한 지향성 에너지 무기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레이저는 위성을 추적하거나 센서를 무력화(Dazzling/Blinding)시켜 기능을 마비시킬 수 있다. 이에 대응하여 영국은 현재 적대국 레이저 위협을 탐지하고 분석하는 신규 위성 센서 기술에 집중 투자하고 있다. 이 위성 센서는 레이저의 특성과 출처(지상 또는 우주 기반)를 정밀하게 식별하여 지휘관이 위성에 대한 방어 조치를 즉각 취할 수 있도록 필수 정보를 제공하게 된다. 또한 중국과 러시아 등의 우주 대응(counter-space) 능력 위협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해 설립된 미 우주군 산하의 우주신속능력사무소(SpRCO: Space Rapid Capabilities Office)는 자체 위성 인식(Own-Ship Awareness) 능력 프로그램으로 정지궤도(GEO) 위성에 항공기의 레이더 경보 수신기(RWR, Radar Warning Receiver)와 유사한 탑재형 RWR 장착을 추진 중이다. 이 시스템은 접근하는 물체의 레이더 신호를 감지해 자국 위성이 추적 또는 표적화되고 있는지를 운영자에게 조기에 경고하는데, 미 우주군 SpRCO는 이 위성 탑재 RWR 능력을 ‘궤도 전쟁(orbital warfare)’ 수행을 위한 핵심 기반으로 간주하며 개발을 서두르고 있다. 사이버 훈련장과 우주기밀 정보 ‘공조’ 체계의 구축 오늘날 우주 위협은 물리적 충돌뿐 아니라 사이버 공격의 형태로 전방위적으로 증대되고 있다. 지상 시스템과 궤도 자산이 얽힌 우주 운영 아키텍처는 “더욱 복잡하고, 분산되며, 동적”으로 진화하고 있어 전통적인 보안 방법으로는 방어가 어렵다. 이러한 난제 해결을 위해 우주 기술 계약업체 딜로이트는 전자레인지 크기의 소형 위성 ‘Deloitte-1’을 발사했다. 이 위성은 궤도상에서 실제 사이버 공격과 방어 테스트를 수행하는 ‘실사격 사이버 훈련장(live-fire cyber range)’ 역할을 하며 탑재된 침입 탐지 시스템(Silent Shield)으로 위성의 사이버 회복 탄력성을 검증하고 강화할 예정이다. 이러한 궁극적인 우주 방어 시스템은 정부와 민간의 경계를 허무는 협력 속에서 완성될 예정으로 미 우주군(USSF)은 ‘Orbital Watch’ 프로그램을 통해 상업 우주 산업 파트너들에게 우주 기밀 위협 정보를 공유하는 새로운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향후 양방향 정보 공유를 통해 민간 위성이 감지한 이상 징후나 우주 위협 정보도 역으로 우주군에 제공되는 시스템을 갖추게 된다. 우주 패권의 기준: 방어와 회복 탄력성 오늘날 우주 시대의 오디세이(대항해)는 이미 평화로운 탐사가 아닌, 생존을 건 치열한 기술 및 정보 전쟁으로 그 성격이 명확히 바뀌었다. 러시아의 공격적 ‘의지’와 중국의 ‘기술적 정교함’으로 대변되는 우주 위협 환경은 이제 논쟁의 여지가 없는 현실이다. 미국과 같은 우주 선진국은 위성 탑재 레이더 경보수신기(RWR)를 통한 자체 위협 인식 능력 보유, ‘Deloitte-1’을 통한 궤도상 사이버 방어 훈련, 그리고 ‘Orbital Watch’를 통한 정부-민간의 우주기밀 정보 공조 등으로 우주 자산을 능동적으로 방어할 예정이다. 이제 미래 우주 패권은 단순히 누가 더 많은 위성을 쏘아 올리느냐가 아니라, 누가 위협에 맞서 자국과 동맹의 우주 시스템을 더 빠르고 유연하게 방어하고 회복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 역시 이러한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고, 능동적인 우주 생존력 확보를 위한 대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
    우주 위협에 맞선 ‘능동 방어’와 ‘우주정보 공조’
    by 최성환
    2025.10.10 16:01:30
  • 17세기말 무굴제국 황제 에우랑제브는 아마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1695년 순례자와 보물을 실은 황제의 호화무역선 ‘간지사와이’가 홍해에서 인도로 가다가 해적들에게 어이없이 약탈당했다. 무역선 이름이 페르시아어로 ‘넘치는 보물’이라는 뜻이니, 얼마나 많은 보물을 싣고 있었을까? 지금으로 치면 일천억 원이 넘는 규모로 보인다. ‘롱벤’(Long Ben) 헨리 에브리는 다른 해적선 5척을 끌어들여 사상최대의 약탈작전을 지휘했다. 동참한 해적선장 토마스 튜가 전투하다 죽으면서 다른 해적선들이 머뭇거렸지만, ‘롱벤’은 해적선 ‘팬시’를 이끌고 거의 단독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불과 100명 남짓한 ‘팬시’의 해적이 보물선을 지키는 해군 500명과 순례자 600명을 제압한 것이다. ‘롱벤’은 이 작전으로 단박에 ‘해적의 왕’으로 불렸다. 영국 해군 항해사 출신 헨리 에브리는 노예선을 타다가 사략선(私掠船)으로 옮겨 탔다. 1694년 ‘찰스 2세’호에서 몇달 동안 월급을 받지 못하자 선원들은 반란을 일으켜 배를 장악한 뒤, 언변이 뛰어난 에브리를 선장으로 추대했다. 꺽다리로 ‘롱벤’이라는 별명은 얻은 그는 배 이름을 ‘팬시’로 바꾸고 무자비한 해적질을 시작했다. ‘롱벤’은 엄격한 규율과 공정한 분배로 해적들의 충성을 끌어내고, 차가운 머리와 치밀한 계산으로 바다를 지배했다. 격노한 에우랑제브가 온 세계에 수배령을 내리면서 ‘롱벤’은 자주 숨던 마다가스카르 기지를 버리고 카리브해로 향했다. 바하마 제도의 뉴프로비던스로 숨어든 것이다. ‘롱벤’은 해적들에게 약속한 보물을 나눠준 뒤, 자신의 몫을 챙겨 아무도 모르게 증발했다. 엑시트에 성공한 것일까? 그가 숨겨놓은 보물이 아직도 카리브해 어딘가 묻혀 있을 것이라는 소문만 남았다. 모든 해적의 로망이랄까, ‘롱벤’은 혜성처럼 나타나 사상최대의 약탈을 저지르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롱벤’이 보여준 담대한 리더십은 비트코인을 개발한 사토시 나카모토의 전설적인 궤적과 어울린다. ‘롱벤’이 무굴 제국 황제의 보물선을 털었다면, 나카모토는 중앙은행이 독점하던 화폐 발행권에 정면 도전했다. 2008년 백서 ‘비트코인: P2P 전자화폐 시스템’(Bitcoin: A Peer-to-Peer Electronic Cash System)을 발표한 뒤 이듬해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탈중앙 화폐인 비트코인을 창조해서 국가가 보증하는 금융시스템의 뿌리를 흔든 것이다. 해적들의 추대로 선장에 오르고 10대1도 되지 않는 전력으로 황제의 보물선을 제압한 것은 ‘롱벤’이 평소 인정받은 리더십을 바탕으로 철저한 계획과 대담한 실행으로 이룬 성과다. 나카모토는 컴퓨터공학과 암호학에 이어 게임이론까지 완벽에 가까운 블록체인 시스템을 설계하고 실행에 옮겼다. 또 ‘롱벤’이 공적에 따라 전리품을 나눈 것처럼, 엄격한 규칙 아래 채굴한 양만큼 공정하게 보상하여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비트코인에 참여하도록 이끌었다. 시작이 담대한 만큼 마무리도 완벽했다. 나카모토는 정체 자체가 신비로운 만큼 엑시트도 전설적이다. 한번도 얼굴을 드러낸 적이 없는데다, 본명이 맞는지조차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8년부터 3년 남짓 활동하고 짧은 이메일을 남기고 사라졌다. “나는 다른 일로 넘어갔어. 개빈과 모든 사람들에게 맡겼으니 괜찮아”. 그가 보유한 재산은 비트코인만 해도 110만BTC(1,300억 달러, 177조원. 2025년 기준)로, 세계 부호 12위 수준이다. 조무래기 해적은 황제의 보물선을 털겠다는 작전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꾼다. 오합지졸 은행강도도 중앙은행 금고는 쳐다보지도 못한다. ‘롱벤’과 나카모토는 담대한 비전으로 기존 질서의 빈틈을 깨고 들어가 세계 질서를 바꿔 버렸다. 빈틈없는 작전의 열쇠는 공정한 규칙과 두터운 신뢰였고, 완벽한 증발의 비결은 깔끔한 분배였다. 세상을 흔드는 혁신은 담대한 시작과 철저한 설계와 깔끔한 엑시트로 완성되는 걸까?
    크게 한 방 터뜨리고 사라져라
    by 허두영
    2025.10.01 11:17:18
  • 추석(秋夕)은 귀향이고, 오봉(お盆)은 머무름이다. 한국은 고향 집으로 달려가고, 일본은 신궁 앞으로 긴 줄이 늘어선다. 명절을 맞는 한국과 일본의 풍경이다. 같은 뿌리에서 갈라졌으나 표현 양상은 사뭇 다르다. 한국은 귀향으로, 일본은 머묾으로 정체성을 드러낸다. 지갑 사정은 여의치 않아도 명절은 여전히 기다려진다. 올해 추석은 지독한 무더위를 지낸 뒤 끝이라 어느 때보다 반갑다. 추석에 다가갈수록 달도 부풀어 오를 것이다. 한민족 정체성을 담은 명절로써 추석만 한 게 없다. 이즘 귀성 행렬은 익숙한 풍경이다. TV 카메라는 주차장이 된 고속도로를 비추고 소요 시간을 생중계한다. 지구상에 이런 나라가 또 있을까 싶다. 일본의 명절은 우리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조상을 기리고 가족·공동체 유대를 확인한다는 점에서는 닮았다. 그러나 표현 방식은 크게 차이 난다. 우리 명절 풍경을 먼저 보자. 양손에 선물 보따리를 들고 자녀들과 함께 설레는 표정으로 서성이는 서울역 대합실이 떠오른다. ‘매진’을 알리는 전광판 앞에서 애를 태우는 모습도 낯익다. 북새통을 이루는 고속도로 휴게소는 또 다른 삽화다. 장시간 운전에 지친 귀성객들에게 고속도로 휴게소는 쉼표 같은 곳이다. 나 역시 평소 2시간 반이면 가는 고향길을 5시간 걸려 갈 때면 반드시 들린다. 눈부신 설경과 황금빛 벼로 일렁이는 국도변 풍광도 정월과 팔월에 만나는 절경이다. 추석 때 주변 산은 성묘객들로 화사하다. 어릴 적 성묫길에 메뚜기 잡고 삘기를 뽑으며 가을 햇살 속으로 들어갔던 기억이 선명하다. 일본인은 새해 첫날, 집과 가까운 신사나 신궁에 간다. 도쿄 메이지 신궁에는 해마다 수십만 명이 몰린다. 새해 첫 참배인 ‘하쓰모데(初詣)’를 올리기 위해서다. 참배객들이 늘어선 모습은 장관이다. 이즈음 노점상(야타이) 행렬도 흥미로운 풍경이다. 다코야키와 오뎅 국물 냄새가 새해 차가운 공기를 달군다. 가정에서는 오세치(お節) 요리가 상에 오른다. 오세치 요리는 정월에 먹는 대표 명절 음식이다. 자손이 번성하기를 기원하는 카즈노코(소금에 절인 청어알)와 장수를 의미하는 새우, 건강을 염원하는 검은콩, 기쁨을 뜻하는 다시마가 주된 요리다. 우리가 떡국을 먹으며 새해를 맞듯 일본인은 오세치를 즐긴다. 아이들에게 세뱃돈 오토시다마(お年玉)를 주는 풍습도 비슷하다. 조상을 만나기 위해 산으로 가는 우리와 달리 신사나 신궁을 찾는 일본, 가깝고도 먼 나라를 상징한다. 우리 추석에 해당하는 일본 명절은 오봉이다. 다른 점은 우리는 음력 8월 15일, 일본은 양력 8월 15일이다. 오봉 연휴는 대략 8월 13~17일까지다. 우리는 매년 9월 중하순 또는 10월 초에 추석이 찾아온다. 반면 오봉은 무더위가 한창일 때다. 명절 분위기는 우리가 훨씬 낫다. 대규모 귀성 귀경 행렬이 벌어진다는 점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다. 우리가 그렇듯 일본 또한 신칸센은 3개월 전에 매진된다. 숙박업소 요금도 덩달아 폭등한다. 대학 때 일본인 홈스테이 가정에서 오봉을 지냈는데 열기가 대단했다. 지금도 일본 소도시에서는 집집마다 등불을 켜고 조상의 영혼을 맞는다. 절집 종소리가 울리면 마을은 봉오도리(盆踊り) 춤판에 휩싸인다. 참가자들은 둥근 원을 그리며 북소리와 손뼉 소리로 하나가 된다. 우리 추석이 가족 단위 성묘라면, 일본 오봉은 마을 공동체가 어울리는 마당이다. 도시와 농촌 차이도 흥미롭다. 도쿄나 오사카의 직장인들은 오봉 기간 해외여행을 떠난다. 반면 지방 소도시에서는 여전히 가족들끼리 조상을 찾고 봉오도리 춤을 춘다. 우리도 명절을 간소화하고 해외를 떠나는 가정이 많다. ‘가족과 조상’을 중심으로 뿌리를 확인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명절을 구습으로 여기는 이들이 점차 늘고 있다. 인천국제공항공사는 10월 2~12일까지 인천공항을 이용하는 여객을 245만3,000명으로 전망했다. 지난해에 비해 80%가량 급증했다. 양국 모두 전통과 변화의 갈림길에 서 있는 셈이다. 한국의 ‘귀향과 제례’, 일본의 ‘머무름과 어울림’이라는 아름다운 풍습은 위기를 맞았다. 한국에서 ‘명절 스트레스’라는 신조어가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일본은 명절에 귀향하지 않는 ‘U턴 거부 세대’가 일상화됐다.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다면 명절은 세대를 잇는 촉매제다. 설과 추석, 신정과 오봉은 두 나라 정체성을 드러내는, 공동체가 공유하는 자리다. 한국인과 일본인에게 명절은 단순한 공휴일이 아니다. 자연에 감사하고 흩어진 가족과 이웃을 만나는 따뜻한 시간이다. 서로 다독이고 보듬고 격려하며 위안을 얻고 돌아간다면 그것으로 흡족하다. 두 나라 명절을 공유할 기회가 있다면 문화적 차이를 좁히는 기회로 삼아도 좋다. 이번 추석 연휴 일본을 찾는 한국 관광객은 50만 명을 웃돌 전망이다. 무엇을 보고 올지는 스스로에게 달려 있다. 퇴임을 앞둔 이시바 총리가 30일 한국을 방문, 이재명 대통령과 만났다. 자주 오가다 보면 차이를 넘어 평화로 가는 작은 시작을 만들 수 있으란 생각이다.
    ‘한국은 귀향, 일본은 머무름’ 대조적인 한일 명절 풍경
    by 임병식
    2025.10.01 11:10:24
  • ‘일본에 왔구나’ 하는 인상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가 자판기다. 일본을 여행하다 보면 정말이지 많은 곳에서 다양한 자판기와 만난다. 도쿄 번화가, 시골 기차역 플랫폼, 고즈넉한 신사, 공원 산책길, 지하철역, 아파트 입구, 골프장까지 없는 곳이 없다. 심지어 이런 곳에까지?라며 놀라게 되는 곳에도 어김없다. 자판기 종류 또한 상상을 초월한다. 자판기에서만큼은 일본인은 한국인의 창의력을 훌쩍 뛰어넘는다. 전통적인 음료나 담배, 스낵 자판기는 물론이고 컵라면, 아이스크림, 라면, 우동 자판기까지 무궁무진하다. 심지어 냉동식품과 술, 야채, 과일, 꽃, 부케, 우산, 속옷 자판기까지 있으니 ‘자판기 왕국’이라는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다. 일본에서 자판기는 단순히 물건을 파는 기계가 아니다. ‘길거리 실험실’이다. 편의·놀이·지역성·비상용품까지, 아이디어와 기술이 더해져 작은 무인 상점처럼 진화하고 있다. 일본 여행에서 이색 자판기 탐방은 흥미로운 경험이다. 도쿄 아키하바라의 ‘수프 자판기’, 홋카이도 농가의 ‘옥수수 자판기’, 니가타의 ‘사케 자판기’처럼, 색다른 자판기를 찾는 일은 여행에 소소한 재미를 더한다. 길모퉁이마다 서 있는 자판기에서 버튼을 눌러 캔 커피가 “톡” 하고 떨어지는 순간, 묘하게 일본답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에치코유자와 역에서 기억은 각별하다. 소설 ‘설국’의 무대에서 자판기 사케를 마시는 순간 소설 속 감흥으로 빠져들었다. 2024년 말 기준 일본에는 약 391만 대의 자판기가 있다. 그중 220만 대는 음료 자판기다. 일본 인구가 1억 2400만 명이니 30명 남짓에 한 대꼴이다. 2000년대 초반 560만 대에 비하면 다소 줄었지만, 여전히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밀도다. 지난달 규슈 여행길에서 그 숫자가 단순 통계를 넘어선 ‘생활의 풍경’임을 새삼 실감했다. 오이타 현 사이키 시 해안 마을을 찾아가는 길에서였다. 가는 내내 만난 자동차라고는 두서너 대가 고작인 오지였다. 한적한 해안도로와 바닷바람이 스치는 방파제 끝에서 빨간색 자판기를 만났다. 누가 이런 곳에까지 와서 자판기를 이용할까 싶었다. 뜨거운 모래바람이 흩날리는 오후 버튼을 눌렀다. 금세 물방울 맺힌 차가운 우롱차가 나왔다. 유령 같은 마을에서 자판기만 살아 움직였다. 일본에서 자판기 문화가 번창한 배경에는 사회적 토양이 깔려있다. 무엇보다 치안이 좋아 도난 위험이 적고 파손 위험이 적다. 인적이 드문 해안도로에도 자판기를 세워둘 수 있는 이유다. 인파가 붐비는 지하철역 등 고밀도 생활권과 협소한 골목상권도 자판기와 잘 맞는다. 자판기는 좁은 공간에서 많은 사람을 상대할 수 있는 효율적 수단이다. 다른 하나는 편의성이다. 오랜 시간 일하고 늦게까지 이동하는 사회에서, 24시간 언제든 물 한 병, 커피 한 캔을 살 수 있다는 건 큰 안도다. ‘항상 그 자리에 있다’는 믿음은 작은 위안이다. 현금 사용 비중이 높은 생활 습관도 자판기 문화와 맞물려 있다. 지금은 현금뿐만 아니라 교통카드나 QR결제도 보편화 됐다. 유연한 결제 방식은 자판기 사용을 한층 편하게 만들었다. 산토리·아사히·코카콜라 제조사들은 자판기를 거대한 유통망으로 삼는다. 도매상과 소매 점포를 거치지 않고도 자판기를 통해 신제품 시장조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곧바로 소비자 반응을 확인하고, 가격 전략을 기민하게 바꿀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기업의 이런 ‘직접 소매’ 전략은 일본의 자판기 문화를 지탱하고 있다. 물론 모든 게 순탄한 것은 아니다. 인구 감소와 편의점 확산, 물가 상승은 수익성이 떨어지는 자판기를 줄이는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전에 비해 자판기가 감소한 건 이 때문이다. 그러나 빈자리를 새로운 자판기가 채운다. 지방 특산 음료, 한정판 간식, 심지어 수소 전원으로 움직이는 친환경 자판기까지 등장했다. 일본에서 자판기는 단순한 판매 기계를 넘어 ‘작은 길거리 이벤트 상점’으로 진화하는 것이다. 오이타 사이키 해안가에서 만난 자판기는 곧 사라질 소도시의 애잔함을 담고 있다. 사람은 떠나고 폐가만 늘어나는 곳에서 자판기도 조만간 자취를 감출 게 분명하다. 여름 한낮 텅 빈 마을을 도는 동안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이미 오래전 폐교한 게 분명한 소학교 정문은 출입을 막는 쇠줄이 걸려 있었다. 그럼에도 입구에는 어김없이 코카콜라 로고가 선명한 자판기가 있었다. 누가 여기까지 와서 자판기를 이용하는 것인지 도무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어쩌다 들리는 눈먼 관광객을 상대로 푼돈이라도 벌어보려는 심산에서 설치한 것은 아닌지 짐작할 뿐이다. 인적이 드문 황량한 마을에도 여전히 “언제나 거기 있는” 자판기는 을씨년스러운 마을풍경과 묘한 대비를 이뤘다. 모든 게 느리게 흘러가는 일본 사회의 단면이다. 마을을 떠나기 전, 방파제에 앉아 파도 소리를 들으며 우롱차를 한 모금 마셨다. 눈앞에는 바다, 옆에는 자판기가 쓸쓸히 서 있었다. 일본에서 자판기는 단순한 기계가 아니다. 그들이 만들어낸 삶의 방식이자 풍경을 담은 거리의 소품이다.
    바닷바람 속 풍경이 된 일본 자판기
    by 임병식
    2025.09.22 10:46:36
  • 일본 평화헌법 9조는 전쟁 포기, 전력 보유 금지, 교전권 불인정을 명문화하고 있다. 패전 직후 연합군 점령하에서 뼈대를 갖췄다. 비록 타의에 의한 것일망정 평화헌법 9조는 80년 가까이 일본의 정체성을 집약한다. 그러나 일본은 평화헌법에 걸맞은 비무장 국가가 아니다. 일본의 군사력은 세계 8위이며 국내총생산(GDP)의 1.4%에 해당하는 553억 달러를 국방비로 지출하는 군사강국이다. 참고로 한국은 세계 5위다. 결국 일본은 국제사회를 향해서는 평화를 외치는 한편 끊임없이 군사력을 증강해온 것이다. 겉 다르고 속 다른 일본인의 습속은 평화헌법에도 반복된다. 국제사회는 일본의 평화 담론에 의문을 제기한다. 미국 해병과 일본 육상자위대가 참가하는 미일 합동훈련(9월 11~25일)이 진행 중이다. 중국과 러시아, 북한이 중국 전승절 80주년 기념식에서 결속을 다진 직후라는 점에서 관심이 높다. 비슷한 시기(9월 15~19일) 한미 연합훈련도 있다.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한미일과 북중러가 대치하는 구도다. 미일 합동훈련에는 역대 최대 규모인 1만 9000명이 참가하고, 중거리 미사일 시스템 ‘타이폰’도 첫 동원됐다. 타이폰에 탑재한 토마호크 사거리는 1600㎞로 베이징과 평양을 사정권에 두고 있다. 중국과 북한은 강하게 반발했다. 일본 언론은 중국을 염두에 두고 있다며 중국을 겨냥한 훈련임을 부인하지 않았다. 일본이 군대와 최첨단 무기를 보유하고 해외 파병까지 하는 이유는 미국과 일본의 이해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재무장을 눈감고 있다. 일본은 중국과 북한의 미사일 위협을 핑계삼아 꾸준히 군사력을 강화해 왔다. 한국을 포함 일본의 식민지배 기억을 공유하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입장에 대해서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이러한 국제정세에 편승한 아베 정부 때는 아예 ‘전쟁할 수 있는 나라’를 꿈꾸며 헌법 개정까지 시도했다. 스스로 지킨다는 ‘자위대’의 무장을 강화하고 도처에 ‘평화’를 남발하며 과거사를 분칠해온 게 일본 평화헌법의 현주소인 셈이다. 일본을 다니다 보면 기념관과 박물관 등에서 평화라는 명칭을 흔히 접한다. 심지어 자살을 강요한 가미카제 특공기지마저 ‘치란평화특공회관’으로 부른다. 일본이 유독 평화에 집착하는 건 가해자로서 과거사를 덮고 합리화하려는 심리의 결과물이다. 일본 청년들과 이야기할 때마다 놀랄 때가 한두 번 아니다. 대학교육까지 마쳤음에도 불과 100년 전에 일어난 역사를 제대로 아는 이가 드물기 때문이다. 아사히신문 기자를 지낸 나리카와 아야 역시 ‘지극히 사적인 일본’에서 자신과 또래들의 역사 인식 부족을 고백했다. 그들 잘못이 아니다. 아예 과거사를 가르치지 않는 일본 교육에 문제가 있다. 히로시마는 메이지 시대부터 군사·상무 도시였다. 1888년 제5사단 사령부가 설치됐고 청일전쟁(1894~1895) 때는 육군 대본영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도 병기창과 부대가 집중된 군사 거점이었다. 전후 히로시마는 “어떠한 군사시설도 없다”는 수사를 전면에 내세워 ‘평화 도시’를 자임해 왔다. 그러나 현실은 다른 방향으로 달린다. 히로시마에서 자동차로 불과 1시간, 41km 떨어진 이와쿠니 기지는 미·일 동맹의 최전선이다. 미군은 지난해 7월 이곳에 최신예 F-35 스텔스 전투기 배치한데 이어 이번에는 중거리 미사일 시스템 ‘타이폰’을 전개했다. 이른바 ‘평화의 도시’에서 한 시간 남짓한 곳에서 벌어지는 모순된 얼굴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그동안 ‘평화 도시’로서의 정체성을 과시해 왔다. 그러나 그 평화는 피해의 서사를 키우면서 가해의 역사와 책임을 흐리는 데 더 오래, 더 유용하게 쓰여 왔다. 이 불편한 비대칭이야말로 일본의 평화 담론에 물음표를 붙이는 이유다. 가해와 피해의 기억을 정직하게 기록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히로시마 원폭 공원에서 주어는 ‘일본인’으로만 수렴한다. 조선인 수만 명이 희생됐다는 사실은 주변부로 밀려나 있다.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평화공원 내부로 들어오기까지 무려 29년이나 걸렸다. 타자의 고통을 공원 울타리 바깥으로 밀어냈던 그 오랜 시간을 통해 일본의 이중성을 볼 수 있다. 지난 2016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히로시마 원폭 공원에서 헌화하고 피해자를 포옹했다. 또 한·일 정상은 2023년 공원 내 한국인 위령비를 찾아 함께 참배했다. 역사는 한 걸음씩 나아가며 화해한다. 그러나 전쟁할 수 있는 나라를 앞세우며 군비를 증강하고 ‘피해자 일본’이라는 자기 서사에만 몰두한다면 평화는 공허할 수밖에 없다. 일본의 평화 담론에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당신들이 말하는 평화는 어떤 평화인가.” 피해의 기억만 부풀린 평화는 과거를 미화하고 현재의 군사화를 가린다. 가해 사실을 인정하고 이웃의 상처까지 보듬으며 힘의 사용을 억제할 때 비로소 평화에 도달한다. 선택은 일본의 몫이다. 히로시마 원폭 평화공원 강변에 서면 원폭 돔의 철골이 물그림자로 떨린다. 그 흔들림은 경고다. 평화는 기억을 선택하는 기술이 아니라 불편한 진실을 포용하는 용기다. 일본이 그 용기를 택할 때, ‘평화 헌법’이라는 간판은 위장막이 아니라 약속이 된다. 그 약속 앞에서 비로소 일본이 말하는 평화 담론은 신뢰를 획득할 수 있다. 북중러 결속에 대응하는 미일 합동훈련과 치란평화특공회관, 히로시마 원폭 공원을 관통하는 평화를 생각한다.
    ‘전쟁하지 않는 국가’ 일본의 속내
    by 임병식
    2025.09.16 14:20:56
  • 점차 현실로 다가오는 북극항로는 단순한 물류 효율을 넘어 국가의 안보와 경제를 좌우하는 핵심 전략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기후변화로 북극 해빙이 가속화하면서 대한민국의 포항항, 울산항, 부산항 등이 복수의 거점항만으로 활약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 극지연구소를 비롯한 국내 기관들은 북극 해빙 연구에 매진하고 있으나 하루에도 여러 번 변하는 북극의 해빙 상태를 실시간으로 파악하지 않고서는 안전한 항해가 불가능하다. 정보의 지속성, 해상도, 그리고 실시간성 부족은 북극항로 운용에 있어 우리의 국가적 자율성을 제약하는 명확한 한계로 작용한다. 결국 중요한 열쇠 중 하나는 초소형 위성이다. 과거에는 기술 검증용에 머물렀던 초소형위성은 이제 고성능 센서를 탑재한 강력한 도구로 진화하고 있다. 여러대의 위성으로 구성된 군집 위성 시스템은 기존 위성보다 낮은 궤도에서 지구를 더 자주, 더 정밀하게 관측할 수 있다. 특히 기상 조건과 관계없이 해빙을 관측하는 SAR(합성 개구 레이더) 기술은 안정적인 항로 운용에 필수적이다. 또한 마이크로파 복사계는 구름과 어둠을 투과해 연중 내내 해빙의 면적, 농도, 두께를 측정함으로써 혹독한 북극 환경에서도 지속적인 관측을 가능하게 한다. 해외에서는 이미 초소형 위성을 활용한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 국토안보부에서는 북극 지역에서 조난 선박의 긴급 신호를 감지하기 위해 큐브샛을 발사했고 노르웨이는 NorSat을 통해 북극 선박 교통을 모니터링하고 있다. 이처럼 초소형위성은 특정 목적에 맞춰 효율적으로 운용될 수 있어 북극항로 개척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여기에 우리나라의 핵심 전략인 ‘AI 대전환’ 정책이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다. 즉 위성으로 부터 쏟아지는 방대한 데이터를 단순히 모으는 것을 넘어 AI와 딥러닝 기술로 분석하여 의미 있는 정보로 탈바꿈시켜야 한다. AI는 실시간으로 해빙의 이동 경로와 위험 구간을 예측하고 선박에 최적의 항로를 제안하는 등 실제 운항에 필요한 ‘지능’을 제공할 것이다. 이처럼 AI는 방대한 데이터의 ‘두뇌’ 역할을 하며 기술적 진보를 실질적인 경제적 가치로 연결할 수 있다. 특히 딥러닝은 해빙의 균열 감지, 두께 추정, 미래 해빙 범위 예측 등 기존의 물리 기반 모델이 가진 한계를 보완하고 예측의 정확성을 높여 북극해 운항의 안전성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다. 최근 국회에서도 북극항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북극항로 운항 지원을 위한 초소형위성 개발사업’을 주제로 토론회가 열렸다. 김현철 극지연구소 원격탐사빙권정보센터장은 ‘초소형위성 사업의 추진 경위 및 준비 현황’에 대해 발제하며 로드맵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는 북극항로의 안전한 해상 운항을 보장하고 기후 위기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역할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또한 북극항로 운항 지원을 위한 초소형위성 개발사업은 AI와 위성 기술의 융합으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우주로 확장하는 중요한 발걸음이 될 것이다.
    초소형 위성과 AI가 열 북극항로
    by 최성환
    2025.09.12 15:50:32
  • 근래 뜨거운 관심을 모으고 있는 스테이블코인을 제도권으로 편입하기 위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미국은 지난 6월 연방 상원을 통과한 ‘지니어스법(GENIUS Act·Guiding and Establishing National Innovation for U.S. Stablecoins Act)’에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하면서 스테이블코인 법제화에 첫발을 내디뎠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6월 발의된 디지털자산기본법안 외에 3건의 스테이블코인 관련 법안이 추가로 발의되어 있다. 정부도 작년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 시행에 이어 2단계 입법의 일환으로 스테이블코인 관련 법안을 준비해서 10월경 제출할 계획이라고 한다. 현재까지 발의된 법안을 둘러싸고 업계와 실무에서 여러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기 위한 요건을 어떻게 정할지(즉, 진입규제를 어느 수준으로 정할지)에 대해서는 은행권과 핀테크 업계의 입장이 엇갈리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법화에 연계(페깅)되어 가격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을 본질로 하고 국경의 제한을 넘어 거래될 수 있기 때문에, 금융위 뿐만 아니라 기재부(외환당국), 한은(통화당국)의 규제와 감독 대상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각 부처의 업무와 권한을 어떻게 획정할지에 대해서도 온도차가 감지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 법제화 과정에서 고려해야 할 다른 법률도 있다. 현행 외국환거래법 체계상 가상자산을 어떻게 규율하는 것이 적정한지에 대해서는 수년간 논란이 있어 왔다. 가상자산이 외국환에 해당할 여지가 있는지, 구체적으로 가상자산이 자본시장법상 증권의 성격을 가지는 경우(소위 ‘토큰증권’에 해당하는 경우) 비거주자를 상대방으로 하는 토큰증권 거래에 대해 외국환거래법상 외화증권에 대한 규제를 전면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지, 토큰증권이 아닌 일반적인 가상자산 양수도거래는 경상거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지 등 여러 문제에 대해 그간 논의가 있었지만 외환당국은 아직까지 명확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있다. 2017년 외국환거래법 개정으로 도입된 소액해외송금업의 경우, 송금 매개수단으로 가상자산을 활용하는 방식은 사실상 허용되지 않는 것으로 실무에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규제 불확실성 속에서 시중은행들은 가상자산 취득 목적의 해외송금 처리에 여전히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스테이블코인 법제화 과정에서 전자금융거래법을 손볼 필요가 있는지도 논의가 필요한 과제이다. 스테이블코인은 법화에 연계되어 발행되기 때문에 지급·결제에 활용되기 쉽다. 이를 감안해서 스테이블코인은 전자금융거래법 체계에 흡수해서 전자화폐나 선불전자지급수단에 준해 규율하는 것이 적절하고 규제차익 논란도 방지할 수 있다는 견해가 그간 실무에서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지금까지는 스테이블코인(또는 스테이블코인을 포함하는 디지털자산 전반)에 대한 단행법을 제정하는 방향으로 입법 논의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세부 규제가 전자금융거래법에 담기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스테이블코인 규제가 단행법으로 제정되더라도 전자금융거래법 규제와 접점이 생길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가령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거나 유통하는 사업자가 스테이블코인을 매개로 하는 전자지급결제대행(PG)업을 영위할 유인이 생길 수 있다. 이는 넓게 보면 가상자산사업자의 전자금융업 진출(겸영)이 허용되는지에 대한 문제이고, 향후 전자금융거래법 규제실무에 대한 정교한 점검이 필요한 부분이다. 스테이블코인 법제화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풀어야 할 과제들도 많이 남아 있다. 연내에는 법이 통과될 것이라는 기대 섞인 전망이 나오고 있지만, 논의가 지지부진한 사이 입법의 적기를 놓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골든타임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규제당국과 국회, 그리고 업계가 더욱 긴밀하게 협조하면서 논의를 뚜벅뚜벅 진척시켜야 할 때다.
    스테이블코인 법제화에 즈음하여
    by 유정한
    2025.09.06 09:00:00
1 2 3 4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