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로터리] 출판 순혈주의-이재호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소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우리 출판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영국 런던에 사는 한 가정주부의 인터넷 팬픽 소설이 2011년 호주 시드니의 한 1인 출판사에 의해 책으로 출간돼 지금까지 1억부가 팔렸다. 작가가 번 돈만 1,000억원이 넘는다. 책 내용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지만 외형만 놓고 보면 대박이다.

개인적으론 씁쓸하다. 이 정도의 성애(性愛)소설은 국내에서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데 왜 이 책만 글로벌 베스트셀러가 됐을까. 솔직히 아쉽고 속상하다. '로맨스 포르노'라고 하지만 20대 후반의 억만장자가 순진한 대학졸업반 여학생에게 온갖 변태 섹스를 가르치는 게 무슨 로맨스인지 모르겠다. 워싱턴포스트(WP)가 '포스트 페미니즘 시대의 바이블'이라고 했다지만 "다른 에로 소설들보다 뜨겁지 않고 다만 '행위'가 자주 반복될 뿐"이라는 시사주간 타임지의 평이 더 적절해 보인다.


그럼에도 이 책의 성공에 투영되는 우리 출판계의 순혈주의, 그 불편한 진실이 새삼 가슴을 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좋은 책은 여전히 반듯한 전문작가와 의식 있는 전통(종이책) 출판사에 의해 만들어져야 한다는 굳은 신념과 문화 말이다. 순혈주의의 기저에는 근대화와 민주화 과정에서 출판도 나름대로 기여했다는 자부심이 깔려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부심이 출판 성장에 걸림돌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이제는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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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의 신성함은 보호받아야 하나 이를 담아내는 그릇은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또 달라져야 한다. 장르소설을 여전히 3류 통속소설 보듯 하고 전자책이라면 외면부터 하는 인식의 틀 속에서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같은 성공은 기대하기 어렵다. 1998년 PC통신을 통해 연재된 이영도의 판타지 소설 '드래곤 라자'는 국내에서만 300만부 이상 팔렸고 일본·대만·중국으로 100만부 이상 수출됐다. 한국판 '반지의 제왕'이라는 이 소설을 이른바 정통 출판인들은 어떤 눈으로 보는지 궁금하다.

이보다 앞서 나온 이우혁의 '퇴마록'은 누적 판매부수가 1,000만이 넘지만 과연 그만한 예우를 받고 있는가. 황규호가 인터넷 구글에 연재 중인 영문소설 '솔롱구스(Solongus)'도 처지는 비슷하다. 정보기술(IT) 최강국인데도 전자책의 출판시장 점유율이 2~3%도 안 되는 현실이 이런 순혈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순혈주의는 출판인들끼리 편을 갈라 서로 반목하게 하는 부작용마저 낳는다. 출신배경이 다르면 아예 출판인으로 인정조차 하려 들지 않는다. 문화경쟁의 후발주자인 우리는 한류의 확산(擴散)과 심화(深化)를 동시에 추구해야 하는 남보다 어려운 이중과제에 직면해 있다. 그 일선에 모태(母胎) 콘텐츠로서 출판이 서 있다. 자유로운 영혼들이 모여 사는 곳답게 좀 더 열린 마음, 열린 눈으로 이 총성 없는 전쟁터를 살펴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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