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74
  • 지난해 가을 일본 홋카이도 치토세공항에 내렸을 때 공기는 유난히 차가웠다. 맑은 하늘 아래 평야와 산림은 평온했지만 공항 인근은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거대한 굴착기와 덤프트럭이 먼지를 일으키며 오갔고 기계음은 첨단 반도체 공장인 ‘라피더스’가 들어서고 있음을 실감케 했다. 일본 열도 북쪽 소도시가 국가 전략산업의 무대로 바뀌는 현장이었다. 치토세시는 라피더스를 총력 지원했다. 인허가와 도로 정비, 숙소 확보를 신속히 진행했고 건설 차량이 몰려들자 전용 노선을 짜 교통 체증을 최소화했다. 라피더스는 소프트뱅크와 소니, 토요타, NTT 등이 2022년 세운 반도체 기업이다. IBM과 손잡고 2나노 시제품 개발을 마쳤으며 2027년 가동을 목표로 한다. 라피더스는 맞춤형 칩을 만드는 ‘싱글 웨이퍼’ 방식을 채택했다. 필요한 만큼 빠르게 공급하는 게 강점이다. 현지에서 만난 이들은 “이 작은 도시가 세계 반도체 지도의 한 축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좀처럼 허풍 떨지 않는 일본 국민성을 고려할 때 허언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동안 홋카이도를 다니며 자연풍광에만 취했는데 이제는 경관농업과 함께 반도체가 중요 산업으로 떠올랐다. 지난 8월에는 구마모토 기쿠요초에 있는 TSMC 공장에 다녀왔다. 공항에서 차량을 렌트해 15분여를 달려 도착했다. TSMC 1공장은 규모부터 압도적이었다. 클린룸만 도쿄돔보다 크다. 인접 부지에서는 뙤약볕 아래 2공장 터파기 작업이 한창이었다. 구마모토가 세계 1위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업체인 대만 TSMC를 유치한 건 2022년이다. 현지에서는 ‘자스무(JASM, Japan Advanced Semiconductor Manufacturing)’라고 부른다. JASM은 2024년 말부터 자동차·사물인터넷(IoT)용 반도체를 생산 중이다. 2022년 말 착공 이후 2년 만이니 빛과 같은 속도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 때문에 2공장 가동 시기는 2027년으로 늦춰졌지만 현지 분위기는 낙관적이다. TSMC 유치 이후 구마모토 인구는 급증했다. 지난해 일본 광역 지자체 가운데 인구 증가율 1위였다. 공장이 들어선 기쿠요마치는 4만 3000명에서 5만 명을 넘어섰다. 양배추와 당근밭이었던 공장 주변이 첨단 반도체 공장으로 탈바꿈하는 데는 2년이면 충분했다. 일본 정부가 반도체 부활을 국가 정책으로 내건 건 2021년이다. 반도체를 국가 전략산업으로 키우기 위해서다. 홋카이도 라피더스와 구마모토 TSMC는 그 중심에 있다. 일본은 1980년대 메모리 반도체를 중심으로 세계 시장을 장악했다. 1990년에는 반도체 제조사 매출 상위 10곳 중 6곳이 일본기업이었다. 그러나 삼성전자 등에 밀려 자취를 감췄다. 현재 반도체 제조사 매출 상위 10곳 중 일본기업은 없다. 글로벌 점유율도 10% 미만이다. TSMC 유치는 반도체 산업 부흥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일본은 파격적으로 지원했다. 1, 2공장 총투자액 중 절반에 가까운 1조 2000억 엔(약 12조 원)을 보조금으로 지원했다. 눈여겨볼 건 지자체다. 구마모토현과 기쿠요마치는 중앙정부와 함께 치밀하게 움직였다.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농지 전용 절차를 단축하고 토지 소유자와 교섭도 지원했다. 또 공업용수와 전력 공급, 도로 등 인프라와 주거 환경을 빠르게 정비했다. 인력양성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지역 여론도 우호적으로 조성했다. 아소 화산지대에 속하는 구마모토는 깨끗한 지하수와 안정적이고 저렴한 전력 공급이 강점이다. 반도체 관련 기업도 꾸준히 유치해 왔다. 구마모토 내 반도체 기업은 200여 개에 달하며 규슈는 일본 반도체 산업 총 매출의 55%를 차지한다. TSMC 유치 이후 기쿠요치는 활기를 되찾았다. 주민들 표정에도 기대감이 묻어났다. 1, 2공장에서 3400명 이상 고용 창출이 가능하다. 또 TSMC와 관련된 일자리는 지역 평균 시급을 두 배 웃돈다. 관련 기업도 급증했다. 소니, 도쿄일렉트론, 미쓰비시전기, 후지필름 등 86개 이상(2024년 말 기준) 반도체 기업이 구마모토에 둥지를 틀었다. 이에 힘입어 규슈 지역 반도체 관련 설비투자는 100건을 돌파했고, 투자액은 5조 엔(약 47조 5000억 원)을 넘어섰다. 호텔도 속속 들어섰다. 대만 직원과 가족 400여 명이 왔다. 구마모토와 대만 사이에는 매일 2~3편에 달하는 직항편이 운항 중이다. 필자가 찾은 날에도 공항 로비는 대만 초등생 야구단으로 북적였다. 구마모토현은 초중고 과정을 갖춘 국제학교를 확장하고 대만인 통역사를 배치했으며, 일반 학교의 영어 교육을 강화했다. 또 구마모토대학교에 반도체 학과를 신설했고 내년부터는 대학원 과정을 운영한다. 점심 식사를 위해 들린 초밥가게 주인은 “TSMC 직원들로 인해 매출이 급증했다”며 활짝 웃었다. 구마모토 TSMC와 치토세 라피더스의 시사점은 크다. 일본은 소재·부품·장비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다. 반도체 역량까지 더해지면 한국 기업의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일본은 정부와 민간이 하나로 뭉쳐 반도체 부활에 집중하고 있다. 막대한 보조금, 인프라 정비, 인력 육성, 신속한 행정 등 ‘원스톱 서비스’는 주목할 만하다. 한국은 위기 상황이다. 언론에 자주 회자되는 용인 SK하이닉스 반도체 공장은 6년 만에 착공했다. 일본과 대비된다. 주 52시간 근무에 예외를 두는 반도체특별법 또한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일본 반도체 산업 부활은 국가 차원의 강력한 의지, 신속하고 유연한 행정, 그리고 기존 산업 생태계와 연계할 때 어떤 시너지를 낼 수 있는지 보여준다. 치토세의 서늘한 바람, 구마모토의 뙤약볕 속에서 만난 일본 반도체 산업의 부흥이 예사롭지 않다.
    일본 반도체 부활 알리는 구마모토 TSMC·홋카이도 라피더스
    by 임병식
    2025.09.03 11:42:57
  • 일본에서 아이폰 점유율은 64%로 일본인들의 아이폰 사랑은 유별나다. 지하철 안에서 어떤 휴대전화를 사용하는지 살펴보노라면 예외 없다. 아이폰은 압도적 1위다. 구글(6%)과 삼성(5%), 샤오미(5%)가 나머지를 분점하고 있으나 존재감은 없다. 스마트폰을 구매할 일본 젊은이들에게 선택지는 오로지 아이폰이다. 갤럭시폰과 아이폰의 장단점을 따져 선택하는 우리와는 사뭇 다르다. 젊은 층에서 아이폰은 단순한 스마트폰이 아니라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 일본 젊은이들은 아이폰으로 소통하고 아이폰을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는 도구로 인식한다. 지난주 서울에 온 큰아이의 일본 친구들 역시 예외 없이 아이폰으로 길을 찾고 결제했다. 아이폰의 나라임을 거듭 확인한 자리였다. 유별난 아이폰 사랑은 왜일까. 편리함과 다양한 기능, 감각적인 디자인, 그리고 미국이라면 한 수 높게 치는 국민성이 떠오른다. 나름대로 설득력을 지닌다. 소프트뱅크의 스마트폰 일본 시장 선점을 빼놓을 수 없다. 일본 이동통신 시장에서 소프트뱅크(21%)는 1위 NTT 도코모(36.6%), 2위 KDDI au(27.1%)와 3강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일본인들이 아이폰을 처음 접한 건 소프트뱅크를 통해서였다. 아이폰을 가장 처음 들여온 이동통신사가 소프트뱅크다. 소프트뱅크는 2008~2011년까지 독점 판매권을 행사했고 이후 KDDI au도 아이폰을 취급하면서 아이폰은 대세가 됐다. 일본인들은 아이폰을 통해 스마트폰 세상과 만난 것이다. 이러니 무의식 속에 스마트폰은 곧 아이폰이라는 관성이 자리 잡을 수밖에 없다. 소프트뱅크는 손정의와 스티브잡스의 개인적 인연을 바탕으로 아이폰 독점권을 확보했다. 스기모토 다카시 니혼게이자이신문 기자가 쓴 ‘손정의 300년 왕국의 야망’에는 이와 관련된 일화가 나온다. 손정의는 아이폰이 출시되기 전 2005년 스티브잡스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아이팟에다 휴대전화 기능을 결합한 스케치를 보여주며 제품이 나오면 일본 판매권을 달라고 요청했다. 이 약속을 기반으로 소프트뱅크는 2006년 3월 보다폰을 170억 달러에 인수한 데 이어 2008년 6월 아이폰 공식 판매권을 확보했다. 시대 흐름을 앞서 내다본 손정의의 통찰력이 주효했다. 소프트뱅크는 아이폰을 앞세워 빠르게 시장 점유율을 확장하고 NTT, KDDI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다. 손정의는 플랫폼 사업에 진출하는 방식을 통해 사업을 확장해 왔다. 요즘은 플랫폼이라는 용어가 흔하게 통용되고 있지만 손정의가 사업가로서 첫발을 내디딘 1980년만 해도 생소한 용어였다. 플랫폼은 시장 지배적인 사업을 뜻한다. 석유왕으로 불리는 존 D. 록펠러가 구축한 석유 생태계는 좋은 사례다. 록펠러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을 때 채굴부터 정제, 유통까지 석유 플랫폼을 장악했다. ‘손정의 300년 왕국의 야망’은 록펠러를 헨리 포드와 함께 자동차 시대를 선도한 인물로 꼽는다. 록펠러가 석유를 공급하는 플랫폼을 구축하지 않았다면 포드의 대량생산은 무의미했다는 것이다. 컴퓨터 운영체제를 개발한 마이크로소프트, 검색 엔진 구글, 인터넷 유통을 장악한 아마존은 정보통신시대 플랫폼 기업인 셈이다. 록펠러가 그랬듯 손정의는 아이폰으로 시장 흐름을 주도한 것이다. 손정의 때문인지 후쿠오카는 창업 DNA가 넘실댄다. 일본 내에서 15~29세 청년 인구 비중(19.5%)이 가장 높고 스타트업 창업 분위기도 활발하다. 후쿠오카 시청에서 500m 거리에 있는 fgn(Fukuoka growth next)은 스타트업 산실이다. 1873년 설립된 다이묘 소학교를 리모델링해 2017년 4월 오픈했는데 148개 기업이 입주해 있다. 번화가에 폐교를 존치한 것도, 스타트업에게 공간을 내준 것도 인상적이다. fgn은 입주 기업에게 월 15만 엔 수준의 저렴한 사무실 임대, 맞춤형 프로그램, 강력한 행정지원 혜택을 제공한다. 특히 사업계획서 한 장으로 비자를 발급해주는 ‘스타트업 비자’는 파격적이다. 일본인은 조용하다는 선입견도 fgn에서는 무색하다. 마침 찾은 때가 오후였는데 주변 거리는 스타트업에 종사하는 젊은이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일본인들이 아이폰을 선호하고 후쿠오카가 역동적으로 바뀐 것은 손정의와 소프트뱅크 덕분이다. 후쿠오카 현지에서 만난 일본 청년들이 생각하는 손정의의 그늘은 생각보다 넓었다. 그들에게 손정의는 닮고 싶은 우상이다. ‘소프트뱅크 호크스’ 프로야구단 홈구장 pay pay돔에서 만난 미야사키씨(28) 일행은 손정의가 자랑스럽다고 했다. 지방도시 후쿠오카에 일본 청년들이 몰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도 후쿠오카 거리는 제2의 손정의를 꿈꾸는 젊은이들로 활기차다. 후쿠오카 fgn 모델은 대기업 유치에만 목을 매는 우리 지방 현실에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스타트업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성장모델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덧붙이자면 한국에서 아이폰(23%) 점유율은 갤럭시 폰(68.3%)의 3분의 1수준이다. 앞서 언급했듯 아이폰은 다양한 편리성, 강력한 브랜드 충성도, 현지화를 통해 일본 시장을 장악했다. 아이폰은 일본 교통 결제 시스템과 빠르게 연동해 실생활과 밀접한 서비스를 구축했다. 또 Felica 결제나 일본 특유 문자 통신환경에 최적화됐다. 일본 소비자들이 한국 제품이라서 갤럭시폰을 외면한다고 생각한다면 섣부른 국수주의일 뿐이다. 프리미엄 이미지 구축, 현지 통신사와 전략적 제휴, 현지 맞춤형 서비스를 주목해야 한다. 어설픈 민족주의로 재단한다면 장벽을 뛰어넘을 수 없다. 아이폰과 소프트뱅크, 후쿠오카를 연결하면 희미하게나마 길이 보인다.
    일본의 유별난 아이폰 사랑, 왜?
    by 임병식
    2025.08.22 17:18:12
  • 오늘날 우주 패권 경쟁은 이제 단순한 기술력이 아니라 인공지능(AI)을 통한 민군 융합 전략이 핵심이다. AI 기반 위성 데이터 분석은 새로운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핵심 분야로 AI가 위성 영상을 분석하여 작황을 예측하거나 산림 파괴를 감시하는 등 다양한 민간 서비스로 확장되고 있다. 미국은 중국과 러시아의 위성 공격 능력 개발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민간과 정부의 협력이 중요해짐에 따라 ‘오비탈 워치(Orbital Watch)’ 프로그램을 통해 민간과 군이 AI 기반 우주 궤도 위협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AI 기반 정보 공동체’를 구축하며 우주 자산의 생존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또한 AI, 양자, 극초음속 등 첨단 기술을 우주 분야에 접목하여 자국 군사력의 약점을 공략하는 ‘점혈전(点穴戰)’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반면 중국은 ‘민군 우주융합(Military-Civil Fusion)’ 전략을 통해 민간 부문의 기술과 자원을 군사 부문에 적극적으로 통합하고 있다. 글로벌 민군 우주융합 트렌드는 단순히 기술을 공유하는 것을 넘어 민간 부문의 혁신을 군사력 증강의 원동력으로 삼아 미래 전장에서의 전략적 우위를 점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미래 우주 패권 경쟁은 ‘민군 우주 융합’을 통해 독자적인 기술력 개발에 좌우될 것이다. 우리나라가 이 흐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이재명 정부의 ‘AI 일상화’ 및 ‘디지털 혁신’ 기조를 우주 전략에 적극적으로 통합해야 한다. AI를 단순한 도구가 아닌 우주 안보와 산업 혁신을 동시에 달성하는 국가적 비전의 심장으로 선정하기를 제언한다. 이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K-민군 우주 융합 전략’을 효과적으로 펼쳐야 한다. 우선 ‘AI 기반 우주 전략 설계’를 통해 국가 차원의 AI 우주 전담 조직을 신설하여 우주 안보와 산업 발전을 통합 관리가 필요하다. 둘째, AI 우주 기업 생태계 육성에 적극 나서야 한다. AI 기반 위성 데이터 분석, 자율 임무 수행, 초소형 군집위성 운용 등 AI 기술을 활용하는 혁신적인 민간 우주 기업에 대한 투자와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 셋째, 독자적 AI 우주 기술 확보가 중요하다. AI 기반 위성 항법시스템 정밀화, 궤도상 서비싱 기술, 우주 데이터 처리·분석 기술 등 전략적으로 중요한 AI 우주 기술의 국산화를 최우선 과제로 추진해야 한다. 넷째, 미래형 우주 인재 양성에 팔을 걷어붙여야 한다. 우주 공학, AI, 데이터 과학을 융합한 전문 인력을 체계적으로 육성하고 민간·국방·학계 간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우주 혁신을 이끌 인재를 확충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AI를 우주 전략의 핵심 동력으로 삼아 우주 경쟁의 판도를 바꾸는 담대한 도전에 나서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K-우주 방산’을 견인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라고 생각한다.
    AI, 우주 패권을 쏘아 올리다: K-민군 우주 융합 전략
    by 최성환
    2025.08.18 12:20:47
  • 대한민국은 한때 세계가 주목하는 거대한 실험장(테스트베드)이었다. 자동차, 철강, 화학, 반도체 같은 중후장대 제조업은 정부 주도의 과감한 투자와 제도적 지원 속에서 기술 자립을 이뤘다. 지난해 자동차 산업은 생산 412.8만 대, 수출 708억 달러, 약 30만 명 고용을 기록하며 여전히 국가 경제의 중추 역할을 하고 있다. 반도체도 메모리 분야를 중심으로 전체 수출의 20% 이상, 1400억 달러 넘는 실적을 올리며 효자 노릇을 한다. 철강, 석유화학, 조선도 정부의 전략적 산업 정책 아래 수출산업으로 성장해 대한민국을 선진국 반열에 올려놓는데 기여했다. 반면 문화와 지식 산업은 성장 경로가 달랐다. K컬처, K푸드, K뷰티 같은 분야는 민간 주도의 창의와 자율이 원동력이었다. 한류 콘텐츠의 확산은 국가 정책이 아니라 기업과 창작자들의 도전에서 비롯됐다. K뷰티는 브랜드 스토리텔링과 글로벌 유통망으로 세계 시장을 넓혔다. 제조업이 국가 주도의 ‘위로부터의 실험’이라면 문화 산업은 시장의 역동성 속 ‘아래로부터의 실험’이었다. 그렇지만 중후장대 제조업과 문화·지식 산업의 성장 방식은 달랐지만 두 길 모두 ‘실험을 통한 성장’이라는 DNA를 공유했다. 문제는 이 DNA가 최근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문재인 정부의 그린뉴딜,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 등 새로운 성장동력 시도는 있었지만 제조업이나 한류 콘텐츠 수준의 성과를 내지 못했다. 특히 바이오, 태양광, 풍력 같은 미래 산업은 수차례 테스트베드 시도가 좌절됐다. 바이오 산업은 2005년 말 줄기세포 연구 논문 조작 의혹에 휘말린 ‘황우석 사태’나 2020년 임원들의 배임죄 의혹과 임상 실패로 거래정지됐다가 이후 2년 5개월 만에 거래가 재개된 ‘신라젠 사건’들과 같은 투명성 이슈와 단기성과에 매달리는 풍토로 지지부진한 상태다. 태양광은 정치적 논란은 뒤로 하더라도 전력망 연계 지연과 변전소 부족에 막혔고 울산 해상풍력의 경우 주민 반발과 정치적 이유로 수년간 중단됐다. 에너지 정책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탈원전’과 ‘원전 회귀’를 오가는 바람에 장기 계획의 일관성 측면에서 많은 문제를 드러냈다. 이는 단순히 지역 갈등이나 기술 미성숙의 문제가 아니다. 정책 설계의 정교함, 이해관계 조정 능력, 경제 문제에 대한 정치적 중립성, 실패를 흡수할 수 있는 안전망 부재 등이 원인이다. 제조업과 지식산업은 각자의 방식으로 시험을 거듭하며 경쟁력을 쌓았지만 새로운 성장동력을 만들고자 했던 신산업들은 애초에 시험의 기회조차 충분히 부여받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 출범한 이재명 정부는 AI를 국가 성장의 축으로 세우며 ‘인공지능(AI) 선도국’을 선언했다. 100조 국민성장펀드 조성, 벤처 투자 연간 40조 달성 등 구체적인 국정과제까지 마련하여 인프라·기술·인재를 동시에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높다. 아직 재원의 조달 구조가 불명확하고 국가 AI컴퓨팅센터 구축사업은 사업자 선정과정부터 표류하고 있다. AI 인재 유출이 심화하고 있어 단기 유인책만으로는 장기 생태계 구축이 어렵다. 미국과 중국의 투자 속도와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이런 조건에서 ‘AI 선도국’이 되려면 예산 투입 이상의 전략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정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공정한 ‘놀이터’, 즉 혁신 생태계를 조성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불필요한 규제를 과감히 없애고 실증 사업의 실패가 곧 산업 전체의 붕괴로 이어지지 않도록 안전판을 마련하여 민간의 창의력이 발휘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의지가 필요한 때다. 정부는 생태계를 만드는 역할에 충실하고 실제 ‘실험’은 민간의 손에 맡기면서 기업이 정부 관계가 아니라 실질적인 성과에 힘쓰도록 도와야 한다. 그리고 이 ‘놀이터’에서 뛰어난 성과를 내는 곳에 정부 자원을 집중 지원해야 한다. 과거 우리는 나눠먹기식의 분산 투자로 진정한 승자가 없는 상황을 만들곤 했다. 누구나 가능성을 가지고 도전을 하게 하되 실질적인 성과를 내는 기업이 마지막 한고비(캐즘)를 뛰어넘게 도와줘야만 기업이 국가의 성장동력까지 클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에너지 정책이 정권 교체에 따라 ‘탈원전’과 ‘원전 회귀’를 오가며 장기 계획의 일관성이 무너졌던 실패를 반복하지 않도록 AI 전략은 정권이 바뀌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법제화와 사회적 합의를 통해 지속성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기술 개발뿐만 아니라 AI 윤리, 데이터 활용 등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분야들을 정부가 주도해서 조율하고 장애를 없애야 한다.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의견을 조율하고 설득하는 정치적 리더십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일관성 있는 정책 추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이미 자동차, 인터넷, 5세대 통신(5G)에서 국가 전체를 거대한 테스트베드로 5활용해 세계를 선도한 경험이 있다. AI라는 새로운 도전 앞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테스트베드 국가’의 DNA를 되살려야 AI 시대의 진정한 선도국으로 도약할 것이다.
    선진국을 넘어 선도국 전략이 필요하다
    by 이보형
    2025.08.18 11:39:46
  • 무더위가 극성을 부린 8월 초, 일주일을 일본 남부에서 보냈다. 후쿠오카와 오이타, 구마모토에 머무는 내내 불볕더위 속을 헤집고 다녔다. 가마솥 더위라는 사전적 의미를 온몸으로 체감한 여정이었다. 언론은 ‘펄펄 끓는 일본 열도’라며 자극적인 제목으로 보도했다. 현지에서 느낀 실상은 펄펄 끓는다는 표현조차 무색할 지경이었다. 이달 5일 군마현 이세사키(伊勢崎) 시는 41.8도를 기록했다. 일본 기상청은 관측 사상 최고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날 사이키(佐伯)시 해안도로를 일주하던 나는 오후 일정을 포기한 채 서둘러 숙소로 돌아왔다. 렌터카 계기판에 표시된 ‘외부 기온 43도’를 확인한 순간 더는 무리라고 판단했다. 결정은 틀리지 않았다. 그날 밤 NHK는 전국 각지에서 온열질환자가 속출했다고 알렸다. 올 여름에만 5만3,000명에 달하는 온열질환자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또 이상고온은 벼 작황에 악영향을 미쳐 4년 연속 수확량 감소가 우려된다고 덧붙였다. 일본은 최근 3년 동안 쌀값이 급등해 정권 위기로까지 번진 상황이다. 이상고온 때문에 수확량이 급감하면서 쌀값 폭등으로 이어졌다. 올해도 쌀값을 잡지 못하면 자민당은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놓이게 된다. 정권을 위협할 정도의 이상고온이니 땡볕과 열대야를 피해 떠난 일본 여정은 호랑이굴 속으로 들어간 격이 됐다. 허구한 날을 놔둔 채 하필 가장 더울 때 일본에 왔나 싶었다. 폭염과 산불, 집중호우가 지구촌 일상이 된 지는 오래다. 산업화 이후 인류는 지구를 지나치게 학대했다. 세계 195개국은 2015년 파리기후협정에서 지구 기온 상승을 1.5도로 묶는 데 합의했다. 온실가스 감축 노력에도 불구하고 온도 상승은 계속되고 있다. 일본 정부는 2018년 기후변화 적응법을 제정한 뒤 다양한 정책을 추진 중이다. 47개 도도부현, 지정도시 20곳, 311개 지자체가 참여하고 있다. 연간 1,295명 수준의 온열질환 사망자를 절반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하고, 고온에 강한 벼 품종도 개발 보급했다. 농림성은 이달 5일 쌀 생산량 증대, 가뭄 완화를 위한 긴급 조치를 발표했으나 큰 흐름을 되돌릴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재명 정부도 다양한 기후변화 대응 정책을 추진 중이다. 눈에 뜨이는 건 ‘기후에너지부’ 신설이다. 여러 부처에 산재한 정책을 집중함으로써 효율을 높인다는 것이다. 재생에너지 확대와 석탄 발전 폐지도 공약했다.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비율을 35% 달성하고 2040년까지 석탄발전소를 폐지할 계획이다. 반면 미국은 국제사회 움직임을 거스르고 있다. 트럼프는 “기후 위기는 사기극”이라며 파리협정 탈퇴에 이어 화석연료 중심 에너지 정책으로 회귀하고 있다. 환경 규제도 완화했다. 자동차 연비·배출 규제를 완화하고 환경보호청(EPA) 권한을 축소했다. 국제사회는 미국의 복귀를 촉구하고 있으나 현실은 비관적이다. 1990년대 이후 일본의 여름 평균 기온은 꾸준한 상승세에 있다. 폭염(35도 이상) 횟수는 40년 전보다 2배 이상 증가했다. 열사병 사망자 또한 2018~2022년 5년 동안 평균 1,295명에 달했다. 1995~1999년 201명과 비교하면 5배 이상 급증했다. 선진국 일본에서 원시적인 더위 때문에 사람이 죽어 나간다는 건 아이러니다. 기후재앙의 가장 큰 피해자는 사회 경제적 약자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2024년 온열질환자 3,704명 가운데 34명이 숨졌는데 대부분 약자였다. 문제는 갈수록 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온열질환자는 최근 5년(2020~2024년) 평균보다 25.3% 급증했다. 이대로라면 ‘사상 최고’ 행렬 속에 기후 불평등은 가속화될 전망이다. 벳부를 출발해 후쿠오카로 가는 길, 급작스러운 폭우로 애를 먹었다. 차량 와이퍼를 최고치로 올렸어도 시야를 확보하는 게 쉽지 않았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폭우가 사그라들기를 기다리며 30여 분을 허비했다. 어제는 폭염으로 힘들었는데 오늘은 폭우라니 종잡을 수 없는 날씨였다. 폭염 뒤 찾아오는 집중호우는 어느덧 한국과 일본에 일상이 됐다. 극심한 땡볕과 물난리를 반복하면서 인명과 재산 피해를 키우고 있다. 그날 밤 후쿠오카 숙소에서 NHK를 통해 규슈 지역을 강타한 집중호우 소식을 접했다. 이시바 총리까지 나서 가고시마 일대 호우경보를 언급하며 피해 최소화를 위한 정부의 노력을 강조할 만큼 큰 비였다. 출국 이틀 전, 구마모토 아소(阿蘇)산에 올랐다. 대학 1학년 1984년에 처음 올랐으니 40년 만이었다.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짚으며 오른 쿠사센리(草千里) 평원부터 나카다케(中岳) 화산 분화구, 다이칸보(大觀峯) 전망대로 이어지는 풍광은 절경이었다. 특히 불구덩이나 다름없는 산 아래와 달리 산 정상 기온은 23도에 불과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한기를 느끼며 40년 전 여름, 나를 맞았던 일본 홈스테이 가족을 떠올렸다. 딸만 셋인 집에서 한여름 외국인 남학생을 받는 건 쉽지 않다. 지난해 방문길에 어떻게 그런 결정을 했느냐고 물었다. 이제는 80대 중반이 된 아츠코 아주머니는 “어라, 그렇네”라며 무심코 답했다. 의식조차 하지 않은 환대였다. 돌아오는 날, 일본 언론은 전날 비 피해를 집중보도했다. 홈스테이 가족의 안전을 기원했다.
    정권 위협하는 기후위기 속 일본
    by 임병식
    2025.08.10 14:13:18
  • 최근 반려동물의 증가와 함께, ‘리얼 베이비돌’ 인형이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실제 아기처럼 정교하게 제작된 인형을 통해 불안 완화와 정서적 안정을 얻는 사람이 늘고 있다. 인형을 통해 외로움과 상실을 치유받는 이들에게 감정과 존재의 경계는 어디까지일까. 위로와 치유의 과정을 보며 자연과 우리의 관계를 질문해 본다. 인간은 문명을 창조했다. 불을 발견하고 바퀴를 만들었으며, 도시를 세우고 산업을 일으켰다. 자연을 정복하고, 기술 발전을 통한 인공지능이 인간의 사고와 노동을 대신하는 지금, 인간은 자연 없이 살 수 있을까. 지난 6월, 강원도 인제에 위치한 DMZ 평화생명동산을 찾았다. 16년째 현장을 가꾸고 있는 정성헌 이사장은 “이곳은 인간이 만든 공간이 아닙니다. 자연이 만든 삶터입니다. 인간은 그저 머물며 치유와 희망을 얻을 뿐이지요.”라고 말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바람과 흙냄새까지 살아 숨 쉬는 동산. 그곳은 단순한 교육장이 아닌 생명과 평화의 성소였다. 자연은 쉼 없이 자신을 회복하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진정한 활력을 되찾고 있었다. 개발이 멈춘 DMZ 생태보존지구는 다양한 야생 동식물이 자생하고,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공간에서 자연은 본래의 질서를 유지하며 살고 있었다. 그 모습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연이라는 ‘비인간 존재’의 강력한 메시지로, 자연을 지키는 일이 단순한 환경보호를 넘어, 인류의 생존 조건이자 평화의 출발임을 각인시켰다. 도시화와 산업화는 우리 삶을 급격히 바꾸었다. 도시는 과밀과 고립에 시달리고, 농촌은 감소와 소멸의 위기를 겪고 있다. 기술과 효율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인간은 점점 자연과 단절되었고, 단절은 고립과 상실을 넘어 불안으로 되돌아오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회복해야 할 때이다. 우리는 그동안 깨끗한 물, 건강한 흙, 맑은 공기의 가치를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왔다. 그리고 인간의 탐욕과 무분별한 개발은 생태계를 파괴했고, 기후 위기로 인한 폭염과 홍수, 가뭄과 산불의 빈번한 자연재해는 우리 스스로가 어떤 존재인지 되묻게 한다. 자연은 더 이상 무한정 제공되는 대상이 아니며, 자연을 지키는 일은 곧 우리 자신을 지키는 일인 것이다. 자연은 인간 생명의 지속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생명의 균형과 공존의 방식을 배워야 한다. 지금 이 시대는 자연과 공존하는 삶을 이끌 지도자 양성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기술 중심이 아닌 생명 중심의 세계관을 가진 이들, 곧 자연 생태의 가치 철학을 갖춘 이들이야말로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프랑스 인류학자 브뤼노 라투르는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그는 인간만을 중심에 두는 사고를 넘어, 자연과 비인간 존재들을 ‘행위자(Actant)’로 바라보며 그들과의 평등한 관계를 강조했다. 인간은 자연과 연결된 존재이며, 그 관계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 대형 선박은 정교한 기술의 집약체지만, 위기 상황에서 일부가 붕괴되도록 설계된다. 선체 전체의 위험을 막기 위해 의도된 약점을 도입하는 것이다. 이를 ‘디자인 위크 니스(Design Weakness)’라 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신학적 관점에서 창조주는 인간을 완전한 자립체로 만들지 않았다. 인간은 자연에 의존하도록 디자인되었으며 그 의존성은 계획된 약점이다. 자연과의 연결 없이는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인간이다. ‘비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배제하거나 지배할 대상이 아니다. 자연, 동물, 다양한 생명체들은 인간이 잃어버린 균형을 되찾고, 상처받은 감정을 회복하며, 삶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그들을 통해 배우고, 그들과 함께 해야 한다. 이러한 전환의 실험은 DMZ에서 이미 시작되었고, DMZ가 보여주는 공존의 생태는 농촌에도 뿌리내리고 있다. 농촌은 단지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자연 생태 공동체의 가능성을 지닌 곳이다. 이것이 또 하나의 ‘농촌유토피아’이며, 지역의 지속 가능한 경제·문화 모델이기도 하다. 전남 곡성과 충북 괴산에 진행되고 있는 ‘농촌유토피아 선도마을’은 이러한 비전을 실천에 옮기는 중요한 기반이다. 비인간이 인간을 구한다. 자연을 보존하고 되살리는 일은 인간을 구하는 일이다. 자연과 공존하는 삶은 ‘사람이 살 수 있는 자연’을 조성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것이 기후 위기와 지역 소멸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 농촌이 다시 살아나는 길이자 다음 세대를 위한 우리의 책임이다.
    ‘비인간’이 인간을 구한다
    by 조금평
    2025.08.01 14:05:01
  • 정책은 이성의 산물일까, 감정의 표현일까. 공공정책이란 이름 아래 제안되는 수많은 제도들은 과학적 근거, 전문가의 논리를 바탕으로 움직이는 듯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정책을 움직이는 힘은 합리성을 넘어 정서와 감정, 그리고 공감으로 뒷받침된다. 그런 이유에서 ‘정책 브랜드(policiy brand)’란 개념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일반적으로 정책을 논할 때의 필요조건은 합리성이다. 문제 진단, 대안 탐색, 비용 편익 분석. 이 모든 과정이 이성적 판단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현실의 정책은 종종 그 합리적 울타리를 넘어서는 대중의 정서와 정치적 역학에 좌우된다. 그래서 국민이 정책을 어떻게 기억하고,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 정책과 어떻게 정서적으로 연결을 맺고 있느냐도 중요하다. 즉 정책은 단순히 이성적 설계물을 넘어 ‘감정적 언어로 포장된 정치적 선택’으로도 표현된다. 때문에 정책이 성공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논리적 타당성이라는 기초 위에 국민의 공감이라는 정서적 지지대가 굳건히 세워져야 한다. 대부분의 기업은 과학적 근거와 합리적 추론을 내세워 정책 제안을 한다. ‘우리는 이러한 데이터를 갖고 있습니다’, ‘국제 비교 지표가 있습니다’, ‘전문가 검토를 거쳤습니다’와 같은 익숙한 접근을 선호한다. 그리고, 정부의 담당자들이 합리적인 기준에 의해 최적의 선택을 할 것으로 믿는다. 하지만 이미 1940년대에도 행동경제학의 아버지였던 하버트 사이먼은 정부정책의 선택과정에서 공무원 역시 ‘한계적 합리성’의 틀 안에서 최적의 해법보다는 ‘만족스러운 해법’을 찾는 경향이 있음을 밝혔다. 정책결정의 과정에서도 정책의 수용 과정에서도 단순히 합리적인 접근만으로는 정책이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지난 2005년 경주로 지역선정이 된 중저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의 경우만 봐도, 초기 필요성과 방사성 물질이 실제로 위험하지 않다는 주장만 반복하다가 굴업도에서 부안까지 19년 동안 부지선정을 못하고 표류했다. 결국 2005년 전문가뿐만 아니라 시민단체를 설득하고, 지역사회 발전과 실생활에 이점을 준다는 구체적인 스토리를 통해 지역민을 설득하면서 성공적으로 정책을 집행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미국산 소고기 사태나, 의대정원 2000명 증원, 초등학교 5세 입학 등 합리적으로는 필요하다고 생각될 수 있는 정책들도 ‘왜, 어떻게’라는 구체적인 스토리라인을 만들지 못하면서 정책과정에서 큰 고통을 겪기도 했다. 이러한 정책실패는 단순히 정책실패에 끝나지 않고 오랜 기간 사회적 후유증을 낳기 때문에 정책의 초기 단계부터 어떻게 정책을 만들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이런 점을 고려했을 때 기업의 정책 담당자들은 회사가 추구하는 정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정책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공공의 서사’ 속에 위치시키는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 첫째, 정책에 ‘이야기’를 입히고, 숫자를 넘어서는 서사를 만들어야 한다. 건조한 통계를 넘어 그 정책이 누구의 삶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 손에 잡히는 이야기를 보여줘야 한다. 예를 들어, 환경 정책이라면 탄소 배출량 감소 그래프에 그치지 말고, 맑은 공기 속에서 마스크를 벗고 뛰어노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함께 들려주는 식이다. 생생한 스토리는 정치인에게는 명분과 비전을, 국민에게는 공감과 참여의 동기를 제공한다. 둘째, ‘핵심 가치’를 명확히 하고 ‘상징’을 만들어야 한다. 정책은 복잡한 개념의 묶음이어서는 안 된다. 간결하고 강력한 슬로건이나 상징적 이미지를 통해 정책의 본질을 압축해야 한다. 독일의 산업계는 높아가는 임금과 노후화되는 산업시설을 바꾸기 위해 정부의 정책변화가 필요했다. 그들은 정부와 함께 ‘인더스트리 4.0(Industry 4.0)’이라는 슬로건 아래 제조업과 ICT의 결합을 통해 국가차원에서 스마트공장, 디지털 전환을 촉진하는 캠페인을 만들어 냈다. 명확한 아이덴티티를 통해 정치권의 지지층과 국민의 정서적 유대감이 형성했다. 셋째, ‘참여의 장’을 확장해야 한다. 정책은 일방적인 선포가 아니라 소통의 과정이다. 국민과 이해관계자들이 정책 형성 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길을 넓히고, 그들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단순히 정보 제공을 넘어, 함께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공동의 경험을 만들어야 한다. 합리적 근거는 전문가의 언어일 수 있으나, 참여는 모두의 언어라는 점을 잊지 말자. 국민은 자신들의 목소리가 담긴 정책에 더 큰 애정을 느낀다. 사소해 보이더라도 국민의 여론을 조사하거나 하는 방법들은 매우 효과적이다. 넷째, 과학과 합리기반의 단어들을 ‘공공의 언어’로 번역해서 설명할 필요가 있다. 정책 제안은 종종 전문가 언어에 갇힌다. 하지만 매력 있는 정책 브랜드는 누구나 이해하고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한다. ‘위해 우려’라는 말보다 ‘우리 아이의 안전’이라는 말이 사람들의 마음에 닿는다. 마지막으로 ‘지속적인 소통’으로 신뢰를 쌓아가야 한다. 정책 수립되어 만들어지는 것이 끝이 아니다. 정책이 집행되는 과정에서도 기업에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정책 추진과정에서 정책을 안착시키고 지속될 수 있도록 정부를 지원하고 이해관계자들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정책과정에서 성공과 실패를 공유하고, 지속적으로 대안을 공유하면서 국민과 이해관계자 모두와 정서적 거리를 계속 좁혀가야 한다. 그래야 정책성과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감정 없는 정책은 제안될 수는 있어도, 살아남기 힘들다. 정책은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할 때 비로소 사회적 선택을 받는다. 데이터와 그래프만으로는 부족하다. 정책은 ‘좋은 말’이 아니라 ‘내 이야기’가 될 때 힘을 얻는다.
    정책은 숫자보다 ‘서사’를 만들어야
    by 이보형
    2025.07.24 10:37:56
  • 제주에 머문 지난주, 많은 건축물을 보고 다녔다. 소문난 건축물을 순례하는 내내 왜 건축을 예술 영역에 포함시키는지 어렴풋하니 수긍했다. 또 세계적으로 일본 건축이 강한 이유도 헤아려봤다. 제주를 대표하는 현대 건축물은 수풍석 뮤지엄과 본태박물관, 방주교회, 포도호텔, 유민미술관, 글라스 하우스다. 이들 건축물만 보러 오는 여행객도 꽤 된다. 모두 일본과 연관돼 있다. 본태박물관과 유민미술관, 글라스 하우스는 안도 다다오(Tadao Ando) 작품이다. 나머지 수풍석 뮤지엄과 방주교회, 포도호텔은 재일 한국인 건축가 이타미 준(Itami Jun)이 설계했다. 둘 다 일본에 뿌리를 뒀다. 볼거리가 흔전만전 널린 제주에서 멋진 건축물과 만남은 색다른 경험이다. 본태박물관과 수풍석 뮤지엄, 방주교회, 포도호텔은 서로 가깝다. 본태박물관은 전시 작품도 수준급이지만 건축물 자체로도 멋지다. 안도는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 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건축가다. 그의 건축 철학은 자연과 조화, 즉 자연과 조응하는 것이다. 오사카 ‘빛의 교회’와 시코쿠 나오시마 ‘지추(地中)미술관’은 안도를 세계에 알린 걸작이다. 안도는 빛을 활용하는데 탁월하다. 빛의 교회와 지추미술관은 정점에 있다. 안도는 바다와 인접한 지추미술관을 땅 밑으로 설계함으로써 자연을 존중했다. 수년 전 이곳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버려진 섬을 예술 섬으로 바꾼 것도 놀랍지만 미술관에 대한 고정 관념을 바꿨다. 섭지코지 유민미술관과 강원도 원주 뮤지엄 산(SAN)도 안도 작품이다. 이들은 지추미술관과 여러 면에서 닮았다. 노출 콘크리트를 기본으로 빛과 물을 차용해 비슷한 느낌이다. 유민미술관 역시 수평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전시공간을 땅 속으로 설계했는데 편안하다. 정원과 전시공간을 잇는 통로는 기발한 발상이었다. 한쪽 벽면을 창으로 뚫었는데 그 프레임 속으로 푸른 파도와 성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본태박물관 또한 안도의 건축 철학에 충실하다. 노출 콘크리트와 빛, 물이 어울려 ‘本態, 본래의 모습’이라는 의미를 제대로 살렸다. 관람 동선 끝에 배치한 수련 연못 또한 설계자 의도가 반영된 결과물이다. 유민미술관 앞 ‘글라스 하우스’는 TV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 등장한 핫 플레이스다. 바다를 향해 두 팔을 뻗은 V자 건물은 그대로 풍경이 됐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천장까지 닿은 바다가 보이는 통유리가 시원스레 펼쳐 있다. 글라스 하우스에서는 제주 농산물로 빵을 굽는다. 제주의 바람과 물, 흙이 키운 당근과 감자, 마늘, 호박, 꿀이 주된 식재료다. 안도의 작품이 한국과 일본에서 사랑받는 이유는 두 나라 정서가 비슷한 때문이다. 두 나라 국민들은 여백 미와 사색에 잠겨도 좋을 단아한 분위기에 푹 빠진다. 제주에서 안도와 함께 거론되는 스타 건축가는 이타미 준이다. 한국명은 유동룡이다. 그는 김수근 건축상과 프랑스 예술훈장 슈발리에와 레지옹 도뇌르 훈장, 일본 최고 건축상인 무라노 도고상을 수상했다. 방주교회와 포도호텔, 수·풍·석 뮤지엄에는 이타미 준의 건축 철학이 온전히 반영돼 있다. 이타미 준 또한 자연과 조화를 지향한다. 현지인보다 관광객들이 더 많이 찾는 방주교회도 각별하다. 물위에 떠 있는 노아의 방주를 형상화했는데, 삼방산을 향해 나갈 채비를 마친 모습이다. 최근 내부 문제로 소란스럽다니 안타깝다. 비오토비아 수풍석 뮤지엄은 물과 바람, 돌을 모티브 삼았다. 많은 이들은 이곳에서 위안을 얻는다. 수 박물관은 천단을 연상케 하며, 풍박물관에서는 무시로 바람 소리를 듣는다. 이타미 준의 딸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2024년 제주 저지마을에 유동룡 박물관을 열었다. 두 사람 외에도 일본에는 내로라하는 건축가가 즐비하다. 우리는 한 명도 없는 프리츠커 상을 무려 10명이나 받았다. 안도 다다오, 단게 겐조, 카즈요 세지마, 이소자키 아라타, 이토 토요, 쿠마 켄코 류에 니시자와 등이다. 지난해 도쿄여행 당시 들린 네즈 미술관도 프리츠커 상을 받은 쿠마 켄고(Kengo Kuma) 작품이다. 네즈 미술관은 미술관 자체가 빼어난 작품이다. 대나무와 목재로 설계한 진입부는 인상적이다. 이 길에 서자 어린시절 추억이 되살아났다. 하코네 폴라 미술관도 매력적이다. 푸른 숲 속에 서 있는 미술관은 한 마리 학을 닮았다. 흰색과 강렬한 절제미로 눈길을 끈다. 일본 건축은 왜 이렇게 잘 나갈까. 장인정신과 섬세함이 바탕에 있다. 일본에는 수 백 년 된 기업이 흔한데, 건축 또한 이런 토양에서 구축됐다. 자연과 조화를 추구하는 정신문화도 다른 요인이다. 한국과 일본 건축은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다는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하고 있다. 지진과 쓰나미, 화재 등 잦은 자연재해와 두 차례 원폭, 도쿄공습 등 대규모 전쟁도 건축 발전으로 이어졌을 것으로 짐작한다. 다시 짓고 튼튼하게 짓고 아름답게 지으려는 과정에서 세계 최고 수준 건축문화를 낳았다. 1995년 대지진 참사를 겪은 고베가 건축학도들에게 실험장인 이유다. 한국에도 프리츠커 수상자가 나오길 기대하는 이들에게 제주 건축기행을 권한다. /서경IN
    ‘프리츠커 상’ 10명 배출한 일본 건축의 저력
    by 임병식
    2025.07.15 16:01:39
  • 최근 미국의 '골든 돔 법안(Golden Dome Act)'과 관련 논의는 미사일 방어 체계의 미래가 어떻게 진화하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가 한국의 안보 전략에 어떤 함의를 가지는지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과거 아이언 돔(Iron Dome)이 보여준 근접 방어의 성공 사례를 넘어, '골든 돔'이라는 새로운 개념은 광범위하고 다층적인 방어망 구축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톰 크래머(Tom Cramer) 상원의원과 댄 설리번(Dan Sullivan) 상원의원이 발의한 '골든 돔 법안'은 미사일 방어 시스템의 통합과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는 단순히 새로운 미사일 요격기를 추가하는 것을 넘어, 기존 및 신규 역량을 조화롭게 연결하여 하나의 거대한 방어망을 구축하려는 시도이다. 특히, 우주 기반 센서와 인공지능(AI) 기술의 적극적인 활용은 '골든 돔'이 지향하는 미래형 미사일 방어의 핵심 요소이다. 즉, 오늘날 미사일 방어 시스템은 특정 위협에 대한 대응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골든 돔'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부터 극초음속 미사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형의 미사일 위협에 대한 포괄적인 방어 능력을 목표로 한다. 이는 다양한 속도와 고도에서 작동하는 요격 미사일, 첨단 레이더,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우주 기반 추적 및 탐지 시스템의 통합을 요구한다. 한반도의 특수한 안보 환경을 고려할 때, '골든 돔' 개념은 한국의 미사일 방어 전략에 다음과 같은 시사점을 제시한다. 첫째, 다층 미사일 방어 체계의 고도화이다. 현재 한국은 한국형 미사일 방어 체계(KAMD)를 구축하고 있지만, 북한의 미사일 능력 고도화, 특히 극초음속 미사일 개발에 대한 대응 역량 강화가 시급한 실정이다. '골든 돔'이 제시하는 다층 방어망 개념은 한국이 이미 운용 중이거나 개발 중인 패트리어트, 천궁-II, L-SAM 등을 더욱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상층 방어 역량을 강화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 둘째, 우주 기반 자산의 중요성 증대이다. '골든 돔'은 우주 기반 센서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한국 역시 정찰 위성 개발 및 운용을 통해 북한 미사일 발사 징후를 조기에 탐지하고 추적하는 역량을 강화하고 있는데, 이와 더불어 저궤도 위성군을 활용한 미사일 경보 및 추적 시스템 구축을 장기적인 목표로 추진해야 한다. 이는 지상 레이더의 한계를 극복하고, 발사부터 요격까지의 시간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셋째, 인공지능(AI) 및 데이터 통합의 가속화이다. '골든 돔'은 방대한 센서 데이터를 통합하고 분석하며, 최적의 요격 솔루션을 도출하는 데 AI 기술을 활용한다. 한국군도 미사일 방어 시스템에 AI를 도입하여 의사 결정 속도를 높이고, 오탐지율을 줄이며, 복합적인 위협에 대한 대응 능력을 향상시켜야 한다. 다양한 센서에서 수집되는 데이터를 효율적으로 통합하고 분석할 수 있는 플랫폼 구축이 동시 개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 한미 동맹과의 협력 강화이다. '골든 돔' 법안 자체가 미국의 국가 미사일 방어 전략의 일환인 만큼, 한미 동맹 간의 미사일 방어 협력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의 새로운 기술과 개념을 공유하고, 연합 훈련을 통해 상호 운용성을 높이며, 궁극적으로는 한미 양국이 하나의 통합된 미사일 방어 체계로 기능할 수 있도록 상호 운용성에도 노력해야 한다. 끝으로 '골든 돔' 개념을 당장 한국에 적용하는 데에는 막대한 비용, 기술적 난이도, 그리고 정치적 고려사항 등 여러 도전 과제가 존재한다. 하지만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고도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미사일 방어 능력의 혁신적인 발전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이다. 우리는 최근 발표된 나토의 '상업우주 전략'에서 얻은 교훈처럼, 민간 우주 기업의 혁신적인 기술을 국방에 적극적으로 통합하고, 국제사회와의 협력을 강화하며, AI와 같은 첨단 기술을 선도적으로 도입하여 미래형 미사일 방어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골든 돔'이 제시하는 비전은 단순히 미사일을 막아내는 것을 넘어,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강력한 억제력을 제공할 것으로 한국도 '골든 돔'의 개념을 바탕으로 더욱 견고하고 포괄적인 방어막을 구축하여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낼 때이다.
    ‘골든 돔’과 한국의 우주안보 전략 
    by 최성환
    2025.07.13 17:19:58
  • 소위 ‘티메프 사태’가 발생한 지 1년이 되었다. 티메프 사태는 싱가포르에 설립된 한국계 이커머스(e-commerce) 업체인 큐텐과 한국 내 계열회사인 티몬, 위메프가 플랫폼 내 판매업체들에게 정산 대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게 되면서 대규모 소비자 피해로 이어진 사건이다. 이보다 3년 전인 2021년 8월 전국을 뒤흔들었던 소위 ‘머지포인트 사태’를 계기로 선불업 등록 면제기준 강화, 선불전자지급수단 할인발행 제한, 선불충전금 보호 등을 주요 내용으로 전자금융거래법이 개정되었는데, 공교롭게도 개정법 시행(2024년 9월) 직전에 티메프 사태가 터진 것이다(티메프 사태에서도 무분별한 상품권 할인발행을 통한 정산대금 돌려막기가 문제되었다). 티메프 사태 발생 이후 정부 차원의 TF가 구성되었다. 금융당국은 판매업체들에게 유동성을 지원하고 소비자들의 결제취소·환불 절차를 도왔고, 관계부처 논의를 거쳐 2024년 9월 전자지급결제대행(PG)업 제도 개선안을 발표했다. 이 개선안에서는 PG사의 정산자금 보호장치 마련, PG업 진입규제 강화, 경영지도기준 미준수 시 행정조치 근거 마련 등 PG업에 대한 규제를 대폭 강화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전자금융거래법 개정 방향이 제시되었다. 금감원은 올해 초 검사업무 운영 계획을 배포하면서 대형 전자금융업자(빅테크사)에 대해 올해부터 정기검사를 실시할 예정이라고 밝혔고, 5월에 네이버파이낸셜에 대한 정기검사를 개시했다. 상기 논의를 반영한 전자금융거래법 개정안도 발의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점은 이커머스 등의 영업 특성을 고려한 PG업의 범위 조정이다. PG업은 본질적으로 “제3자(타인) 간”의 대금결제를 대행하는 영업이다. 그런데 현행 법규정과 그간 금융당국 실무해석에 따르면 이커머스와 같은 일반 상거래 업체들이 “자기 사업” 영위의 일환으로 수행하는 내부 정산 업무까지 모두 PG업의 범위에 해당하게 되는데, 이것은 과도한 규제라는 지적이 예전부터 있어 왔다. 이를 고려해서 전자금융거래법 개정안은 PG업을 (자기사업이 아닌) 제3자 간 거래의 대가 수수·정산업무를 의미하는 것으로 명확히 하고, 이커머스, 대규모유통업자, 프랜차이즈본사(가맹본부) 등이 자기사업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각각 판매업체, 납품업자, 가맹점사업자에 대한 관계에서 처리하는 내부정산업무는 PG업의 범위에서 제외하고 있다. 이에 맞추어 (내부정산업무를 수행하는) 일정 규모 이상의 이커머스업체를 대규모유통업자로 의제하고 판매대금 별도관리의무 및 정산기한 준수의무를 부과하는 내용의 대규모유통업법 개정안도 발의되었다(소위 ‘티메프 방지법’). 문제는 작년에 발의된 개정안이 대통령 탄핵과 대선 정국을 거치면서 반년이 넘도록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그 사이에 올해 3월 온라인 명품 거래 플랫폼 발란의 판매대금 미정산 사태가 터졌고, 발란은 회생절차에 들어갔다). 규제 공백을 해소하고 제도를 정비하기 위한 방법론을 논의하는 데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는 것은 물론이다. 다만 논의가 지연되는 와중에 또 다른 ‘OO 사태’가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규제당국과 국회, 관련 업계가 지혜를 모아 속도감 있게 제도를 정비하고 대응해 나갈 필요성이 제기되는 시점이다.
    티메프 사태, 그 후
    by 유정한
    2025.07.12 09:00:00
  • 기업에게 정책은 나침반과 같다. 방향이 분명해야 길을 내고, 전략을 세우고, 투자도 가능하다. 하지만 지금 우리 기업들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방향을 바꾸는 나침반을 붙잡고 항해하고 있다. 전임 정부에서 추진한 규제 완화나 산업 육성 정책이 새 정부에서는 폐기되거나 반대로 전환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탈원전과 친원전, 벤처 기업 지원 정책의 대폭 확대와 정권 교체 후의 축소, 반도체 특별법이나 바이오헬스 지원 로드맵 같은 산업 전략마저도 정권 교체 이후 재검토 대상이 되는 현실은, 기업들에게 예측 불가능성과 전략적 혼란을 초래한다. 지방투자 보조금, 탄소중립 지원, 환경 규제 유예 등 실무적으로 경영전략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정책 기조가 5년 주기로 바뀐다면, 기업은 성장보다 생존을 우선할 수밖에 없다. 이런 풍토에서는 기업이 자신이 가진 핵심 역량을 한 곳에 몰아 성장 동력을 만들기보다는 정책 리스크를 감안해 다양한 시나리오에 대비하는 방어적 전략에 자원을 분산시킬 수밖에 없다. 해외자원투자, 풍력발전, 플랫폼 기업 육성 정책 등 정권에 따라 부침을 겪는 사업들이 많다. 정책의 방향성이 신뢰받지 못하면 민간의 투자는 위축되고, 국가 산업 전략의 동력도 분산된다. 이처럼 정책이 리셋되는 문화의 근본 문제는 ‘정정(訂正)’의 부재다. 일본의 경영철학자 아즈마 히로키가 ‘정정하는 힘’에서 말했듯, 정정이란 “과거를 인정하면서도 현재에 맞게 해석을 조정해 나가는 힘”이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과거의 정책을 전면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성과는 계승하고 문제는 조정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우리는 ‘정정’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를 갖춰야 한다. 새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전 정부의 주요 정책을 정책 백서로 체계적으로 평가하고, 국민과 기업 앞에 무엇을 계승하고 무엇을 정정할지 공개하는 평가 시스템을 만들면 어떨까? 또 주요 산업 정책의 변경 시에는 기업 현장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고, 급격한 전환 대신 점진적 조정과 의견 수렴 절차를 의무화하는 정책 연속성 고려하는 제도를 만들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특히, 경제에 영향을 많이 주는 산업 전략과 관련해서는 민간도 함께 참여하는 국가 차원의 전략기구를 만들어서 새로운 정책에 대한 비토권을 줘 보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 이러한 시스템은 먼 이야기가 아니다. 독일의 에너지전환정책(Energiewende, 에네르기벤데라 읽는다)은 좋은 예이다. 독일은 정권이 바뀌어도 2050년까지의 목표를 분명히 하고 핵심 기조를 유지하면서 각 정권은 그 안에서 세부 실행방안을 조정해왔다. 성급한 전환 대신 정책 정정의 과정을 제도화한 결과, 기업들은 10년 단위의 전략을 안정적으로 구사할 수 있었다. 프랑스는 17세기 프랑스의 재무장관이던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가 국가주도의 산업육성 전략을 주창한 이후로 ‘콜베르주의적 디리지즘(국가개입경제, dirigisme)’의 정책적 전통을 수립하고 정권 교체와 관계없이 원자력이나 항공·우주 산업등에서 국가 주도의 전략개발과 공공조달의 유지, 기술 투자를 일관되게 이어오면서 산업적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관련 기업들이 장기적인 투자전략을 수립하고, 연관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 근간이 된 것이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을 유임시킨 결정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단순한 인사 유지가 아니라, 전임 정부의 정책 중에도 이어가야 할 부분이 있음을 인정한 정책의 연속성을 지키겠다는 선언의 출발점이 되길 기대한다. 이런 실용적인 결정들이 축적되어 이제 우리나라도 ‘리셋’이 아닌 ‘정정’을 통한 산업발전 전략을 가져가고 기업들도 예측가능한 경영전략을 수립할 수 있지 않을까. 리셋은 기억을 지우지만, 정정은 기억을 살리며 현재를 갱신한다. 민간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정책은 성과를 계승하고 오류를 고치는 ‘정정의 힘’으로 지금의 경제위기가 극복되길 기대한다. 그래야 기업도 다시 성장에 집중할 수 있다.
    리셋 아닌, 정정(訂正)되는 나라
    by 이보형
    2025.06.27 14:56:19
  •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 우선 레인.’ 김포와 김해, 하네다와 후쿠오카 공항에 설치된 안내판이다. 양국 정부는 국교 정상화 60주년 기념해 6월 한 달 동안 전용 창구를 시범 운영 중이다. 반응은 뜨겁다. 한국과 일본 국민들은 다른 외국인과 함께 줄을 서지 않고 곧장 심사대를 통과한다. 뭔가 특별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해외여행을 다녀온 이들이라면 안다. 고작 10분만 빨리 입국 절차를 마쳐도 이게 어딘가 싶다. 이러니 외교관 대우나 다름없는 전용 창구를 지나면서 우쭐할 수밖에 없다. “이런 게 진짜 교류”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하네다공항은 외국인 입국심사 창구 16개 가운데 6개를 한국인 우선 레인으로 할당했다. 또 외국인 공용 키오스크 43개 중 16개를 한국인 전용으로 확보했다. 우리는 흔히 섬나라 일본은 소심하며 통이 작다고 한다. 축소지향 일본인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맞다. 그러나 한일 수교 60년을 맞는 일본 정부의 행보는 파격이다. 지난주 주일 한국대사관이 주최한 한일 수교 60주년 기념식에는 이시바 총리를 포함 전·현직 총리만 4명이 참석했다. 우리로 말하자면 이재명 대통령을 비롯해 전직 대통령 3명이 참석한 것이니 놀랍다. 수년 전 수출규제와 경제보복, 죽창가와 노 재팬을 외치며 서로에게 으르렁댔던 것을 떠올리면 뭔가 싶다. 미묘한 변화는 일본을 찾는 한국인과, 한국을 찾는 일본인의 표정에서부터 확인된다. 긴장감 대신 내 집을 찾은 듯 편안하다. 지난주, 제주 카멜리아힐에서 오사카에서 왔다는 이십 대 후반 일본 여성 관광객을 만났다. 그들은 수국이 만개한 정원에서 “스고이(놀라운, 대단한)”를 연발하며 환히 웃었다. 도쿄 최대 번화가 긴자와 오모테산도 힐에서 만난 우리 청년들도 거침없었다. 지금 추세대로라면 올해 일본을 찾는 한국인은 1,000만 명을 넘어설 전망이다. 사상 처음이다. 출입국 통계에 따르면 올해 출국장을 나선 3명 가운데 1명은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인 또한 앞다퉈 한국을 찾는다. 올해 400만 명을 넘어설 게 분명하다. 지구상에 이런 나라는 없다. 양국 거리에서 들리는 “굉장하다”와 “스고이”가 낯설지 않다. 이재명 대통령과 이시바 총리의 행보 또한 파격의 연속이다. 이시바 총리는 SNS에 이 대통령의 당선 축하 메시지를 올리면서 한국어를 병기했다. 이 대통령도 SNS에 한국어와 일본어로 화답했다. 한국을 아직도 자신들 식민지로 인식하는 일본 극우 인사들이나 조금이라도 일본에 우호적일라치면 ‘신 친일파’로 공격하는데 익숙한 민주당 지지층 모두에게 이시바와 이재명은 못마땅할 수 있다. 그렇지만 양국 정상의 언행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이 더 많은 게 현실이다. 이 대통령은 G7 정상회담장에 먼저 도착해 이시바 총리를 기다렸고 상석을 양보하며 배려했다. 아베가 트럼프에게 황금색 드라이버를 선물한 것은 비굴해서가 아니다. 지도자는 국익을 위해서라면 종종 자신을 낮춘다. 이 대통령은 “작은 차이를 넘어서자”며 일본 국민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또 “한·일은 앞마당을 같이 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며 지정학적 입지도 상기시켰다. 과거사를 덮어두자는 게 아니다. 한일관계는 속도도 더디지만 그나마 쉽게 무너지는 게걸음을 반복해 왔다. 엉성하게 쌓아 올린 돌탑이 따로 없다. 김영삼 정부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충돌, 이명박 정부에서 독도 방문, 문재인 정부 경제전쟁까지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한일관계는 뇌관이었다. 특히 과잉 민족주의와 결합할 때 양국관계는 쉽게 파국으로 치달았다. 한일수교 60년, 올해는 새로운 출발을 고민하고 실행하는 분절점이다. 그동안 정치권은 ‘친일파’와 ‘토착 왜구’ 주홍글씨를 동원해 상대를 제압하고 낙인찍었다. 지지층을 결집하는 데는 쏠쏠했으나 외눈박이 역사 인식이라는 비판도 상당했다. 오랜 시간 일본을 다닌 내가 내린 결론도 다르지 않다. 낯선 소도시를 여행하고 그들과 대화하며 막연한 적대감을 내려놓고 마음을 열었다. 흔히 일본인의 친절을 ‘다테마에(겉마음)’와 ‘혼네(속마음)’는 다르다며 폄훼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때마다 나는 “그러는 당신은 흉내라도 내봤냐”고 반문한다. 그런 이들에게는 일본의 어떤 장점을 들이대도 쇠귀에 경 읽기다. 메이지유신 세대의 정치적 결단은 좋은 본이지만 그마저 흠만 들춘다. 당시 변방이었던 사쓰마와 조슈는 앞다퉈 영국으로 유학생을 보냈다. 또 메이지 정부는 1년 10개월에 걸쳐 12개국에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했다. 19세기 후반, 그때 조선의 지식인들은 무얼 했나. 일본 비판만 올인하는 건 무책임하다. 물론 루스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에서 일본인의 양면성을 부정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일본인에게도 배워야 한다는 사실마저 부인할 필요는 없다. 한일 양국은 외교와 안보, 경제, 문화까지 협력할 공간이 넓다. 트럼프의 관세정책 때문에 이해관계가 일치하고 공조할 분야도 많다. 이념 중심 진영외교에서 벗어난 국익 중심 실용외교는 생존의 문제다. 한시적인 전용 입국심사 창구는 진심과 정성이 수반된다면 상설화할 수 있다. 서로의 언어로 말할 때 상대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언제까지 훈풍을 지속할 수 있을지 실용외교를 기대한다.
    한일에 부는 훈풍 “이런 게 진짜 교류”
    by 임병식
    2025.06.27 14:39:59
  • ‘사람은 공간을 만들지만, 공간은 사람을 만든다.’ 영국 총리를 지낸 윈스턴 처칠이 1943년 독일의 런던 폭격으로 파괴된 국회 의사당의 재건을 약속하면서 한 말이다. 처칠은 우리가 만들어낸 공간과 환경이 결국 우리의 삶, 사고방식, 공동체의 구조까지도 바꾸어 놓는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 공간은 인간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조건이다. 우리는 항상 어딘가에 거주하며, 그 공간은 단순한 물리적 장소를 넘어 기억과 감정, 만남과 회복, 사유와 상상의 터전이 된다. 하이데거는 이를 ‘거주함(Dwelling)’이라 했다. 인간은 단순히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공간 속에서 의미 있게 거주함으로써 존재한다고 본 것이다. 공간을 어떻게 만들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더 나은 삶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지난 5월 정부는 ‘범정부 빈집 관리 종합계획’을 발표했다. 행정안전부, 국토교통부, 농림축산식품부, 해양수산부 등 4개 부처가 공동으로 빈집 문제 해결에 나섰다. 국가 차원의 빈집 관리를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농어촌빈집정비특별법’과 ‘빈건축물정비특별법’ 제정을 통해 국가와 소유자의 책무를 명확히 하고, 농어촌 빈집 리모델링을 통해 생활인구와 귀농·귀촌 예정자, 청년 등을 위한 주거·업무·문화공간으로의 재활용을 도모한다는 계획이다. 이는 단순한 주거환경 개선을 넘어, 마을공동체의 회복과 지역 균형발전의 전환점을 만들 수 있는 중요한 기회이다. 감자꽃이 피던 지난달 24일, 충북 옥천군 ‘옥천공동체 허브 누구나’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작년에 개장한 안남면 최초의 마을 공중목욕탕 소식을 접했다. ‘목욕 한 번 하려면 버스 타고 읍내까지 30분을 가야 하고, 버스 시간 맞추려면 큰맘을 먹어야 하는 일’이었다는 안혁관 할머니(89세. 청정리)와 마을에 목욕탕이 생길 거라고 꿈도 꾸지 못하였다는 마을 어르신의 감회는 마을의 지속을 위한 필요 요소가 무엇인지 분명한 자각을 요구하는 목소리였다. 마을의 목욕탕은 단순한 위생 공간을 넘어 마을에 사라진 온기를 되살리는 공동체의 심장이 되었다. 충남 서천군 마서면 ‘여우네 작은 도서관’도 같은 사례이다. 귀농한 젊은 부부가 아이들을 위한 돌봄과 놀이공간이 없던 마을에 도서관을 구상하였다. 주민들의 협조로 마을의 유휴 공간을 활용해 만든 도서관은, 아이들을 돌보며 방과 후 아이를 맡길 수 있게 된 이들에게 마을의 유일한 안식처가 되었다. 마을의 작은 도서관은 아이들과 주민들이 함께 숨 쉬는 공간으로 마을의 미래를 준비하는 디딤돌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사람과 공간과 시간은 곧 지역의 문화가 된다. 이렇듯 공간의 재탄생은 문제 해결을 넘어, 사람과 사람을 잇고 농촌의 회복력을 되살리는 시작점이 된다. 무위당 장일순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 했다. 그는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이 가진 생명력을 통해 풀뿌리 문화의 확장성을 보여주었다. 지금 우리 농촌에서 무위당의 생명 운동과 정신이 다시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주민 스스로 공간을 회복하고, 마을의 필요를 채우며 문화의 싹을 틔울 때, 진정한 변화는 시작되는 것이다. 농촌의 빈집은 말이 없다. 그러나 그 안엔 수많은 기억과 시간이 쌓여 있다. 빈집을 그저 철거의 대상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새로운 쓰임을 부여하고 마을에 맞는 방식으로 재생할 때, 비로소 공간은 사람을 살리고, 마을을 살리는 힘이 된다. 빈집 관리는 곧 사람을 위한 일이다. 이는 단지 행정적 정비가 아니라, 삶의 질을 높이고 공동체 회복을 위한 문화적 과제이다. 정부의 정책이 현장에서 실효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전문가의 손과 주민의 땀방울이 만나는 접점이 필요하다. 지역 주민이 주체가 되어 마을의 미래를 함께 그릴 수 있을 때, 정책은 지속 가능한 변화로 이어질 것이다. 하얀 감자꽃이 말을 한다. ‘이곳에도 여전히 삶이 있다’라고. 아름다운 경관 속에서 소리 없이 무너져온 농촌 마을들을 돌아보며, 공간의 소중함을 되새겨 본다. 감자꽃은 풍요와 수확의 상징이라고 한다. 꽃이 수고를 다 하는 동안 감자가 땅속에서 튼튼하게 영글듯, 빈집과 공간 개선 정책도 현장의 필요와 그를 위한 지원이 이어질 때 진정한 수확으로 이어질 것이다. 감자꽃이 피는 지금, 공간 정비와 함께 우리가 꿈꾸는 더 나은 세상을 농촌에서 피워 보자. 우리의 시선을 도시를 넘어 농촌에 머물게 하자. 그곳이 곧 다시 회복해야 할 우리의 미래이다. /서경IN
    “감자꽃이 피었습니다”
    by 조금평
    2025.06.09 16:47:27
  • 최근 ‘도시의 마음’이란 책을 흥미롭게 읽었다. 저자 김승수는 전주시장을 지낸, 각별한 후배다. 그는 시장 재임 당시 책 읽는 시민들이 도시의 품격을 결정한다며 ‘책이 삶이 되는 책의 도시 전주’를 디자인했다. 시장 취임과 함께 시청사 로비를 책 읽는 공간으로 전환하고, 특색 있는 도서관을 신축 또는 리모델링함으로써 정책을 현실로 옮겼다. 10여년이 흘러 전주는 도서관 도시로써 입지를 굳혔다. 도서관을 찾는 발길이 급증하자 전주시는 아예 도서관 투어 프로그램까지 만들었다. 저자가 꿈꾸었던 전주다움을 인정받고, 지역경제 활성화도 어느 정도 결실을 거둔 것이다. ‘도시의 마음’은 안목과 관점을 일깨운다. 저자는 “도시가 바뀌면 시민들 삶도 바뀐다. 정책의 차이가 삶의 차이를 만든다. 도시에 마음을 담으면 시민들에게 반향이 일어나고, 그 반향은 도시와 사람을 동시에 변화시킨다”고 말한다. 저자는 책과 도서관으로 시민들 삶과 도시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지만 반대 여론에 직면했다. 그는 시민들을 설득하고 공직사회로부터 공감을 이끌어냈다. ‘도시의 마음’에는 이런 안목과 관점을 담았다. 책을 읽는 내내 일본 이시카와(石川) 현립도서관과 21세기 미술관, 다케오(武雄) 시립도서관, 시마네(島根) 현립미술관을 떠올렸다. 세 도시 모두 공공건축물을 통해 도시를 바꿨다. 잘 지은 미술관 하나, 도서관 하나가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고 지역소멸을 막는다. 이들 도시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우리나라 지방도시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도시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특색 없는 도시경관 일색이다. 매력적인 도시, 활력 있는 도시와 거리가 멀다. 무엇이든 순위 매기기를 좋아하는 일본은 매년 전국 47개 광역단체를 대상으로 매력도를 발표한다. 지난해 10월 발표한 ‘2024 매력도 랭킹’에서 1위는 홋카이도(北海道), 47위는 사가(佐賀) 현이었다. 그런데 사가 현에 한국인 관광객이 몰린다니 그 이유가 궁금하다. 사가 현 다케오는 인구 5만 명이 채 안 되는 소도시다. 수령 3000년 녹나무가 유명하지만 여행자들이 궁벽한 다케오를 찾는 이유는 다름 아니다. 다케오 시립도서관을 방문하기 위해서다. 연간 100만 명이 다케오 도서관에 다녀간다. 도대체 어떤 도서관이기에 도시 인구의 20배 넘는 여행자들이 도서관을 찾을까. 2013년 문을 연 다케오 도서관은 책 읽고, 물건 사고, 커피 마시는 복합공간이다. 시민들은 이곳에서 책 읽고 수다를 떤다. 다케오 도서관은 ‘도서관은 조용해야 한다’는 고정관념부터 깼다. 24시간 연중 운영하니 지역주민들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커뮤니티 공간이다. 주변 지형과 어울린 외관 설계 또한 인상적이다. 처음 다케오 도서관을 방문한 때는 해질 무렵이었다. 노을에 물든 도서관은 황홀했다. 뒷산을 배경으로 둥근 활시위 형태로 설계한 도서관은 위압적인 여느 도서관과는 달리 편안했다. 내부에 있는 스타벅스 커피숍과 잡화 코너도 독특했다. 이곳에서는 문구류부터 지역 특산물, 심지어 전통 술까지 판다. 도서관에서 웬 술이냐고 하겠지만 다케오 도서관에서는 가능하다. 2층은 책 읽는 공간이다. 시민들은 도서관에서 책 읽고 밀린 이야기를 나누며 지역공동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서울 코엑스 별마당 도서관은 다케오 도서관을 벤치마킹했다.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으로 회자되는 이시카와 현립도서관은 2022년 7월 개관 이후 2년 9개월 만에 내방객 300만 명을 기록했다. 도서관은 짧은 기간에 21세기 미술관과 함께 가나자와를 대표하는 명소로 부상했으니 놀랍다. 빼어난 설계 덕분인데 지난해 일본 도서관협회 건축상을 받았다. 로마 콜로세움을 떠올리는 지붕 설계는 인상적이다. 이곳은 도서관 본래 기능뿐만 아니라, 커뮤니티 기능까지 수행한다. 3층까지 이어지는 360도 책으로 둘러싼 중앙 홀을 따라 올라가는 통로는 압권이다. 이곳에서 하루 종일 책에 파묻혔으면 했다. 시마네 현립미술관 또한 지역을 살린 공공건축물이다. 매끈한 우주선 모양을 한 미술관은 넓은 신지 호수에 접해 입지부터 남다르다. 호수와 어우러진 미술관은 시마네 시민들에게 자부심이다. 시민들은 일부러 동트는 새벽 또는 해질 무렵 미술관을 찾아 시간을 보낸다. 시마네 현은 이웃 돗토리 현과 함께 일본에서 인구가 가장 적다. 그런데도 여행자들이 시마네를 버킷리스트에 담는 건 미술관 때문이다. 지난해 여름, 이곳에서 우키요에 작품을 관람하며 느꼈던 감동은 여전하다. 다녀온 지 1년여가 흘렀지만 호수를 품은 미술관 풍광이 잊히지 않는다. ‘도시의 마음’에서 저자는 “공공은 성공의 기쁨과 자부심보다는 실패의 책임과 두려움을 먼저 생각한다. 여기에서 늘 마찰이 일어난다.”며 “적당한 성공은 철저한 실패보다 위험하다. 적당한 성공은 앞으로 갈 수도 뒤로 갈 수도 없다. 적당한 성공으로는 누구의 마음도 흔들 수 없다.”고 했다. 공직사회가 실패의 책임과 두려움에서 벗어난다면 다양한 정책을 기대할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감사원의 정책감사를 폐지하겠다고 공약했다. 새로운 시도에 활기를 불어넣을지 기대된다.
    일본 소도시를 바꾼 공공건축물
    by 임병식
    2025.06.09 13:31:34
  • 2022년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상업위성 미)Starlink, Capella, 핀란드)ICEYE 등 활용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지난 3월, 트럼프와 젤렌스키 대통령의 종전 협상 회담이 결렬되자 미국은 위성영상 정보지원을 즉시 중단하며 우크라이나를 압박했다. 이 위성영상은 미 국가정찰국(NRO)이 상업우주 활용 프로그램으로 확보한 것이다. 오늘날 상업위성은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핵심 요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반영하여 지난해 4월, 미 국방부와 우주군은 각각 ‘상업 우주 통합 전략(Commercial Space Integration Strategy)’과 ‘상업 우주 전략’을 발표했다. 미 행정부의 ‘상업 우주 통합 전략’은 안보와 상업을 통합하려는 시도로 민간의 상업용 우주 솔루션 활용이 군사 작전 영역에서 효용성을 높을 수 있다는 인식에 기반하며, 우주상업 파트너십을 확보하고 육성하기 위한 전략을 상세 기술하고 있다. 또한, 이 전략은 민간 우주 산업의 기술과 능력을 군사 및 국가 안보 분야에 활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통해 우주에서의 위협을 감소시키고, 상업적 솔루션이 군사 작전에 효용성을 높이는 것을 추구한다. 주요 내용은 첫째, 상업 우주 솔루션의 군사 작전 분야 활용을 확대하기 위한 파트너십을 구축하고, 둘째 상업 우주 산업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혁신적인 상업 문화를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셋째 상업 우주 산업의 개발 기간 단축과 시장 동향 파악을 통해 정부와 민간 부문 간의 협업 장벽을 해소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 달성을 위해 미 국방부는 상업 우주 산업의 활용 가능 분야를 파악하고 정부가 맡아야 할 역할을 설정한다. 미 우주군은 상업 우주 솔루션 사용을 지속적으로 확대하고 상업 부문과 지속적으로 협력한다. 이러한 실행 사례로 미국 콜로라도 스프링스 위치한 미우주시스템사령부 소속의 ‘Innovation Hub VT-ARC’는 국가안보에 상용 우주솔루션을 활용하는 방안을 구현하는 곳으로 우주 우방국의 상용 우주업체 대상으로 위성통신, 우주감시, 우주정보, 항법(PNT) 분야의 순으로 미 우주군 사업 참여도 유도하고 있다. 우리의 경우 민군협력진흥원에서 ‘민 · 군기술협력사업촉진법’에 따라 민·군겸용기술(Spin-up)의 개발과 국방기술의 민간이전(Spin-off), 민간기술의 국방 활용(Spin-on) 등의 민·군 기술협력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전담기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민·군 기술협력에 대한 사업·제도적 한계로 실질적으로 소요군의 활용이 필요한 소프트웨어 분야 개발까지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냉전 종식 후 군비를 축소해 온 유럽과 달리, 우리는 방위사업에 꾸준히 투자해 왔다. 최근 K-방산 수출이 괄목 성장한 계기가 되었다. 수출국이 실제 사용하지 않는 무기를 구매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그러니 K-방산의 핵심 경쟁력은 적과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우리 군이다. 국산화를 참고 기다려 준 우리 군 덕분에 아무것도 없던 황무지에서 오늘날 글로벌 방산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오늘날 미 행정부의 ‘상업 우주 통합 전략’은 정부 주도 우주 개발을 선택과 집중으로 전환하고, 우주 자산의 회복력 강화를 위한 경쟁 우위 모색에 방점이 있다. 국가가 민간 우주 자산을 활용하는 사례가 확대하고 있어 우리도 관련 사안에 대한 검토와 안보 환경 변화에 맞는 우주 생태계 구축 전략 모색이 필요한 시점이다. 즉, 미 우주군은 “구매할 수 있는 것은 구매하며 반드시 필요한 것은 구축한다”는 접근방식으로 상업 우주부문의 혁신을 유도하고 있다. 우리도 저비용 단기간으로 우주자산을 획득하고 소프트웨어 분야에 상업우주를 접목하는 ‘한국형 상업 우주전략’ 수립을 제언해 본다. 이와 함께 우주청과 방사청 컨트롤이 가능하고, 국가 안보를 고려한 민-군 우주안보 통합 전략 수립이 가능한 상위기관의 설립과 우주 생태계 구축을 위해 국방우주산업을 기반으로 민간우주산업을 육성화하는 전략적 접근도 필요하다. 또한, 글로벌 우주 협력을 통한 한국의 우주 산업 기반 강화와 우방국과의 우주 안보 협력을 확대해야 한다. 이러한 시도는 K-방산을 ‘K-우주방산’으로 도약시키는 큰 밑거름이 될 것이다.
    ‘K-우주 방산’ 전략을 만들 때다   
    by 최성환
    2025.06.04 17:20:30
  • 기업의 퍼블릭 어페어즈(Public Affairs) 활동의 지형이 바뀌고 있다. 과거에는 정부 관료를 만나고 국회의원을 설득하면 정책은 움직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정책을 만드는 사람은 여전히 정치권이지만, 정책을 움직이는 힘은 시민단체, 전문가, 이익단체, 미디어 등 ‘제3자 그룹’으로 분산되고 있다. 권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흩어졌을 뿐이다. 정책은 법과 제도, 그리고 예산이라는 형식으로 실현된다. 그러나 그 형식을 실질적으로 만드는 본질은 ‘사람’과 ‘이해관계’다. 과거처럼 관료나 국회의원만을 겨냥한 일방향 설득으로는 설 자리가 없다. 여론을 선점한 시민단체 하나가 기업의 시장을 송두리째 흔들고, 학회 성명 하나가 법안의 생사를 갈라 놓는 시대다. 사회적 설득력이 없는 정책은 제도화되지 못하고, 제도화되지 못한 정책은 의미를 갖지 못한다. 환경·보건·플랫폼 등 다양한 영역에서 이 같은 흐름은 더욱 뚜렷하다. ‘탈플라스틱’ 캠페인으로 출발한 일회용 컵 규제는 몇몇 시민단체와 소비자단체의 꾸준한 이슈 제기와 언론 연계로 국회까지 연결됐고, 법제화로 이어졌다. 기업들은 규제가 시작되고 나서야 비로소 본질을 인식했다. 문제는 사후 대응이 아니라, 초기의 무관심이었다. 제약업계의 약가제도 개편 역시 마찬가지다. 환자단체와 전문가 그룹이 ‘신약 접근권’이라는 공공성을 앞세우자 정책 프레임은 완전히 전환됐다. 정책을 앞당긴 건 정부가 아니라, 정책 바깥에서 문제를 구조화한 이들이었다. 정당성과 긴급성을 확보한 제3자가 정책 결정의 흐름을 바꾼 셈이다. ICT 산업도 예외는 아니다. 일명 ‘온라인 플랫폼 공정화법’은 정부나 기업이 아니라 소상공인 단체와 소비자 권리단체들의 요구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은 알고리즘의 투명성, 입점 수수료 문제 등을 제기하며 여론을 장악했고, 국회는 이 흐름을 외면하지 못했다. 플랫폼 기업들은 법안의 정합성에 대해 반박했지만, 사회적 정당성을 넘지 못한 반론은 정책의 벽을 막지 못했다. 이제는 정책의 권력 구조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이해관계자는 정부 내부뿐 아니라, 외부에서도 점점 더 조직화되고 다층화되고 있다. 이제 소셜폴리틱스의 시대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기업이 생존하려면 이들과의 관계설정부터 다시 설계해야 한다. 누구를 설득하고, 누구와 협력하며, 누구의 반발을 예측할 것인가. 이 복잡한 지형을 해독하는 도구가 바로 ‘살리언스(Salience) 모델’이다. 살리언스 모델은 이해관계자의 속성을 세 가지 기준으로 분류한다. ‘권력을 가졌는가’ ‘정당한가’ ‘긴급한가’ 이 세 가지 질문에 따라 기업은 대응의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다. 목소리가 크다고 반드시 설득해야 할 대상은 아니며, 영향력이 낮다고 무시해도 되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정당성과 긴급성을 가진 ‘의존적 이해관계자’는 언론과 여론을 움직이는 도덕적 정당성을 가진 그룹이다. 환경단체, 환자단체, 소비자단체 등이 여기에 해당하며, 이들과의 조기 협력은 사회적 지지와 정책 우군 확보의 핵심이 된다. 반대로, 권력과 긴급성을 동시에 가진 ‘위험한 이해관계자’는 사전 대응 없이는 돌이킬 수 없는 리스크로 번질 수 있다. 정치권 핵심 인사나 거대노조, 언론 권력자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단순한 메시지로는 설득할 수 없으며, 신뢰 기반의 대화 채널을 사전에 확보해 두어야 한다. 그럼에도 많은 기업들이 여전히 정부와 국회라는 공식 경로에만 의존한다. 변화한 환경을 읽지 못하고, 전략은 과거에 머물러 있다. 설득의 기술을 넘어, 조율의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해관계자의 언어를 읽고, 갈등을 구조화하며, 공통의 정책목표를 재설계하는 일. 퍼블릭 어페어즈의 본령은 바로 거기에 있다. 이해관계자 맵핑은 결코 고비용 전략이 아니다. 포럼 하나, 리서치 하나, 소규모 자문그룹 운영만으로도 충분한 데이터와 신호를 얻을 수 있다. 관건은 이를 전략으로 축적할 수 있는 체계와 의지다. 정책은 언제나 사람의 손에서 결정된다. 그리고 지금 그 손은 점점 더 정부 바깥으로 향하고 있다. 이제 퍼블릭 어페어즈 전략의 타깃은 넓어져야 한다. 정부청사나 국회만이 아니라, 거리의 시민사회, 기자실의 여론, 전문가의 보고서가 기업을 둘러싼 정책 환경을 바꾸고 있다. 이들을 이해하고, 구분하고, 조율하지 않으면 기업의 논리는 정책의 언어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정책이 되지 못한 논리는 곧 시장에서의 실패로 이어질 것이다.
    ‘소셜폴리틱스’ 시대가 왔다
    by 이보형
    2025.06.03 08:26:45
  • 일본에서는 엑스포(EXPO)를 ‘반파쿠’로 부른다. 만국박람회를 줄인 ‘만박(萬博)’의 일본어 발음이 반파쿠다. ‘천하의 부엌’ 오사카(大阪)에서 엑스포(4월 13~10월 13일)가 한창이다. 일본은 앞서 1970년 오사카, 2005년 아이치(愛知)엑스포를 개최한 바 있다. 등록박람회를 한 번도 열지 못한 우리와 달리 일본은 벌써 세 차례다. 5년마다 6개월간 개최하는 등록박람회는 세계 최대 규모다. 1993년 대전엑스포는 체급이 작은 인정박람회였다. 일본은 1964년 도쿄올림픽과 1970년 오사카엑스포를 통해 패전국에서 벗어나 선진국 반열에 올랐음을 알렸다. 이후 한동안 일본은 미국에 이은 세계 2위 경제대국 자리를 지켰다. 오사카엑스포 주최 측은 55년 전 6,400만여 명에 비해 2,800만 명으로 관람객을 낮춰 잡았지만 여의치 않은 모양이다. 지금이야 스포츠를 비롯한 메가 이벤트가 흔전만전하지만 19세기만 해도 볼거리는 흔치 않았다. 세계 최초 박람회는 1851년 런던박람회다. 일본이 국제사회에 처음 얼굴을 내민 것도 박람회를 통해서였다. 사쓰마(가고시마) 번은 1867년 파리박람회에 도자기를 첫 출품했다. 사쓰마 도자기는 유럽인들을 사로잡았고, 단박에 자포니즘(Japonism) 열풍을 불렀다. 유럽인들은 앞 다퉈 도자기를 사들였고 사쓰마 도자기는 최고 사치품이 됐다. 사쓰마는 도자기 판 돈으로 대포와 군함을 사들였고 조슈(야마구치)와 손을 잡고 메이지유신을 단행했다. 아이러니한 건 도자기 산업의 주인공이 조선도공이라는 점이다. 임진왜란 포로로 끌려간 조선도공들은 오늘날 반도체와 맞먹는 하이테크 산업을 주도하며 일본 개화에 기여했다. 쓰라린 역사다. 오사카는 한반도와 밀접한 곳이다. 원조 한류인 조선통신사와 연결 지어 생각하면 한층 각별하다. 지금도 오사카는 재일 동포가 가장 많이 사는 곳으로, 조선통신사의 주된 통로였다.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관계 개선을 위해 요청한 평화사절단이다. 한양을 떠난 통신사는 육로와 해로를 따라 에도로 향했다. 한양~에도는 왕복 4,600km에 이르는 거리다. 부산항부터 오사카까지 바닷길만 840km다. 오사카는 일본 본토 첫 기착지였다. 에도 막부는 통신사 행렬이 시모노세키에 들어서면 오사카까지 뱃길을 안내했다. 지난 11일 부산항을 출발해 보름여 만에 오사카에 도착한 조선통신사 재현 선 역시 세토내해 전통항해협의회 도움을 받았다. 비로소 본토에 오른 통신사는 요도우라(淀浦) 강을 거슬러 에도로 갔다. 지난해 자동차를 이용해 시모노세키부터 구레, 토모노우라, 히로시마를 다녀왔다. 선조들이 말과 배를 타고 이동했을 소도시 곳곳에서 조선통신사 행적을 만났다. 최근 엑스포 한국관에서는 조선통신사 행렬이 재현됐다. 한일국교정상화 60주년을 맞아 261년 만에 연 행사는 여러모로 뜻깊었다. 관람객들은 조선통신사 선박과 통신사 행렬에 흥미를 나타냈다. 조선통신사는 단순한 외교 사절을 뛰어넘은 평화와 문화 사절이었다. 1607~1811년까지 200여 년 동안 12차례 파견된 조선통신사는 신뢰를 상징한다. ‘믿음을 통하는 사절단’이란 명칭 또한 일본으로 가는 사절단에만 사용했다. 통신사의 주요 임무는 도쿠가와 쇼군에게 국서를 전달하고 답서를 받아오는 것이다. 조선통신사는 쇼군을 만나 국서를 교환함으로써 신뢰를 쌓았다. 통신사가 지나는 길목에 위치한 다이묘들은 숙식과 행정편의를 제공하며 극진히 환대했다. 일본 기록에 따르면 과도한 접대로 지방재정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그럼에도 에도 막부는 조선통신사를 앞선 문화를 받아들이는 유용한 창구로 인식했다. 일본 지식인들은 통신사 행렬이 머무는 숙소를 방문해 밤새워 필담을 나누고 글씨와 시를 받는 것을 특별한 기쁨으로 여겼다. 서울역사박물관은 6월 29일까지 ‘마음의 사귐, 여운이 물결처럼’을 주제로 조선통신사 특별전을 열고 있다. 전시장에서는 친밀한 교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대와 하룻밤 이야기하는 것이 십 년 동안 책을 읽는 것보다 낫다.”는 일본 학자의 글은 인상적이다. 비록 불행한 근현대사를 공유하고 있지만 한국과 일본에도 호우시절은 있었다. 대륙과 단절된 섬나라 일본에게 조선통신사는 새로운 세계와 만나는 엑스포였다. 통신사가 머무는 동안 문화와 물물이 섞이고 지식은 확장됐다. 통신사 일원으로 다녀온 이언진은 ‘오사카는 큰 도회지라 진기한 보물은 용궁의 보물을 털어낸 듯, 페르시아 상인들도 눈부셔하고 절강의 처자들도 빛이 바래네’라며 오사카의 번화함을 묘사했다. 포르투갈 상인들이 다네가시마(種子島)에 상륙(1543년)해 서구 문물을 전하기 전까지 조선통신사는 유일한 문화 유입 창구였다. 어쩌면 조선과 일본의 악연도 조선통신사가 끊기면서 시작됐는지 모른다. 통신사는 1811년, 12차 사행을 끝으로 중단됐다. 이로부터 불과 65년 뒤 일본은 강화도조약(1876년)을 시작으로 조선침략을 본격화했다. 신뢰가 끊긴 자리에서 전쟁이 싹텄다. 에도 시대 외교가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는 ‘성신이라는 것은 진실 된 마음을 뜻하며 서로 속이지 않고 다투지 않으며 진실을 갖고 교제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일 양국에 필요한 말이다. 2025년 오사카엑스포 한국관의 주제는 ‘연결’이다. 한일 양국이 새로운 미래로 나가는 것 또한 새로운 연결에 있다.
    오사카에서 만나는 ‘새로운 연결’
    by 임병식
    2025.05.19 15:54:44
  • ‘현대차, 유네스코 세계유산 야쿠시마(屋久島) 달린다’ 얼마 전 ‘서울경제신문’과 ‘연합뉴스’에 실린 흥미로운 기사 제목이다. 요지는 현대차에서 생산한 전기 버스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야쿠시마 섬을 운행한다는 것이다. 최근 장재훈 부회장을 비롯한 현대차 임원들은 야쿠시마를 방문해 무공해 전기 버스 5대를 인도했다. 고작 5대를 팔기 위해 그들이 먼 길을 간 이유가 궁금했다. 동행한 김정훈 상무(상용 품질담당)는 “‘바다 위 알프스’로 불리는 청정한 야쿠시마에 현대차가 달린다는 것은 전기 버스 강자로서 경쟁 우위를 선점하는 한편 일본 시장에서 교두보를 마련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듣고 보니 현대차의 야쿠시마 진출은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는 야쿠시마와 인접한 다네가시마(種子島)에 관심이 끌렸다. 두 곳은 가고시마를 갈 때마다 마음에 둔 섬이다. 섬 전체가 세계자연유산인 야쿠시마는 1993년 유네스코에 등재됐는데 일본 최초였다. 유네스코가 야쿠시마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때 묻지 않은 원시림에다 신령스러운 삼나무 때문이다. 제주도 4분의 1 크기인 이곳에는 1000년을 넘긴 삼나무가 즐비하다. 특히 수령 7000년으로 추정되는 조몬스기는 경외심마저 불러일으킨다. 일본에서만 관람객 1,300만 명을 기록한 애니메이션 ‘원령공주(모노노케 히메)’에도 나오는 조몬스기와 이끼 숲은 영화의 모티브가 됐다. ‘원령공주’는 환경파괴의 위험을 그린 수작으로 야쿠시마에 친환경 버스가 필요한 이유다. 영화를 제작한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 감독은 챗GPT가 그리는 지브리 풍 만화의 원조인 스튜디오 ‘지브리’를 설립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하야오 감독은 오랫동안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모색해 왔는데 ‘원령공주’ 외에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벼랑 위의 포뇨’ 등으로 인간의 탐욕과 무분별한 개발을 경고해 왔다. 지난해 다녀온 히로시마 현 토모노우라(鞆の浦) 역시 감독이 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소재로 삼은 작은 어촌 마을이다. 하야오는 훼손 위기에 처한 토모노우라를 배경으로 ‘벼랑 위의 포뇨’를 제작했다.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고 히로시마 지방법원은 도로 건설계획을 중지했다. 토모노우라가 아름다운 풍광을 간직하게 된 것은 하야오 감독 덕분이다. 야쿠시마로 가는 길은 간단치 않다. 후쿠오카 또는 가고시마 공항으로 이동한 뒤 다시 쾌속선을 타고 2시간을 달려야 한다. 탐방객들이 원행을 마다하지 않는 건 독특한 식생을 보기 위해서다. 야쿠시마는 아열대 기후부터 설산까지 보기 드문 섬이다. 연평균 강우량은 2,500~1만mm로 ‘한 달에 35일 비가 내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이 때문에 짙은 이끼가 섬을 뒤덮고 수 천 년 된 삼나무 숲을 형성했다. ‘원령공주’에 등장하는 이끼 숲길은 탐방객들에게 최고 코스다. 탐방객들은 원시림과 이끼 숲을 헤치며 섬의 주인은 숲이고, 인간은 손님에 불과함을 깨닫고 돌아간다. 지척에 있는 다네가시마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다네가시마는 일본에 처음 화승총이 전해진 곳으로, 과장되게 말하자면 근대 일본의 시발점이다. 1543년 9월 23일 다네가시마에 상륙한 포르투갈 상인 100여 명은 훗날 전쟁 판도를 바꾼 화승총을 에도막부에 전했다. 다네가시마 도주 도키타카는 이들로부터 2000냥을 주고 화승총 두 자루를 구입했다. 오늘 날 수 억 원에 해당하는 막대한 금액이다. 액수도 놀랍지만 당시 도키타카는 15살에 불과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화승총이 지닌 위력을 간파한 것이다. 도키타카는 화승총을 철포(鐵砲·뎃포)로 개량했고,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철포를 실전에 투입해 천하를 통일했다. 이후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은 조선을 유린하고 근대 일본으로 가는 종자돈을 마련했다. 다네가시마에 포르투갈 상인이 상륙한 뒤, 임진왜란까지 걸린 시간은 49년에 불과했다. 그동안 조선도 화승총을 받아들일 기회가 있었지만 조선 지식인들은 변화에 둔감했다. 1653년 또 한 차례 기회가 왔지만 역시 흘려보냈다. 그해 제주에 표류한 하멜을 비롯한 네덜란드 상인 38명은 조선에 13년 동안 머물렀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그들을 전국에 분산한 채 구경거리로만 소비했다. 앞선 문물을 받아들일 기회를 놓친 것이다. 일본의 실용주의와 조선의 탁상공론은 훗날 지배와 피지배라는 치욕스러운 역사로 귀결됐다. 정치하는 이들의 책임이 그때나 지금이나 가볍지 않은 이유다. 전국시대 뎃포(鐵砲)가 위력을 발휘하면서 철포도 없이 싸우는 무모함을 빗댄 말이 ‘무대포(無鐵砲)’다. 조선은 한동안 정신 승리에만 골몰한 중국 소설속의 아Q처럼 무댓포 시대를 지냈다. 도요타 자동차는 글로벌 메이커 1위다. 현대 전기 버스가 일본에 상륙한 건 뎃포로 무장한 실력 덕분이다. 일본 최초 화승총을 받아들인 다네가시마, 일본 첫 세계유산 야쿠시마에 현대 전기차의 첫 상륙은 의미 있다. 우리나라 전기 버스가 일본 열도를 뒤덮는 날이 온다면 반도체에 이은 기술의 승리일 것이다. 역사는 반복한다는데, 이번에는 어떤 형태로 변주될지 궁금하다. 조만간 두 섬에 다녀오고 싶다.
    천년 삼나무 일본 섬에 상륙한 현대차
    by 임병식
    2025.05.08 16:03:30
  • 기업의 위기관리 컨설팅을 하다 보면 늘 긴장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위기 상황에서 임원들이 모여 심각하게 회의를 거듭하지만, 정작 고객과 직접 맞닿아 있는 현장의 목소리가 빠지는 경우가 많다. 고객센터 상담원, 세일즈 담당자, 이들의 경험과 통찰이 회의실 문턱을 넘지 못하면, 결정은 어김없이 현장과 어긋난다. 그렇게 2차, 3차 위기가 시작된다. 위기관리를 위한 결정이 새로운 위기를 낳는 아이러니다. 정책 수립도 다르지 않다. 빠르게 변하는 기술 환경과 대내외 경제의 변동성 속에서 정부가 정책을 세우는 일은 늘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기 어렵다. 규제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채 과거의 틀에 갇혀 있고, 새롭게 떠오른 기술과 서비스는 그 벽을 넘지 못하고 시장에 나오지도 못한 채 사라진다. 무엇이 이 벽을 넘게 할 수 있을까. 결국 현장을 가장 잘 아는 기업의 목소리에 정부가 귀를 기울이는 것, 그것이 답이다. 영국 금융감독청(FCA)의 규제 샌드박스는 좋은 예다. 핀테크 산업이 급성장하던 2016년, FCA는 기존 금융 규제가 신기술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현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규제를 무턱대고 없애기보다는, 기업들에게 제한된 환경에서 신기술을 시험할 기회를 주었다. 기업이 시장에서 직접 서비스를 실증하고, 그 데이터를 정부와 공유하며 규제 방향을 함께 모색하는 구조였다. 결과는 놀라웠다. 168개 기업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 시장에 진입했고, 참여 기업들은 기존보다 50% 이상 더 많은 자금조달에 성공했다. ‘선구매 후결제(Buy Now Pay Later)’ 모델을 실험한 질치(Zilch)는 그 대표적 사례다. 기존 규제의 틀에서는 서비스를 내놓을 수 없던 질치는 FCA 규제 샌드박스에서 소비자 보호 기준을 충족할 수 있는지 시험했다. 실증 결과, 400만 명의 고객과 20억 달러 기업가치를 가진 회사로 성장했다. 한국도 2019년 규제 샌드박스를 도입하는 등 나름의 시도를 해왔다. 그러나 여전히 갈 길은 멀다. 특히 기술 변화 속도가 가장 빠른 인공지능(AI) 분야만 봐도 그렇다. 수년 전부터 AI 산업을 육성하겠다고 했지만, AI 활용에 관한 규제와 정책은 번번이 발목을 잡았다. 오랜 논의 끝에 인공지능기본법이 가까스로 통과됐지만, 이미 글로벌 기업들은 한국보다 한참 앞서 달리고 있다. 단지 AI만의 문제가 아니다. 에너지 산업, 모빌리티, 원격의료 등 어느 분야를 보더라도 혁신은 시장에서 앞서가고, 규제는 뒤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왜 이토록 우리의 정책은 현실을 따라잡지 못할까. 결국 답은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기업은 누구보다 기술의 변화와 시장의 반응을 가장 먼저 감지하는 존재다. 그들의 경험과 데이터를 정책에 담아냈다면, 이렇게 뒤처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늘 기업과 정부의 협력을 ‘야합’이라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한국적 정서에 갇혀 있다. 정부가 기업의 의견을 수용하면 어김없이 따라붙는 ‘특혜’, ‘재벌 편들기’라는 비난이 발목을 잡는다. 결국 귀를 닫고 안전한 길을 택하게 된다. 그러나 이제는 그 두려움을 버려야 할 때다. 혁신 기술이 시장을 이끄는 시대, 정부가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면, 현장의 목소리를 정책에 담아야 한다. 기업과의 협력은 야합이 아니라, 혁신을 현실로 만드는 동반자 관계다. 규제는 시장을 지키는 울타리다. 하지만 그 울타리가 너무 높으면 누구도 넘을 수 없는 장벽이 된다. 울타리는 지키되, 그 안에서 새로운 길을 낼 유연성이 필요하다. 기술과 시장, 정책과 규제가 함께 움직일 때, 혁신은 비로소 현실이 된다. 정부가 기업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 바로 여기에 있다.
    규제 개혁, 결국 현장에 답이 있다
    by 이보형
    2025.05.07 14:08:51
  • 책무구조도 도입은 요 근래 금융업권의 주요 화두이다. 과거에 대형 금융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금융회사의 내부통제 부실 문제가 지적되었다. 금융회사와 임직원들을 어떠한 근거로 어디까지 제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실무상 논란도 있었다. 개정「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면서 책무구조도 도입 의무가 마련된 것은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 기반한 것이다. 책무구조도는 영국 금융서비스 및 시장법(Financial Services and Markets Act 2000: FSMA)상 고위 경영자 및 인증제도(Senior Managers and Certification Regime, SM & CR)에 근거하고 있는 고위 경영자 및 거버넌스에 대한 책임지도(responsibilities map) 제도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책무구조도 도입에 따라 금융회사 임원별로 소관 영역에 대한 내부통제 ‘책무’가 명확하게 식별, 배분되어야 한다. 임원은 소관 영역에서 내부통제·위험관리 기준이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관리조치를 이행해야 한다. 대표이사는 전사적 내부통제체계를 구축하고 임원들의 내부통제 활동을 감독하는 내부통제 ‘총괄’ 관리 의무를 부담하며, 임원별 내부통제 책무를 배분한 ‘책무구조도’를 작성해서 금융당국에 제출해야 한다.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대표이사와 고위임원들에게 중징계가 부과될 수 있기 때문에 세간에서 ‘금융판 중대재해처벌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법에 따라 책무구조도를 도입해야 하는 기한은 업권별로 다르다. 은행·금융지주회사는 올해 1월 책무구조도 제출을 완료했다. 금융투자업자·보험사는 자산총액·운용재산 규모에 따라 올해 7월 또는 내년 7월까지, 여신전문금융회사·저축은행은 자산총액 규모에 따라 내년 7월 또는 후년 7월까지 책무구조도를 도입해야 한다. 책무구조도 도입을 준비하는 금융회사들은 고충이 많다. 각자의 영업, 내규와 조직 현황을 전반적으로 점검해서 법의 취지에 맞게 내부통제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조직 개편, 업무 분장·조정, 인사이동이 수반되는 경우가 생긴다. 내규도 정비해야 하고 전산시스템과 업무 프로세스를 변경해야 한다. 간단한 일이 아니고 전사적인 역량이 투입되어야 하는 프로젝트이다. 여기에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금융당국도 새로운 제도 정착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책무구조도 시범운영 제도를 시행해서 업권별 책무구조도 도입 기한 전에 참여를 희망하는 금융회사로부터 책무구조도를 조기에 제출받아 사전 컨설팅을 해주고 있다. 시범운영 기간 중에는 내부통제 관리 의무가 완벽하게 이행되지 않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는 등 인센티브도 준다. 컨설팅 과정에서 금융회사들에 공통적으로 발견된 실무상 쟁점에 대해 일정한 가이드라인을 제공하려는 노력도 병행하고 있다. 당분간은 시행착오가 불가피할 것이다. 축적된 실무가 많지 않고 금융회사마다 경영 여건과 조직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금융당국이 제공하는 컨설팅이나 가이드라인에만 의존해서 개별 회사들이 내부통제 시스템을 단기간에 완결적으로 보완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 어려움이 있겠지만, 금융회사의 적극적인 실행 의지와 금융당국의 적정하면서도 유연한 감독권 행사가 결합되어 책무구조도 도입이 대형 금융사고를 예방하고 금융회사의 내부통제 시스템이 한층 고도화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책무구조도, 내부통제 고도화를 위한 성장통
    by 유정한
    2025.05.07 12: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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