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IT

극한경쟁의 파고 넘을 신무기 극한기계

THE EXTREME MACHINES

현대는 극한경쟁의 시대다. 어떤 산업인지를 막론하고 현실에 안주해 기술혁신을 멈추면 1등 기업조차 한순간에 몰락의 길을 걸을 수 있다. 이와 관련 최근 초고온이나 극저온·초고압·초고진공 등 극한조건에서 사용되는 극한 기계가 기계산업 분야에서 극한경쟁의 파고를 뛰어넘을 블루오션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기계산업은 아무래도 정보통신기술(ICT) 산업에 비해서는 기술의 진보나 변화가 더디다. 하지만 혁신의 바람은 기계산업이라고 비켜갈 턱이 없다. 시장혁신의 요구가 날로 커지고 있는 상태다. 우리나라의 기계산업은 지난 2012년 세계시장 점유율 3.2%로 세계 8위권에 진입할 만큼 단기간 내에 급성장했다. 하지만 눈부신 양적 성장에 비해 질적 성장은 초라하기 그지 없다. 기계의 가격을 어림할 때 기계 중량에다 쇠 값을 곱하면 얼추 비슷하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이에 전문가들은 국민소득 4만불 시대로 도약하기 위해선 모든 산업의 토대가 되는 기계산업의 성장이 필수불가결하다고 말한다. 또 기계산업계 스스로 쇠 값의 수십 배, 수백 배의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변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과거의 구태를 벗고 진입장벽이 높은 특수재, 전용재 같은 블루오션 기계시장으로 눈을 돌릴 때가 왔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이 가장 주목하고 있는 분야는 바로 극한 기계다. 초고온이나 극저온, 초고압, 초고진공 등의 극한조건에서 쓰이는 극한 기계야 말로 국내 기계산업계가 나아가야할 훌륭한 블루오션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극한 기계 산업은 이미 ICT 산업 혁신의 기반기술로 부상하며 관련 수요가 괄목할 만한 증가세를 나타내고 있다. 활용 분야 또한 우주 항공, 국방, 심해자원 개발, 전자·반도체 등으로 확산일로를 걷고 있다.

이런 극한 기계 시장의 최대 특징은 명칭에 걸맞은 고부가가치 창출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일례로 구경 100㎜의 일반 산업용 밸브는 가격이 수십만원 수준이지만 극저온 및 고진공용 밸브는 수백만원, 고온·고압용 밸브는 개당 수천만원대를 호가한다. 또한 극한 기계 산업은 매우 보수적이고, 소수에 의해 지배되는 특성을 가진다. 때문에 선점기업의 우위가 쉽게 깨지지 않는 공급자 중심 시장이 형성돼 있다. 신규 진입은 힘들지만 자리를 잡고 나면 사업성이 오랜 기간 보장된다는 얘기다. 독일, 미국, 일본의 기계업계가 한국과 중국 등 후발주자들의 추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는 비결도 여기에 있다.









국내의 경우 한국기계연구원이 2012부터 극한기계기술 전담 연구본부를 설치하고 해당분야 연구를 선도해 나가고 있다. 또한 기계연 극한에너지 기계연구실 박성제 박사팀은 극한기계의 원천기술을 연구·개발해 산업화를 촉진하는 국내 최강 연구팀으로 꼽힌다. 지금껏 다수의 연구성과를 창출하며 전통 기계산업이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환골탈태할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있다.

연구팀이 지난 2008년 국산화에 성공한 K1A1 전차의 야간조준경과 주야간 관측장비에 탑재된 ‘열영상 장비용 초소형 극저온 냉동기’가 그 실례다. 적외선 센서를 섭씨 -193℃로 유지해주는 이 냉동기는 대당 1,000만원이 넘는 고가로서 미국·프랑스·독일 등 일부 선진국이 세계 시장을 석권하고 있었지만 박 박사팀의 원천기술 개발로 기술자립을 이뤘다.

박 박사는 “위성과 미사일 방어, 감시·정찰 등 우주항공 및 군사용으로 쓰이는 적외선 센서는 작동온도가 낮을수록 성능이 좋아져 극저온 냉동기가 필수적”이라며 “지금껏 약 1,200대를 공급하는 성과를 올렸다”고 설명했다. 연구팀은 이 기술을 근간으로 최근 반도체·디스플레이 장비용 저진동 초저온 펌프와 초소형 열병합발전용 1㎾급 스털링 엔진의 개발을 완료하고 기술이전 및 상용화에 나선 상태다.


이를 이어 연구팀이 현재 연구개발에 주력하고 있는 대상은 초전도 케이블용 4㎾급 극저온 냉동기다.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장거리 초전도 케이블이 전력손실 없이 데이터를 전송하려면 온도를 -196℃로 유지해줄 극저온 냉동기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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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박사는 “주지하다시피 극저온 냉동 기술은 우주항공과 군용을 넘어 의료·초전도·전자·플랜트·에너지 등의 분야에 적용 가능해 산업적 파급력이 매우 크다”며 “내년에는 달 탐사선 등 우주항공용 적외선 센서 냉각을 위한 소형 고수명 맥동관 극저온 냉동기 개발에 착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윤의수 기계연 극한기계연구본부장은 이와 관련해 “극한기계는 고도의 기술력이 요구되는 선진국형 고부가가치 시장”이라며 “장기적으로 기계산업을 포함한 국내 산업 전반의 성장을 이끌 열쇠가 될 수 있다”고 전했다.

기계연의 극한기계 개발 사례



정유·석유화학용 특고온 펌프
정유·석유화학 플랜트와 LNG·LPG 가스플랜트, 질소비료 플랜트, 그리고 원유기지 등에는 원료물질이나 열 매체를 이송·가압하기 위해 수많은 펌프가 사용된다. 이 가운데 API 610 BB5 타입은 미국 석유화학협회(API)에서 규정한 최고 기술 난이도를 갖는 펌프를 지칭한다. 고온(350℃)과 고압(200기압) 환경에서 완벽한 작동성을 발휘해야만 이 등급을 받을 수 있으며, 세계적으로도 소수의 기업만이 상품화에 성공했다. 때문에 화학공학용 펌프의 기술력을 나타내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국내에서는 지난 2013년 기계연 연구팀과 동양화공기계가 중형 API 610 BB5 타입 펌프의 독자 개발에 처음 성공했다. 대당 가격은 약 12억원으로 동급 용량 범용 펌프의 10배 수준이라고 한다.



폴리머 열교환기
발전플랜트 등에서 사용하는 열교환기는 대부분 금속소재로 제작되지만 바닷물처럼 부식성이 강한 액체를 취급해야 할 때는 티타늄이나 특수합금을 사용한다. 이 경우 열교환기의 가격이 귀금속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치솟기도 한다. 만일 열교환기를 금속이 아닌 폴리머 수지로 만든다면 가격을 지금의 10% 대로 낮출 수 있다. 이때는 세계 시장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놓는 것도 가능하다. 전 세계 열교환기 시장의 20% 정도가 폴리머 열교환기로 대체 가능하다는 조사결과도 나와 있다. 개발만 해내면 중형차 10만대에 해당하는 부가가치가 창출된다는 뜻이다. 이에 현재 기계연에서는 폴리머 수지에 나노물질을 배합, 열전도율과 내구성을 금속수준으로 업그레이드시킨 폴리머 열교환기의 상용화에 연구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유해물질 플라즈마 처리장치
기체분자에 고에너지를 집중적으로 가하면 전자와 이온 등으로 구성된 플라즈마로 변한다. 이 플라즈마는 산업용 효용성이 매우 크다. PDP TV를 비롯해 네온 싸인, 엔진 점화 플러그의 불꽃방전 등이 그 실례다.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제조공정의 핵심인 증착 및 식각 공정도 플라즈마 반응기 속에 이뤄진다. 최근 이러한 플라즈마를 활용해 다양한 오염물질을 처리하려는 시도가 잇따르고 있다. 기계연의 경우 플라즈마 버너를 이용한 디젤자동차 매연저감장치, 반도체 공정용 가스를 처리하는 플라즈마 반응기 등의 기술을 상용화하면서 플라즈마 유해물질 처리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열 매체 (heating medium) 열의 전달에 사용되는 유체.

파퓰러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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