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G7, 2000년 이후 11년만에 의기투합… 1995년 고베 대지진 때도 円개입

[일본 대지진] G7 환율공조 역사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상호협력의 고리가 약해졌던 선진7개국(G7)이 일본 대지진이라는 엄청난 재난 앞에서 다시 손을 맞잡았다. 이들은 대지진 이후 사상 최고 수준으로 치솟은 엔화 가치를 진정시키기 위해 18일 환율시장 공조 개입을 시작했다. 요동치는 환율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G7이 공조에 나선 것은 지난 2000년 9월 유로화 약세를 막기 위해 유로화 매수 개입을 한 후 11년 만에 처음이다. 1999년 화려하게 출범한 유로화 가치가 속절없이 추락하자 지지개입에 나선 것이다. 또 G7의 엔시장 개입은 1995년 고베 대지진 때의 역플라자합의(엔저 저지) 이후 16년 만이다. ◇미 압박에 의한 '플라자합의'로 달러약세로 돌아서=G7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의 환율시장 공조 개입 역사는 미국이 쌍둥이 적자에 시달리던 19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는 무역불균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요 대미 흑자국이었던 독일과 일본을 압박했다. 결국 주요5개국(G5) 대표들은 같은 해 9월 미국의 압박 속에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만나 마르크화와 엔화를 절상시키고 이를 위해 각국이 환율시장에 협조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이른바 플라자합의다. 하지만 플라자합의 이후 시작된 달러약세 흐름은 과도하게 진행됐다. 독일의 마르크화와 일본 엔화가 2년 만에 달러화 대비 50% 가까이 절상되는 등 또 다른 불균형이 야기됐다. 이에 G7은 1987년 2월 프랑스 파리에서 약달러가 각국의 경제성장을 저해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루브르합의'를 도출해냈다. G7은 루브르합의를 통해 '1달러=150엔'이 깨지면 각국이 공조 하에 시장에 개입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러나 루브르합의는 약달러 흐름을 저지하는 데 별다른 효력을 내지 못했다. 1987년 말 엔화 가치는 달러당 122엔까지 급등했고 엔고 현상은 더욱 공고해졌다. ◇고베 대지진 이후 '역플라자 합의'로 엔고 저지=1990년대 들어 중남미 국가에서 통화위기가 발생하자 엔화 가치는 더욱 급등했다. 1994년 들어서는 엔ㆍ달러 환율 100엔선마저 깨졌다. 급기야 1995년 1월 일본 고베 대지진이 발생하자 엔화 가치는 수직 상승했고 같은 해 4월18일 도쿄 외환시장에서 엔ㆍ달러 환율 80엔선이 붕괴됐다. 이에 G7은 다음날 미국 주도 하에 엔고 저지를 위해 환율시장에 공조 개입하기로 뜻을 모았다. 역플라자합의라고 불리는 당시 G7의 공조 개입 결과 엔화는 안정세로 돌아섰다. G7은 2000년 9월 유로화 가치가 급격히 추락하자 신뢰도 회복 차원에서 또 한번의 공조 개입을 단행했다. 그러나 2000년 이후 G7은 더 이상 환율시장에 강력하게 공조 개입하지 않았다. 2003년 9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G7 재무장관ㆍ중앙은행 총재회담을 열고 달러약세를 위해 '보다 유연한 환율제도 도입의 필요성'을 선언하기도 했지만 과거 플라자합의 때와 같은 영향력이 발휘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2000년대에 들어서는 환율시장에 대한 각국의 개별 대응이 이뤄졌다. 특히 환율 변화에 민감한 수출주도형 경제구조를 가진 일본이 수차례 단독 개입을 단행하며 엔고에 맞섰다. 일본은 지난해 9월에도 80엔대 사수를 위해 대규모 엔화 매도 개입을 단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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