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수전 라인의 다채로운 인생 THE MANY LIVES of SUSAN LYNE

올해의 가장 영향력 있는 비즈니스 우먼 MOST Powerful WOMEN 2011


그녀는 루퍼트 머독, 마사 스튜어트, 제인 폰다, 마이클 아이스너 Michael Eisner 와 함께 일했다. 패티 허스트 Patty Hearst 를 감옥에 보냈고, ‘위기의 주부들 Desperate Housewives ’ 을 방영하게 했다. 이제는 떠오르는 럭셔리 웹사이트 길트 그룹 Gilt Groupe 에서 또 한 번 새로운 삶을 꾸리고 있다.

By Jennifer Reingold

수많은 이력서 중 유독 잘 읽히고 재미있는 것이 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1930년대 섹시 스타 헤디 라마 Hedy Lamarr *역주: 영화 ‘삼손과 데릴라’ 등에 출연했으며 영화사상 최초로 누드 신을 연기한 배우의 이력서도 그럴것이다. 그녀는 배우였지만 로켓 과학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녀가 특허를 낸 무전 로켓유도 시스템은 나중에 미군에서 쓰이기도 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Vladimir Navokov *역주: ‘롤리타’를 쓴 러시아 태생의 미국 소설가는 문학뿐만 아니라 인시류학(나방과 나비를 연구하는 학문)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 더프 매케이건 Duff McKagan은 록밴드 건스앤로지스 Guns N’Roses의 베이시스트로 세상을 뒤흔들었지만, 지금은 뜻밖에도 자산운용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이쯤에서 떠오르는 인물이 오늘의 주인공 수전 라인 Susan Lyne이다. 올해 나이 61세인 그녀가 회장으로 있는 길트 그룹 Gilt Groupe은 요즘 가장 주목받는 이커머스 e-commerce 사이트로, 발레리나 스커트에서부터 송로버섯에 이르기까지 모든 명품과 브랜드 상품을 판매한다. 라인이 헤디 라마처럼 국가 안보에 공을 세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위기의 주부들’이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을까? 수준 높은 영화잡지가 없는 세상, 매일 오후 12시 1분에 사무실에서 편하게 70% 할인된 가격으로 발렌티노 가방을 구입할 수 없는 세상은 어떨까? 시시때때로 직업을 바꾼 라인(‘와인’과 각운을 맞춰 발음)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바로 그런 단조롭고 칙칙한 인생을선고받았을 것이다. (물론 길트 그룹에서 파는 명품은 필자 아이들의 대학 등록금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라인은 직업 변신의 귀재다. 그녀는 정통을 확연히 벗어난 방법으로 커리어를 쌓아 성공신화의 주인공이 되었다. 인터넷 2.0 시대의 주요 인물로 거론되고 있는 그녀는 셰릴 샌드버그 Sheryl Sandberg *역주: 전 구글 부사장이자 현 페이스북 COO 같은 인물과 패널로 동석하기도 한다. 길트 그룹 개발자들과 아이패드 전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도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AOL 이사회 위원이기도 한 그녀는 이사회 의장 짐 스텐겔 Jim Stengel로부터 “AOL 이사회에 딱 맞는 인물”이라는 칭찬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전 마사 스튜어트 리빙 옴니미디어 Martha Stewart Living Omnimedia middot; MSLO에서 일하던 때만 해도 라인은 자칭 ‘인터넷 초보자’였다. MSLO에 들어가기 전 그녀는 ABC의 고위급 방송 편성 담당 임원이었고, 그전에는 잡지 편집장이었다. 그보다 더 오래전에는 히피족이었다.

하지만 수전 라인의 커리어를 관통하는 공통된 줄기가 몇 가지 있다. 첫째, 그녀는 항상 “열풍이 부는 곳에” 이끌렸다고 스스로 말한다. 익숙한 것만 붙들고 있지 않았다는 얘기다. “여러 차례 나를 믿고 과감한 도약을 시도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다시 초심자로 돌아갔다”는 것이 그녀의 말이다. 둘째, 그녀는 직접 인생의 각본을 썼다. 여성이 전문직으로 성공하고 싶다면 한우물을 파야한다는 조언이 대세였던 시기에 그녀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라인은 다음 단계에 예정된 일보다는 흥미로워 보이는 일을 택한다. 가족을 위해 따로 시간을 내기도 했지만, 총성이 난무하는 권력 다툼의 세계에선 타고난 미모와 고상한 매너로 승부했다. 매트릭스 파트너스 Matrix Partners의 파트너이자 길트 그룹의 최대 주주인 닉 베임 Nick Beim은 “라인의 우아함과 EQ(감성지수)는 평균을 훨씬 웃돈다”고 평한다. 흔들림 없는 단호함도 그녀의 팬들을 매료시키는 매력이다. 그녀와 함께 일했던 어떤 전설적인 인물들(루퍼트? 마사? 제인 폰다? 누구?)과도 뚜렷하게 대비되는 돋보이는 자질이다.

협업에 강한 라인의 업무 스타일은 사실 기존 상명하복식 체제보다는 지금처럼 불확실성이 짙은 비즈니스 환경에 더 잘 맞을 수 있다. 그녀는 리더라는 옷을 갑옷이 아니라 캐시미어 숄처럼 부드럽게 걸친다. 강한 자존심도 물론 있지만, 잘 드러내지 않는다. 라인은 남자처럼 행동하지 않는 편이다. 그녀는 특히 여성들에게 독보적인 리더이자 멘토다. 아르마니Armani 여직원들 사이에선 엄마 같다는 평도 듣는다. 물론 그녀는 최신 팝 문화에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가진 최고의 장기는 창의력이 뛰어난 인재들이 최고의 성과를 내도록 도와주는 것임이 시간이 지날수록 분명해졌다. 뉴욕 어퍼 이스트 사이드에서 피노 그리지오 Pinot Grigio 레드와인 잔을 손에 든 라인이 “40년 전의 나는 분명 지금의 나를 알아볼 것”이라고 묘한 미소를 흘리며 말한다. 과연 그럴까? 필자는 잘 모르겠다. 지금의 그녀는 뉴욕 매디슨 애비뉴 Madison Avenue와 더없이 잘 어울린다. 백조처럼 우아한 금발머리는 기본이다. 누구나 꿈꾸지만 결코 가질 수 없는 품위와 스타일도 그녀에게선 저절로 우러나온다. 낮고 조용한 목소리를 가진 그녀는 어려운 이야기를 하려고 할 때면 사과를 하듯 한 번씩 목을 가다듬는다. 그녀는 그 자체로 길트 그룹의 완벽한 홍보대사다.

1970년대 초반 수전 라인은 푸치Pucci 가운이나 캘빈 클라인 정장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부유층을 대상으로 마케팅을 하기보다는 그들을 타도하는 데 열의를 쏟았다. 옷은 굿윌 Goodwill *역주: 기증받은 중고 물품을 판매하는 사회적 기업. 미국 전역에 약 2,500개 지점이 있다에서 사 입었다. 라인은 부족한 것 없이 자랐다. 보스턴 지역의 유복한 아일랜드계 천주교 가정에서 4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변호사 출신 사업가인 아버지 유진 라인 Eugene Lyne은 딸에게 늘 세상을 향해 열린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지만, 딸이 4년 사이에 예술대학, 조지 워싱턴대, UC 버클리를 차례로 자퇴할 정도로 활짝 열린 사람이 될 줄은 몰랐다. “자퇴를 할 땐 두 번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과감했다. 그때는 우리가 역사를 바꾸게 될 것이라고 믿었던 순간이었다”고 그녀는 말한다.

19살 때부터 라인은 지역에서 가장 열정적인 인물들과 인맥을 맺는 재주가 있었다. 버클리에서 그녀가 가장 가깝게 지냈던 동지들은 톰 헤이든 Tom Hayden *역주: 1960년대 미국의 학생운동가로 전 캘리포니아 주 상원의원의 조직 ‘붉은 가족 The Red Family’에서 만난 진짜 ‘동지들’이었다. 그녀는 그들의 집에서 함께 살았다. 블루 페어리랜드 유치원 Blue Fairyland Preschool에서 실크스크린 판화와 양초 만들기를 가르치기도 했는데, 그때 가르쳤던 아이 중에는 제인 폰다의 딸도 있었다. 그때도 라인은 평범한 운동권 학생들과는 달랐다. “그녀는 보통 멍청한 히피족과는 전혀 달랐다. 그녀는 세상을 발견하는 것을 즐겼다. 원한으로 가득 찬 반항아는 아니었지만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라고 기자 겸 시민운동가이고 당시 라인의 남자친구이기도 했던 로버트 쉬어 Robert Scheer는 말한다.

또한 당시 라인은 리더 타입이 아니었다. “메가폰을 잡는 일은 내 담당이 아니었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녀는 자신이 권력에 가까이 있으면서도 권력을 행사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운동권 생활을 청산한 라인은 그다음 할 일을 찾아 1975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사했다. 그녀가 자리를 잡은 곳은 ‘시티 City’라는 잡지사였다. 시티는 클레이 펠커 Clay Felker *역주: 뉴욕지 창간인으로 현대적인 잡지 양식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인물의 뉴욕 New York지에 대응하기 위해 프랜시스포드 코폴라 Frances Ford Coppola *역주: 영화 ‘대부’의 감독가 만들어낸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 주간지였다.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도와 더 나은 성과를 내게 하는 데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직접 글을 썼어도 괜찮았겠지만, 다른 사람에게 맡겼을 때 더 훌륭했다. 나는 일을 맡긴 사람에게 계속 질문을 던져 그 사람이 훨씬 더 나은 결과를 도출해내도록 유도할 수 있었다”고 그녀는 말한다.

‘시티’에서 나온 후 그녀는 조너선 라슨 Jonathan Larsen이 운영하는 신랄한 격주 발행 잡지 ‘뉴 타임스 New Times’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 전 남자친구 로버트 쉬어와 함께 일하면서 그녀는 희대의 특종을 잡았다. 1974년 신문재벌 상속녀 패트리샤 허스트 Patricia Hearst를 납치한 혐의로 수감 중이던 과격파 조직 공생해방군 Symbionese Liberation Army 소속단원 빌과 에밀리 해리스 Bill & Emily Harris 부부를 대상으로 한 최초의 옥중 인터뷰였다.

뉴 타임스와의 인터뷰 도중 에밀리 해리스는 허스트를 납치한 윌리 울프 Willie Wolfe(나중에 허스트의 연인이 됨)가 허스트에게 원숭이 모양의 작은 조각품을 주었다는 이야기를 했고, 당시 허스트를 기소 중이던 상대 변호사 제임스 브라우닝 James Browning이 이 인터뷰를 읽었다. 그리고 허스트가 체포될 당시 갖고 있었던 지갑 속 소지품을 다시 점검해 원숭이 모양 조각품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법정에서 만약 허스트가 무장강도조직에 자발적으로 가담한 것이 아니라 강제로 투입된 것이라면 납치범이 준 선물을 지니고 있었을 리 없다고 주장했다. 납치범과 연인이 되어 그의 조직 활동에 동조한 허스트는 결국 22개월 동안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그때도 라인은 뛰어난 육감을 발휘해 자신이 속한 회사가 정점을 찍고 내리막길에 들어섰음을 알아챘다. 1978년 그녀가 떠난 후 뉴 타임스는 이듬해 폐간되었다. 뉴 타임스를 떠난 그녀는 ‘빌리지 보이스 Village Voice’의 편집주간으로 부임했지만, 이곳에서도 승진을 기다리지 않고 한 번 더 도약을 시도했다. 새로 계약서에 서명한 회사는 블루 페어리랜드 유치원 시절 그녀와 인연을 맺은 제인 폰다의 IPC 필름이었다. 이곳에서 라인이 맡은 업무는 영화화 가능성이 있는 기사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무렵, 영화 때문에 그녀의 가정생활이 복잡해졌다. 그녀는 1984년에 CBS 다큐멘터리 ‘식스티 미닛츠 60 Minutes’의 PD 겸 기자 조지 크라일 3세 George Crile III와 결혼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2년 전 방송된 다큐멘터리 때문에 크라일이 소송에 휘말렸다. 크라일과 마이클 월러스 Michael Wallace가 함께 제작한 다큐멘터리 ‘월남전의 속임수 A Vietnam Deception’는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William Westmoreland 장군이 의도적으로 북베트남 세력을 평가절하했다고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웨스트모어랜드는 CBS와 크라일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고, 1억2,000만 달러의 손해배상도 요구했다. 라인과 크라일이 결혼한 1984년은 재판이 시작되는 해였다.

패트리샤 허스트 사건이 1970년대를 대표하는 법정싸움이었다면, 1980년대를 상징하는 사건은 단언컨대 웨스트모어랜드 사건이었다. 크라일은 기자로서의 자질은 물론 미국인으로서의 국민성까지 상실했다고 맹비난을 받았지만, 명예훼손 사건을 처음 수임한 데이비드 보이스 David Boies의 활약에 힘입어 1985년 무죄를 입증받았다. 웨스트모어랜드는 자신의 애국충정에 의문을 제기할 의도가 없었다는 CBS의 진술을 갑자기 수용했다. 소송 중 라인은 크라일이 안정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아직까지 라인과 가까운 친구로 지내는 당시 변호사 보이스는 “라인이 크라일의 사기를 북돋워 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그녀는 놀랍도록 평정심을 유지했다”고 말했다.

제인 폰다의 IPC 필름에서 일하는 동안 라인은 더딘 영화제작 속도에 답답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틈에서 기회도 발견했다. VCR이 영화를 문화의 강력한 시금석으로 재탄생시키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사람들의 시간 활용 방식을 바꾸어 놓는 기술적 발명을 목격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사람들의 관심사도 바뀌고 있었다”고 그녀는 말한다. 두꺼운 롤로덱스 Rolodex *역주: 회전식 원통형 링에 철해진 카드파일 형태의 주소록으로 넓은 인맥을 상징함를 꺼내든 그녀는 빌리지 보이스에 있을 때 소유주와 직원으로 만났던 루퍼트 머독에게 연락을 했다. (그녀는 지금도 직원들에게 인맥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 사람들을 몇 번이고 다시 만날 것임을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라인은 머독에게 프랑스에서 출판되는 잡지를 참고해 영화 전문 잡지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영화배우들을 띄워 주며 비위만 맞추는 잡지가 아니라, 최고의 필진을 갖추고 영화산업계를 샅샅이 파헤치는 잡지를 만든다는 것이 그녀의 계획이었다. 그렇게 해서 1987년 탄생한 잡지 ‘프리미어 Premiere’는 발간 2주만에 창간호가 매진되는 기록을 세웠다.

라인은 자신이 중책 맡기를 좋아하고, 또 그 임무를 잘 수행한다는 것을 프리미어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경영진이라면 누구든 노골적으로 무시하기로 유명한 기자 세계에서, 그녀는 기자들에게 충분한 자유를 주면서도 자녀의 안부까지 잊지 않고 챙기는 보스로서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했다. 프리미어 부편집장을 지냈고 나중에는 마사 스튜어트의 MSLO에서도 라인과 함께 일한 신디 스타이버스 Cindy Stivers는 “라인과 함께 일하는 것이 정말 즐거웠다. 그녀는 결단력이 있고 경청할 줄도 안다. 또 자유로운 브레인스토밍을 즐긴다”고 말한다. 로버트 레드포드 같은 시대의 아이콘에게도 서슴없이 태클을 거는 라인은 레드포드가 창립한 선댄스 인스티튜트 Sundance Institute를 비판하는 기사를 내기도 했다.


여성으로서 1980년대 말 회사를 이끈다는 건 난관의 연속을 의미했다. 프리미어 창간 후 얼마 되지 않아 라인은 둘째를 임신했다. 헐렁한 재킷을 입고 다니며 5개월 동안 임신 사실을 숨긴 그녀는 동료들과 상영회에 가던 중 진통을 느꼈다. 택시를 바꿔 타고 병원에 도착한 지 10분 만에 딸 제인 Jane을 낳은 그녀는 출산 후 3주 만에 회사에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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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미어에 8년 동안 머물렀던 라인이 다시 방황을 시작할 무렵, 당시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를 이끌던 조 로스 Joe Roth가 그녀에게 함께 영화와 TV 시리즈를 개발하자는 제안을 했다. “내가 40년 동안 이 일을 해왔지만 업계 밖에 있는 사람에게 손을 내민 일은 정말 드물었다. 하지만 라인은 사업 수완도, 사람 대하는 능력도, 심미안도 뛰어났다”고 이제 레볼루션 스튜디오 Revolution Studios를 이끄는 로스는 말한다.

이직 초 라인은 안네 프랑크 Anne Frank와 주디 갈란드 Judy Garland *역주: 아역스타로 유명했으며 뮤지컬 영화 ‘오즈의 마법사’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가수 겸 배우를 각각 메인 캐릭터로 삼은 미니시리즈 두 편을 채택해 성공리에 방영하며 능력을 입증했다. 그리고 마이클 아이스너 CEO의 눈에 띈 라인은 2002년 ABC 엔터테인먼트 사장 자리로 승진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는 단순하지만 불가능에 가까웠다. 시청률 꼴찌 신세였던 ABC를 구출해 1970년대 마이클 아이스너가 이끌던 영광의 시절을 재현하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라인은 처음으로 실패의 쓴맛을 보았다. 당시 월트 디즈니는 미키마우스도 뒤통수를 조심해야 할 만큼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아이스너는 사방에서 집중 공격을 받고 있었다. 밥 아이거 Bob Iger 사장은 후임자로서의 자질을 증명하고 싶어했지만 회사에선 수년째 히트작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라인의 상관이었던 ABC 회장 로이드 브라운 Lloyd Braun은 사사건건 아이거와 충돌했다. 브라운과 라인은 지나치게 야심찬 (그리고 그만큼 제작비도 비싼) ‘로스트 Lost’라는 드라마를 강행하려 했지만, 그에 관해서도 아이거와 마찰을 빚었다.

라인은 시장에서 여성 시청자가 소외되어 있다고 판단하고, 들뜬 마음으로 이들을 위한 새 드라마를 준비했다. 그녀는 형사물 대신 ‘그레이 아나토미Grey’s Anatomy’를 골랐다. 곧 이어 위스테리아 레인 Wisteria Lane이라는 근교 주택가에 사는 여자들의 비밀스러운 삶을 그린 통통 튀는 드라메디 dramedy *역주: 코미디를 가미한 드라마 ‘위기의 주부들’을 내놓았다. 브라운은 말한다. “수전은 대본을 들고 내 책상에 툭 던졌다. 내가 훑어보고 ‘제목은 괜찮은데, 수전?’ 하고 말하니 그녀는 ‘오늘 밤에 읽어 보세요. 저는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했다. 그녀는 그때부터 이 드라마가 잘 될 줄 알았던 것 같다.”

ABC의 가을 편성 발표를 불과 몇 주 앞둔 2004년 4월 브라운이 회사에서 쫓겨났다. 아이거는 공개적으로 라인은 안전하다고 말했지만, 2주 후 라인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녀는 절망했다. 항상 먼저 그만두는 쪽은 그녀였지 어디에서도 쫓겨난 적은 없었다. 항상 일자리를 제안 받았지 먼저 찾아본 적도 없었다. “일을 그만두면서 아직 다 못한 일이 남았다고 느낀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해고 통보는 공개 처형이었다. 그것도 ‘위기의 주부들 시즌 2’ 방영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라인은 몇 주 동안 아이스너의 전화를 받지 않을 정도로 분개했지만, 결국 서운한 감정을 흘려 보냈다. “그때 내가 배운 것 중 하나는 약간의 무시나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는 일체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건 엄청난 시간낭비일뿐만 아니라 유치한 짓이다”라고 라인은 말했다. ‘위기의 주부들’은 방영 첫해 에미상 Emmy Awards 6개 부문을 석권했고, 파일럿 방영 당시에는 1996년 이래 ABC가 방영한 신작 드라마 중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ABC에서 해고당한 건 전화위복이었다고 라인은 말한다. 그 덕에 처음으로 CEO 직함을 달게 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가기로 했던 곳은 마사 스튜어트 리빙 옴니미디어(MSLO) 이사회였다. MSLO는 라인이 이사회 위원으로서 브랜드를 키워 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갑자기 브랜드의 상징인 마사 스튜어트가 수감되고 *역주: 마사 스튜어트는 주식 부정거래 혐의로 2004년 말부터 5개월간 복역했고 8개월간 가택연금 되었다 CEO 섀론 패트릭 Sharon Patrick이 쫓겨나는 사태가 발생했다. 수다쟁이 마사 스튜어트와 뚜렷하게 대비되는 침착함이 한몫했는지, 라인은 위기에 처한 회사를 구해낼 적임자로 급부상해 2004년 11월 CEO 자리를 이어받았다. 당시 이사회 동료였고 라인이 떠난 후에 MSLO공동 CEO가 된 웬다 밀라드 Wenda Millard는 “라인은 MSLO 브랜드와 참으로 잘 어울렸다. 사람들 사이에 신뢰와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고 말했다.

처음에 라인은 크리스마스 트리 꼭대기의 솔방울 장식처럼 마사 스튜어트의 자리에 잘 어울렸다. “그녀는 순식간에 회사 사람들의 환심을 샀고, 앞으로 회사 발전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도 금방 알아챘다”고 전MSLO 이사회 위원 릭 보이코 Rick Boyko는 말한다. 라인은 마사 스튜어트가 연방정부 초청을 받아 참석했던 웨스트 버지니아의 ‘캠프 컵케이크Camp Cupcake’에도 주기적으로 방문해, 낱말 만들기 게임 스크래블 Scrabble과 브레인스토밍을 즐겼다. 회사 운영을 다변화하고 비용을 절감하는 한편 내부 직원과 광고주 사기 진작에도 힘쓰며 회사가 어려운 시절을 곧 통과할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녀는 마사 스튜어트의 모습까지 닮아 갔다. 뉴욕지는 라인을 마사 스튜어트의 ‘금발 도플갱어’라고 불렀다. “엄마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 마사 스튜어트와는 달리 실제 모든 면에서 회사를 키우는 사람은 수전 라인”이라며 정곡을 찔렀다.

그러던 2005년 말, 라인 자신에게도 돌보아 줄 누군가가 필요하게 되었다. CEO로 취임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남편 조지 크라일이 췌장암 선고를 받은 것이다. 라인은 계속해서 종일 근무를 하며 애널리스트 회의에서 발표를 했고, 합작 벤처 사업 검토를 하며 서류 글씨체와 소품 소재 선정작업에까지 관여했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그녀의 내면은 남편과 함께 투병하고 있었다. ‘찰리 윌슨의 전쟁 Charlie Wilson’s War’이라는 책을 저술한 남편은 9 middot; 11 테러 전에 알 카에다 단원들을 인터뷰한 모험가였다. “나는 미래로 이어진 끈이 필요했다. 조지가 떠난 후의 삶으로 나를 이끌어 줄 어떤 것이 필요했다. 일은 슬픔의 해독제였다. 옳은 결정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때는 일을 통해서 구원받는 것 같았다”고 그녀는 말한다.

2006년 5월 15일 크라일이 세상을 떠났다. 라인은 CEO 활동을 계속했지만 전보다 쉽지 않은 환경에 놓여 있었다. 마사 스튜어트는 법적으로 회사 운영에 관여할 수 없었지만, 이사회 투표권은 계속 행사했다. 그녀가 직접 앉힌 회장 찰스 코펠만 Charles Koppelman은 그녀의 든든한 우군이었다. 라인은 스튜어트의 보수 지급 문제에서부터 비타민의 적합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스튜어트-코펠만 동맹과 부딪혔다. 라인 자신도 실수를 했다. 블루프린트 Blueprint라는 디자인 잡지를 출시했다가, 예상 외의 높은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문을 닫은 것이다. 라인이 폐간 결정을 내리자 바로 다음날 아침 스튜어트는 모든 직원을 다시 고용할 것을 종용했다.

2008년 6월 라인은 자리에서 물러났다. 현재 스튜어트와 라인은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스튜어트는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라인이 떠난 후 MSLO의 주가는 60% 가까이 하락해 3.51달러까지 곤두박질쳤다. 라인이 떠났을 때 주주도 함께 떠났어야 했다는 것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58세가 된 후 자유로워진 수전 라인은 버클리로 돌아왔다. 그녀는 뉴욕 주 비버킬 Beaverkill에 있는 시골집에 가서 편히 쉴 수도 있었고, 세계 여행을 할 수도 있었다. 그녀를 데려가려고 애썼던 오프라 윈프리의 미디어 회사 하포 Harpo를 맡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라인은 인터넷 업계 거물이 되기로 결심했다. 2008년 9월 길트 그룹 CEO 자리로 와달라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디지털 광고대행사 더블클릭 DoubleClick을 경영하면서 2007년 길트 그룹을 창업한 케빈 라이언 Kevin Ryan과 수전 라인을 처음 연결해 준 사람은 라인의 오랜 친구이자 길트 그룹의 최대주주인 매트릭스 파트너스의 닉 베임이었다. 길트 그룹은 인터넷 2.0 기업을 표방했지만, 실제론 사이트를 방문하는 모든 소비자에게 무언가 줄 수 있는 온라인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를 지향하고 있었다. 케빈 라이언은 라인이 브랜드 목표를 이해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의 롤로덱스에도 탐을 냈다.

라인이 길트 그룹 CEO로 부임한 날은 리먼 브라더스가 무너진 바로 그날이었다. 그 후로 이어진 경기 침체 속에서도 라인은 회사를 폭발적으로 성장시켰다. 2010년 말엔 매출액 4억 달러, 직원 수 500명을 돌파할 수 있었다. “라인은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을 거리낌 없이 묻는다. 나는 그녀가 일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모든 캐치프레이즈를 하나하나 손보고, 항상 엔지니어들에게 직접 질문하고 설명을 듣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고 길트 그룹의 공동 창립자이자 최고마케팅책임자(CMO)를 맡고 있는 알렉시스 메이뱅크 Alexis Maybank는 말한다. 남편을 떠나 보낸 후 라인은 더 좋은 경영자, 그리고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스스로 말한다. “그때 얻은 것은 ‘이게 아니라 다른 일을 하고 있어야 하는데’라는 집착을 모두 떨쳐버리고 바로 지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상대방에게 100% 집중해야 한다는 깨달음”이었다고 라인은 말한다.

2010년 9월 라인은 회장으로 승진했다. 라이언은 그와 라인이 “파트너관계”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가 창립자인 만큼 길트 그룹이 상장될 땐 회사가 그의 명의로 될 것이다. 라인 쪽에서도 직함이 변경되는 것엔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미 사내 여러 부서와 신규 벤처에서 그녀에게 직접 보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9월 어느 날, 길트 그룹의 미식 사이트 테이스트 Taste의 아이패드 애플리케이션 프로토타입을 검토하기 위해 회의가 열렸다. 라인은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리더의 권위를 뽐냈다. 그러면서도 사업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어제 생토마토 파스타 레시피를 따라 음식을 만들어 보았는데, 정말 환상 그 자체였다” 같은 말로 회의실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렇다면 애플리케이션에 대한 의견은 어떨까? 그녀는 목청을 한 번 가다듬더니 “최고의 레시피 체험 기회를 제공하는 애플리케이션을 만든다면,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레시피에 다른 사람을 끌어오고 싶을 것이다. 이 사람들이 길트 테이스트 웹사이트에 레시피를 계속 업데이트하면서 우리 웹사이트에서 식재료를 구매하도록 유도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레시피를 모아 꾸민 화면을 보여주며 회의의 포문을 열었다.

회의실에는 일순간 정적이 흐른다. 그 가운데 테이스트의 편집자문위원을 맡은 전 ‘구어메이 Gourmet’지 편집장 루스 레이츨 Ruth Reichl이 “참으로 기발한 생각이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아이디어”라며 거침 없이 목소리를 높인다. 회의는 순식간에 발표장에서 적극적인 대화의 장으로 바뀐다. 레이츨은 약이 오른 듯 “제일 좋은 질문은 항상 수전 라인 회장 차지라니까”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길트 그룹은 내년 중 기업공개(IPO)를 계획하고 있다. 당분간은 라인도 다른 일자리로 떠날 것 같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녀의 다음 행보는 어디로 향하게 될까? 사실 수전 라인은 TV 드라마 ‘총사령관 Commander-in-Chief ’의 작가 로드 루리 Rod Lurie가 극 중 최초의 여자 대통령 캐릭터를 그릴 때 모델로 삼은 인물이다. 당시 로드 루리가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 모린 다우드 Maureen Dowd에게 말했듯이, 그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고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하며 차분하기까지 한 인물”을 그리고 싶어했다. 물론 그런 여자 대통령은 환상에 불과하겠지만. 아닌가?


FORT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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