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폐에 그려진 인물과 동물, 유적지, 상징물들의 면면은 그 나라를 이해할 최고의 역사 교과서다. 이는 과학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지폐 속에 등장하는 과학자와 과학기기들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좁게는 한 국가, 넓게는 인류의 과학 역사를 알 수 있다.
김청한 기자 best@hmgp.co.kr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조그만 기계 앞에서 포즈를 잡는다. 이윽고 ‘찰칵’하 는 소리와 함께 플래시가 터지고 사람들은 그제야 저마다 한껏 지었던 미소들을 정리하며 자리를 뜬다.
이는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으로 순간의 영상을 담아내는 카메라가 빚어내는 풍경이다. 이 카메라의 기원을 따라 올라가면 이라크 1만 디나르 지폐의 주인공, 이븐 알하이삼(Ibn al-Haytham)을 만날 수 있다.
알하이삼은 수학·물리학에서 의학·천 문학·철학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긴 르네상스적 인물이다.
특히 그는 오늘날 카메라의 기본 원리가 되는 카메라 옵스큐라를 고안하고 시각에 대한 개념을 제대로 정립하는 등 광학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래서 ‘광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관찰과 측정으로 기존 이론 뒤집어
하지만 알하이삼이 오늘날 이라크의 지폐에 등장할 정도로 인정받는 것은 단순히 광학분야의 업적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경험적 관찰과 측정에 근거한 과학적 방법론을 확립해 과학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꾼 인물로 꼽힌다. 이탈리아 뇌과학연구소의 로잔나 고리니 박사는 “알하이삼은 근대 과학적 방법론의 선구자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고 평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알하이삼은 어두운 방의 구멍으로 빛이 들어오는 것을 관찰, 빛의 직진성을 증명했다. 비록 간단한 실험이지만,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깨달았던 뉴턴처럼 그의 과학자적 관찰은 이후 많은 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과학자 이전에 정치가, 행정가, 공학자로서 나일강의 범람을 막기 위한 댐을 고안하기도 했던 알하이삼은 매우 실용적인 인물이었다. 각종 실험 및 도구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다양한 거울과 렌즈를 제작해 시각, 착시, 굴절 현상 등을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특히 그는 실험과 관찰을 바탕으로 유클리드와 프톨레 마이오스 등이 주도했던 광학이론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 당시에는 사람의 눈이 물체를 감지할 수 있는 것은 눈 자체에서 빛이 나가기 때문으로 여겼다. 반면 알하이삼은 물체로부터 빛이 나오기 때문에 눈이 물체를 볼 수 있는 것이라 주장했다.
그가 증거로 제시한 것은 밤하늘의 별이다. 만일 눈에서 빛이 나가 사물을 인지하는 것이라면 눈을 감았다 뜨자마자 까마득히 멀리 존재하는 별이 곧바로 보이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밝은 빛에 눈이 부신 이유 역시 설명할 수 없다는 논거를 펼쳤다.
광학의 서
알하이삼 연구의 정수는 그의 저서 ‘광학의 서’에 담겨 있다.
12세기 말~13세기 초 쯤에 어느 이름 모를 학자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된 이 책은 유럽 과학계에 엄청난 파장을 미쳤다. 책에는 눈의 구조, 빛의 반사 및 굴절, 무지개 등 광학과 관련된 다양한 혁신적 이론들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광학 연구에 신기원을 제시한 이 책은 ‘알하젠(알하이삼의 라틴어 이름) 문제’라고 불리는 유명한 논쟁을 낳기도 했다.
이 논쟁은 ‘임의의 빛이 구면 거울에 반사돼 눈으로 향했을 때 빛을 눈으로 반사시킨 구면거울의 초점을 찾아라’는 것으로 정리된다.
알하이삼은 이를 원뿔곡선과 기하학적 증명을 통해 풀어냈으며 그의 사후에 많은 학자들이 수많은 수학적·기하학적 방법을 동원, 문제 풀이에 도전했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풀이법을 내놓은 학자는 1997년 옥스퍼드 대학의 수학자 피터 엠 뉴만으로 알려져 있다.
광학의 서는 생리학적으로 광학을 풀이한 최초의 책이기도 하다. 의학, 안과학, 해부학, 생리학에 모두 능통했던 알하이삼은 책을 통해 시각의 프로세스, 안구의 구조, 눈에서 이미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부터 양안시차 같이 복잡한 시각의 작용까지 모두 상세히 묘사했다.
이런 알하이삼의 업적은 오늘날까지 높게 인정받아 결국 1982년 10디나르의 모델이 된 후 2003년에는 1만 디나르 모델로 승진(?)까지 하며 그 위용을 높이고 있다. 사담 후세인이 권좌에서 물러난 후 현재 이라크 지폐에 남은 유일한 인물이라는 점은 그가 이라크에서 가지고 있는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과학자: 이븐 알하이삼
국가: 이라크
지폐: 1만 디나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