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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폐 속 과학자] 세균 헌터가 된 빈농의 아들

지폐 속에는 한 국가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지폐에 그려진 인물과 동물, 유적지, 상징물들의 면면은 그 나라를 이해할 최고의 역사 교과서다. 이는 과학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지폐 속에 등장하는 과학자와 과학기기들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좁게는 한 국가, 넓게는 인류의 과학 역사를 알 수 있다.



김청한 기자 best@hmgp.co.kr

과학자: 노구치 히데요
국가: 일본
지폐: 1,000엔

일본 지폐 1,000엔은 현지에서 우리나라 돈으로 1만원권 정도의 가치를 갖는다. 그 만큼 실생활에서 자주 사용하는 화폐다. 이 1,000엔에 얼굴을 내민 생경한 헤어스타일의 인물은 바로 일본이 자랑하는 생물학자 노구치 히데요다. 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만 15명이나 되는 일본에서 1,000엔의 주인공으로 낙점됐다는 사실만으로도 일본 내 그의 명망을 잘 알 수 있다.

노구치가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국민 과학자 대우를 받는 것은 그의 인생 자 체가 워낙 극적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나 가업을 이어야 하는 운명, 어릴 적의 화상으로 불구가 된 왼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에 대한 엄청난 열정으로 이를 극복한 과정 등 그의 인생은 사람들이 열광할 만한 요소들로 점철돼 있다.

노력으로 극복한 장애와 가난
1876년 후쿠시마현에서 태어난 그는 생후 1년 6개월 경 화덕에 넘어져 왼손 손가락이 전부 붙어버리는 큰 화상을 입고 조막손이 되고 말았다. 학창시절 은사였던 고바야시 사카 선생의 도움으로 수술을 받아 완치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손의 기능을 회복할 수 있었던 노구치는 이를 통해 의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러나 부잣집 아들도 아닌데다 손까지 불편한 그가 의사가 되는 것은 당연히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노력으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꿨다. “누구보다 3배, 4배, 5배 공부하는 사람. 그것이 천재다”라는 그의 말은 그 열정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노구치가 가진 열정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세이사쿠’였던 이름을 ‘히데요’로 바꾼 게 그것이다. 1898년 노구치는 한 소설에서 자기와 같은 이름의 의사 이야기를 읽었는데 소설 속 노구치 세이사쿠는 훌륭한 의술을 지녔지만 게으름 탓에 인생을 망치는 인물이었다. 이에 노구치는 그렇게 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개명을 했다.

그를 의사의 길로 인도한 사람은 왼손을 수술해준 의사 와타나베 카니에 선생이었다. 노구치는 와타나베를 스승으로 삼아 의사시험 준비부터 영어, 독어 등 세계적 학자로 커 나갈 기반을 닦는다.

1896년 스무 살의 나이로 의사시험에 합격한 그는 준텐 도의원 전염병 연구소, 요코하마 해양검역소 등을 거치며 실력을 쌓았고 통역사로서도 뛰어난 소질을 보였다. 그리고 1900년 펜실베이니아대학 교수였던 사이먼 플렉스너 박사와의 인연을 계기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빈농의 아들이 세계적 생물학자로 거듭날 계기가 마련된 셈이다.

무한 질주 실험 머신 이후
노구치는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뱀의 독, 광견병, 결핵 등을 연구했고 덴마크 유학을 거쳐 1904년 록펠러의학연구소(현 록펠러대학)에 들어간다. 그리고 여기서 23년간 근무하며 수많은 업적을 통해 성공신화를 써내려갔다.


특히 매독 병원체인 ‘스피로헤타균’을 최초로 발견하고 황열병 예방 백신과 혈청제 개발에 앞장서는 등 세균과 관련된 연구에서 큰 성과를 이뤘다. 동양에서 온 무명의 과학자가 잇따라 매독, 소아마비, 광견병 등 주요 질병들의 병원체를 세계 최초로 발견하자 미 의학계는 그에게 ‘세균 헌터’ 라는 칭호를 붙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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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경이로웠던 것은 쉬지 않고 연구에 몰두하는 모습이었다. 지인들은 믿기 힘들 만큼 빠르고 정확하게, 휴식조차 없이 실험과 연구를 진행하는 그를 ‘실험 머신’ 이라 부르며 “일본인은 잠을 자지 않는다”고 놀라워했다.

200여편에 달하는 엄청난 숫자의 논문도 이 같은 열정의 산물이다.

노구치의 노력은 실험실에서만 발휘된 것이 아니다. 전염병을 연구하고 퇴치하기 위해서라면 아프리카, 멕시코, 브라질 등 세계 어디라도 주저하지 않고 떠났다. 그 대가로 1918년 에콰도르 정부로부터 명예 육군 군의관 대우를 받았으며 아프리카에서는 질병대책의 연구·활동에 현저한 공적을 이룬 의학자에게 ‘노구치 히데요 아프리카상’을 수여, 감사를 표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목표를 위해 끝없이 질주하던 그의 앞길을 막은 것은 평생 연구해오던 황열병이었다. 1928년 아프리카 가나에서 황열병에 감염돼, 생가의 기둥에 그가 새겨 놓은 말처럼 이역만리 타국에서 아쉬운 생을 마감했다. 지금도 보존돼 있는 기둥에는 ‘뜻을 이루지 못하면 두 번 다시 이 땅을 밟지 않겠다’고 쓰여 있다.




천재의 어두운 이면








노구치 히데요는 일본의 국민 과학자로 지폐에 더해 만화, 우표, 심지어 맥주캔에도 등장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그의 업적과 생애에 대해 의구심을 표명하기도 한다.

가장 큰 논란은 업적이 과장됐다는 주장이다.

사후에 그의 연구들을 재검토한 결과, 소아마비·광견병·트라코마·황열병의 병원체를 발견했다는 그의 발표가 대부분 오류였음이 확인된 것. 때문에 연구 방법의 잘못에 더해 학자로서의 정직성 역시 의심받고 있다.

노구치의 최대 업적으로 꼽히는 매독 연구에서도 ‘인체 실험’에 의한 윤리성을 공격받고 있다. 그는 연구를 위해 피실험자들에게 매독균을 주사했는데 개중에는 2세 유아와 18세의 미성년자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 일로 노구치에게는 많은 비난이 쏟아졌고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결혼 사기꾼이라는 지적도 그의 이력에 큰 흠집이다. 미국으로의 이주 경비 마련을 위해 도쿄 재력가의 딸과 결혼했지만 이주 이후 연락을 두절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직까지 일본에서 절대적 인기를 누리는 비결은 뭘까. 많은 해석이 있겠지만 엄청난 악조건을 노력으로 이겨낸 한 과학자의 ‘아메리칸 드림’이 일본인들이 지향하는 영웅적 모습을 하고 있어서는 아닐까.




파퓰러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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