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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심장' 단 신형 그랜저의 놀라운 질주 본능


5G그랜저가 어느덧 해저 터널로 접어들었다. 시속 100km 언저리에서 가속페달을 강하게 밟았다. 저단으로 변속되면서 차가 힘차게 튕겨나갔다. 3세대 이후의 그랜저들을 사랑하게 되는 순간이다.

5G그랜저는 준대형차 시장에서 K7과 렉서스ES350를 동시에 잡을 요량이다. K7의 남성적 질주 본능과 렉서스ES350의 여성적 편안함을 동시에 만족시키고자 한다.


5G그랜저로 산 같은 장애물들을 요리조리 따돌린다. 때론 ASCC로 맘 편하게 운전했다가 때론 엔진 출력을 최대한 높이며 곡예 운전을 해본다. 지난 25년 동안 그랜저는 그렇게 달려왔다. 그리고 다섯 번째이자 첫 번째 그랜저로 다시 태어났다.

5G그랜저는 그랜저의 25년 전통과 전설을 계승한다. 할아버지 그랜저들이 국내 브랜드들과 내수 시장을 놓고 각축전을 벌였다면 5G그랜저는 수입 브랜드들과 다시 한번 내수 시장의 주도권을 놓고 맞붙는다.

5G그랜저는 변치 않는 강점들에 비장의 무기까지 겸비했다. 부산에서 5G그랜저를 만났다.

다섯 대가 나란히 서 있었다. 1986년 7월에 첫선을 보인 각진 그랜저와 1992년에 새로 나온 뉴 그랜저와 1998년에 선보인 그랜저XG와 2005년에 나온 4세대 그랜저TG, 그리고 2011년에 새롭게 태어난 5G그랜저였다. 지난 1월 18일 5G그랜저 시승행사가 열린 부산 해운대 웨스틴 조선호텔 앞엔 그렇게 다섯 대의 그랜저들이 도열해있었다. 고스란히 한국 고급차의 살아있는 역사였다.

1986년 무렵 정부가 규제를 풀면서 중형차만 만들던 대우차는 소형차를 만들게 됐고 소형차만 만들던 현대차는 중형차도 만들게 됐다. 승합차만 만들던 기아차도 승용차 시장에 진출하게 됐다. 대우차는 르망을 내놓았다. 기아차는 프라이드를 만들었다. 현대차의 신무기는 그랜저였다. 시작은 미약했다. 아직 중형차를 만들 만한 기술력이 없었던 터라 현대차는 일본 미쓰비씨와 손을 잡았다. 미쓰비씨가 엔진을 만들었고 현대차가 차체를 디자인했다. 현대차는 새 차에 그랜저란 이름을 붙였다. 웅장하고 당당하고 위엄이 있단 의미였다. 미쓰비씨는 2세대 데보네어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데보네어는 미쓰비씨가 1960년대부터 만들어온 고급차 브랜드였다. 데보네어와 그랜저는 명암이 갈렸다. 일본 시장에서 데보네어는 도요타의 크라운한테 완패했다. 그랜저는 한국 고급차 시장을 개척했고 확대했고 장악해버렸다. 현대차가 기술력과 판매에서 결정적으로 대우차를 앞서게 되는 계기가 됐다.

그랜저는 승승장구했다. 다시 한번 미쓰비씨와 손잡고 만든 뉴 그랜저는 고급차의 대명사가 됐다. 소비자들은 그때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고급차종만의 각종 편의 장치에 놀라 자빠졌다. 뉴 그랜저는 에어백을 장착한 최초의 한국차였다. 뉴 그랜저가 풍미한 1992년부터 외환위기가 닥치기 직전인 1998년까진 한국 경제가 흥청되던 시기였다. 덕분에 뉴 그랜저는 사장님들의 차로 깊이 뿌리내릴 수 있었다. 미쓰비씨 역시 뉴 그랜저를 3세대 데보네어란 이름으로 판매했다. 이번에도 뉴 그랜저는 성공했고 데보네어는 참패했다. 미쓰비씨는 데보네어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그랜저는 현대차만의 것이었다.

1998년 9월 선보인 3세대 그랜저XG는 오직 현대차의 기술력으로 만든 차였다. 그랜저XG는 각 그랜저나 뉴 그랜저와는 전혀 다른 차였다. 차체는 작고 간결해졌다. 뒷좌석 위주가 아니라 운전석 위주의 차가 됐다. 쏘나타와 그랜저 사이 틈새 차종이었던 마르샤를 흡수한 결과였다. 현대차의 새로운 고급차종인 에쿠스가 함께 등장하면서 그랜저는 고급 준대형 차종으로 자리매김했다. BMW5시리즈나 아우디A6와 벤츠 E클래스와 같은 체급이 됐다. 좀 더 젊고 패기 있는 차가 됐다. 2005년 선보인 4세대 그랜저TG는 아제라라는 이름으로 북미 시장에 수출되기 시작한다. 미쓰비씨와 합작으로 그저 내수용으로 개발된 그랜저가 20년 만에 해외 시장으로 뻗어나갔다. 이때부터 쏘나타와 그랜저의 패밀리룩 디자인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현대차가 다시 한번 현대차다워지기 시작했다. 지난 25년 동안 그랜저의 성장과 변신은 곧 현대차의 성장과 도약이었다.


5G그랜저 페달을 힘차게 밟으며 부산과 거제를 잇는 거가대교를 건넜다. 지난해 12월에 개통된 거가대교는 1km 길이의 육상 터널까지 합하면 8.2km나 되는 거대교다. 5G그랜저가 바닷바람을 뚫고 시속 200km를 돌파했다. 람다II 3.0리터 GDI엔진이 웅웅거렸다. 최고 출력은 270마력이다. 연비는 리터당 11.6km다. 4세대 그랜저TG의 3.3리터 람다엔진은 259마력을 냈다. 4세대보다 기름은 적게 먹고 힘은 더 내는 강력한 심장을 달고 있단 얘기다. 한껏 밟았다. 하지만 시속 200km 언저리에선 현대차의 6단기어로는 조금 모자란다. 그랜저의 경쟁 수입 차종들은 대부분 8단 기어가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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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G그랜저가 어느덧 해저 터널로 접어들었다. 시속 100km 언저리에서 가속페달을 강하게 밟았다. 저단으로 변속되면서 차가 힘차게 튕겨나갔다. 3세대 이후의 그랜저들을 사랑하게 되는 순간이다. 차체 무게에 비해 강한 마력을 지닌 탓에 저단 가속을 하면 질주 본능이 되살아난다. 하지만 역시나 급가속을 하거나 급회전을 하면 차가 출렁인다. 차선 변경을 할 때 차 앞부분과 차 뒤꽁무니가 미세하게 따로 논다. 부드러운 승차감과 말랑말랑한 서스펜션은 현대차의 오랜 특징이다. 많은 현대차 소비자들이 이런 승차감을 당연하게 여긴다. 하지만 벤츠나 BMW 같은 수입차들이 딱딱한 서스펜션과 안정된 승차감을 맛보이면서 국내 소비자들의 취향도 분화되고 있다.

이제 한국 시장에서도 그랜저의 최종 경쟁자는 렉서스ES350 같은 수입차들이다. 그랜저로 대우차의 프린스나 기아차의 콩코드와 경쟁하던 시절은 지나갔다. 일본과 유럽의 수입차들은 가격을 3,000만 원대까지 내려 잡으면서 현대차나 기아차의 앞마당을 위협하고 있다. 5세대 그랜저는 새로운 적과 마주하고 있단 얘기다. 2010년 현대차는 해외 시장에선 승승장구했다. 국내 시장에선 부진했다. 현대차 국내마케팅실 김성환 상무는 말했다. "지난해 현대차의 내수 시장 점유율은 47%였습니다. 구형 그랜저의 판매량은 3만2,000대 정도였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숫자입니다. 5G그랜저로 내수 시장의 주도권을 되찾아오겠습니다."

어드밴스드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 Advanced Smart Cruise Control을 작동시켰다. 현대차는 5G그랜저의 부산 시승 행사를 ASCC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했다. ASCC는 전자 제어 장치를 이용해 정속 주행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여기까진 크루즈 컨트롤이다. 5G그랜저의 앞 부분엔 레이더가 달려 있다. 앞서 가는 차와의 거리를 설정하면 그 거리를 유지하면서 정속 주행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여기까지가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이다. 갑자기 앞에 가던 차가 멈추면 정속 주행을 하다가 알아서 제동을 해준다. 이게 어드밴스드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이다. ASCC는 5G그랜저가 선보인 비장의 무기다. 설날이나 추석에 고속도로에서 가다 서다를 반복할 때 ASCC 기능이 있다면 발품을 덜 수 있다. ASCC는 벤츠S클래스나 BMW7시리즈나 아우디A8에서나 적용되는 최고급 운행 기술이다. 그랜저가 동급 경쟁 수입차들한테 가한 일격인 셈이다.

그랜저는 전자제어장치 ECU와 차체자세제어장치 VCD를 적용했다. 급제동과 급선회를 할 때 차체가 흔들리는 걸 전자적으로 잡아준다. 그랜저는 부드러운 승차감을 지향했다. 요철 구간이나 급커브 구간에선 차체가 출렁일 수 있다. 경쟁 차종들이 딱딱한 서스펜션으로 출렁임을 잡았다면 그랜저는 전자제어장치를 통해 잡아주는 방식을 선택했단 얘기다. 서스펜션이 딱딱하면 더 안정적일진 몰라도 승차감은 거칠어진다. 차를 몰기보단 차 타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평범한 소비자들은 부드러운 승차감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강남 여성 운전자들 사이에서 렉서스ES350이 큰 인기를 끌었던 것도 그래서였다. 5G그랜저는 준대형차 시장에서 K7과 렉서스ES350를 동시에 잡을 요량이다. K7의 남성적 질주 본능과 렉서스ES350의 여성적 편안함을 동시에 만족시키고자 한다.

ASCC를 적용해도 사실 마음은 불안하다. 아직도 전자제어장치보단 자신의 오른발을 더 믿는 운전 습관 탓이다. 앞 차 후미등에 빨간불이라도 들어오면 저도 모르게 브레이크를 밟으려 든다. 하지만 이미 자동차는 내연 기관에서 가전제품으로 진화하고 있다. 각종 전자제어장치에 의존한 운전이 운전자의 오른발 감각보다 더 안전해지는 시대가 이미 왔다. ASCC나 ECU나 VCD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이미 그랜저에는 평행주차 보조장치와 스마트폰을 이용해 차를 원격 제어하는 모젠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이 적용됐다. 현대차는 앞으론 주행할 때 차선을 알아서 유지해주는 장치나 T자 주차보조 장치까지 선보일 참이다. T자 주차보조 장치까지 나오면 운전면허 시험에서 T자 주차 관문이 아예 사라질지도 모른다. 액티브 에코모드를 선택하면 그랜저가 알아서 엔진과 에어컨과 변속기를 조정해서 가장 경제적인 연비를 유지해준다.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그랜저가 달린 곳은 현대차 기술진화의 최전선이다.

5G그랜저에서도 YF쏘나타에서부터 이어지는 현대차의 패밀리룩 디자인은 여전하다.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 듯한 풀루이틱 스컵처 디자인은 오히려 5G그랜저에서 한층 더 강화됐다. 선이 많은 풀루이틱 스컵처 디자인은 기아차 K시리즈의 선이 없고 간결한 디자인과 대비된다. 현대차 디자인이 좀 더 장식적이다. 내관에서도 마찬가지다. 현대차 디자인실의 이병석 이사대우는 설명했다. "운전석과 조수석은 독수리의 양 날개를 본떴습니다. 가운데 센터페시아는 넥타이를 맨 모습을 형상화 했습니다. 위엄과 품격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외관은 앞 세대 그랜저의 전통을 따랐다. 이병석 이사대우는 말했다. "후미 디자인은 앞선 그랜저들의 전통을 계승해서 디자인했습니다. 전면의 라디에이터 그릴과 후드 부분은 독수리의 눈과 날개를 형상화했습니다." 결국 5G그랜저 디자인에는 25년 동안 이어져온 그랜저의 전통적 모양에 풀루이틱 스컵처라는 새로운 현대차의 패밀리룩이 덧붙여지고, 여기에 다시 독수리의 형상과 넥타이라는 모티브까지 더해졌단 얘기다. 이질적인 세 가지 요소를 구분해내게 된다는 건 그 모든 요소들이 아직은 하나의 요소로 화학결합되지 않았단 뜻도 된다. 5G그랜저는 파라노마 선루푸를 채택했다. 앞좌석부터 뒷좌석까지 천장 전체가 활짝 열리는 파격적인 구조다. 그랜저와 현대차 디자인의 진화는 분명 현재진행형이다.

5G그랜저의 최고급 모델인 HG300 로얄의 풀옵션 가격은 4,271만 원이다. 가장 낮은 모델인 HG240 럭셔리의 가격은 3,112만 원이다. 3,000만 원대 초반에서 4,000만 원대 초반까지 가격대가 펼쳐져 있단 얘기다. 도요타 캠리나 혼다 어코드와 가격대가 부딪힌다. 등급과 옵션에 따라 5G그랜저는 수입차보다 훨씬 싸지기도 하고 다소 비싸지기도 한다. 이미 5G그랜저는 출시하자마자 볼륨감 있는 판매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지난 2월 9일까지 5G그랜저의 누적 계약 대수는 3만8,000대였다. 쾌조의 출발이다. 덕분에 도요타나 혼다 같은 경쟁 일본차들의 판매가 급감할 지경이다. 현대차는 5G그랜저의 2011년 한국 시장 판매 목표를 8만 대로 잡고 있다. 2010년에 팔려나간 준대형차는 모두 합쳐도 12만 대 정도다. 5G그랜저로 준대형차 시장을 독식해버리겠단 뜻이다.

1세대와 2세대 그랜저는 일단 크게 만드는 게 목표였다. 각 그랜저는 이제 클래식 차의 반열에 올라섰다. 환골탈태한 3세대부턴 준대형차로 체급을 낮추면서 소나타와 함께 현대차의 볼륨 모델이 됐다. 도요타의 캠리나 렉서스처럼 가장 대중적이기에 가장 많이 팔리는 차가 됐단 얘기다. 5G그랜저는 그 전설을 이어가고 있다.

거가대교를 넘어 해저 터널을 지나면 산업 도로가 나온다. 큼지막한 화물차들이 내달리는 구간이다. 5G그랜저로 산 같은 장애물들을 요리조리 따돌린다. 때론 ASCC로 맘 편하게 운전했다가 때론 엔진 출력을 최대한 높이며 곡예 운전을 해본다. 지난 25년 동안 그랜저는 그렇게 달려왔다. 그리고 다섯 번째이자 첫 번째 그랜저로 다시 태어났다.

사진 주간한국 임재범 기자
신기주 기자 jerry11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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